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Mozart,Wolfgang Amadeus :1756~1791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태생으로 고전주의 시대에 많은 작품을 작곡한 영향력 있는 작곡가이다. 모차르트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오페라, 코랄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600 여곡을 작곡하였고, 작품들은 각 장르에서 절정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모차르트는 가장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클래식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연주목록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작품] <후궁으로부터의 탈출>,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여자는 다 그래>, <마술피리>, 그 밖의 15개 오페라와 징슈필, 17개의 미사곡, 레퀴엠, 55개 교향곡, 23개 피아노 협주곡, 15개의 다른 협주곡, 26개 현악사중주곡, 19개 피아노 소나타, 수많은 노래, 아리아, 세레나데, 디베르티멘토, 춤곡, 다른 많은 성악과 기악 작품. [작품번호] : K. 또는 KV. 오스트리아음악학자인 쾨헬(Köchel)이 1862년에 정리한 작품목록번호(Köhel Werke Verzeichnis)
▣ 일대기 ■ 유년 시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지금은 오스트리아이지만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대주교 관할 구역이었던 잘츠부르크에서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페르틀 모차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형제로는 누나인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가 있었다. 모차르트는 태어난 다음 날 성 루퍼트 성당에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라는 세레명을 받았다. 모차르트는 성인이 되어서는 대체로 “울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è Mozart)라는 이름을 썼으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이름도 사용되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상당히 존경받는 작곡가이자 노련한 음악 교육자 중 한 사람으로, 모차르트가 태어나던 해에 “바이올린 교습본 (Versuch einer gründlichen Violinschule)”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18세기의 음악유산을 조망할 수 있는 귀중한 저서의 하나이다. 레오폴트는 볼프강의 누나인 난네를이 7살 되던 해부터 키보드를 가르쳤고, 3살 된 모차르트는 분명히 홀린 것처럼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누나는 이 당시의 모차르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자주 클라비어(키보드)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3도화음을 연주하고 그 소리를 듣고는 기뻐하였다. 그가 4살이 되자 아버지는 클라비어 미뉴에트와 소곡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모차르트는 매우 정교하며 완전무결하게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연주했다. 5살이 되자 그는 이미 작은 소곡들을 작곡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연주해 보였고, 그의 아버지는 그 악보를 받아 적었다.” C장조의 안단테(K. 1a)와 알레그로(K. 1b)가 그들이다.
전기 작가인 솔로몬( Maynard Solomon)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레오폴트가 그의 아들에게 헌신적인 스승이긴 했지만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훨씬 능가하는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그의 최초의 독자적인(잉크가 튀겨있는) 작품과 순전히 혼자 힘으로 바이올린을 최초로 연주하는 능력을 보고 레오폴트는 크게 놀랐다는 점이다. 그들 부자는 매우 가깝게 지낸 것 같으며, 앞에서 언급한 아들의 조숙함을 나타내는 일련의 삽화적인 사건을 본 아버지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 레오폴트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남을 발견하고는 작곡을 포기하고 아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는 유소년 시절의 아들의 유일한 스승으로서 음악뿐만 아니라 언어와 학교 교과목도 가르쳤다.
■ 여행 시기 :1762~1773년(6~17세) 모차르트 그의 성격 형성기간에 가족과 함께 어린이들이 모여 신동의 재질을 보여주는 유럽여행을 다녔는데, 최초의 신동 공개연기는 1762년에 뮌헨의 바바리아 선거후의 궁정에서 시작하였고, 같은 해에 빈과 프라하의 임페리얼 궁정에서 가졌다. 3년 반 동안의 긴 연주여행은 뮌헨, 만하임, 파리, 런던, 헤이그를 거쳐, 다시 파리로 갔다가 취리히, 도나우에슁엔, 뮌헨을 거쳐 귀가하였다. 이 여행기간에 모차르트는 수많은 음악가들을 만났고, 그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을 잘 알게 되었다.그 중에서 모차르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1764-65년에 런던에서 만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였다.
이 여행은 몹시 힘든 일이였다. 그것은 당시의 발달되지 못한 교통과 귀족들의 초대가 있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함은 물론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객지에서 오랫동안 죽음에 직면한 질병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1764년 여름에는 레오폴트가 런던에서, 1765년 가을에는 자매가 헤이그에서 병마로 고생하였다. 잘츠부르크에서 일년을 머문 후에 레오폴트는 가족을 남겨두고 아들만 다리고 1769년 12월부터 1771년 3월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했는데, 이 여행 목적 역시 아들의 연주와 급격히 성숙되어 가는 작곡가로서의 아들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 이였다. 그는 볼로냐에서 마르티니(G.B. Martini)를 만나 대위법을 공부하였으며, 유명한 ‘아카데미아 필라모니카’의 회원이 되었다. 로마에서는 오로지 시스티나 성당에서만 불려지고 들을 수 있는‘그레고리오 알레그리’작곡의 9성부의 이중합창 <미제레제(Miserere)>를 단 한 차례 듣고 기억을 더듬어 오선지에 옮겼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소년 모차르트에게 ‘황금박차 훈장’을 수여했다. 1770년에 밀라노에서 최초의 이탈리아어 오페라《폰토 왕 미트리다테》를 작곡한 후, 초연에서 크게 성공하였다. 그러자 1773년 3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를 재방문하여《알바의 아스카니오》, 《루치오 실라》를 초연하고, 흥행 계약을 기대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만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귀국하기 직전에 오늘날에도 자주 공연되고 있는 솔로 칸타타 <환호하라, 기뻐하라. K. 165>를 작곡하였다.
■ 1773~1777: 잘츠부르크 시절 1773년 3월에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오자 새로 대주교가 된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 백작의 궁정의 악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많은 친구들과 팬들을 갖게 되었고, 교향곡을 비롯하여 소나타, 현악4중주, 세레나데 및 오페라를 포함한 많은 장르의 음악을 작곡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 중에는 오늘날에도 널리 연주되는 곡들이 있다. 1775년 4월에서 12월 사이에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협주곡에 열중하여 5곡으로 된 한조를 작곡하였는데, 갈수록 음악적 세련미가 더해져서 마지막 3곡(K. 216, K. 218, K. 219)은 오늘날 연주목록의 표본이 되었다. 1776년부터 그는 일련의 피아노 협주곡들에 매진하였는데, 그 중에서 1777년 초에 작곡된 Eb장조(K. 271)가 그 절정을 이루는데, 비평가들은 획기적인 약진을 이룬 성공작이라 평했다. 이와 같은 예술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점차로 잘츠부르크에 불만을 갖게 되고 여기저기로 새로운 자리를 물색하게 되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낮은 급여인 듯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는 늘 오페라 작곡을 열망해 왔는데, 잘츠부르크에서는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775년에 궁정극장이 폐쇄되었고, 시내의 다른 극장들도 거의 단체 관광객들에게 예약되곤 하였다. 1773년 7월 14일부터 9월 26일에는 빈에서, 1774년 12월 6일부터 1775년 3월에는 뮌헨에서 두 번에 걸쳐 직업을 찾아 다녔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뮌헨 여행 때에 초연한 오페라 부파 <가짜 여자 정원사>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 1777~1778: 파리여행 1777년 8월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사임하고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 파리를 거쳐 뮌헨으로 돌아오는 또 다른 구직여행을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콜로레도 대주교는 아버지인 레오폴트가 함께 여행하지 못하게 하고, 그의 어머니와 함께 다녀오라고 명했다. 그는 도중에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쳐 만하임에서 약 5개월가량 체류하는데, 이때 소프라노 알로이지아 베버를 사모하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 프리도린 베버 역시 성악가이며,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큰 아버지이다. 만하임에서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오페라를 자곡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알로이지아의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만하임에서 머뭇거리는 모차르트를 나무라며 서둘러 파리로 향할 것을 명령했다. 하는 수 없이 모차르트는 1778년 3월 중순에 10일쯤 걸려 파리에 도착하게 된다.그는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권유받았지만 그가 원하는 자리가 아님으로 정중히 거절한다. 결국 그는 빚을 지게 되고 모든 값나가는 물건은 전당을 잡혔다. 모차르트가 파리 체류 때에 겪은 가장 참담한 사건은 어머니의 사망이었다(1778년 6월 23일). 그것은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돈이 없어 제때에 의사를 부르지 못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잊지 못할 한으로 남게 되었다. 모차르트가 파리에 머물러 있을 때에 아버지 레오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에 전보다 훨씬 나은 유급(450 플로린)의 오르가니스트 겸 악장 자리가 있으니 빨리 귀국하라고 도촉해 왔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이 자리를 떠 맡기가 싫어서 1778년 9월 26일에 파리를 떠나 만하임과 뮌헨에서 머물면서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뮌헨에서 이제는 제법 성공적인 가수가 된 알로이지아를 다시 만나게 되었으나 그녀로부터 당신에게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말만 듣게 된다.
모차르트는 1779년 1월 15일에야 집에 도착하게 되고 새로운 자리에 임명된다. 그러나 잘츠부르크 궁정에 대한 그의 불만은 계속된다.모차르트의 파리여행 중에 작곡한 작품 중에서 유명한 곡은 <가단조 피아노 소나타(K.310)>, <파리교향곡(제31번,K.297)>등이 있다.
■ 1781년 : 빈으로 출발 1781년 1월에 사육제에 공연될 오페라를 뮌헨 궁정으로부터 의뢰받고, 오페라세리아 형식의 <이도메네오>를 작곡하여, 1월 29일에 성공적으로 초연된다. 그러던 중에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장레식과 그 아들 요제프 2세의 대관식 때문에 빈에 체류하고 있던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소환 명령을 받는다. 뮌헨에서 막 성공을 경험하고 불려온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가 그를 단순한 종으로 취급하는데 대해 몹시 감정이 격해 있던 차에 툰 백작부인이 제의해온 연주(잘츠부르크에서 받던 급여의 절반이 넘는 출연료)를 금지하게 되자 극에 달했다. 5월에 들어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모차르트는 사직원을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달에 이르러서야 매우 모욕적인 방법으로 사직이 허락되었다. 모차르트는 문자 그대로 대주교의 사무장인 아르코 백작의 “엉덩이에 발길질”을 당하고 해고되었다. 그동안 그는 빈에서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중에, 빈에 안주하면서 프리랜서로서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심한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격렬한 반대와 대주교와 화해하고 돌아오라는 회유가 있었지만, 끝내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지 않고 빈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전기 작가인 졸로몬은 모차르트의 사직을 “혁명적 단계”라고 특징지었으며, 장래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다. ■ 초기 빈 시절 빈에서 그는 새로운 경력을 튼튼히 쌓아나갔다. 그는 1781년 12월 24일에 요제프 2세의 여흥을 위해 개최된 당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클레멘티(Muzio Clementi)와의 피아노 연주와 작곡 경연에서 빈의 최고 키보드 연주자의 위상을 확고히 굳혔으며, 촉망받는 작곡가로 부상하였다. 1782년에는 요제프 2세가 독일 오페라를 창립하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의뢰한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를 작곡하여, 그 해 7월 16일에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연이어 ‘독일어로 말하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었다. 이로 인해 작곡가로서의 모차르트의 명성은 완전히 확립되었다. 대주교 콜로레도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일러 있었던 1781년 5월에 모차르트는 아버지가 죽자 만하임에서 빈으로 이사하여 생계를 위해 숙박업을 하고 있던 베버가로 이사한다. 이 무렵에 모차르트의 청혼을 거절했던 알로이지아는 배우인 요셉 랑게와 이미 결혼해 버렸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의 동생인 콘스탄체(Constanze)와 1782년 8월 4일에 결혼한다. 이들 부부는 6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4명은 어려서 죽고 두 아들만 성인이 되었고, 그 중 둘째 아들(Franz Xaver Wolfgang)은 작곡가가 되었다
1782~1783년에는 하이든의 마지막 두 오라토리오의 대본을 쓴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 남작과 친교를 갖게 되어, 남작이 소장하고 있던 바로크 거장들의 필사본들을 접하게 됨으로서 바흐(J. S. Bach )와 헨델(G. F. Handel)의 작품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바로크 형식을 모방한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후일 그의 음악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데, 오페라 <마술피리>의 푸가와 교향곡 41번의 피날레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1783년에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잘츠부르크의 아버지 집을 방문하였으나, 아버지 레오폴트와 누나 난네를은 콘스탄체만 반길 뿐이고 모차르트는 냉대하였다. 그러나 이에 자극받은 모차르트는 유명한 전례곡인 <다단조 미사 >를 만들어 잘츠부르크에서 초연하였는데, 콘스탄체가 성악에 참여했다. 빈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만나 두 작곡가는 곧 친구가 되었으며, 모차르트가빈을 방문하면 둘은 함께 즉흥 현악4중주를 연주하곤 했다. 모차르트는 1781년에 발표된 하이든의 현악 4중주 Op.33(러시아 현악 4중주)에 크게 감명 받고,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그는 1782~85년의 4년간에 걸쳐 6곡(K.387, K.421, K.428, K.458, K.464, K.465)의 4중주를 작곡하고 수정을 거듭하여 <하이든 4중주곡>이라 명하고 존경하는 친구이자 스승인 하이든에게 헌정한다. 친애하는 벗 하이든에게, 한 아버지가 넓은 세상에 자식들을 내보내려고 결심했을 때, 다행이도 가장 친숙한 벗이 된 유명한 분에게 그들을 맡겨 보호와 지도를 부탁드리는 것이저의 의무라고 여기고 여기 여섯 명의 자식을 보내 드립니다. ............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경외하고 있었는데, 최초로 모차르트의 이 하이든 세트의 마지막 3곡을 들었을 때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그에게 다가오자 이렇게 말했다. “신 앞에서 정직한 인간으로 분명히 당신께 말씀드립니다. 당신 아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이름으로 아는 음악가들 중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심미안을 갖고 있을 뿐아니라 작곡에 대한 심오한 지식까지도 지니고 있습니다.” 1782~85년에 걸쳐 모차르트는 일련의 피아노 협주곡을 만들어 스스로 피아노 독주를 담당한 연주회를 가졌다. 그는 한 시즌에 3~4곡을 만들었는데, 그 시절에는 대극장에는 연주실이 드문 때라 관습에서 벗어난 개최지인 타르너호프의 큰 거실, 아파트, 무도장, 식당 등에서 공연하였다. 이 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들은 청중들에 매우 인기가 높았고, 그가 최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전기 작가인 솔로몬(Solomon)은 이 시절의 모차르트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열정적인 작곡가 겸 연주자와 환희에 찬 청중이 잘 조화를 이룬 결합이며, 주 음악 장르의변화와 완성을 증명하는 기회가 되었다.” 연주회 등으로 많은 돈을 벌자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사치스런 생활을 하게 된다. 모차르트는 460플로린의 고급 임대아파트로 이사하였고, 900플로린의 피아노와 300플로린의 당구대를 사들였으며, 아들 칼 토마스를 수업료가 아주 비싼 기숙사제 학교에 보냈으며, 심지어 하인들도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생활태도의 변화로 인해 저축은 불가능해 졌고, 수년 후에 모차르트가족은 심각한 재정적 곤경에 처하게 된다. 1784년 12월 14일에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여‘선행[Zur Wohltätigkeit("Beneficen")] 이라는 집회소로 들어간다. 그 후 프리메이슨은 그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프리메이슨의 많은 모임에 참석하고, 수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프리메이슨에 관련된 음악을 작곡하였다. ■ 1786~1787년: 오페라로 복귀 1782년에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후에는 2개의 미완성작품과 단막극 <극장 지배인>을 만들었을 뿐이며, 1785년 말까지는 오직 피아노 독주자로피아노곡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그는 다시 오페라로 눈을 돌려 유명한 오페라 대본가인황실극장의 시인이며 오페라 대본작가인 로렌초 다 폰테( Lorenzo da Ponte)와 손을 잡고,1786년에 <피가로의 결혼>을 만들어 빈에서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프라하에서 더 열정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모차르트는 세칭 “다 폰테 오페라” 제2탄인 <돈 조반니>를 위촉 받아 다음해인 1787년에 프라하에서 초연하고 빈에서도 공연했다. 이 두 작품은 모차르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로 오늘날에도 자주 공연되고 있다.
1787년 궁정악장 이였던 글룩(Gluck)이 사망한 후에 황제 요제프 2세가 모차르트를 궁정 작곡가로 임명함으로서 그는 드디어 귀족 후원자에 의한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그저 무도회장에서 연간 거행되는 무도회 음악을 작곡하는 연봉 800플로린의 파트타임 직 이였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에게 “내가 하는 일에 비하면 너무 많은 돈이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너무 적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일 모차르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이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궁정 기록에 의하면 요제프 2세의 의도는 모차르트를 이렇게 붙잡아둠으로서 대우가 더 나은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 이였음이 분명하다. 1787년에 17세의 젊은 베토벤이 모차르트로부터 한 수 배우려고 2주 동안 빈을 방문했다.그러나 이 방문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다만 세 가지 가설만 떠돌고 있다. 베토벤의 연주를 듣고 그를 칭찬하였으나, 그를 제자로 받아 들이기를 거부하였고 그 후로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1788~1790년 이 시기의 마지막 무렵부터 모차르트의 인기는 기울고 있었다. 1780년 무렵부터 모차르트는 공공 연주회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수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빈의 모든 음악가들에게 어려운 때였는데, 그것은 오스트리아가 터키와 전쟁 중이여서 귀족들의 음악에 대한 후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였다.
1788년 중반에 모차르트는 빈의 중심지에서 교외에 있는 알제그룬트의 값싼 숙소롤 이사 하였고, 친구들과 동료 프리메이슨인 푸흐베르크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돈을 구걸하는 비참한 편지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솔로몬 등 여러 사람들은 이 당시 모차르트가 몹시 의기소침해 있어서 작곡 활동도 약간 주춤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기의 주요작품으로는 마지막 3개의 교향곡(1788년, 39번, 40번,41번)과 3개의 '다 폰테 오페라’의 마지막 작품인 <여자는 다 그래>가 있는데, 이 오페라는 1790년에 초연되었다. 이 시기에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극복하려고 긴 연주여행을 시작하여, 1789년 봄에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베를린을 그리고 1790년에는 프랑크푸르트, 만하임과 몇몇 도시를 순회했다. 이 연주여행에서 약간의 성공은 거두었으나 그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에는 미흡하였다.
■ 1791년 솔로몬에 의하면 병마가 최후로 덮치기 전의 생애 마지막 해에 모차르트는 많은 작품을 썼고, 재정적으로도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고 한다. 이 기간에 만든 작품으로는 오페라 <마술피리>,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Bb장조,K. 595), 클라리넷 협주곡(K. 622), 마지막 현악 4중주 세트(K. 614),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존귀하신 주),K. 618> 및 미완곡인 <레퀴엠(K. 626)>등이다. 1790년에는 모차르트가 극도로 고민하던 재정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를 좋아하던 헝가리와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후원자가 그들의 위촉 작품을 만들어 주는 대가로 연금을 지급할 것을 약속했으며, 그는 궁정 작곡가로 일하면서 써두었던 춤곡을 팔아 상당한 금액을 마련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동료인 푸흐베르크로부터 빌려오던 거액의 돈을 갚기 시작하였다. 최후에는 모차르트는 몇 개의 작품이 대성공을 거두어 큰 만족감을 누릴 수 있었다. 초연부터 그가 죽기까지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마술피리>는 빈에서 지속적인 흥행으로 하여 그는 물론 친구이자 대본 작가인 시카네더도 파산으로부터 구해냈으며, 1791년 12월 15일에는 <작은 프리메이슨 칸타타(K. 623)>가 초연 되었다.
■ 병마와 죽음 모차르트는 1791년에 보헤미아 왕으로 취임하는 레오폴트 2세의 프라하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오페라 <티토의 자비>를 9월 6일에 초연하고 병에 걸린다. 그러나 당분간은 그의 직업에 관련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고, 9월 30일의 <마술피리> 초연도 직접 지휘하였다. 그러나 11월 20일에 이르러 그는 병석에 눕게 되었고, 종기와 통증 그리고 구토증 등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모차르트는 아내 콘스탄체와 그녀의 막내 여동생인 조피 그리고 주치의인 토마스 프란츠 클로셋의 간호를 받고 있었으나, 귀족 발제크 백작의 위촉을 받아 착수한 <레퀴엠>의 작곡이 <마술피리> 작업으로 늦어져서 거의 진척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온통 <레퀴엠>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 뿐 이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제자인 쥐스마이어에게 패시 지를 받아쓰게 한 흔적은 매우 희박하다. 모차르트는 1981년 12월 1일 새벽 1시에 사망했다. 뉴 그로브(New Grove)지는 그의 장례를 이렇게 기술하였다. “모차르트는 12월 7일에 빈의 관례에 따라 시 외곽에 있는 성 마르크스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한 사람의 조문객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빈의 장례관 습에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1856년에 잔(Jahn)은 살리에리, 쥐스마이어, 스비텐 및 두 명의 음악인이 참석했다고 전한다. 또한 장례날에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렸다는 이야기는 거짓말로 날씨는 따뜻하고 고요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의 원인 또한 추측이 무성하다. 기록에는 그가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 수은 중독, 류머티즘 열,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환자의 피를 뽑았던 당시의 의술도 모차르트의 죽음의 원인으로 여겨진다.그러나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인은 극심한 ‘류머티즘 열병’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류머티즘 열병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데, 이 병은 재발하는 성향이 있어 그 때마다더욱 악화, 만연시켜서 심장 판막을 손상한다.
모차르트의 장례는 빈약하게 치러졌으나 대중들에게 작곡가로서의 그의 위상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빈과 프라하에서 열린 그의 추모행사와 연주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실제로 그의 사후 기간에 모차르트의 음악가로서의 명성은 굳건해졌는데, 솔로몬은 그의 전기에 “전례가 없는 음악적 열정의 파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작품의 양식과 영향 ■ 작품의 양식 모차르트의 음악은 하이든과 마찬가지로 고전주의양식의 전형적인 표본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갤런트 양식으로 예시되는 형식과 이것과 후기 바로크 시기의 대위법적 복합성을 조합하는 형식에 걸쳐있으며, 그 자신의 양식의 발달은 고전주의 양식의 발달과 밀접하게 병행한다. 모차르트는 다작을 한 작곡가로, 유명한 작품으로는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현악 사중주 등이 있다. 그의 많은 작품이 그 당시에 있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피아노 협주곡만큼은 모차르트 혼자서 발전시켜서 대중화했다. 모차르트는 미사곡을 포함한 종교 음악과 실내악곡, 그리고 디베르티멘토와 춤곡과 같은 가벼운 곡도 썼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고전주의 형식의 중심적인 특징을 찾아 볼 수 있으며, 명료성과 균형성 그리고 투명성이 그의 음악의 검증서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의 우아함을 너무 극단적으로 단순화 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C단조 피아노 협주곡 24번(K. 491)>, <G단조 교향곡 40번(K. 550)> 및 오페라 <돈 조반니>와 같은 훌륭한 걸작들의 특별히 빼어난능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찰스 로젠(1997)은“우리가 모차르트의 작품 구조를 이해하고 그의 장대함을 들여다보려면 그의 작품 한 가운데에 도사리고 있는 격렬함과 관능성을 인지하여야만 한다. 역설적인 방법이지만 G단조 교향곡에 대한 슈만의 피상적인 성격 묘사를 보면 모차르트의 비범함을 더욱 견실하게 알 수 있다". 라고 쓰고 있다
특별히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모차르트는 당시에는 꽤 드물었던 반음계적 화성을 탐구한다. 거친 불협화음으로 서서히 진행되던 도입부가 갑자기 굉장히 밝고 즐거운 화성으로 전개되는 <불협화음 4중주곡(K. 465)>에서 모차르트의 스타일을 이해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모차르트는 한번 들은 음악을 흉내낼 수 있는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유년기의 장기간에 걸친 여행을 통한 진기한 경험으로부터 모차르트는 자기만의 작곡어법을개발했다. 당시에 런던과 이탈리아에서는 화음과 대칭적 악절 및 간단 명료한 구조를 배제하고, 으뜸화음과 딸림화음 및 버금딸림화음을 강조한 종지형태가 주로 사용된 간단하고 가벼운 음악의 갈란트형식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후기 바로크 음악의 복잡성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새로 출현한 것이 고전주의 음악 양식이다.
모차르트의 초기 이탈리아식 교향곡은 3악장 체계로 구성되었고, 대부분 같은 조(중간의 느린 악장은 관계단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바흐(J.C, Bach)를 모방한 작품들과 빈의 작곡가들이 보통 사용하던 단순한 순환 2부형식을 사용한 작품을 만들었다. 모차르트의 작품에서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은통상 딸림조나 으뜸조로 종지하도록 유도하는화성이나 선법의 동형진행이다. 이 동형진행은 바로크 음악, 특히 바흐의 프리지아선법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스트롱 하프(세로줄의 첫 번째 비트)에서 종지하도록 동형진행을 이동시켰다.
기량이 성숙해지자 모차르트는 약간의 바로크 양식의 특성을 자기 음악에 접목시켜 나갔다. 예컨대 <A장조 교향곡 29번(K. 201)>에는 제1악장에 대위적 주제를 사용하였고, 비규칙적 악절의 길이를 시도해 보았다. 1773년에 작곡한 현악 4중주곡의 일부는 푸가형태의 피날레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최근에 발간된 하이든의 현악 4중주곡 작품 20번 중의 3곡의 피날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다가올 낭만주의 음악시기를 예고하는 ‘질풍노도’ 시기의 영향은 두 작곡가 모두에게서 볼 수 있으며,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 25번>은 이 형식의 훌륭한 예라 하겠다.
그의 작품 활동은 기악곡에서 다시 오페라로 바뀐다. 그는 당시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여러형식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오페라 부파로는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 및 <여자는 다 그래>, 오페라 세리아로 <이도메네오> 그리고 모차르트의 가장 유명한 곡 중의 하나인 독일 오페라인 징슈필 <마술피리>가 있다. 이후의 오페라에서는 심리적, 감정적 상태를 적절히 표현하고 고취시키며 분위기의 극적 전환을 위해 악기편성, 오케스트레이션, 음색에 미묘한 변화의 사용법을 개발하였다. ■ 영향 조아키노 로시니는 모차르트가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그의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에게 자신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의 1악장의 주제만큼 대단한 선율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경의로 쓴 작품이 있는데, 마술 피리의 주제에 의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위해 쓴 카덴자 등이 그것이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만나고 나서 그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를 위해 《모차르티아나》를 썼으며, 구스타프 말러는 모차르트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다. 막스 레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에 의한 것이다.
♣♣♣♣ 출처: 1.Wikipedia 번역 2. 그라우트,"서양음악사" 제7판(상),pp.585~605. 참고 3. 김용환,"서양음악사, 100 장면(2)",pp.90~104.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