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로 유명한 광시를 거치고
외가쪽 조상인 조극선을 모신 예산 도산서원을 찾았다
조극선 선조는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 조곤(趙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흥무(趙興武)이고, 아버지는 조경진(趙景璡)이다.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진사 이치림(李致霖)의 딸이다. 박지계(朴知誡)·조익(趙翼)의 문인으로, 처음에는 이명준(李命俊)을 사사하였다.
사실 도산서원은 포저 조익과 관련한 곳이다
조극선 선조가 조익의 문인이라 같이 배향을 하였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조익의 신도비가 먼저 맞이한다
서인의 종주였으니 송시열의 찬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해평 윤두수, 윤근수의 후손인 윤용구가 전서한 것으로 봐서 조선말 또는 일제강점기에 세운 듯 하다
다 알다시피 순정효황후의 조선왕조 옥쇄를 빼앗아 적극적으로 1910년 경술국치를 통과시킨 이가 황후 백부 해평윤씨 윤덕영이다 그러나 윤용구는 그 위 항렬인데 작위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성역화하려 했는지 현재보다 더 광범위한 유적지 안내도가 사당 앞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전시관만 홀로 으리번쩍 위치해 있지만 인적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된 듯 굳게 닫혀있다
부총리 조순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포저 조익은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존재(存齋). 오위도총부부총관 조안국(趙安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조간(趙侃)이고, 아버지는 중추부첨지사 조영중(趙瑩中)이다. 어머니는 찬성 윤근수(尹根壽)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윤근수의 문인이다.
그나마 윤근수의 학문보다 장현광의 학문이 같이 녹아들었기에 서인이지만 그의 문인들은 노론보다는 소론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조익은 한성부우윤·개성부유수·대사간·이조참판·대사성·예조판서·대사헌·공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대동법(大同法)을 확대하고 관리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636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자 종묘를 강화도로 옮기고 뒤이어 인조를 호종하려다가, 아들 진양(進陽)에게 강화로 모시게 했던 80세의 아버지가 도중에 실종되어 아버지를 찾느라고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호란이 끝난 뒤 그 죄가 거론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지만, 그 까닭이 효성을 다하고자 한 데 있었고, 또 아버지를 무사히 강화로 도피시킨 뒤 윤계(尹棨)·심지원(沈之源) 등과 함께 경기 지역의 패잔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며 입성하고자 노력한 사실이 참작되어 그 해 12월에 석방되었다.
이후 1655년 3월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기까지 우의정·좌의정과 중추부 판사·영사의 자리를 거듭 역임하였다. 윤방(尹昉)의 시장(諡狀) 사건에 관련되어 몇 개월 동안 삭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대체로 무난하게 벼슬 생활을 하면서 김육(金堉)과 함께 대동법을 확장, 시행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각종 폐막(弊瘼)을 개혁하는 데에도 전념하였다고 한다
조익의 묘 아래에는 조익의 부모인 조영중과 해평윤씨의 묘가 있다
입수가 S자로 변화무쌍하게 들어와 부모의 묘가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어쨌든 조익의 3자 조복양에 이어 그의 딸들로 이어지며 대제학을 배출하게 된 명당이란다
왠일로 사당 앞에 절에서나 봄직한 석탑을 가져다 조성해 놓았다
유구를 거쳐 온양으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