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박사는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극저온 기술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2003년 플로리다 주정부 산하 플로리다 태양에너지센터(Florida Solar Energy Center)로 가 극저온시스템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았다. 그는 그곳에서 미 항공우주국(NASA) 케네디우주센터의 극저온시스템 실험부(Cryogenic System Testing Division)와 함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의 액체수소 연료 효율을 극대화하는 프로젝트를 14년간 수행하다 지난해 말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 2월말 시내 한 커피숍에서 만난 백종훈 박사는 “우주발사체 기술이전을 해 달라며 동맹국에 손을 내밀었으나, 냉혹하게 거절당한 기술빈약국의 슬픈 현실을 기억해야만 한다”면서 “당시 미국 국무부가 그들의 발사체 기술이전을 허락했더라면 지금쯤은 우리도 액체수소 제조 관련 기술을 보유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20여 년의 액체수소 관련 연구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자주국방 실현과 수소경제사회로 나가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도 했다.
— 좋은 제안들을 여러 건 받았다고 들었는데, 왜 그만두고 귀국했나요.
“미 항공우주국(NASA), 미 해군 제트추진연구소(JPL) 등의 영입 오퍼를 다 거절했습니다. 미국 연구소에서 터득한 노하우를 한국의 액체수소 산업 발전에 쏟아붓고 싶었으니까요. NASA 직원들은 자신의 커리어와 가족들을 위해 일하면서도 자신들이 인류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게 한국은 땀 흘려 일할 만한 가치가 있는 땅입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민권도 신청하지 않았으니까요.”
극저온 최고 전문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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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국제극저온공학콘퍼런스에서 극저온분야의 최고 권위상인 러셀스콧상(The Russel B. Scott Award)을 받은 백종훈 박사. 사진=백종훈 |
“NASA는 학위를 마치면 NASA에 들어와 극저온과 액체수소를 계속해서 연구하라고 권했습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NASA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NASA는 자신들과 액체수소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플로리다 태양에너지센터로 취업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백종훈 박사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 15년간 플로리다 태양에너지센터 극저온시스템 프로젝트 매니저로 근무하면서 NASA의 우주왕복선 효율개선 프로그램에 참여해 7개의 공동연구를 수행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2015년 미국 극저온 분야의 최고 권위인 러셀스콧상(The Russell Scott Award)을 받았다.
백 박사는 이때 NASA의 액체수소 분야 ‘고수’들을 만났다. 케네디우주센터 극저온실험연구소 창립자인 제임스 페스마이어(James Fesmire) 미국 극저온공학회장, 백 박사의 연구동료였던 윌리엄 노타도네이토(William Notardonato) 로켓액체연료 운용분야 책임연구원 등이 그들이다. 특히 2008년 은퇴 이후에도 미국 표준기술연구소(NIST) 펠로로 활동하는 극저온 기술 분야의 세계 최고 전문가 레이 라더보(Ray Radebaugh) 박사 등은 백 박사의 내공을 키워 준 훌륭한 스승들이었다.
— ‘스승복’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대학 재학 때 장호명 교수님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고, 1999년 위스콘신대에서 존 포텐하우어(John Pfotenhauer) 교수님도 석학이셨어요. 그곳에서 극저온 기술 연구로 박사학위를 하면서 기술적인 미팅과 발표를 위해 NASA엘 갔는데, 그곳 연구원들도 하나같이 기라성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NASA 액체수소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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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퇴역한 우주왕복선의 축소형인 미 시에라 네바다사의 ‘드림체이서’ 우주선 상상도. 2016년 1월 14일 국제우주정거장으로 화물을 운송할 우주선으로 선정됐다. 사진=조선일보 |
백 박사는 “미국은 예산부족으로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국가 차원에서 새로 시작하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며 “2002년 부시 대통령이 수소에너지를 미래의 청정에너지라며 정책적 드라이브를 거는 바람에 졸지에 플로리다 태양에너지센터가 주목을 받았다”고 했다.
백종훈 박사는 “NASA는 로켓 종류, 화물 무게, 우주 미션에 따라 고체연료, 케로신(등유), 액체수소 등을 골라 쓴다”며 “미국은 이미 50여년 전 세계 최초로 수소를 액화해 연료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플로리다의 대형 액체수소 플랜트들이 NASA에 액체수소를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NASA는 액체수소의 효율을 리서치해 본 결과, 액체수소의 45%가 발사과정에서 손실된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NASA는 손실률을 최소화할 수 있는 차세대 액체수소 연구를 플로리다 태양에너지센터에 제의했고, 우리 연구소는 에너지 손실률을 20%까지 줄일 수 있다고 결론을 냈습니다. 14년간 분석프로그램을 통해 이 사실을 입증했고, 2016년 12월 NASA와 태양에너지센터는 에너지 손실률을 20%까지 줄이는 차세대 액체수소 운용시스템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형 우주로켓의 추진력으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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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항공우주국 내부 실험실의 로켓 앞에 선 백종훈 박사. 사진=백종훈 |
백종훈 박사는 “액체수소는 영하 253도 이하에서 액체가 되는 극저온 유체(流體)로, 현재까지 가장 효율적으로 수소를 활용하는 방법 중 하나”라며 “액체수소는 기체수소 부피의 800분의 1에 불과해 압축 기체수소에 비해 약 10배의 수송효율을 갖고 있다”고 했다.
— 액체수소를 보관하는 방법은.
“액체헬륨을 보관하는 용기를 좀 변형하면 돼요. 인체와 금속에 무해한 액체헬륨은 금속을 파고들지 않지만, 수소는 분자 크기가 작아 금속 내부로 파고들어 금속을 깨뜨리는 취성(脆性)을 발생시킵니다. 까다로운 친구지만, 쉽사리 폭발하지는 않습니다.”
— 액체수소가 액체헬륨이나 액체아르곤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액체헬륨이나 액체아르곤은 버닝을 하지 않죠. 물과 휘발유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물은 유용하지만 불이 붙질 않지만, 액체수소는 휘발유처럼 자체에 불이 붙을 수 있는 에너지원입니다.”
— 액체수소를 자동차용 연료로 쓴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만.
“액체수소는 널리 알려진 대로 발사체 로켓 연료 이외에도 자동차의 수소 직분사식 내연기관용 연료, 무인기와 무인잠수정 연료로도 사용합니다. 반도체 공정 등 다양한 분야에도 응용되죠.”
한국은 액체수소 기술의 불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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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나라의 액체수소 생산현황은 어떻습니까.
“선진국의 경우, 액체수소에 대한 투자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습니다. 액체수소 대량 소비국인 미국을 예로 들면, 대형 액체수소 생산 플랜트를 새로이 건설하고, 우주, 국방, 반도체, 운송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액체수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액체수소를 우주기술에 적용해 50년 이상 전세계 우주기술을 선도하고 있고, 최근에는 미 해군연구소와 보잉, 에어로바론먼트와 록히드마틴처럼 액체수소로 나는 무인기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 일본과 중국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일본은 아시아권에서 수소경제의 핵심을 액체수소로 보고, 현재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나라입니다. 국가 차원에서 액체수소 기반 인프라 구축과 대형 액체수소 생산시설, 그리고 액체수소 스테이션을 설치하고 있어요. 중국도 유럽의 기존 대형 액체수소 플랜트 회사들과 계약을 맺고 액체수소 대형 플랜트를 건설 중입니다.”
백종훈 박사는 “독일은 BMW와 세계 최대의 액체수소 공급업체인 L사가 제휴해 고성능 신개념의 압축 액체수소 저장과 디스펜서 시스템을 공동으로 개발했다”며 “독일은 이 기술을 미국 에너지국(DOE)과 공유하며 기술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 한국의 액체수소 기술은 어느 수준입니까.
“한국은 액체수소 생산 기초기술조차 보유하고 있지 않고, 더 안타까운 것은, 액체수소 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합니다. 축적된 기술기반도 전무에 가까운 데다, 의식마저 못 따라가고 있지요.”
수소차는 전기자동차에 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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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의 친환경 기술이 집약된 ‘투싼’ 수소전기차. 사진=조선일보 |
“현대차를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수소산업에 참여하는 현대차 등 국내 기업들의 경우, 본질적인 액체수소 기술의 개발보다 기술적 난이도가 낮은 기체수소 충전방식을 적용해 수소연료전지 자동차를 사업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수소연료전지 자동차는 수소차라기보다 전기자동차라고 보시면 됩니다.”
백 박사는 “전기차가 수소차에 비해 단기간에 확산되는 이유는 전기차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전기충전 인프라의 구축이 동시에 진행됐기 때문”이라며 “궁극적으로 전기차는 배터리 무게와 충전당 운용거리가 수소차에 비해 현격히 짧아 차세대 운송시스템으론 미지수”라고 했다. 그는 “전문가들은 현재의 전기차 시대를 가솔린과 수소연료 시대를 잇는 징검다리 정도로 판단하고 있다”며 “결국 무한저장량을 보유한 청정에너지 수소가 자동차 등 운송수단과 각종 파워시스템으로 자리 잡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액체수소 기술은 우주발사체 로켓기술로 전용이 가능해 우주 강국들이 기술전수를 금지하는 분야”라며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강력한 자체개발 의지와 장기간의 충분한 투자, 산·학·연을 연계한 협력이 이뤄지지 않는 한, 액체수소 기술 확보는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 현재 액체수소 국내개발 방식의 문제점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현재까지 한국의 국산화 과정은, 선진국들로부터 철 지난 기술을 거액을 내고 도입해 역(逆)엔지니어링을 하거나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해 카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산화 방식으로는 우주발사체와 국방기술에 전용 가능한 대량 액체수소 제조와 운용기술들을 습득할 수 없고, 동맹인 미국조차도 핵심 기술은 한국에 전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액체수소 업체 국내 상륙
백종훈 박사는 지난해 2월 언론에 실린 낯선 기사 하나를 소개했다. ‘글로벌 수소생산과 저장, 공급업체 L사의 한국법인과 국내업체가 수소충전소(HRS: Hydrogen Refuelling Station) 사업협력을 하기로 했다’는 기사였다.
독일기업인 L사는 30년 전부터 수소자동차용 수소충전소 설비를 개발해 유럽, 미국, 일본 등에 100개소가 넘는 수소충전소를 공급해 오고 있는 전세계 시장점유율 1위의 업체다.
“환경부(수소차 보급사업)와 국토부(수소 하이웨이 구축사업), 산업부(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는 185억원가량의 예산을 받아 수소충전소 10개소(1기당 15억×10개소)와 수소차 130대(1대당 2750만원×130대)를 보급하기로 한다는 겁니다. 전세계에서 액체수소를 가장 많이 생산해 공급하는 공룡기업이 드디어 한국땅에 상륙해 사업을 한다는데, 한국 정부는 국민 세금을 대 주고 있는 셈입니다. 국내 회사는 수소충전소를 설립해 운영하는 것에 불과하고, 핵심인 극저온 기술은 외국에서 가져와 사업을 하는 겁니다.”
백 박사는 “정부가 수소차 보급을 위해 글로벌 액체수소 기업들을 서둘러 국내로 끌어들이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라며 “이들 기업이 한국으로 원천기술 전수는 하나도 하지 않고 돈만 벌어 갈 것을 생각하면 기술자로서안타깝다”고 했다.
— 도로에 수소자동차가 자주 보이지도 않는데, 굳이 몇 백억씩 들여 충전소까지 설치할 필요가 있을까요.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도로에 가솔린과 디젤차는 사라져요. 유럽에선 가솔린차를 2030년 이후 만들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못 박았고, 기존의 가솔린차들은 도시 바운더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미국은 현재 80기의 액체수소 충전소가 있고, 유럽연합은 160여 기, 일본은 2025년까지 수소충전소 1000기를 설치하겠다며 야단법석입니다. 현대차가 수소차를 내놓았으면, 정부가 칭찬은 못해 줄망정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5~10년 내에 수소기술 국산화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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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플로리다주 태양에너지센터 소속 백종훈 박사가 자신이 개발한 소형 수소액화기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백종훈 |
“한국형 액체수소 기술의 국산화에 도전하는 겁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우주 관련 기술과 방위산업 기술을 향상시키고, 한국을 미래의 산유국(産油國)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미국처럼 액체수소를 생산해 로켓발사에 사용하고, 일부를 수소충전소를 통해 수소자동차에 공급하는 구상입니다.”
— 액체수소 국산화 방안이 궁금하네요.
“현재 한국의 우수 중소기업들이 보유한 요소기술들을 효과적으로 결합해 액체수소 기술 국산화라는 목표를 설정해 한국인 특유의 집중력을 발휘한다면 단시간 내에 국산화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대부분의 주요 핵심기술과 모든 요소기술들의 통합 노하우는 제가 갖고 있고요, 관련 기술 중 일부는 제 네트워크를 통해 외부기관의 협력으로 개발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 액체수소 기술을 국산화하면 우리 산업에 어떤 파급효과가 있을까요.
“액체수소 기술은 수소생산, 수소정제, 냉동, 고진공, 특수금속 등을 포함한 다양한 산업기술의 집약체죠. 덩달아 일자리도 늘어날 겁니다. 특히 수소경제사회에서 기체수소가 아닌 액체수소 개발은 단박에 우리나라를 세계 7대 액체수소 기술보유국 반열에 올릴 것이고, 액체수소 수출까지도 가능해질 겁니다.”
백 박사는 “단기적으로 일부 요소부품들과 소형 액화시스템, 중장기적으로는 핵심 요소부품들과 대형 액화시스템 개발에 연구 인력과 자본을 투입한다면, 5~10년 내에 모든 기술을 국산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장기간의 연구개발 방식 대신,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투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2025년 수소경제사회 도래
— 조광래 원장은 예전 언론 인터뷰에서 “위성자주권의 핵심은 로켓이라며 한국형 발사체 개발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로켓개발에서 액체수소는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로켓에서 연료시스템과 운용시스템을 압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발사체를 완성시킬 수 있는 건 아니고, 여기에 액체수소 엔진기술을 확보해야 합니다. 보안상 자세히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만, 국가적 목표가 정해진다면 상당히 가속화시킬 수는 있을 거란 말씀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우선, 로켓을 만들려면 액체수소 엔진 개발자, 액체수소를 무한정 공급하는 플랜트를 지어야 합니다.”
백 박사는 “미·일 우주협력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 나름의 연구개발을 통해 로켓기술을 어느 정도 확보해 놓아야 한다”며 “여기에 정부 간 레벨의 협상과 기업 간 협력을 동시에 추구해야 대미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 액체수소를 연료로 한 로켓기술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전용될 수도 있겠지요.
“원론적으로, 하루 한나절씩이나 걸려 주입해야 하는 액체수소를 ICBM으로 사용하기는 곤란해요. ICBM은 바로 발사가 가능해야 하고, 따라서 상온에서 주입해 놓을 수 있는 연료를 주로 씁니다.”
백종훈 박사는 “2025년 수소경제사회가 도래하면, 수소는 원유와 같고 연료전지는 발전기와 같다”며 “미래에는 수소를 자유롭게 생산·이송·저장·이용할 기술 보유국이 중동의 산유국과 같은 부(富)를 누릴 것이며, 액체수소 기술 미보유국은 기술 선점국의 횡포 속에 에너지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