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광고등학교에 가게 된 것은 1977년 3월경이다.
오성면 사무소에서 군복무의 의무를 마치기 한 달전 쯤
2학년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야간 수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바로 국가에 대한 의무가 끝나고 한광에서 정식으로 근무를 하게 되면서
바로 고 3학년 수업을 맡게 되었는데 상당히 부담감을 느끼며
열심히 수업준비를 하면서 내 스스로 실력이 많이 향상이 되고
또 고등학교 경험을 한다는 마음에 힘든 줄도 모르고 참으로 열심히 하였다.
심지어 고 3 수업을 하면서 연구수업까지 하라고 하여 기꺼이 수 십명의 남녀 중고 국어 선생님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공개 수업을 하고 실랄하게 평가를 받던 생각이 난다.
아마 나를 일깨우며 내실을 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때는 보충수업 시간표를 따로 짜지 않고 본수업 시간표에 넣어서 하였는데,
일 주일에 36시간 정도를 소화하였다.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나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젊다는 것과 부임 첫해라는 것으로 아무 생각하지 않고 오직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렇게 일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다음 해에는 바로 고 3 담임까지 하게 되었다.
한 곳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우리반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서 나누는데 한 녀석이 키도 크고 나이도 들어보이고 잘 생겨서,
너는 내 큰 아들이야! 하면서 불러내고 또 한 녀석은 덩치가 좋아서 너는 둘째 아들이라며 불러서
우리반 학생들을 데리고 교실로 가던 생각이 36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럽게 난다.
실제로 그녀석은 나이도 많고 집안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한 반이 되어서 몇 달을 지나고 야간 자율학습 지도를 마치고 10시경에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는데 희미한 가로들 불빛 사이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니 어쩐지 눈에 익은 것 같아서
앞에서 걸어가는 녀석 바로 앞에 가서 얼굴을 보니 우리반 큰 아들이라고 했던 녀석이 아닌가.
예감이 이상해서, 너 지금 어디 가는냐?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니, 여자 친구 만나러 간다는 것이다.
그럼 사실인지 내가 확인을 해봐야 하겠다며 앞장을 세우고 따라가서 여자친구 문 앞까지 가서 만나는 것을 확인하고 너무 늦지 말고 빨리 돌아가라고 한 후 나는 집으로 퇴근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야! 이놈아 여자 친구가 있으면 애비한테 인사를 시켜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러겠노라며, 어느날 여자 친구를 우리 집까지 데리고 온 것이 아닌가?
집사람이 저녁까지 지어서 나와 같이 겸상을 하여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건전하게 사귀라고 충고를 하고 돌려보냈다.
2학기 들어 어느 날, 운동장에서 선생님들과 축구를 하고 있는데 중학교 학생 주임이 찾는다고 하여 갔더니, 우리반의 학생 이름을 대면서 여자 친구들과 밤새 한 방에서 혼숙을 하고 성관계까지 가졌다고,
여자 친구가 자백을 햇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당사자를 불러서 확인을 하니 같이 논 것은 맞지만 절대 성관계는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강하게 부인인을 하였다.
그 뒤에 고 3 담임들이 단체로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지만
선도위원회가 열리고 남여 단 둘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남녀가 여러명이 한 방에서
혼숙을 하며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퇴학 처분이 내려졌다.
모두 3명이 연루되었는데 다른 두 학생들은 학생회 간부라서 한 등급씩 처벌이 강등되어 무기정학이고, 우리반 녀석만 아무 것도 아니라서 그냥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원래 집이 대전인데 부모가 안 계시는데다가 혼자 객지에 와서 하숙을 하고 있는 처지라
유일한 보호자인 서울의 누님한테 연락을 하였더니,
오후에 학교로 와서 수업하고 있는 교실에 가서 불러내어 바로 데리고 가라고 하였더니 본인은 억울하며 병원에 가보면 알지 않느냐고 길길이 뛰는 것을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하여 보내고 말았다.
그렇게 그놈과는 인연이 끝나고 말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라지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 중의 하나인 스승과 제자로 만나서 이렇게 가슴아프고 허무하게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허전하였다.
그 후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그 여자 친구와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유산으로 받은 돈으로 주유소를 운영하다가 친구들과 술먹고 노느라고 다 탕진을 하고,
또 외국에 가려고 하였는데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형님과 사업을 하다가 고양지역 대홍수때 수재를 만나서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지, 그 때 지켜주지 못한 것이 참으로 미안하기도 하고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은 아마 만나면 같이 늙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흐르고 시대가 많이 변해서 요즘 같은 세상이면 희생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젊은 새싹을 싹뚝 잘라버린 것 같아서 참 교육이 어떤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져 드는 것은
나의 죄책감을 회피하기 위한 알량한 변명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