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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3장 1-8절
거듭남, 성령으로 난 사람
오늘 본문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는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이며, 또한 유대인의 지도자 중 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부류에 대해서는 신약, 특히 복음서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하며, 사두개인과 더불어 빈번하게 예수님과 마찰을 일으키는 부류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 대해 성경은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있는데, 마가복음 7장 3절과 4절에 보면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중시하되,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도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성경 전체로 볼 때 그 일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사람이 누구냐? 바리새인들인 겁니다. 그리고 그런 전통 아래 그들은 성결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열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이런 바리새파를 유대 종교 가운데 가장 엄한 파로 소개할 정도입니다(행26:5). 그러면서도 성경 한 부분에는 어떤 말씀도 있느냐? 누가복음 16장 14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물론 모든 바리새인들이 다 돈을 좋아한다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성경이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정도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 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이익에 눈이 멀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니고데모 역시 세상의 이익에만 눈이 먼 사람이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중시하고,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더욱 성결하게 한다고 볼 수는 있지만, 세상 이익에 눈 먼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 그것도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은 그의 관심이 세상의 이익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니고데모에 대해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지도자로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자였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모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염두해 둔다면, 그의 지위가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산헤드린의 존경받는 공회원 가운데 한 사람인(막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장사하는 데 도왔던 인물입니다(요19:39).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도 역시 산헤드린의 공회원 중 한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김성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부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런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왜 하필 밤에 찾아오게 되었는가? 일반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즉 두려움과 소심함 때문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요, 높은 지위, 그리고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담대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예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이것도 말하지만 다른 해석도 염두해 두고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신중함과 사려분별도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온 종일 공적인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좀 더 자연스럽게 예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쉬시는 시간대를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고,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우선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하여 ‘랍비여’라고 부릅니다. 랍비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의미인데(요1:38), 비록 자신이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있었지만 그 역시 예수님 앞에서는 배워야 할 학생으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그가 고백하기를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가르침이 하늘의 가르침에 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의 관한 말씀을 꺼내고 계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안다고 말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여기 보면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으로 그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안에서 보자면 표적이라는 말이 맨 처음 사용되는 것이 요한복음 2장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표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이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적을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요한복음 2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러니까 표적을 행하시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요,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자신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인 겁니다.
특히 우리가 지난주에 살핀 요한복음 2장에 있는 성전청결 사건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사람들이 표적을 보이라고 할 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2:19).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는 건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요2:21).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염두해 두신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복음서에 보면 사람들이 표적을 구할 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도 말씀하시는데(마16:4), 이런 말씀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게 뭐냐? 모든 표적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성을 취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이었던 겁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2장에서는 성전청결 사건을 통해 드러내셨던 겁니다.
이후 모든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도 표적을 행하셨습니다(요2:23). 구체적으로 어떤 표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적과 기사와 같은 표적을 보여주셨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맹인들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마11:5), 한 마디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 표적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니고데모는 그런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도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과연 그의 신앙은 합당한 신앙인가?
요한복음 6장으로 가시면 이미 살핀 바 있지만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데, 왜 따르게 되었는가?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요6:1), 즉 병자들을 고치신 일을 보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 이후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저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먹고 배부른 까닭에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6:26). 오병이어 사건을 보고 경험했지만 실제로 그것을 통해 표적을 본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얼핏 보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전에는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따랐다 할 때 표적을 보고 따랐다고 되어 있지만, 정작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는 그런 표적을 분명히 보고 경험했지만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이 표적이라고 말할 때는 주로 기적과 이적과 관련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기적과 이적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의 일인가?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사탄이라 할지라도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난다면 분명 하나님께서는 거부하십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분명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습니다.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했지만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들을 내쫓으십니다. 심지어 신명기 13장을 통해서는 어떤 말씀도 하시는가?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13:1-3)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이 이적과 기사를 보이면서 그들의 신을 섬기자고 유혹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마술처럼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보더라도 그들을 따라 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하나님만을 사랑하는지를 알기 위한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적 자체만으로 참된 믿음의 증거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도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이적의 한 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 칼빈의 주석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좀 길지만 나눠드린 프린트물을 보시면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 하시면 아무도 이러한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할 때, 하나님을 표적의 유일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도 옳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런 표적은 인간적인 행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 표적에 완연히 드러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말해서 표적은 믿음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결과와 말씀에 의해 잉태된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하는 결과 등 두 가지 효과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니고데모는 전자의 유익을 얻었던 것이다. 표적을 통하여 니고데모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참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론적인 것이 아니다. 선지자들이 마치 참된 표적에 의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증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지한 자들을 그들의 기만책으로 속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표적에 의존한다면 참과 거짓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과연 모세는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이러한 방법으로 시험받게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신 13:3). 우리는 또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많은 사람들의 눈을 미혹할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거짓된 표적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던 그리스도와 바울의 경고를 알고 있다(마 24:4). 나는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의로운 승낙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미혹을 받을 자는 사탄의 간계에 의해 미혹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표적을 통하여 택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표적은 택한 자들에게 참되고 건전한 교훈을 확인시켜주는 가치있는 확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그의 사도됨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에 의해 확증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12:12).
정리하자면 이적과 기사, 표적 자체만으로는 참된 믿음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단도 우리를 속이기 위한 역사로서 그런 일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보면 많은 은사주의자들, 특히 병을 고친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교리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그들의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도 얼마나 말씀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가 있는지 모릅니다. 단지 이적과 기사 때문에 그것을 주목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간다면 앞서 말씀드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 외에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병 고치는 은사와 같은 그런 기적과 기사가 있는가? 우리는 없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적과 이적이 주목하도록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초점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 줄 표적이 없다(마16:4)고 말씀하시는가? 모든 표적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표적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표적이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을 통한 우리의 고백인 겁니다.
물론 칼빈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그 표적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게 하시고, 또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그런 역사를 통해 믿도록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방식으로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이상 혹 죽은 자가 살아나서 그리스도를 증거할지라도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눅16:31).
이렇게 볼 때 결국 표적은 표적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실제 내용까지 가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니고데모는 무엇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표적을 보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속에 경건의 씨앗이 있음을 보게 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그의 반응을 통해 더욱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시면 니고데모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여기 보면 ‘진실로’(amen)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는 것은 니고데모가 좀 더 주의를 환기시키도록 하기 위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내용을 가볍게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의도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쉽게 말해 니고데모가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임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반면,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표적들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 줄 알았고, 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줄 확신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알고 확신한다는 것 자체가 니고데모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나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바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니고데모가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안다고 말하는 내용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경건의 씨앗은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세상의 이익에만 눈 뜬 자가 아니라, 영적인 부분에 대한 목마름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밤에 찾아온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참된 믿음을 소유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거듭난다는 말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칼빈의 말에 따라면 당시 그리스도께서 표현하신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그대로 쓰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 전체가 이런 거듭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 또 믿음의 첫 번째 원칙이었기 때문에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니고데모가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당시 바리새인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교사라고 하는 자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만큼 드물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하시는데, 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거듭난다는 것은 뭐냐?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데, 거듭나지 않으면, 동일한 의미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니고데모의 경우 거듭나는 것을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단지 육적인 의미에서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육적인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입니다. 다시금 태어나되, 단지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거듭나다(gennhqh'/ a[nwqen[[겐네데 아노덴])는 말에서 ‘거듭’이라는 말의 원문 뜻을 보면 분명 ‘다시’라는 말도 있지만, ‘위로부터’라는 뜻도 있습니다. 번역에 따라 ‘거듭나다’라는 말도 될 수 있지만, 원문에 좀 더 합당하게 번역하자면 위로부터 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땅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하여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6절과 7절도 보시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육으로 난 것은 결코 영으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 결코 영적으로 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자면 우리 모두는 육으로 난 자들이기 때문에 육으로만 있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종교를 만나지 못할 장소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칼빈의 표현으로 하자면 어느 누구에게나 종교의 씨앗이 그 마음 한 구석에는 있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사모함(전3:11)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보다 분명하게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즉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모든 만물 가운데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핑계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합니다(롬1:20).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비록 육신적으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죄를 가진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다는 측면에서는 육적인 존재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이기 때문에 결코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태로부터 육에 대한 것 외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면서부터 하늘의 생명을 박탈당하고 죽음의 노예가 된 채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당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은 모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아담 탓이 아니라, 우리도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담의 책임이 우리 개개인의 책임으로 있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죄의 대한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지, 결코 아담 탓으로 돌리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혹 아무 것도 모르는 유아 태어나자마자,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유산이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 대상이 아니고서는 결코 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인류는 육으로 난 육적인 존재이지, 결코 영적인 존재로 태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땅으로부터 난 자이지, 하늘로부터 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뭔가?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되, 영적으로 다시금 태어난다는 것이고, 좀 더 분명하게는 위로부터 나야한다고 알리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뭐냐?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을 말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뭐냐? 성령으로 난다는 말에 대해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물에 대한 해석이 많은 논쟁거리로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라는 교부의 견해인데, 그는 물이라는 낱말을 세례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즉 세례와 성령을 통해 거듭난다고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견해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후 세대들 속에서는 어떤 주장까지 하게 만들었느냐 하면 세례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의 입장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의 입장은 다릅니다. 일단 이 부분도 나눠드린 프린트물을 보시면서 함께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세례를 말씀하고 있다고 우리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한시켜 구원을 외부적인 표적에 연관시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겠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물을 성령과 연관시키고 있다. 눈에 보이는 표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속에 이루어 주시는 새 생명을 증거하고 인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례를 소홀히 한다면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과연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세례가 필요하다고 자인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을 세례에 국한 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말씀에 관한 한, 나는 도저히 그리스도께서 세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고 믿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상황과 시기에 맞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거듭나야 하며 성령께서 이 둘째 탄생(중생)의 주가 되신다는 말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 사람이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은 자연 현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새로운 몸을 입고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에 의하여 심령이 새롭게 될 때 거듭나는 것이라고 부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성령’이라는 낱말을 같은 것을 뜻하는 것으로 쓰고 있다... 성령이 언급될 때, 그의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물이나 불이라는 말을 부언하는 것은, 성령에 흔히 자주 나타나는 화법이다.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 것을 듣게 된다. 불은 성령과 다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속에 역사하는 이 성령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물이라는 말을 먼저 쓴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물로 새롭게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그리스도께서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물은 우리를 새롭게 씻어주고, 우리가 전혀 불모의 상태로 태어났을 때, 우리 위에 부어진 그의 능력을 따라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의 원기를 옮겨주는 성령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물은 단순히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고 소생케 하시는 역사를 뜻하는 것이다.
결국 지금 예수님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할 때 그 핵심은 물은 곧 성령과 같은 의미이고,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 물로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그런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역사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과 같은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8절을 보시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이 임의로 분다는 것은 그 움직임이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어떤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때로는 이 방향에서 바람이 불기도 하지만 때로는 저 방향에서 불기도 하는 등 그 변화가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자유로우신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이지, 인간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경우 표적으로서 예수님을 선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지만,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표적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코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신비의 역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행하시는 주권적인 역사, 이것이 거듭남인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실 때 거듭나게 되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거절해야 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던 사고 방식들, 즉 펠라기안주의나 반펠라기안, 알미니안주의가 그것입니다.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철저히 거부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성경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태어나야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기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만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지금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구원을 얻은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 받았다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지금 보이는 건물, 그리고 보여 지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의 증거라고 보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선생이라 부르고,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어떤 말씀까지 하느냐? 추수 때가 되기까지는 좋은 씨만 있는 게 아니라 가라지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마13:30). 달리 말하면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 안에는 알곡만 있는 게 아니라, 쭉정이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기독교인이고 외적으로는 신자이지만, 참된 신자가 아닌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사 그리스도인, 그들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 분명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도 지키는 자들입니다. 지키되 열심을 다해서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거듭났다고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거부하고 있는 이상 결코 거듭났다고 말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종교적인 형식을 있을지 몰라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이상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면 우리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적어도 믿음을 가졌다고 말한다면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구원만 말하는 게 아니라, 항상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던 겁니다(마7:20). 즉,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그래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역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비록 땅에서부터 난 자이지만 위로부터 난 자로서 다시금 태어났기 때문에 땅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분이 주신 율법으로 우리의 외면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까지 살펴가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분명 육으로 시작했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으로 시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걸아가야 할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이 땅에 머물러 살고 있지만, 우리의 참된 처소는 하나님 나라이며, 그 나라에 들어갈 백성으로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