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贈)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공(李公)의 묘비명(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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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휘(諱)는 도장(道長)이요, 자는 태시(泰始)이며, 성은 이씨(李氏)인데, 그 선대(先代)는 광릉(廣陵) 사람이다. 고려(高麗) 때 이름 있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집(李集)의 후손이다. 전교의 뒤에 형조 우참의 이지직(李之直), 예조 참판 이예손(李禮孫), 좌통례(左通禮) 이극견(李克堅), 승사랑(承仕郞) 이지(李摯), 국자감 진사 이덕부(李德符)가 있었는데, 이덕부가 이준경(李遵慶)을 낳고, 이준경이 이희복(李煕復)을 낳고, 이희복이 공조 참의 이윤우(李潤雨)를 낳았는데,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성균관 생원 채응린(蔡應麟)의 딸인데, 만력(萬曆) 32년(1604, 선조37) 5월 11일에 공이 출생했다. 종조부 첨정(僉正) 이광복(李光復)이 주부(主簿) 이영우(李榮雨)를 낳았으나, 후사가 없어 공이 뒤를 이었다.
공은 아이 때에 학기(學記),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송독(誦讀)했고, 사상(泗上)에서 정 선생(鄭先生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가리킴)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28세에 대과(大科)에 뽑혀,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에 보임된 지 4년에 사근 찰방(沙斤察訪)이 되어 옛 폐습을 개혁하고, 1년 만에 사직하고 돌아오니, 그곳 사람들이 그의 덕을 비(碑)에 새겨 잊지 않았다 한다. 그해에 박사로 주서(注書)가 되었는데, 그때 생부(生父) 참의공이 죽었다.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주서가 되었는데, 겨울에 오랑캐가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기병의 선발대가 3일 만에 개성(開城)을 넘어섰다. 상이 급히 강화(江華)로 행행하게 되자, 공이 체상(體相 도체찰사(都體察使)의 별칭) 김류(金瑬)를 보고,
“사태가 긴박한데 급히 출병하여 오랑캐의 길을 끊지 않고, 경망하게 임금께서 거둥하시게 했다가, 갑자기 변이라도 있게 되면 상국(相國)은 어찌하려 하오?”
하니, 상국이 처음에는 그렇게 여기지 않다가, 문득 깨닫고는 바로 사방으로 초병(哨兵)을 발동하여 나가니, 오랑캐가 육박해 있었다. 상(上)은 급히 달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고, 종묘사직과 비빈, 모든 궁녀와 왕자, 귀신(貴臣)들의 가족은 모두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때에 ‘상께서 밤에 급히 나가신다면 조만간 강화로 갈 수 있다.’고 권하는 대신들이 많았는데, 말이 결정도 되기 전에 성안이 요란해지자,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사변(事變)을 알 수 없는데 이런 계책을 세움은 잘못이니 결단코 성을 지킬 계획으로 맹세와 경계를 분명히 하고 성중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하였는데, 그런 뒤에야 진정되었다. 오랑캐가 날이 갈수록 다급하게 성을 에워싸자, 상이 공ㆍ경ㆍ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위사(衛士), 병졸에 이르기까지 각각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하였는데, 공이 상 앞에서 일을 잘 기록하자 상도 유심히 보았고, 그 자리에 있는 신하들도 모두 서로 돌아보며 ‘잘한다’고 했다.
이듬해 겨울에 예문관 검열로 옮겼다가 여러 번 전직하여 봉교(奉敎)에 이르렀는데, 상이 몹시 신임했다. 여름에 사헌부 지평으로 제수되어 이로부터 삼사(三司 홍문관ㆍ사헌부ㆍ사간원)에 연달아 재직했다. 겨울에 교리(校理)로 이조 좌랑에 옮겼는데, 그때 심양(瀋陽)으로부터 징병(徵兵)하는 일이 생기자, 시의에 아첨하는 남쪽 인사들 가운데 ‘출병이 의리에 크게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하는 자가 있으므로, 대신이 그 말을 받아들이고, 또 그 사람을 발탁하여 쓰려고 했는데, 공이 의리로 따져 힘껏 저지했다.
기묘년(1639, 인조17)에 지제교에 뽑혀 수찬을 제수했으나 부모 봉양하기를 빌어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나갔는데, 한 해 만에 백성들이 생업을 즐기게 되고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가 없어지니, 온 고을이 치적을 칭찬했다. 얼마 안 되어 중풍 질환으로 집에 있었는데, 연달아 시종(侍從)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시무(時務)를 논한 상소를 올렸으며, 뒤에 응교와 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갑신년 11월 18일에 공이 죽으니 나이 42세였는데, 부고가 이르자 왕이 특별히 부의를 하사하였다. 이듬해 1월 6일에 성주(星州)의 다촌(茶村) 동향(東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이 6대(代)를 성주에 살았는데, 선대의 장지가 모두 성주에 있다. 21년 뒤인 갑진년(1664, 현종5)에 장남의 현달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은 통달한 식견과 민첩한 재주가 있었는데, 또 박학하여 문예에 능했고, 일을 논함에도 기미를 잘 알아 남들이 따를 수 없는 바가 많았다. 가정생활의 선행을 열거하면, 부모 형제에게 잘했고 상(喪)과 제사에 독실하였다. 가정교육도 반드시 충애(忠愛)와 친친(親親)으로 근본을 삼았으며 의리에 처하기를 확고히 했고, 재물에 임해서는 청렴했으며, 착하지 못한 일을 보면 자기를 더럽히는 것처럼 생각했다.
안동 김씨 판중추부사 김시양(金時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원정(李元禎)은 병조 참판이고, 차남 이원록(李元祿)은 장연 부사(長淵府使)이며, 3남 이원례(李元禮)는 일찍 죽었고, 4남은 이원지(李元祉)이다. 사위는 네 사람으로 별검(別檢) 장영(張
)과 선비 권두망(權斗望), 곽전(郭鐫), 박명징(朴明徵)이다.
이원정은 아들이 셋인데, 이담명(李聃命)은 학록(學錄)이고, 이한명(李漢命)은 생원이며, 이귀명(李龜命)은 어리다. 딸은 넷인데, 사위 둘은 유명하(柳命河)와 최항제(崔恒齊)이며, 두 딸은 어리다. 이원록의 큰 사위는 정진교(鄭震僑)이고, 세 아들 이주명(李周命), 이기명(李基命), 이신명(李申命)이 있으며, 두 딸은 어리다. 이원례(李元禮)는 아들은 하나이고, 사위는 조우형(趙宇衡)이다. 이원지(李元祉)는 아들 이현명(李顯命)을 두었고, 장영(張
)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만기(張萬紀)는 진사(進士)이고, 장만중(張萬重), 장만최(張萬最), 장만용(張萬用), 장만익(張萬益), 장만성(張萬成)이며, 딸이 넷인데, 사위는 진사인 안중현(安重鉉)과 홍상문(洪相文)이 있으며, 두 딸은 어리다. 권두망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권석형(權碩亨), 권덕형(權德亨), 권후형(權后亨)이고, 세 딸을 두었는데, 사위는 박문로(朴文老)와 전적(典籍) 김성좌(金聖佐)가 있으며, 딸 하나는 어리다. 박명징은 딸 하나인데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강직한 충성 / 謇謇之忠
몸을 아끼지 않는 절개 / 匪躬之節
끝내 크게 쓰이지 못하고 / 卒不大施
중도에 꺾였으니 / 中道而折
아, 운명이로다 / 嗚呼命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