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설 물(Water), 불(Fire)을 가리지 않고 「흔들(Händel) 흔들(Händel)」 주인의 비위를 맞춰 출세하는 헨델 ■ 수상음악(Water Music) ▲ 아버지 조지 1세 : 물(Water)로 「흔들(Handel) 흔들(Handel)」 헨델은 1685년 독일 할레에서 태어나 27년을 살다가 영국에 귀화해서 47년간을 살다가 1759년에 영면했다. 17세 때에 할레 교회당의 오르간 주자로 있으면서 20세 때에 가극 「알미라」를 상연하여 명성을 얻어, 이타리아 각지를 4년간 여행하면서 더욱 이름을 알렸다. 그러자 독일 북부에 있는 하노바공인 게오르크 빌헬름 후작의 초청으로 1710년에 하노바궁의 긍정 음악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오페라로 명성과 돈을 함께 거머쥐고자 휴가를 얻어 영국에 출장차 왔다가 오페라 <리날도>의 공연 등으로 크게 명성을 얻게 되자 그를 고용한 하노버의 선거후인 게오르크 빌헬름공의 귀국 명령에 불복하고 계속 영국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를 총애하던 앤 여왕이 서거하자 그의 외손자인 하노버공인 빌헬름이 후임이 되어 1711년에 영국왕 조지1세로 등극하자 그의 입지가 몹시 불안하게 되었다.
수완 좋은 헨델은 오페라 <리날도> 등으로 앤 여왕의 총애를 이용해 여왕의 측근들과 끈끈한 우의를 맺고 수 있었다. 실의에 빠진 그를 보고 그의 친구인 킬만제그 남작과 바리톤 백작이 1715년 템스강에서 거행된 왕의 뱃놀이 잔치에 헨델로 하여금 왕을 위한 모음곡을 작곡하여 연주하라고 귀뜸해 주었다. 그래서 헨델은 3개의 모음곡으로 구성된 <수상음악>을 작곡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부터 첼시까지 템스강에 나온 왕의 유람선에 악단을 배에 태워 접근해서 매혹적인 선율로 된 곡을 연주하여 왕의 환심을 샀다고 한다. 조지1세는 이 곡이 너무 좋아서 첼시에서의 만찬전과 세인트 제임스로 돌아오기 직전에도 지친 연주자들에게 연주케하여 모두 세번을 연주했다고 전한다.
이 전해지는 이야기는 흔들 흔들(Händel)의 수완에 색칠한 듯하다. 어쨌든 조지 1세는 즉위 얼마 되지 않아 헨델의 연금을 두 배로 올려 주었을 뿐 아니라, 곧 이어 황태자비 카롤라인의 자녀들에게 쳄발로를 가르치는 보수로 200파운드를 더 지급하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 <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Royal Fireworks Music>
▲ 아들 조지 2세 : 불(Fire)로 「흔들(Handel) 흔들(Handel)」 1727년에 조지1세가 서거하고 그의 아들인 조지2세가 국왕에 등극하였다. 조지1세는 앤여왕 서거 후 왕위 계승에 우선권이 있는 제임스2세의 스튜어트가를 제치고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기 때문에 재임기간 내내 스튜어트가를 지지하는 재커바이트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을 뿐만아니라, 개인적인 능력과 사생활면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데 심지어는 영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한다. 조지2세가 아버지 조지1세에 이어 즉위했으나, 그의 아버지에 대한 좋지 못한 평판 뿐만아니라 그 역시 용기 없는 군주로 회자되고 있었다.특히 당시 유명한 저술가인 왈폴(Walpole,1717~97)의 영향으로 제국은 팽창주의의 열병에 휩싸이게 되고, 급기야는 조지2세는 영광스러운 정복자로서 제국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국왕이라는 여론이 팽배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러한 불행스런 여론에서 벗어나고, 사실은 자기는 용맹한 군주라는 사실을 홍보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진정한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획기적인 사건이 절실히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때맞추어 별 소득없이 개입해서 8년간 끌어오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1748년 7월 7일 엑스 라 샤펠에서 프랑스와의 평화조약으로 종결되었다. 그러자 조지2세는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국민들에게 자기의 용맹스러움을 알릴 수 있는 승리 축하연(사실은 승리랄 수도 없는 그저 평화를 얻은 것에 불과 하지만)을 떠올리게 되고, 그린파크에서 거창하고 화려한 불꽃놀이의 장관을 위주로한 축하공연을 열기로 했다.
우리의 흔들 흔들씨_이건 내꺼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2 ~1748.7) 1740년 10월 20일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군주이며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6세가 사망하자 아들이 없는 카를을 이을 후계자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였으나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일어난 분쟁으로 유럽이 오스트리아와 영국등을 한 편, 또 프랑스와 프로이센등을 한 편으로 나뉘어 헤게모니 쟁탈을 한 전쟁으로 결국 영국과 프랑스간의 평화조약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여왕으로 합의하여 종결된 전쟁이다.
■ 에릭 사티(Eric Satie) : 난 달라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