《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9회》
9. 여수 14연대 반란사건과 숙군작업 (계속)
(1)여수14연대 반란사건ᆢᆢ8회
(2)숙군작업(肅軍作業)
숙군작업이란 군의 질서가 문란하고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국가를 방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되었을 때 구태의연한 기존질서를 청소하고 새로운 질서로 바꾸는 작업을 말한다.
■숙군의 배경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정부는 1946년 10월 대구폭동 사건, 1948년 4.3제주사건에 이어서 동년 10월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이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국가존립이 위태롭다고 판단하고 숙군작업을 단행하게 된 것이다.
군대에 좌익세력이 확산된 원인은 남로당의 끈질긴 포섭공작도 작용을 했지만, 미 군정 당국이 공산당을 합법화 해준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미 군정청의 군사부 자문위원으로 있던 이응준 대령이 군사영어학교 지원자들과 부사관으로 입대하는 장정들에 대해서는 사상검증을 해야한다고 <아놀드> 군정장관에게 건의 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있다며 묵살했다.
그랬기 때문에 군사영어학교 학생 중 김종석(일본군 대위), 최남근(만주군 대위), 오일균, 조병건 일본 육사 생도 출신 등 10여명의 좌익 사상을 가진 자들이 들어가게 된 것이며, 46년 5월에 개교한 경비사관학교 1기부터 3기에도 좌익사상을 가진자들이 많이 입교하였는데, 특히 3기생의 경우는 더욱 심하여 임관한 장교 281명 중 80%가 좌익분자들이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남로당의 지령을 받으면서 군대 안에 좌익세력을 크게 확산하게 된 것이다.
■숙군단행
숙군은 1948년 10월 부터 1950년 6. 25 전까지 4차에 걸쳐 단행되었다.
숙군 과정에서 군 내부 좌익세력이 10,317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 중 군에 좌익세력을 확산시키고 대구폭동사건과 제주 4.3 사건, 14연대 반란사건을 사주했던 남로당 지도부의 김달삼, 이중업, 이주하, 이재복, 김영식, 김형륙 등을 포함하여 4,749명을 사형, 무기징역, 유기징역, 징계 등으로 구분하여 엄하게 처벌하였다.
이렇게 숙군을 단행한 결과 군 내부에는 좌익세력이 발을 붙일 수가 없었으며, 6.25 전쟁기간 내내 좌익세력에 의한 난동은 발생하지 않았다. 만일 숙군을 하지않고 그대로 6.25를 맞았더라면 박헌영과 김일성이 바라던대로 남한 내부에서 인민혁명이 일어나 대한민국은 조기에 적화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특무대장 김창룡 장군과 특무대(현 방첩사령부 전신) 장병들이 막은 것이다.
김창룡 장군이 합동수사본부장을 하던 1949년과 1950년에 수사관으로 함께 활동했던 선우종원 검사에 의하면 김창룡 장군은 남로당 간첩을 잡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와 그의 부인을 행상으로 위장하여 정보요원으로 이용할 정도였다고 하며, 당시 서울신문 사회부장이었던 이혜복 씨는 김창룡 특무대장은 빨간 것은 무조건 싫어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런데도 김창룡 장군이 친일파니,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는 등으로 그를 폄훼하는 좌파 역사학자들 때문에 그의 빛나는 타공(打共)의 업적이 빛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