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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심원한 작가정신, 전략적 이중구조
- 파동-입자라는 빛의 이중성과 양자역학 이론에 기대어 -
권대근
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송명화 수필을 분석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분석틀은 양자역학의 이중성이었다. 예술의 주요한 특성 중의 하나가 복합성이라면, 오랫동안 본격수필을 주창하면서 예술수필을 써온 송명화 교수는 수필을 창작함에 있어서 복잡계 속 사건 사물 사람간의 복잡한 전개양상을 예술구조의 한 방법론인 이중구조로 짜서 형상화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한강 이남에서 몇 안 되는 본격수필 선두주자의 한 사람으로서 송명화 교수는 우리 수필의 고급화, 본격화를 위한 노력의 결실을 이미 오래 전에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일억원고료 제1회 김만중문학상을 수필 부문에서 수상했으며,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이 그녀의 문학적 역량을 가늠하게 해준다. 글을 쓰기 전 그녀는 반드시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심층구조 단계에서는 주제와 제재의 상관화를 도모하고, 그리고나서 문학작품을 위대하게 하는 철학성을 문학성에 덧칠해서 작품을 완성시켜낸다. 이런 작가의 수필을 <서평>으로나마 조명하고, 그 심원한 수필세계와 구조를 분석해 보려한다.
권대근의 <수필은 사기다>라는 본격수필시학에 관한 이론을 토대로 <본격수필 창작이론과 적용>이란 본격수필시학론을 펴낸 문학평론가로서 지금까지 20여 년 간을 문학공부와 연구를 병행해서 해오고 있고, 대학원에서 문학언어치료학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부산교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과정 선생님들을 가르치며, 평생교육원에서 수필론을 강의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최선을 다하지만 무엇보다도 칭찬할 만한 것은 본격수필전문지 <예세이문예> 주간을 20여 년 간 줄곧 하면서, 에세이문예를 대한민국 일등 문예지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사실이다. 본격문학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부적격 수필을 가려내는 등의 수고로 에세이문예지를 22년, 23년 연속 부산문화재단 우수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되도록 한 바 있다. 그녀가 한 길을 고집하는 이유는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뜻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시나 소설을 쓸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예술의 목적은 돈을 버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20여 년 전 부산교육대학교 문예창작반 수필 과정에 등록해서 수필가로 등단하여, 지금은 부산교대 문예창작반에서 수필론 지도교수로서 참신한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수제자에게 수필론 강좌를 물려준 평자는 시론을 가르치고 있다. 송명화 교수는 평자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사무총장으로 한국수필을 영어로 번역해서 한영대표수필선을 내는 일의 실무를 맡아 보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 수필가로서 우리 수필이 영어로 번역되어 해외로 나가지 못한다면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요원하다는 자신의 철학을 다지는 차원에서 우리 수필의 번역화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재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수필을 세계에 소개하는 기회를 여섯 차례나 만들었다는 것이다. 평자는 송명화 수필이 하루빨리 영국이나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의 국어교과서에 실리길 바랄 뿐이다. 그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겸손은 그녀의 시그니쳐다. 송명화 작가 하면, 있는 듯 없는 듯 단아하면서도 엄정한 자세로 오직 문학을 위해 걷는다는 인상이 지금도 줄곧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의 인지시스템은 익숙하지 않는 것은 더 잘 기억하는 법이다. 그녀는 분명 남다른 데가 많았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조금의 허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면에서, 그리고 무슨 일이든 올곧은 자세로 반듯하게 확실하게 행하는 데서 약간 관료적인 면이 느껴지나 마음속이나 머릿속 깊은 곳의 열림과 변화, 관용과 포용으로 ‘다름’을 껴안는 자세로 봐서는 아름다움이 내포한 기본 가치들을 잘 품고 있다고 하겠다. 시대를 관통하고, 지구의 안위를 논하고, 젊은 청년들의 삶을, 불우한 이웃의 아픔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워낙 크고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고 주변부 타자를 아끼는 마음 또한 크기에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그릇을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지구를 염려하는 마음은 크고 깊어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항상 한결같음으로 스승에게 존경과 예를 다하는 모습에, 나는 이분이 “작가는 글로 말하고 인간성으로 평가받는다”는 명제에 딱 맞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다.
Ⅱ.
양자 물리학은 파동-입자 이중성 및 양자 얽힘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개념으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이해에 도전하고 있다. 양자물리학의 매력과 그것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미치는 심오한 영향을 밝히는 작업을 송명화의 본격수필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과정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은 송명화 교수가 수필집을 내겠다고 할 때부터 마음 먹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성은 구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중구조가 주는 송명화 수필의 묘미와 흥미진진성에 벌써 나도 들떠 있다. 나는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파동과 입자 모두로 행동하는 빛의 이중적 특성과 같은 개념에 신기해하면서, 우리의 지식에 한계를 부과하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수필의 이중구조와 귀납추론의 원리나 주제의 내면화 원리와 연결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양자 영역의 비밀을 밝히고 이 매혹적인 과학 분야의 경이로움을 송명화의 본격수필 분석영역으로 치환해 본격수필의 창작원리를 이해하는 이 여정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한다.
뉴턴 역학에 기초한 고전 물리학이 양자 물리학의 새로운 영역에 자리를 내준 양자혁명 동안 발생한 패러다임 전환을 ‘사실을 사실대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전통수필’에서 수필은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한다’는 본격수필에로의 전환에 견주어보면 어떨까. 송명화 수필은 이중구조와 전이 미학으로 분석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그 문학의 본격성과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 공중부양되고 있는 영자역학은 오랜 결정론적 세계관에 도전하고 파동 입자 이중성, 불확실성 및 양자 중첩과 같은 개념으로 우주의 운행원리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지식을 부여하고 있다. 양자 혁명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놀라운 과학적 발전과 기술 혁신의 발판을 마련했다. 본격수필이론도 양자역학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교술이라는 전통수필 이론에 도전하고, 기존 수필에 대한 개념에서 전환하여 수필적 허구, 중층구조와 존재론적 의미화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현대수필의 옷을 입게 되었으니, 이번 송명화 수필의 분석틀은 앞으로 우리 수필의 본격성과 구조성을 재단하는 척도로 널리 애용되리라 믿는다.
Ⅲ.
예술의 특성 세 가지 기본 요소는 난해성, 복합성, 통일성이다. 이 세 가지 속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복합성이다. 복합성은 기술방법론에서 보면 ‘이중성’과 같은 말이다. 본론에서 빛의 이중성을 강조하는 ‘파동-입자’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송명화 수필에 적용해 보려 한다. 빛이 ‘파동과 입자’의 특성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에 기대어 그 동작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도전하는 양자역학의 원리를 통해 송명화 수필의 구조를 재미있게 풀어보겠다. 파동-입자 이중성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이중 슬릿 실험과 같은 유명한 실험을 했다. 이 실험은 빛이 어떻게 동시에 파동과 입자로 행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촘촘하게 간격을 둔 두 개의 슬릿을 통해 빛을 통과시키면 파동과 같은 행동을 암시하는 간섭 패턴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광자가 어떤 경로를 택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검출기를 배치하면 간섭 패턴이 없는 입자와 같은 동작이 관찰된다. 따라서 빛이 파동-입자라는 이중의 성질을 띤다는 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송명화 수필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 도토로프의 중층구조이론으로 풀어낼 수 있다. 수필의 창작이나 이해에 있어서 ‘이중성’의 이론적 배경은 1. 예술의 복합성 원리, 2. 토도로프의 중층구조이론, 3, 언어학의 이중부호원리 4.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란 문학이론에 의해 그 근거를 확보한다고 하겠다. 송명화의 수필의 문학적 성취를 드높이는 이중구조는 여러 수필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들 작품을 토대로 구조미학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수필은 새가 하나의 세계인 알을 깨고 태어나듯이 인습과 고정관념을 깨고 태어난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예전부터 있어 온 세계, 기성품으로 가득 찬 인습의 세계, 타인의 가치가 규범으로 옭아매고 있는 타인의 땅에 태어난 것이다. 타고난 개성을 바탕으로 새로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낡은 인습과 타인들의 가치로 뭉쳐진 알을 깨지 않으면 안 된다. 기성품의 세계에서의 바람은 질서와 떳떳함과 맑은 세계로, 남의 가치에 맞춘 또 다른 기성품으로의 삶이다. 이 기성품 세계의 맞은편에는 또 다른 세계의 삶이 있다. 수필 <아마릴리스>는 바로 다른 세계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윤여정은 아마조네스의 전사다. 이혼의 상처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아이들을 안았다. 유명인이기에 그녀의 힘든 가정사를 사람들은 대체로 알고 있었다. 한때는 쉽게 어둠의 그림자를 벗어 내리라 생각지 못해 안쓰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빈 줄기 속에 쓰디쓴 눈물과 아픈 모정과 수많은 대본을 쟁여 넣고 우뚝 서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가열한 삶에서 구한 내공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진중하면서도 재치 있게 말했다. “나를 바깥으로 내몰았던 아이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무슨 배역이든 맡아 생계를 책임지려 했던 그녀의 시간들이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 무지개다리를 놓는다. 땀과 눈물이 양팔저울의 눈금을 영으로 만들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제 그녀의 트로피가 땀에 얹혔다. 그녀가 받은 갈채는 세상과 전투를 벌이는 어머니들에게 나누는 비타민이라 해도 될까.
- <아마조네스, 아마릴리스> 중에서
송명화 작가가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키워온 ‘아마릴리스’ 꽃에 대한 수필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수필정신과 맞닿아 있어 신선감을 준다. 무엇보다도 전이의 미학을 통한 문학성 견인해내기에 성공한 작품이라 하겠다. 어느 한 부분도 비장함이 묻어나지 않는 데가 없지만, 위 인용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를 보여준다. 주체적 여인이고자 한다면, 유교적, 남성중심적 세상과의 전투는 여성의 운명이 아닌가. 부산수필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힌 이 수필 <아마릴리스>를 쓴 송명화 작가는 실수로 아마릴리스를 ‘아마조네스’로 인지한 데서 전사의 이미지를 건져내고, ‘릴리스’를 해방을 뜻하는 영어단어 release로 풀어내었다. 이 수필의 최고 압권은 이 부분이 주는 네오필리아가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아마릴리스를 ‘얽매임을 끊고 자신의 의지로 선다’는 뜻으로 읽어낸다. 의미화해 놓고 보니, ‘날씬하게 뻗어 나온 여섯 개의 수술대와 하나의 암술대가 장엄하게’ 보인다고 하면서 윤여정의 이미지를 잘 소화해내고 있다.
아마릴리스 꽃잎에서 나팔소리를 스캔하고, 진격의 신호로 읽어내고, 윤여정의 삶에 워킹맘으로서의 자신의 고되었던 삶도 전사 이미지에 포개어, 궁극적으로는 미의식으로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데 성공했다. 작가는 연상과 상상을 위한 전략을 수립해서 수필텍스트를 철학적 인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미적 향수의 대상으로 만는 것이다. 미학적으로 전자와 후자가 조화롭게 융화될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미의식의 창조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수필은 미적 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배우 윤여정과 자연 아마릴리스, 여성의 문제를 통찰하는 미적 사유의 예술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데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수필로서의 성공적 요인은 메타포라는 문학적 원리를 사용하여 수필의 구조와 전개를 이중적으로 짜나간 데 있다. 변용, 전이 치환의 미학은 감동의 바로미터이면서 송명화 수필의 원형질이라 하겠다. 이 작품의 쾌미는 중층구조를 갖는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심층차원에서 획득한 제재의 성찰결과를 감동적인 이야기질서로 표층차원에서 구조화한 부분에서 맛볼 수 있다.
한국현대수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문제는 제재의 통찰 결과를 미적인 이야기로 이중구조화, x축과 y축으로 이원화하는 이야기 배열작업에 대한 무관심인데, 송명화 작가는 이야기의 미적 배열을 통해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이끄는 디자이너라고 할 만하다. ‘회자되는 꽃말인 ‘눈부신 아름다움’ 말이다. 외관에 초점을 둔 것이겠지만, 화려한 화판 속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조준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소심한 여성성은 버려도 좋다. 그냥 ‘꽃’이다. ‘제3의 젠더’다. “아마릴리스, 너의 별명은 여전사꽃, 꽃말은 당당함이야.”라는 결말부의 이런 변용미학은 송명화 수필의 의미구조 생성원리일 뿐만 아니라, 주제를 형상화하는 미적 원리라는 점에서 창작의 핵심 부분을 차지한다. 주제와 구조가 튼실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울림을 생성하도록 주제의식을 형상화하는 면에서도 모자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송명화 수필의 문학적 울림은 이야기의 감동을 구조화하는 방법과 그러한 이야기 구조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서술전략이 긴밀한 상호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마다 산고의 고통을 겪는다. 송명화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기성품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 즉 어두운 세상을 낯선 인식으로 열어젖히는 열린 작가다. 사회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녀의 수필은 하나 같이 독자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게 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실로 우리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진지한 성찰을 안겨준다. 이처럼 진지하게 우리네 삶의 본질을 천착해 보인 작품이 있었던가. <아마릴리스>는 진정으로 우리가 읽고 싶은 수필들이라 감동을 준다. 이는 그녀가 세상을 향해 눈과 귀 그리고 가슴을 열어놓고 제 물상의 발신음을 듣는 열린 마음의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중화 구조를 통해 작가는 나름의 개성적 색깔을 문학적 형상화로 축성한다. 때로는 소시민적 일상을 수필적 제재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경우라도 결코 단순한 소품으로 그치는 경우란 드물다. 하동 화개장터에서 산 ‘아마릴리스’ 구근 한 톨을 ‘다시 보기’를 통해 정교하게 형상화하였다.
문학적 성취는 수사학에 의해 성패가 갈린다. 흔히 ‘수사학’하면, ‘으레 그렇게 하는 화법' 또는 ‘과장된 표현을 동원한 진부한 설명’ 등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떠올리겠지만, 원래 수사는 설득하고 추론하고 분석하고 나아가 현실을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소통의 수사는 논리에 취약한 사람들에게 더욱 중요하다. 사회의식이 부족한 작가들은 세상 바꾸기라는 전략에 비추어 그것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것보다 주제의 전달성에만 신경 쓴다는 걸 알 수 있다. 독자와의 문학적 소통, 설득 등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번에 다룰 네 작품은 ‘언어’와 ‘소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므로 단어 하나하나, 표현 하나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수필언어는 문장미학의 관점에서 시어와 소설언어를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지구의 위기 앞에 세상 바꾸기에 앞장서서 소통의 길을 걷는 작가의 작품을 따라가 보자.
‘에나가’는 맹세와 결의의 말이다. 150여 년 전 농민들이 목숨을 걸었던 말이다. 조선 후기에 진주민란이 일어날 당시, 모의하는 과정에서 ‘배신하지 않겠다.’, ‘반드시 참여하겠다.’는 뜻으로 ‘에나가?’라고 물으면 ‘에나다.’라고 대답했다는 유래를 읽은 적이 있다.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 역사 시간에 외우느라 힘들었던 용어들이 떠오른다. 관리들의 수탈이라는 부끄러운 역사에 침을 뱉다가도 분연히 일어선 백성들의 결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다면 하는 것이 바로 ‘에나’의 정신이다. 에나가란 낱말이 가진 큰 의미에다 선생이란 호칭이 더해져 그의 어깨엔 더 큰 무게가 얹힌다. 선생이란 깨달은 이, 앞서가는 이, 깨우쳐 주는 이를 말함이 아니던가. 달리 생각해 보니 ‘나가’는 ‘선구자로 나서라’는, 아니면 ‘부조리는 나가라’는 것으로까지 생각이 가지를 뻗는다.
- <에나가 선생> 중에서
‘에나가 선생’은 경남일보에 연재된 네 컷짜리 시사만화의 주인공이다. 송명화는 뚱하면서도 아버지를 닮은 이 시사만화 주인공이 어린 자신의 눈길을 사로잡았다고 적고 있다.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에나가 선생을 영화 말모이와 견주는 데 있다. 치환원리는 수필의 문학성을 높이는 데 최고로 기여하는 문학적 장치다. 수필에서는 제재를 활용하고, 치환원리라는 문학적 장치를 활용하지 않으면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교시적 기능을 주제로 암시하되, 심미적 기능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 수필의 쾌미는 “제때, 제 말할 줄 아는 사람, 핵심을 바로 보는 깨어있는 지성이 소중한 시대가 아닌가. 에나가 선생이 진정 그리운 이유다”라는 주제에 대한 의미화 대목에 있다. 여기에 사회 변혁을 바라는 작가의 간절한 소망이 묻어난다.
‘에나가’는 150여 년 전 농민들이 목숨을 걸었던 말이다. 조선 후기 진주민란 당시, 모의과정에서 ‘배신하지 않겠다.’, ‘반드시 참여하겠다.’는 뜻으로 ‘에나가?’라는 말이 쓰였다고 한다. 시대정신과 세태풍자에 대한 송명화의 애정과 이해는 수필의 갈피갈피에 진하게 배어있다. 특히 <에나가 선생>은 작가의 사회의식이 사회 변혁의 방향성과 얽혀 수준 높은 상징성을 획득한 작품으로서 단연 이 문예지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결말부, “예리한 설봉은 약침이다. 소독약이건 방부제건 한 방이 그립다.”에서 ‘약침’ 또는 ‘소독약’ ‘방부제’ 등의 어휘를 배치하여 지배적 정황을 만드는 것으로 볼 때, 글쓴이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면서 병리학적 처방을 내어놓을 깨어있는 지성인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이 글은 작가의 저항적 세계관을 보여주기도 하고, 작품 속에 풍부하게 도입된 사자성어들이 주제를 잘 뒷받침해주어 독자를 사회 변혁의 주체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하겠다.
수인번호 475를 앞가슴에 단 사내가 피를 토한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괴로워한다.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대던 구리거울 속 슬픈 뒷모습을 남기고, 시인은 스물아홉 아까운 나이에 갔다. 화면 속 동주의 눈빛에 내 감정을 몽땅 실었다. 눈앞에 펼쳐진 윤동주의 연보를 애써 읽으려니 눈에 괸 눈물이 둥글게 뭉쳐지고, 유독 참회록이 크게 보인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윤동주의 청동거울은 깨끗해졌을까.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로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지만 아직도 거울은 흐리다. 녹청이 해독을 입히지 못 하도록 문지르고 또 문질러대던 그 작업은 아직도 마무리되지 못하였지 싶다. 언제쯤 뚜렷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시대가 변했건만 아직도 꿈틀거리는 부끄러움, 그 녹을 벗겨내야 하는데.
- <녹> 중에서
수필의 특성이 인간학에서 인문학으로 옮겨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현대수필은 인문학적 소양의 바탕 위에서 창작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의식있는 작가라면 당연하게 우리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송명화 교수 수필의 특성이라면 문사철을 관통하면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데’서 발현하는 작가정신이라고 하겠다. 이 수필은 <동주>라는 영화를 보고, 쓴 수필이다. 참회록에 가까운 글이다. 작가는 영화를 보고난 후 ‘흑백화면에 기록된 시대의 암울함과 젊은이의 고뇌가 시들었던 나의 의기에 불을 붙였다.’고 적고 있다. 민족신인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 시인은 ‘일본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하며 그 참담한 심사와 비애를 그는 「참회록」’에 실었다. 이 수필의‘침울한 표정으로 나라 잃은 분노의 시절을 하루하루 견뎌내던 삶’은 그에게 ‘무시로 닦아야 할 청동거울’ 같았으리라고 한 대목은 압권 중의 압권이다. 이런 특별한 삶을 눈물로 살아온 윤동주 시인의 참회를 ‘녹’에 견주어 잘 형상화하였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라는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에 주목하면서 송명화 교수는 부끄러운 자신을 발견하는 대목에서 이 수필이 주는 감동은 절정에 다다른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를 잊지 말아야 될 일제의 만행을 ‘그 녹을 벗겨내야 하는데.’라는 말줄임으로 간접화해서 주제의식을 연상과 상상으로 실어나르는 데 성공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승자가 영원한 승자가 되는 건 아니다. 역사는 후세 사람들의 엄정한 평가 속에서 재정립되고 재평가되기 마련이다. 송명화 교수는 갓 열 살을 넘어선 나이에 그의 시를 외웠다. 윤동주의 ‘민족적 저항’이란 수식어는 당시 민족정신으로 불타던 어린 여학생 송명화의 가슴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물음표는 수시로 송명화의 영혼을 두드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표지에는 한 송이 연꽃이 우뚝하다. 내 안에서 그의 시는 청정한 꽃이 되었다. 그의 시를 암송하며 나이를 먹었고 정신을 키웠다. 우리 모두는 잊어야 할 것,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안다고 나는 굳게 믿었다. 왜 줄기가 꺾이면 안 되는지, 왜 정신이 좀먹지 않도록 잊지 않고 녹을 닦아야 하는지 모두들 뼈에 새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은 이들이 잘 챙기고 있고, 그 정신을 후손에게 잘 전해주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는 대목에서확인할 수 있듯이, 작가는 한 편의 시로부터, 참회록으로부터 민족혼을 일깨웠던 것이다. 윤동주의 참회를 ‘녹’에 견주고, 그 저항정신을 ‘거울’에 빗대어 이중구조 층위를 통해서 윤동주의 민족정신을 고양하려 라는 지성적 사유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독자들은 동감으로 지지를 보낼 것이다.
따끔하다. 장갑을 끼고 신문지로 말아 쥐었는데도 서너 개의 침이 손가락에 박혔다. 가시 하나 뽑을 때마다 어머니 계신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해외여행을 권하는 내게 팔순을 넘긴 내 어머니는 손자 녀석 용돈이라도 벌어야 한다면서 단호히 거절하셨다. 아들만 자식이냐고, 직업 있고, 자식까지 있는 아들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남았냐고, 제발 당신 걱정이나 하시라고 퉁명스럽게 응대한 내 목소리가 두고두고 나를 찔러대는 가시가 될 줄 어찌 알았을까. 새끼를 떼어내는 나를 견제하는 어미선인장의 가시는 날을 곧추세워 햇살 속에 은빛으로 빛난다. 칼날처럼 뻗치는 기상,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아직도 새끼에게 빨릴 수액이 남았을까. 군데군데 굳어가는 몸을 지탱하기조차 힘든데 어미는 새끼를 안고 가려 하는 것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첩첩한 건물 너머 아득한 구름 사이로 괜찮다고 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 굽은 허리를 세울 튼튼한 받침목이 되지 못하는 큰딸을 어머니가 토닥이신다. 그 목소리가 더 아파 가시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내 가슴속에서, 내 손가락에서 가시들이 서릿발처럼 일어선다.
<가시> 중에서
송명화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가시’라는 기표를 통해서 전통적 모정이라는 기의를 제시한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어머선인장의 가시라는 이중 층위를 통해 정서를 객관화하려는 작가의 전략은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모든 수필에 공히 나타나는 문학적 수법이다. 이런 비유적 언술 양상은 이미지가 전달하는 미적 감각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예술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듯보인다. 다시 말해 그녀는 친정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는 방식을 우회적으로 표현해서 자신의 섭섭한 그 감정으로 호명해 낸 것이다. 수필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서의 객관화 작업인데, 이것은 사건이나 대상에서 받은 감정을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재현하여 깊은 울림을 주는 방식이다. ‘새끼를 떼어내는 나를 견제하는 어미선인장의 가시는 날을 곧추세워 햇살 속에 은빛으로 빛난다. 칼날처럼 뻗치는 기상,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아직도 새끼에게 빨릴 수액이 남았을까. 군데군데 굳어가는 몸을 지탱하기조차 힘든데 어미는 새끼를 안고 가려 하는 것인가.’ 어미선인장의 가시가 날을 곧추세워 햇살 속에 은빛으로 빛나고, 그 기상이 칼날처럼 뻗친다는 언술 양식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전략을 이해할 수 있다. 위 인용문은 지배적 정황을 나타내는 부분으로써 우리의 미의식을 자극할 수 있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요즘 들어 시골에 올 때마다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설렌다. 혹여 그들의 음악회가 끝났다고 해도 아쉬워할 일이 아님을 안다. 아무쪼록 녀석들의 바람이 잘 이루어지고, 새로운 생명들이 논마다 꼬물거리게 될 때 그땐 또 얼마나 미쁠 것인가.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세상의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어디서나 아기를 보면 사람들의 눈길이 모여든다. 예전처럼 다가가 쓰다듬고 말 건네지는 못하지만 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대견해한다. 어른들의 가슴마다 휑한 허전함이 숨어있다. 아무리 동네를 정비해도 아이들의 부산한 기운이 결핍된 동네는 풀죽은 광목이불 같다. 아련한 추억이 되어가는 젊은 날의 기운 넘치던 동네에 방송을 하는 이장님의 목청조차 예전 같지 않다. 아기 울음소리, 아이들 노는 소리, 청장년들 일하는 소리, 노인들 너털웃음 소리가 담 넘어 넘실대던 옛날이 대한뉘우스처럼 그립다. 사람이 그립다.
<개구리 소리> 중에서
개구리 소리가 사라진 시골 분위기는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고유한 인정이 사라졌다고도 볼 수 있고, 문명의 발달로 예전의 인정스런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문명비판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작가는 ‘아이들의 부산한 기운이 결핍된 동네를’‘풀죽은 광목이불’에 견줌으로써 개구리 울음소리가 사라진 동네의 모습을 구체적 형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객관적 상관물인 ‘풀죽은 광목이불’은 시골의 내면이 느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시골을 둘러싼 허전한 삶의 느낌까지 확연하게 전달한다. 이 작품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온고이지신 철학으로 감싸안는 한국적인 수필이다. 이를테면 문명의 이기가 주는 현란함 등의 이미지를 배제하고, 그녀는 ’아이들의 소리’,‘이장님의 목청’ ‘아기 울음소리’ ‘청장년들 일하는 소리’ ‘노인들 너털웃음 소리’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아쉬움을 표출하고 있다. ‘발전’ ‘변화’가 곧 ‘문명’ ‘풍족’이라는 기존의 사유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을 제시하고자 한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더욱 구체화하고, 단단하게 하기 위해 적절환 어휘를 채굴해서 의미화 문장 안에 배치하는데, 이를테면 ‘뉘우스’다. ‘뉘우스’는 흘러간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과거가 그립다는 것이다. 무조건 과거가 좋다고 하는 건 아니다. ‘개구리 소리’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으로 가슴을 울리는 그런 추억의 소리라는 메시지다.
이번엔 다리를 역순으로 건넌다. 창선에서 출발하여 단항교, 창선대교, 늑도대교, 초양대교, 삼천포대교를 차례로 건넌다. 여러 다리가 하나로 이어져 달리게 한다. 어머니는 작년까지만 해도 맑은 정신으로 아직도 글 쓰냐고 하셨다. 공부하는 거, 강의하는 거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주셨다. 어머니가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큰딸의 손을 잡고 힘차게 바다를 물리던 그날이 생생하다. 주저하지 말고 푸르게 날아오르라고 엉덩이를 쳐주시던 쨍한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학력은 얕았어도 평생 독서를 즐기시던 어머니는 그때도 지금도 낡지 않는 내 견고한 다리다. 내 손을 잡고 함께 건너고자 한 어머니의 다리가 눈에 밟히는 것은 내가 조금이나마 철이 드는 까닭일까. 어머니의 목도리를 다시 묶어 드린다. 잠깐 옛날 생각이 나신 것일까. 이제 그만 쉬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당부에 눈물이 솟았다.
-<저 다리처럼> 중에서
<저 다리처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바 있는 삼천포창선대교를 제재로 해서 자신의 성장서사를 다룬 글로, 그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머니를 교각에 비유해서 쓴 문학수필이다. 이 수필에서 ‘다리’는 섬을 육지로 만들어준 다리, 탈주의 선으로서의 다리, 어머니와 작가 사이에 서로의 교각이 되어준 다리라는 상징성을 띤다. 따라서 자신의 성장서사의 코드, 도전과 극복 해방의 기쁨 등을 담아낸다. 남해는 ‘내 성장기를 보낸 땅’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섬 남해에서 형제가 많은 집의 맏이로 자랐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어머니의 지원으로 명문 여고로 진학하고 대학을 거쳐 교사로 수십 년을 봉직하면서, 작가가 되고 학문에 대한 탐구심과 도전의식은 중년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조금 늦은 나이에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문학언어치료학이란 학문을 연구한 결과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렇듯 작가의 어머니는 딸이 섬을 벗어나도록 했고, 중년 이후에 과감하게 선택한 학문의 길이 새로운 세계로의 끊임없는 다리로 이어지게 함으로써 성공의 계기가 되었고, 작가가 푸른 꿈을 펼치게 되는 해방의 기쁨이 되기도 한 것이다.
섬에서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 하나하나에는 작가가 욕망의 주체,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자유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연결고리 역할이 있다. 섬이 섬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섬이 된 것처럼 남해에서 진주로, 부산으로, 서울로 이어지는 학업의 연속과 확장을 상징한다. ‘바다는 가늠할 수 없는 힘으로 일렁인다. 주눅들만도 하건만 교각은 굵은 몸통을 곧게 편 채로 의젓하기만 하다’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이 알아주는 작가가 되고, 교수가 되어 작가 자신의 인생에 거센 파도가 밀려와도, 곧게 서 있을 수 있는 다리가 되어 삶의 주체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 수필은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다리를 건널지, 구경만 하고 도로 갈지, 아니면 먼 거리에서 일별만 할지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다’라는 대목은 펼쳐지는 인생의 상황들 앞에 공부와 학문을 통해 길러진 자신감과 인격적 성숙을 나타낸다. 이는 다리를 하나하나 건너면서 탈주의 선을 그렸던 결과일 것이다. 다리를 받쳐주는 교각이 있음으로 다리가 그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처럼 예전에는 어머니가 작가를, 지금은 작가가 어머니를 받쳐주는 교각이 되고 있다. 역전된 역할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어머니가 딸에게로 딸의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따뜻한 마음, 서로를 지켜주고 싶은 교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모시고 다리 위에서 바다를 보고 싶었다.’‘기억이 심하게 무너졌는데도 순간의 체험을 즐거워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리신다.’와 같은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어머니는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쇠잔해졌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 또한 애잔하지만 단단한 마음이다. 어머니가 아파서 안타깝지만 작가는 ‘슬픔’ 이나 ‘아픔’ 이라는 단어들 대신 유한한 시간을 받아들인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부는 다리 위에서 어머니의 목도리를 다시 묶어 드리는 장면에서 작가가 어머니의 든든한 교각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독자는 읽을 수 있다. 젊은 날 작가에게 더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치라고 맏딸의 든든한 다리가 되어 주셨던 어머니와,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잘 모시는 큰딸인 작가는, 삶의 무게를 지탱해 주고, 인생의 짐들을 견디게 하는 튼튼하고 따스한 서로의 교각이다. ‘잠깐 옛날 생각이 나신 것일까. 이제 그만 쉬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당부에 눈물’을 쏟아내는 작가 당대적 상황에서 남성중심주의가 뿌리 깊은 남해라는 보수적인 섬동네에서 딸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든 어머니가 있어서 오늘의 자신이 있었음을 떠올린 것이다. 이 성장서사는 작가로서 어머니에게 바치는 감사의 노래라 하겠다.
민간시설도 아랑곳없었다. 병원이나 학교까지 폭격하고, 금지된 소이탄까지 사용되는 전쟁의 참상을 보며 세상 어떤 미담을 들이대도 인간이라는 존재에 자부심을 얹기 어려울 것 같다. 무슨 권리로 타인의 삶을, 타인의 목숨을 제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전쟁은 죽음의 행진이다. 인간 탐욕의 더러운 배설이다. 석류알처럼 고르게 함께 다독이며 사는 세상은 동화 속에나 있는 허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무기의 전시장이 되고, 실험장이 되어버린 비극의 땅, 우크라이나에 마지막 화염이 꺼지는 순간을 고대하며 비닐봉지에 고인 석류즙을 따른다. 사붉은 음료 한 잔이 지구별이 흘린 피눈물 같다.
이르핀의 다리는 석류 껍질이다. 껍질이 뜯겨나간 석류알은 조금의 억눌림에도 터지고 마는 연약한 생명이다. 찢겨진 껍질 속에서 피 흘리는 저들을 지켜낼 보호막은 과연 무엇일까. 비극의 끝을 사람들은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밥 딜런의 노래가 전파를 타고 있다. 그가 내 질문에 답하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대포알이 날아야 Yes,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영원히 포탄이 금지될까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 <석류알 같은> 중에서
문학의 묘미는 전이, 치환, 변용의 미학에서 나온다. 가끔 작가가 언어유희를 통하여, 낯설게 하기를 하면, 수필의 맛을 더 낼 수가 있다. 위의 수필도 이중구조가 숨어있다. ‘사붉은 음료 한 잔이 지구별이 흘린 피눈물 같다.’ ‘이르핀의 다리는 석류 껍질이다.’에서 볼 수 있듯이, ‘사붉은 석류 음료’를 ‘지구별이 흘린 피눈물’로, 폭탄 투척으로 파괴된 ‘이르핀의 다리’를 ‘석류껍질’로 변용하여, 전쟁의 참상을 자극적으로 묘파한 한 언술전략이 매우 돋보인다.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제시되는 근원영역은 일상적으로 보아온 낯익은 사물에 신선한 감각을 부여한다. 이렇게 전이된 어휘는 기존 언어가 제시하기 힘든 미적 사유와 감정을 전달한다. 따라서 ‘이것’을 ‘저것’으로 치환하는 작업은 대상의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게 된다. 전이가 없는, 본 것 위주로의 사실적 언술은 전형성을 띤 장면을 포착함으로써 상투성이라는 한계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시지각 안에 들어온 주변의 익숙한 장면을 손쉽게 포착한 뒤, 별다른 고민없이 그것을 진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장에 맛을 내려면, 송명화 작가의 경우처럼 관찰, 수사, 시선의 새로움을 변용하는 기법을 통해 기존의 낡은 감수성과 감각으로부터 탈피해야 할 것이다.
이 직품은 매우 전략적으로 쓰여져 짜임새 있는 구성과 적발과 직시, 사회적 발언이 설득력있게 전개되어 감동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예리한 진단과 증언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작가의 여망을 문학적 담론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하겠다. 작가는 ‘이르핀의 다리’란 제재를 통해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대두되고 있는 생명 경시 현상과 강대국의 약소국 침략이라는 반문명적 저급한 전쟁유발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 있다. 전쟁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한마디, ‘세상 어떤 미담을 들이대도 인간이라는 존재에 자부심을 얹기 어려울 것 같다. 무슨 권리로 타인의 삶을, 타인의 목숨을 제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작가의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가 강한 설득력으로 다가오는 건 침략의 근거가 너무나 터무니없기 때문이 아닌가. ‘밥 딜런의 노래가 전파를 타고 있다. 그가 내 질문에 답하는 것일까.’라는대목은 주제의 간접화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정서의 상징화에 많은 도움이 된다. ‘노래가사’는 일종의 상징으로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이처럼 이중 층위를 통한 현실의 재경험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한다. 문학은 이처럼 의미발견, 의미부여에 의해서 생명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언제가 떨어져야 할 시점인지 고대하고 있었을까. 차갑고 상쾌한 바람을 맞이하고자 오랫동안 준비했음에 틀림이 없다. 흠뻑 맞아도 옷이 젖지 않는 비, 맞을수록 행복해지는 어엽비를 나는 축제처럼 즐긴다, 우아하게 낙하하여 대지를 만나고 온몸을 떨며 반가움의 인사를 나눈다. 허물어져 내린 돌담도, 금간 기왓장과 물 괸 오지장독도 토닥토닥 따스한 위로를 입는다. 추한 곳, 젖은 곳 가리지 않고 살며시 가려주고 다독여주는 비, 바라만 봐도 마음을 편히 내려놓을 수 있는 아늑함까지 선사하는 빨간 낙엽무리들을 본다. 사람도 떠날 때에 저리 아름다울 수 있을까. 자신이 내리는 곳이 어디든 저리 미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정 꽃보다 아름답다 할 수 있으련만.
- <어엽비> 중에서
이 수필집의 마지막에 자리잡은 <어엽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에 놓일 작품이라면 일단 보통의 작품이 아닐 것이고, 제목이 요상하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비가 아닌가. 요즘 양자역학이 공중부양되고 있는데, 양자역학이론을 이 수필의 이중구조화전략에 응용해서 풀어내어 보고싶은 욕심이 생긴다. 고전역학의 핵심이 미래예측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면,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는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수필의 창작전략도 제목이나 발단부 전개부를 읽고 내용을 미미 다 알아버리면 안 된다. 결말부까지 읽고나서 메시지를 파악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양자역학의 불확실성의 원리는 수필의 귀납추리 형식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문학의 주이야기, 글감 하나로 글을 쓰면 단순구조라서 복잡성을 갖지 못하고, 스토리 정도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예술성이란 복잡한 구성에서 나온다.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쓴 문학이 감동을 견인하는 문학성을 가지려면 하나의 이야기를 덧씌워 이야기를 이중구조로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의 이야기가 입자라면, 여기에 파동을 덧씌워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물질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빛은 알갱이면서 파동이다. 빛의 이중성을 수필의 구조에 적용시켜 보자. 즉 수필의 이중성이란 원자와 전자의 관계이거나, 입자이면서 파동으로 이해된다. 송명화의 <어엽비> 는 그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진정한 울림을 주려고 한다면, 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방법을 써서 감동을 창출해야 한다. 질 좋은 작품은 독자의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그의 정서와 사상을 고양시킨다. 독자의 문학적 상상력은 소재로부터 발생한 기본적인 이미지의 울림, 그것을 미지의 세계로 도약시키는 역동적 이미지의 울림, 그 역동적 이미지를 궁극적 보편적 가치의 세계로 이끄는 초월적 이미지의 울림으로 위계화되는 것이다. 장 피아제에 의하면, 구조라는 것은 전체성과 변형성, 자기 조정성을 본성으로 갖는 구성요소로, 상호간의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방식이라 할 수 있다. 송명화 수필의 본격성은 구조로부터 나오고, 수필 텍스트가 주는 감동은 미적 울림을 극대화시킨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구조화 작업이 곧 미적 울림의 창조원리라는 등식이 성립된다고 하겠다.‘땅 위에 눕는 순간까지도 삶은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몸짓으로 말하는 고귀한 잎들’을 작가는 ‘어엽비’라 명명한다.이야기의 구조화 방법으로부터 미적 울림을 창조하는 원리는 스토리를 이중층위로 변형시키는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수필의 쾌미는 ‘사람도 떠날 때에 저리 아름다울 수 있을까.’에 놓여 있다. 작가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선택한 ‘낙엽비’를 ‘아름다운 마지막’으로 변용시켜서 수필의 주제를 우회적으로 간접화한 정략이야 말로 압권 중의 압권이다. ‘언제가 떨어져야 할 시점인지 고대하고 있었을까. 차갑고 상쾌한 바람을 맞이하고자 오랫동안 준비했음에 틀림이 없다.’는 대목은 상상력의 극치를 자아낸다.
Ⅳ.
수필의 파동성은 전이, 치환, 변용의 미학으로 빛나는 시적 언술의 양상에서 도출되는 성질이다. ‘이것’을 ‘저것’으로에서 ‘저것’에 해당하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에서 ‘보조관념’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감정’보다 ‘미적 정서’요, ‘이야기’보다 ‘플롯’에 해당하는 화자의 ‘전략적 표현’이다. 문학의 원리는 메타포의 원리다. 변용, 전이 치환의 미학은 감동의 바로미터다. 중층구조를 갖는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표층차원에서 작가가 수행해야 할 과제는 심층차원에서 획득한 제재의 성찰결과를 감동적인 이야기질서로 이중구조화하는 일이다. 한국현대문학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문제는 제재의 통찰 결과를 미적인 이야기로 이중구조화, x축과 y축으로 이원화하는 이야기 배열작업에 대한 무관심이라 하겠다. <산중의 악사>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 <반와> <개못생겼다> <석류알 같은> 등의 송명화 수필에 나타난 서사의 미적 구조화에 대한 결과는 곧 작품의 미학성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작가들의 이중층위 전략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송명화의 수필 세계는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를 그 특징으로 하며 비평의 렌즈를 번뜩이면서 작가 자신이 직접 네거리로 뛰어나가 여성의 문제를 목이 터지게 외치는 그런 지성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야기의 미적 배열은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이끄는 의미구조의 생성원리일 뿐만 아니라, 주제를 형상화하는 미적 원리라는 점에서 송명화 교수 수필에서 감동전략의 핵심을 차지한다. 송명화는 같은 시대의 대다수 여성수필가들과 달리 인식을 통한 수필 쓰기가 창작의 바탕을 이루면서 탄탄한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녀의 수필 속에서 부드러운 감성과 예리한 지성이 교직되고 있음을 발견해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부산문화재단의 지원금으로 엮어내는 수필집 한 권에 영광이 있기를 기대한다. 항상 미래를 보고 걷는 자의 발끝에서 역사는 이루어지는 법이다. 의리와 신뢰를 바탕으로 차이와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세로 헌신하여 에세이문예 주간으로서 소임을 다하면서 좋은 수필 쓰기를 위한 이론서도 발간하고 꾸준히 수준높은 수필을 써나가는 송명화 교수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자발적으로 송명화론을 썼고, 송명화 수필 연구서를 낼 정도다. 이번에는 청탁에 의해 다시 송명화 수필세계를 거칠지만 양자역학이론과 수필시학에 기대어 살펴보았다. 나는 서평을 마치면서 입자와 파동이란 이중구조를 통하여 문학적 성취를 견인한 송명화 교수의 본격수필 생성전략이 매우 돋보였다고도 말해주고 싶다. 가장 형상화가 잘된 부분을 결말부로 돌려 지배적 정황을 더욱 강화하거나 ‘주제의식’의 국면을 이미지로 재현해서 보다 더 울림이 큰 감동을 전달할 수 있게 한 것도 바람직하다. ‘제재’의 의미를 철학적인 의미에 얹어 이미지로 묘사했기에 미적 감각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고 본다. 송명화 수필의 우수성은 바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주제의식을 형상화한 것에서 찾을 수 있겠다. 송명화 수필은 지배적 정황으로 제시된 보조 자료에 힘입어 기존의 언어가 제시하기 힘든 미적 사유와 감정을 전달한다. 수필을 읽으면서 제목에 담긴 함의를 독자들이 생각해 보는 것도 송명화 교수의 수필을 읽어내는 멋이라고 생각한다. 수필을 쓰는 자각들에게 많이 읽혀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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