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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길-12회차(천왕봉-성삼재)
글쓴이 : 미스터리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나무에 흑심을 품지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 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전문. //
1. 지난 곳/시간. 2005. 5/13~14.
성삼재 (3:29분 출발)
~코재 (3:43), 화엄사 갈림길.
~노고단산장(3:52)
~노고단 (4:00)
~돼지평전(4:08)
~헬기장1 (4:25)
~헬기장2 (4:32)
~피아골갈림길(4:41)
~임걸령 (4:47/4:50)
~노루목 (5:12), 반야봉 갈림길.
~무덤 (5:21)
~삼도봉 (5:25)
~화개재 (5:44), 뱀사골 갈림길.
~토끼봉 (6:07)
~명선봉 (6:51)
~연하천산장 (6:57/7:27), 아침식사.
~삼각봉 (7:36)
~형제봉 (7:56)
~벽소령대피소 (8:29/8:37)
~신벽소령 (8:53), 음정 갈림길.
~선비샘 (9:06)
~전망바위 (9:43/9:48)
~칠선봉 (9:57)
~영신봉 (10:31), 낙남정맥 분기점.
~세석산장 (10:41/10:55), 간식. 거림 탈출로.
~촛대봉 (11:10)
~삼신봉 (11:30)
~연하봉 (11:53)
~장터목 (12:08/12:19), 점심식사. 백무동,중산리 갈림길.
~제석봉 (12:35)
~천왕봉 (오후 1:05/1:15)
~법계사 (2:04/2:08)
~칼바위 (2:56)
~중산리매표소 (3:16)
- 총 11 시간 47분.
2. 이동 거리.
성삼재~노고단: 3.5km.
~돼지평전 : 2.23km.
~임걸령 : 1.05km.
~삼도봉 : 2.15km.
~화개재 : 0.75km.
~토끼봉 : 1.25km.
~연하천 : 2.95km.
~형제봉 : 2.05km.
~벽소령산장 : 1.3km.
~선비샘 : 2.55km.
~칠선봉 : 1.5km.
~세석산장 : 2.0km.
~촛대봉 : 0.6km.
~연하봉 : 1.86km.
~장터목 : 0.8km.
~천왕봉 : 1.6km.
~법계사 : 1.98km.
~중산리 : 3.25km.
- 총 33.37 km. (포항 셀파산악회 실측자료 참조.)
3. 12 회차.
(성삼재~연하천산장), 13.88km. (3:29/7:27)
반년만에 다시 성삼재에 선다.
지난 가을 가을빛 깊은 이 곳 다녀 간 후, 겨울 넘겨 새 봄에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롭다.
고개를 넘는 바람도 훈기가 있어 높은 고갯길임에도 새벽바람이 차지 않다.
이곳 도착은 2:30분이었으나 야간산행은 금지하고 3:30분에나 출발이 가능하다 한다.
억지로 한 시간 잘 요량으로 차 속에서 둥싯거려 보지만 공연히 눈만 뻑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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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姓三재
姓三재는 이름의 유래가 분명치 않은 고개이다.
지금 같이 지리산 관통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지리산 산행은 주로 화엄사에서 코재로 올랐으니 구지 성삼재에 대해 관심 갖는 이도 많지 않았다.
예전 부족국가 시절인 삼한시대에 마한, 진한, 변한 삼국이 한 반도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과 가야의 강성으로 이들 부족국가는 멸망의 길로 닫게 된다.
그 시절 이 곳 남원의 세력권이 마한이었는데 마한의 효왕은 백제에 밀려 이 곳 달궁(성삼재에서 대정,인월로 넘어가는 길목)에 宮을 짓고(달-月-의 궁전) 이 곳으로 들어오는 전략요충지인 고개를 鄭장군과 黃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고 한다.
이 때가 BC84년이었다.
이 때 鄭장군이 지킨 고개가 鄭嶺峙, 黃장군이 지킨 고개가 黃嶺峙였다고 西山대사가 쓰신 淸虛堂集 黃嶺庵記에 적혀 있다는데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나?
八良峙는 여덟 명의 군사가 지킨 고개로, 姓三재는 세 姓받이 장수들이 지킨 고개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장수들의 노력도 허사가 되고, 삼국사기에는 결국 마한은 백제에 병합되는 운명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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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을 기다려 오늘의 대장정 천왕봉을 향해 출발한다. (3:29)
어두울 때는 걷는 일밖에 달리 할 일이 없는지라 어두운 동안 많이 가기로 한다.
오늘의 갈 길이 로스 없이 정코스로만 걸어도 장장 34km 장거리이니 단단히 마음 먹어야 한다.
이름도 재미 있는 코재를 지난다. (3:43)
성삼재에서 출발할 때야 코재의 의미가 와 닿지 않으나 화엄사에서 올라 와 보면 이 고개의 이름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지난 해 여름, 화엄사에서 올라 온 적이 있는데 하루 묵어 갈 댓 명분의 먹거리를 메고
올라 온 이 길은 코가 땅에 닿을 듯 가파르고, 코 빠지게 뺑뺑이를 친 고개였다.
오늘은 가벼운 배낭 달랑 메고 성삼재에서 가니 여엉 코재가 아니다.
큰 길을 버리고 지름길로 오르니 노고단산장이 나타난다. (3:52)
산장은 어둠에 묻혀 고요하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 곳에서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돌길을 밟고 노고단으로 오른다. (4:00)
노고단 봉우리는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여 있어 매번 바라만 본다.
이 곳에는 地母神께 제사드리는 제단(老姑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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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老姑壇
신라시대에는 성 스러운 다섯 산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곳 지리산은 五岳 중 南岳으로 박혁거세의 어머니 仙桃聖母를 산신으로 노고단에 제단을 쌓고 제를 지냈다 한다.
그 후, 고려조에는 왕건의 어머니 威肅王后를 산신으로 모셨는데 장소는 천왕봉으로 옮겼다 한다. 이 후 지리산의 스포트라이트는 천왕봉으로 이동하게 된다.
老姑(老 마님)라는 이름이 ‘선도성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 곳곳에 ‘노고산’ 또는 ‘老姑城’이라는 지명이 많은 것을 보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덕유산의 할미봉도 한자화해서 읽으면 ‘老姑峰’이다.
그 이유를 이렇게 추론하는 이들이 있는데 타당성이 매우 높다.
옛날 자기 사는 곳 기준으로 큰 산을 ‘한(큰) 뫼(산)’라 했다.
이 한뫼가 세월이 가면서 할매, 할미처럼 들리게 되고 본래 어원이 큰산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후세 사람들이 한자로 지명을 쓰려다 보니 할매=老姑. 이렇게 기록하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이 나라 곳곳에 노고산이 많은 것 같다.
지금 이 산행기를 정리하고 있는 내 눈에도 창문 넘어로 서강대학 뒷산 노고산이 보인다.
문득 지꿎게 질문 하나 던져 보고 싶다.
노고단, 당신의 이름은 ‘한뫼壇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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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을 빗겨 팔부 능선길로 들어 선다.
이제부터 길고 긴 지리산 종주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길은 잠시 평탄한 흙길이 나오더니 그 새를 못 참고 돌 섞인 길로 변하기 시작한다.
지리산처럼 편마암산은 세월에 풍화되면서, 바위결에 따라 細石平田의 작은 돌부터 큰 바위에 이르기까지 부서져 내린 돌과 바위들이 널려 있어 발목과 무릎에 부담을 주게 된다.
더욱이 이런 길을 30여 km나 가려면 무엇보다 발목과 무릎을 보호해야 한다.
어디 하루 이틀 쓰고 버릴 무릎이더냐?
무릎은 기계의 베어링과 같아서 마모되는 소모품이니 아껴쓰고 사랑해 주어야 한다.
건방떨지 말고 조심하리라, 이렇게 마음 다짐하면서 헤드랜턴 아래 비춰지는 길을 골라 간다.
뒤쪽에서 누군가 장난스러운 이야기가 들려 온다.
‘축지법이라도 쓰고 가십니까? ’
이상타.
우리 팀의 불멸의 선두 손승천님이다.
아니 벌써 멀리 내달났는지 알았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다니.
우리가 지름길인 돌길로 올라온 반면 손승천님은 넓은 길로 돌아 온 것이었다.
앞 자리를 비켜주고 우리 페이스에 맞춰 간다.
잠시 후 넓은 고갯길에 닿는다.
돼지평전(돼지령)이다. (4:08)
먹이 찾는 멧돼지가 이 곳에 자생한 원추리 球根을 파먹느라고 자주 땅을 뒤집어 놓아 돼지평전이 되었다 한다.
첫 번 헬기장을 지나고 (4:25), 두 번째 헬기장을 지나니 ( 4:32) 피아골로 내려 가는 길
안내판이 나타난다. (4:41)
피아골이라는 이름이 주는 강렬함이 오래 남아 있다.
가을만 되면 온 관광회사가 ‘피아골 단풍’ 코스로 떠나니 더더욱 ‘단풍’이란 단어와 ‘피’란 글자가 묘하게 결합되어 피(血)가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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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골.
피아골은 노고단과 삼도봉 사이 즉 임걸령 남쪽 골짜기이다.
어떤 이들은 피(血) 자를 연상하여 한국전쟁 당시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로 골자기가 피로 붉게 물들었기에 피아골이라고 그럴 듯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 골자기 이름은 피아골이었으니 맞지 않는 말이다.
第 2설로 가장 많은 이들이 믿고 있고 땅이름도 그렇게 적고 있는 이야기가 이 곳 사람들이 가난을 못 이겨 피(稷)를 심어 연명했기에 한자로는 피밭(稷田)이라 쓰고 지도에도 직전이라고 적고 있는 說이다.
이 것은 우리가 언젠가 가야 할 대간길 태백시 피재(稷峙)도 똑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배고파 허기를 면하려면 고구마나 감자, 하다못해 수수나 강냉이를 심을 일이지
좁쌀보다도 더 잘은 새 모이 피를 심을 이유가 없다.
또 피를 심은 흔적도 없다.
우리 말에 ‘빗’, 또는 ‘비앗’은 비스듬한 모양새를 나타내는 말이다.
쉽게 보면 빗금(斜線), 씨름에서 빗당겨치기와 같은 예이다.
이 골자기는 비탈진 비스듬한 골이어서 ‘비앗골’이었는데 세월이 가면서 비아골이나
피아골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도 안동, 영덕, 승주 등지에 비아골, 비앗골로 불리는 곳이 여럿 있다 한다.
그러고 보면 피아골은 그냥 ‘비탈진 골’일 뿐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그런 곳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피아골에 또 하나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는 種女村에 관한 것이다.
이 곳에는 예전 씨받이 여자들이 모여 사는 종녀촌이 있었다 한다.
아들 원하는 집에 자식을 낳아 주는 일인데, 아들을 낳으면 그 집에 주고 오고
딸을 낳으면 데려다가 다시 種女로 키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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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봉우리를 넘어 목이 마를 즈음 툭 터진 안부, 임걸령에 도착한다. (4:47/4:50)
사시사철 감로수가 철철 넘치는 샘물이 변함없이 뿜어 나온다.
한 컾 그득 마시고 pet병에도 그득 담는다.
이 곳 울타리 너머에는 노란 동의나물 군락지인데 어둠에 가려서인지, 계절이 일러서인지 보이지를 않는다.
이 곳 임걸령은 조선조 명종조에 창궐했던 의적 林傑年의 근거지였다고 한다.
역사의 기록은 없으나 구전되기를 가난한 이들을 도운 도적이었다 한다.
해방 전에는 이 샘물도 임걸년샘이라 불렀다 하는데 이제는 임걸령샘으로 부르고 있다.
구지 발음하기 힘든 年자보다는 임걸령샘이 편하니 그리 되는 것이다.
말이란 편하게 입으로 口傳되다가 어느날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둔갑되고 거기에
전설과 民譚까지 생겨나면 그 때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대간길 가면서 도저히 알 수 없는 고개이름 봉우리 이름은 다 이런 둔갑술을 부린 경우이다.
그러나 구지 찾아서 무엇하리. 전설과 옛날이야기가 더 재미 있는데.
이 곳에서 물 마시고 잠시 한숨 돌리는 순간, 갑자기 뒤 따라온 몇몇 분이 쏜살같이 치고 나간다.
저 기세로 보아 오늘 일낼 게 분명하다.
나도 뒤를 따른다.
그러나 이미 꼬리도 보이지를 않는다.
아서라, 내 페이스를 지키기로 마음 먹는다.
이제부터 힘든 길이 시작된다.
노루목 오르는 길은 그 언덕 하나로 보면야 아무것도 아니나 긴 여정에서 본격적인 언덕오름으로 볼 때는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다.
땀 좀 내고 나니 노루목에 도착한다. (5:12)
반야봉의 지세가 피아골로 내려오다가 이 곳에서 잠시 멈춘 것이 노루가 고개를 들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노루목이라 부른다 하기도 하고,
노루사냥에서 몰잇군들이 노루를 몰면 포수는 총쏘기 좋은 길목에서 대기하는 것인데
그런 연유가 아닐까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땅이름을 연구하시는 선생님들 말씀은 이런 말은 다 맞지 않고 다른 어원에서 왔다고
하는데 국어시험 볼 일도 없으니 그냥 넘어 간다.)
이 곳에서 좌로 오르면 般若峰이다.
지난 여름 다녀 갔기에 먼길 갈 오늘은 힘 아끼고 그냥 통과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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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般若峰
지리산의 봉우리는 우리나라 어느 산에 비해도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산의 봉우리 이름은 불교, 도교적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지리산만은 특이하게 한국의
土俗信仰, 民俗信仰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 중 예외인 것이 般若峰으로 불교적 이름이다.
般若란 모든 法의 진리를 아는 智慧라고 한다.
하지만 지리산의 반야는 男神의 이름이다.
지리산에는 男神 般若와 女神 痲耶姑가 딸 여덟 낳고 알콩달콩 사셨는데 남신 반야께서
무엇에 씌웠는지 반야봉에 파뭍혀 공부삼매에 빠져 들었다.
아무리 세월이 가도 반야는 돌아 오지 않고, 반야가 그리운 여신 마야고는 미칠 지경이었다.
마야고는 반야가 돌아오면 드리려고 옷을 지어 가지고 있었는데 달빛 밝은 어느 밤
반야가 손짓하며 다가 오지 않는가.
너무 기쁜 마야고 달려 갔는데 반야는 없고 쇠별꽃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실망한 마야고, 옷을 찢어 바람에 날렸는데 이 것이 지리산 風蘭이 되었고, 거울처럼
들여다 보던 못(池)도 메워 버렸다.
(이 못의 뒷 이야기는 장터목에서 드리도록 하겠음.)
한편, 이 神들의 여덟 딸은 8道로 흩어져 8도 巫堂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 巫俗의 뿌리는 지리산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한편, 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佛法 최고의 지혜인 般若가 무당의 아버지이니 마음 편치
않을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마음 쓴다면 별일도 아니다.
한국의 巫俗만큼 넉넉한 것이 없으니 일찌기 중국의 관운장도 융화시켜 巫俗神으로
섬겨 왔고, 최근에는 맥아더 장군도 한국 巫俗神으로 융화되었으니 우리의 巫俗은
블랙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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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목에서 내려 가는 길은 너덜길이다.
이제 어둠이 가시기 시작하니 길이 조금씩 밝아져 다행이다.
지나는 길목에 무덤이 하나 있다. (5:21)
이 곳이 1400m 대의 고지인데 어떻게 이 곳에 묘를 썼는지 不可解하다.
우리 조상들의 명당에 대한 염원은 참으로 끈질긴 것이었다.
이 정성 보아 후손들 발복하게 하옵소서.
작은 오르막 하나 오르니 三道峰이다. (5:25)
1896년 고종 33년 도계를 南道와 北道로 나눌 당시 새롭게 생겨난 3道(전라남도,전라북도,경상남도)의 분기점이다.
(또 다른 두 개의 삼도봉은 대간길- 7 회차,(빼재~부항령) 참조. )
이 곳에서 바라보는 불무장등 능선은 구례군 토지면과 하동군 화계면을 가르면서 뻣어나가는데 운무에 싸인 지리산의 산록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어둡더라도 사진을 한 장 찍어 둔다.
잠시 호흡을 고른 후 花開재를 향한다.
이 곳에서 화개재에 이르는 길은 오늘 종주코스 중 중늙은이 무릎 잡는 코스의 시작이다.
끝없이 내려 가는 층계길은 털컹털컹 무릅을 압박한다.
다행히 잘 다듬은 나무계단이라 그나마 위안이 되나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오죽했으면 내 친구 모모씨는 이 계단의 숫자를 세어 기억하고 있을까.
계단 옆 언덕에는 산딸기와 얼레지가 많다.
딸기 익는 철에는 꽤 입맛을 돋울 듯하다.
드디어 화개재이다. (5:44)
이 고개는 전라도의 운봉, 산내면 농산물과 경상도 화개면, 섬진강의 물산이나 소금, 해산물의 物産 이동 통로였다 한다.
북쪽 산내, 운봉, 인월, 남원으로 내려 가는 계곡의 이름도 유명한 뱀사골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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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사골
땅이름학자는 달리 하실 말씀이 많으나, 이야기로 뱀사골을 집고 넘어 가려 한다.
뱀사골은 뱀이 들끓어 뱀사골이라 하기도 하고,
계곡이 구불구불 뱀처럼 뻗어나가 뱀사골이기도 하고,
그 옛날 이 골짜기에 배암사란 절이 있었다 해서 뱀사골이기도 하다는데,
또 다른 전설이 있다.
골자기 아래 고을 반선에 송림사란 절이 있었다.
이 절에 내려 오는 전설에 다른 불제자의 본보기가 될 만한 승려가 칠월칠석날 지극정성 기도하면 신선이 되어 구름타고 仙界로 간다고 했단다.
그래서 매년 칠월칠석날 영광의 승려를 뽑았다.
조선조 선조 때 西山大師가 이 이야기를 듣고 송림사를 찾았다.
대사는 영광의 승려 옷에 몰래 비상(독약)을 넣어 신선대에서 기도하게 했다.
다음날 아침 신선대에 가 보니 커다란 이무기(용이 못 된 뱀)와 승려가 함께 죽어 있었다.
이후로 이 골짜기는 뱀이 죽었다 해서 뱀사골, 이 승려는 반만 신선이 되었다 해서 고을 이름을 반선이라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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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전설을 뒤로 하고 다시 봉우리를 오른다.
키 큰 나무들은 사라지고 관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진달래와 철쭉 군락지이다.
진달래는 끝물이라 꽃이 많이 졌는데 고도가 높아 기온이 낮다 보니 꽃색깔이 짙은 자주에 가깝다. 아름답다.
자연은 역경을 이겨낸 피조물에게는 그 보답을 하는 것 같다.
철쭉은 아직 봉오리만 맺고 있고 간간히 개화한 연분홍이 수줍다.
토끼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토끼봉에 도착한다. (6:07)
이 峰의 이름은 반야봉의 正東쪽에 있어서 토끼봉이라 했다고 모든 지리산 관련자료에 씌여 있다.
산이름을 방위를 따져서 붙이는 예는 없었던 것 같은데..
陰陽五行에서 12地支는 子쥐, 丑소, 寅호랑이, 卯토끼, 辰용, 巳뱀, 午말, 未양, 申원숭이, 酉닭, 戌개, 亥돼지를 말하는데,
여기서 子(쥐)를 正北 방향으로 하고, 이어서 右로 30도씩 돌아가면서 방향을 정한다.
그러니 세 번째인 卯(토끼)는 正東이 되고, 해가 正南에 오는 시각을 正午라 하고
닭은 酉이니 서쪽이 된다.
점쟁이가 南方을 조심하라든지 西方에 귀인이 나를 도운다 한다든지 이런 것은 다 달력에 있는 일진과 나를 연관지어서 卯와 관련 있으면 東方, 午와 관련 있으면 南方,
酉와 관련이 있으면 西方.. 이런 식으로 점을 쳐 주는 것이다.
만일 이런 이론이 맞는 것이라면 우리의 지리산 종주는 東쪽(卯方)으로 진행했으니
우리 일행 중 이 날 卯와 일진이 맞지 않는 이가 있었다면 컨디션 꽝이었을 것이고
잘 맞는 이가 있었다면 날개 단 듯 날았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런 것인데 토끼봉은 반야봉 동쪽(卯方)에 있어 토끼봉이 되었다 하니
재미 있는 이름이다.
특징없는 능선과 봉우리들을 지난다.
1463 무병봉을 지나 총각샘 내려가는 길도 지나 명선봉으로 향한다.
총각샘은 산약초꾼들만 알고 있던 샘이었다는데, 1970년 진주 지리산산악회에서 이름을
붙이고 알렸다 한다.
그러나 표지판도 없는데다가 번번히 물이 말라 이용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산 너머에 연하천이 있는데 구지 여기서 수고할 일은 없다.
얼레지군락을 통과하여 땀흘려 명선봉에 오른다. (6:51)
이동간에 숨 한 번 고르고 연하천으로 내려 간다. (6:57/7:27)
煙霞泉은 진주 지리산산악회의 前身인 煙霞伴이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한다.
우리가 갈 길, 장터목 넘어 煙霞峰도 마찬가지라 한다.
지리산의 고마운 점은 천 몇백 고지 능선에 샘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지나온 임걸령, 이 곳 연하천, 세석은 언제나 넉넉한 물을 베풀어 주어 늘 우리 마음 부자 되게 해 준다.
함께 진행해 온 이형석님과 김밥 한 줄, 삶은 계란 하나씩으로 아침을 먹는다.
아까 임걸령에서 치고 나간 이들의 소식이 궁금하다.
아니 식사들도 안 하셨나?
최소한 이곳 연하천에서는 느긋이 휴식의 한 때를 즐기고 있으리라 생각한 우리의 짐작은 헛것이 되고 이 분들 오늘 기록에 도전하는가 흔적이 없다.
이 때 사진 찍어 주느라 뒤에서 진행하던 고영식님이 오신다.
함께 휴식을 즐긴 후 길을 떠난다. (7:27)
(연하천~세석산장), 9.4km. (7:27/10:41)
배도 든든하고 물도 충분히 준비하니 기분이 새롭다.
연하천 주변에는 물이 많아 1400수준의 이 고지대에 습지처럼 물이 고이고 흐르는 곳이 있다.
따라서 꽃도 많고 식물의 분포도 많은 것 같다.
주변에는 주목도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삼각봉에 도착한다. (7:36)
이 봉을 중심으로 해서 남원시 산내면, 함양군 마천면, 하동군 화개면이 접하고 있다.
이 곳이 소위 ‘피의 능선’이 시작하는 봉우리이다.
봉우리는 그 옛날 민족상잔의 핏빛을 잊은 채 신록이 푸르기만 하다.
길은 너덜길이다.
이윽고 형제봉에 도착한다. (7:56)
형제봉에서는 형제처럼 생긴 바위를 찾을 수가 없다.
정상 넘어 9부쯤 내려 오니 서로 등을 마주 대고 있는 암봉이 아침 햇살을 뒤로 하고 서 있다.
옛날 지리산에 입산하여 도를 닦는 두 형제가 있었다 한다.
인물 좋은 이 두 형제를 지리산녀가 끊임없이 유혹하였다.
형제는 이 유혹을 이기려고 등을 서로 딱 붙이고 꿈적도 안 했는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그대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 한다.
이 형제가 굳어진 바위 사진 한 장 찍는다.
이 딱한 형제님들아, 못이기는 척 한 번 넘어가 주실 일이지.. 어찌 그리 무정하시단 말이요.
공연히 사진 찍는다고, 이끼에 피어 있을 작은 꽃 찾는다고 나 홀로 시간 끌어 보지만
‘福 없는 년은 머슴방에 들어도 고자’라더니 내게 추파던지는 지리산녀는 아무도 없다.
한맺힌 지리산녀의 원한이 만들어 냈는지 이후 갈 길은 커다란 돌과 바위의 너덜길인데
행여 발 잘못 짚으면 발목 삐기 십상이다.
천천히 천천히 늙은이 빙판길 걷듯 조심하면서 간다.
안부가 나타난다. 벽소령(碧宵嶺)이다. (8:29)
이 곳은 빨치산과 토별군 사이, 피의 역사가 있던 곳이니 잠시 쉬어 가면서 피의 능선이라도 짚어 보려 한다.
돌아 보고 싶지 않아도 지리산길 가는 이들은 한 번은 돌아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아름다운 봄 지리산의 그늘에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智異十景 중 하나인 벽소령의 달은 청아함의 극치라 한다.
불행히도 내가 만난 것은 細石明月뿐이었으니 아직 지리산에 한참 더 와야 한다.
이 벽소령에 만월이 뜰 때면 온통 하늘도 푸른 氣를 띠어 碧宵(푸른 하늘)嶺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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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과 벽소령.
때는 1952년 1월이었다.
지리산 일대에서 날치던 빨치산들은 천왕봉, 촛대봉에서 토벌대에 밀려 벽소령 아래 대성골로 밀려 들었다.
이 때를 기해 토벌군은 야포와 비행기 폭격으로 이들을 섬멸하였으니 죽은 자가 300여명, 포로된 자가 250여명으로 빨치산의 반 이상이 괴멸되었다.
여기서 살아 도망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반기를 든 방준표, 박영발 등에 의해 실권도 잃은 채 이듬해인 1953년 9월 벽소령 아래 계곡 빗점골에서 사살되었다.
방준표도 54년 1월 남덕유에서 최후를 맞고, 박영발 또한 뱀사골에서 포위되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빨치산이란 비정규유격대를 뜻하는 러시아語 partizan에서 온 말이라 한다.
이들은 6.25가 발발하자 남노당계 행동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궐기하고, 북한군 패잔병, 아무것도 모르는 노동자 농민들을 꾀어 산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의 최후만큼 철저히 배신당하고 쫓긴 비참한 生도 없을 것이다.
목숨 바쳐 北을 위해 싸운 이들은 휴전협정과정에서 北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하였다.
휴전협정과정에서 北은 이들을 위해 아무런 배려를 하지 않았다.
절저히 이용하고 소모품으로 버려진 것이었다.
그 후 이들은 지리산을 헤매는 위험한 산짐승에 지나지 않았고, 토벌군에게는 제거해야 할 위험한 잔당들이었으니 아무 희망도 없이 쫓겨다녀야 하는 이들의 배신감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55년 4월 1일,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은 정부는 지리산 입산금지를 해제하였고
이 때부터 삶의 터전을 삼는 이들과 산을 사랑하는 이들이 지리산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빨치산이란 단어가 국민의 뇌리에서 잊혀진 1963년 11월 어느날, 신문에 충격적인 기사가 보도되었다.
산청군 삼장면(천왕봉 동쪽마을)에서 마지막 빨치산 李洪伊 사살, 鄭順德 체포 기사였다.
정순덕은 산으로 간 남편을 찾으러 산으로 갔다가 공비가 되었다.
빨치산으로 산짐승처럼 10여년을 살고, 체포 후 20여년을 감옥에서 살다가 출소하여
아픈 몸을 끌며 10여년을 더 살다가 정순덕 할머니는 죽었다.
한 인간으로 무슨 이런 개같은 운명도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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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를 떠난다. (8:37)
길은 이제까지 오던 너덜길과는 달리 잘 닦여진 우마차길 같은 편안한 길이다.
살펴보면 진행방향 좌측으로는 기암들이 서 있고 길은 축대를 쌓아 다듬어 놓았다.
처음 지리산에 왔을 때부터 이 축대가 궁금하였다.
도대체 1400m가 넘는 이 고지대에 무엇하자고 축대를 쌓았을까.
돌아보면 이 축대도 1950년대 초 공비토벌을 위해 낸 작전도로용 축대인 것이다.
함양쪽 마천에서 벽소령으로 오르다가 길이 가팔라 동쪽(덕평봉쪽)으로 틀어 안부에
오르고 여기서부터 축대를 쌓아 벽소령까지 길을 내고, 다시 벽소령을 넘으면 길이
가팔라 동으로 길을 다듬은 후 빗점골 지나 상계사, 화개장터로 내려 가게 길을
뚫었던 것이다.
이제는 차량은 다니지 않고 등산로로 쓰일 뿐이다.
이 길을 좌우로 삼각봉과 덕평봉 가는 길목을 ‘피의 능선’이라 부르는데 이는 빨치산 토벌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지나가는 지리산 종주길 벽소령 구간이 ‘피의 능선’인 것이다.
50 여년 전 그 날의 내력을 알고 있을 이 길은 신록만 푸를 뿐 말이 없다.
작전도로가 동쪽 안부로 올라온 지점(신벽소령, 작은 벽소령)에 닿는다. (8:53)
잠시 평평한 공터인데 길 안내표지에 ‘음정’으로 내려 가는 길임을 알리고 있다.
음정으로 내려가는 길 좌측에 지도에는 1426봉으로 표시되어 있는 무명봉이 있다.
이 봉우리의 꽃이 아름다워 빨치산들은 ‘꽃대봉’이라 불렀다 한다.
다시 돌 많은 길로 접어들면서 덕평봉이 보인다.
종주길은 다행스럽게도 德坪峰에 오르지 않고 우회해 간다.
그러다 보니 한 번도 덕평봉에 올라 본 일이 없다.
덕평봉에서 내려다 보는 지리산 남쪽 연봉들도 좋다는데.. 언젠가는 마음 먹고 올라 보아야겠다.
한무리의 젊은이들이 내 앞에서 진행하는데 어찌나 속도가 더딘지 짜증스럽다.
눈치껏 비켜주었으면 좋으련만 칠팔명이 줄을 지어가니 추월하기도 어렵고 좁은 길에서 앞질러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거기에 맞춰간다.
이윽고 선비샘에 도착한다. (9:06)
눈치도 없는 이들 젊은이들이 지들이 먼저 왔다고 줄줄이 물을 받는다.
허허 참, 같이 산에 다니기 싫은 친구들 같으니라구..
나도 선비샘에서 물을 받는다.
의식적으로 공손히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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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샘에 얽힌 이야기.
1. 덕평봉 아래 상덕평마을에 벼슬 못하고 가난한 선비(일설에는 화전민)가 살았다 한다.
모든 사람에게 대접 받지 못하고 산 이 양반 이 돌아가시자 효자 아들은 돌아가셔서라도
대접 받으시라고 선비샘 위에 묘를 모셨다.
선비샘이 깊다 보니 이 샘에 오는 이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물을 뜰 수가 없었다.
이 선비님 돌아가셔서야 비로서 모든이가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위에 계실 수 있었다.
그런데 무정한 요새 사람들이 축대를 쌓고 파이프를 꽂아 놓으니 무릎 꿇을 일도 고개 숙일 일도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有情한 지리산 산꾼들아, 선비샘에서는 무릎꿇고 두 손으로 물받아 드리면
어떠시겠는가.
2. 林傑年이야기.
임걸령에 자리잡은 임걸년은 선비샘에 와서 자주 놀았는지, 이 곳에서 화전민생활전시장이
있는 의신마을쪽으로 내려가는 곳의 공터가 임걸년이 배타고 놀았다는 ‘임걸년못’ 자리라는 전설을 남기고 있고,
임걸년이 愛馬를 시험하기 위해 선비샘에서 세석쪽을 향하여 활을 쏜 일이 있었다 한다.
말을 타고 힘껏 달려가 보니 화살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화살 하나 못 따라 가는 말이 무슨 말이란 말이냐.
화가난 임걸년은 말의 목을 베어 버렸다.
잠시 후 화살이 날아 왔다.
이 화살과 말의 이야기는 주인공만 바뀔 뿐 우리나라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전설을 남길 수 있는 임걸년이었다면 적어도 똘마니는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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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샘을 떠나 할 수 없이 젊은이들을 추월하면서 언덕 하나 오른 후 안부에 도착한다. (9:32) 안부는 다시 오르기 위한 숨고르는 도움닫기 밭침대이다.
다시 봉우리를 향해 오른다.
바위가 올망졸망 자리 잡은 탁 트인 봉우리에 닿는다. (9:43/9:48)
시야가 트이고 시원한 바람도 분다. 전망바위이다.
여기서 영신봉에서 뻗어 내리는 낙남정맥을 감상한다. 사진도 한 장 찍는다.
한 무리의 남녀 젊은이들이 생선통조림을 먹고 있다.
그 비릿한 냄새가 식욕을 돋군다.
갑자기 김치에 고추장 풀고 생선통조림도 넣어 끓인 찌게에 소주 한 잔 생각이 간절하다
입맛 다시며 전망봉을 내려 오니 잠시 후 길가에 기암이 서 있고 七仙峰이라고 씌여 있다. (9:57)
솔찍이 칠선봉에는 일곱 神仙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다시 긴 길을 걷는다.
나무가 많지 않아 무언가 허전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등성이에 닿은다. 이 곳에는 靈神峰을 알리는 길표지판이 서 있다. (10:31)
철쭉과 구상나무 군락지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등성이가 영신봉에서 洛南正脈으로 뻗어 나가는 출발점이다.
낙남정맥은 이 곳 영신봉에서 분기하여 하동의 동쪽으로 뻗어 내려 南海를 마주 보는
바다끝 금오산, 연태봉까지 이어진다.
어떤 이들은 이 낙남정맥은 정맥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백두대간의 연장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 놓고 있다.
사실 이렇게 되면 덕유산 향적봉이 그렇듯이 지리산 천왕봉이 대간에서 벗어나게 되어 아쉬움이 남으나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반도를 꿰툻고 바다에 닿아 남해의 금산에서 솟구치는 형상이다. (더 나아가 바다로 이어져 대마도에서 다시 솟구친다고 한다. )
세석평전과 촛대봉이 시원스레 보인다.
안부로 내려서 세석산장으로 내려간다. (10:41/10:55)
이 곳에서 물도 다시 보충하고 발바닥 아픈 곳 테이핑도 한다.
(세석~중산리) 10.09km, (10:55/15:16)
촛대봉을 바라 보면서 세석평전을 오른다. (10:55)
지리산 제일의 철쭉군락지 이 곳에는 아직 철쭉 소식 듣기에는 이르다.
져 가는 진달래가 그나마 대간꾼 마음을 달래 줄 뿐, 양지쪽 철쭉은 수줍은 봉오리가 맺혀 있을 뿐이다.
일주일 뒤부터는 만개하기 시작할 듯하다.
그 때가 되면 蓮眞아씨도 많이 바빠질 것이다.
통로를 빼고는 출입금지 되어 있는 평전은 이제 생태복원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철쭉철이면 노고단과 이 곳 세석에는 전국에서 몰려 온 젊은이들의 텐트가 무척 많았다.
우리도 그랬지만, 먹고 난 음식 찌거기는 땅 속에 묻고, 큰일 작은 일도 으슥한 곳이면 OK, 쓰레기도 대충 한 곳에 모아 태우면 되었으니 텐트 있는 곳이면 어디나 피난민촌
같았다.
샘가에 음식 찌거기와 밥알은 또 얼마나 수도 없이 떠 다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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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蓮眞아씨 이야기.
세석에서 거림골쪽으로 내려 가다 보면 영신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에 陰陽水샘이 있다.
이 샘 아랫동네에 연진이라는 아릿따운 아가씨와 乎也라는 젊은이가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았다 한다.
아기를 기다리던 중, 어느날 지리산 곰이 연진아씨에게 넌지시 일러 주었다.
세석고원 아래 음양수가 있는데 이 물을 마시고 산신령님께 기도하면 태기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너무 기쁜 나머지 연진아씨 물만 계속 마시고 기도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사실을 눈치챈 호랑이가 산신령께 고해 바쳤다.
음양수의 신비가 인간세계에 알려진 것을 안 산신령은 대로하였고, 급기야는 곰은 굴속에 영영 가두고, 연진 아씨는 세석돌밭 철쭉을 평생 돌보라는 벌을 받았다.
우리가 세석의 철쭉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다 연진아씨 덕이리라.
또한, 연진아씨는 틈틈이 촛대봉에 올라 촛불 켜고 산신령께 용서를 비는 기도도 드렸다 하는데 기도하던 중 그대로 굳어 촛대봉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산신님은 여신이셔서 이쁜 꼴을 못 보고 샘을 부리셨는가,
한 번 잘 못 용서해 주시지 어찌하여 일생을 사역시키다가 나중에는 바위로 만들어
버린단 말씀인가.
또 하나 재미 있는 것은 이 땅에 사시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곰과 호랑이에 대한
인식이다.
세월은 흘러 지리산 반달곰이 다시 산에 돌아와 살게 되었으니 재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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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평전 지나 촛대봉에 닿는다. (11:10)
아무리 보아도 연진아씨 모습이나 촛대를 연상하기에는 어색해 보인다.
차라리 등잔이라 할까, 공깃돌 바위라 할까, 그런 모습이다.
이 곳에서는 천왕봉이 이제 가까이 보인다.
길은 좌로 틀어 천왕봉을 향하여 북동으로 대간길은 이어진다.
잠시 후 三神峰에 닿는다. (11:30)
사실 지리산의 三神峰은 비록 높이는 낮을지라도 지나 온 영신봉에서 뻗어 내린 곳, 靑鶴洞 위에 있는 또 다른 삼신봉이 제격이다.
이 삼신봉은 영신봉을 祖山으로 하고 좌우로 내삼신봉과 외삼신봉을 거느리고 있어
그 아래 청학동이 자리하고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 三神을 모신 곳이다.
언덕 오르다 좌측 煙霞峰을 만난다. (11:53)
여기에서 뻗어나간 남쪽 능선은 여러 모양의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공식명칭은 아닐지라도 등산지도에는 日出峰능선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천왕봉에 미쳐 못 오른 이들은 이 곳 일출봉에서 일출을 보아도 장관이기 때문이라 한다.
연하봉고개를 넘는다.
장터목으로 가는 대간길은 현호색과 얼레지 군락이다.
나무 그늘 아래 그 보랏빛들이 청초롭다.
얼레지는 비록 잎은 얼룩져 있어도 보랏빛 꽃이 아름다운데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고개 숙이고 들지 못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이 애들 군락지를 지나 언제나 장터처럼 붐비는 장터목으로 내려 선다. (12;08/12:19)
오늘도 어김없이 장터목은 사람들로 붐빈다.
천왕봉 오르기에 제일 적합한 길목이기 때문이리라.
예부터 이 곳에서는 봄,가을로 산 남쪽 하동쪽 사람들과 북쪽 함양쪽 사람들이 만나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물물교한 하던 장터였다 한다.
천왕봉 길목이다 보니 이 곳에는 71년 지리산 최초로 산장이 들어서 지리산산장이라고
불리어 왔고, 86년에 재건축하면서 장터목산장이 되었다.
이 장터목 있는 샘은 또다른 현대적 전설을 지어 냈으니 ‘山姬샘’이라고 부른다.
남신 반야를 그리다가 스스로 거울처럼 쓰던 못을 메워버린 여신 마야고가 생각나시는지?
그 때 메워버린 못을 다시 찾았는데 그 것이 장터목샘이며, 진주 지리산산악회 열성 회원의 따님 이름을 따 ‘山姬샘’으로 이름 지었다 한다.
수천년을 이어 넘어 오늘날에 이어진 전설이 재미 있다.
명선봉 아래 ‘총각샘’도 이 산희샘과 음양을 맞추기 위해 지은 이름이라 한다.
그런데, 이 총각샘은 하고한날 물 안 마를 때가 없으니 다음번 종주에는 이 샘 아래
바위 밑에 ‘무슨그라’인가 그 알약이라도 한 알 묻어 주고 와야겠다.
이제 오늘의 클라이막스 천왕봉을 앞에 두고 남겨 놓은 김밥 한 줄로 에너지를 보충한 후 제석봉을 향한다. (12:19)
무릎도 아프고 힘도 많이 든다.
우리 친구들은 무박산행 다니는 나를 보고 고만 좀 설치고 분수를 알라고 한다.
오늘 분수 넘는 짓을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하산 후 하루 이틀 뒤, 무릎 아프면 분명 분수에 넘치는 일 한 것이다.
고사목 지대가 나타난다.
오래 전, 눈쌓인 이 고사목 지대의 사진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 감동하다가 처음 지리산에 오던 날 이 고사목 지대의 특이함에 신기해도 하다가, 고사목지대가 생긴 이유를 알고는 분노했던 기억이 새롭다.
도벌꾼들이 자신들의 도벌 흔적을 감추기 위해 불을 질러 수백년 묵은 구상나무 등 거목군을 태워 버렸다는.
그런데 그 도벌꾼은 다름 아니고 자유당 말기 현직 농림장관의 삼촌이고, 더욱이 제재소까지 차려 놓고 도벌을 했다니..
그냥 띵~ 할 뿐이다.
이 곳 지날 때 마다 분노가 차 오르지만 오늘도 참고 제석봉에 도착한다. (12:35)
우리 民俗信仰에서 모시는 神이 열 두 분 계시다는데 그 중 한 분인 帝釋天께 제사를 지내던 봉우리이다.
노고단이 있듯이 이 곳에는 帝釋壇이 있다.
帝釋天은 인간의 善惡과 邪正(바름과 그릇됨)을 관장하신다 하니 이 곳을 지나기 전 마음 정갈하게 할 일이다.
제석봉 내려 서면 흔히 톱날능선이라고 부르는 울퉁불퉁한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이다.
천왕봉으로 향하는 이들도 많고, 내려 오는 이들도 많다.
오르는 사람들은 다들 힘들어 한다.
힘 들어 하는 사람들이 자꾸 길을 막는다.
신선들도 통과해야 하늘에 이를 수 있다는 通天門 지나 큰 숨 한 번 몰아 쉬고 내쳐 천왕봉으로 오른다. (1:05/1:15)
天王峰.
늦었지만 백두대간의 출발점에 선 것이다.
조선조를 대표하는 선비 남명 趙植 선생은 천왕봉을 일러 ‘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라 했다 한다. (만고의 천왕봉, 하늘이 울더라도 울지 않는다.)
그만큼 천왕봉은 늠름한 峰이다.
3대의 德을 쌓아야 이 곳 일출을 본다 했는데 날이 맑으니 오늘 새벽이었다면 혹시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 곳에는 지리산 정상석이 서 있다.
예전 여신상도 경주 옥석으로 만들어 이 곳에 모셨다는데 이제는 없다.
누대에 걸쳐 수차례 수난을 당했다가 근래에는 여신상을 미신으로 여기는 믿음을 가진이들이 굴려 버렸다 한다.
뿔뿔이 깨어진 조각을 계곡에서 찾아 맞추어 천왕사라는 곳에 모tu다 놓았다 하는데 궁금하다.
천왕봉 정상석도 왠만하면 다시 만들어 세웠으면 한다.
지금의 정상석은 1982년 이 곳 산청,함양 국회의원인 5공 실세 권익현씨가 세운 것인데
뒷면에 씌여 있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라는 문구를 잘 살펴 보면 한국인 자리를 뭉개고 다시 쓴 흔적이 역역하다.
본래, ‘慶南人’이라 씌여 있었는데 누군가 갈아 내고 ‘嶺南人’으로 바뀌었다가 또다시
손질하여 ‘韓國人’이 되었다 한다.
백두대간의 출발점 치고는 구차한 생각이 든다.
중산리를 향해 하산 시작이다. (1:15)
가파른 너덜길이 사람을 괴롭힌다.
이 곳, 설악산 휘운각길, 오색길, 소백산 희방사길.. 이런 하산길들은 중늙은이 무릎 잡는 길이다. 80 영감님 내려가듯 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2, 30년은 이렇게 더 써 먹어야 할 것인데 아껴 써야 한다.
끝도 없는 너덜길 내려 오니 法界寺이다. (2:04/2:08)
넉넉히 넘쳐 나는 샘물을 마신다.
이 곳의 전설로는,
법계사가 興하면 일본이 亡하고
법계사가 亡하면 일본이 興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말 운봉에서 이성계의 활에 맞아 죽은 倭寇 將帥 ‘아지발도’도 이 곳 법계사를 불태웠다 한다.
일본이 까불면 법계사에 시주 많이 해야겠다.
끝까지 내리막길 조심하면서 내려 온다.
삐죽한 바위가 길가에 서 있는데 ‘칼바위’라는 안내판이 서 있고 이성계와 얽힌 내력도 적혀 있다. (2:56)
운봉 남원을 비롯하여 지리산 주위에는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작은 쇠다리를 지난다.
출렁다리인데 사람이 건널 때면 연결부위가 새소리 같은 마찰음을 낸다.
하산길 우측으로는 중산리 큰 계곡인데 지나는 길목마다 보이는 큼직한 바위들과 물소리가 오늘의 산행길 피로를 풀어 준다.
다가가 풍덩 멱이라도 감고 싶구나.
산길 끝나고 오늘 대장정의 끝, 중산리매표소에 도착한다. (3:16)
돼지고기 숭숭 썰어 넣고, 두부 넣어 끓인 김치찌개에 한잔 생각이 간절하다.
가자. 앞으로.
저 앞에, 언제 하산하셨는가? 배덕현 총무님의 웃는 얼굴이 보인다. //
1. 지리산은 이 기슭에 삶을 터를 잡고 일생을 이 곳에서 사시는 산신령 같은 분들이
많습니다.
감히 이 분들 앞에서 지리산을 말하는 것은 외람됨입니다.
또한, 지리산 골짜기 산길 하나 모두 전설이며, 이 분들 삶 아닌 곳이 없습니다.
여기에 옮겨 적은 내용들은 모두 이 분들이 정리하신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함께 산행한 분들 중 바쁘신 분들은 일일이 원자료 찾으실 시간이 없을 듯 하여
대신한 것입니다.
무릎은 다들 괜찮으십니까?
2. 이 번 산행에서 아쉬운 것은 우리 대간코스가 모두 北進하는 것이었는데
코스의 난이도로 인해 역주행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언제 기회되면 천왕봉쪽에서 노고단쪽으로 종주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산행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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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8-12-27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