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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이의 아침시장
아침시장에서 탁발하는 승려들
새벽 안개를 헤치며 아침시장 구경에 나선다. 내가 여행지에서 빼 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 바로 그 지역의 재래시장이다. 아침시장이 열리는 곳은 빠이 군청에서 서쪽으로 약 150m 더 가면 도로 좌측에 있는데 새벽 6시 쯤 오토바이와 차가 많이 몰려가는 쪽으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빠이 자체가 작은 도시라 시장에 나온 상인도 손님도 별로 많지 않아 시장 치고는 좀 썰렁한 느낌이다. 파는 물건도 대부분 농산물과 농산가공품이다. 승려 몇 명이 아침 탁발을 나와 시장 상인들에게 시주를 받고 있다.
빠이 강을 건너는 대나무 다리
빠이 강 건너 농촌 풍경
초가형 방갈로
철모르고 피어난 바나나 꽃
전통식 가옥을 활용한 까페
시장 구경을 마치고 어제 갔던 빠이 강 대나무 다리를 건너 농촌마을을 찾아간다. 이곳은 강 안쪽과 다르게 푸르름과 낭만적인 강변의 정취와 매캐한 나무가 타는 전원내음이 나는 곳. 강을 건너자마자 빠이에 잘 왔다는 생각이 마구 든다. 피부 속, 아니 폐 속 깊숙이 상큼한 공기가 나를 감싼다. 안개가 살포시 내려앉은 밭에는 마늘이 자라고 있고 마늘밭 둔덕을 따라 심겨진 파파야 나무에는 초록색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건너편 숲처럼 무성한 바나나 밭은 이미 수확이 끝난 것 같은데 철모르는 바나나 나무엔 바나나 꽃이 피어 있다. 밭 주변으로는 우리나라 초가집처럼 생긴 갖가지 형태의 방갈로가 이곳이 관광지임을 말해주고 있는데 무분별하게 지어진 게 눈에 거슬린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커다란 나뭇잎으로 지붕을 이은 목조가옥이 보이는데 까페로 운영하고 있다. 차량도 오토바이들도 안 다녀 걷기 좋은 길이다.
빠이 버스터미널에서 본 태국 군인
매홍손행 미니버스
이제 빠이를 떠나 매홍손으로 갈 시간이다. 빠이 버스터미널엔 군인들이 여럿 보인다. 치앙마이에서 빠이로 올 때도 군부대를 많이 봤는데 여긴 미얀마가 더 가까우니 군부대가 꽤 있을 것이다.
빠이에서 매홍손 가는 루트
매홍손 가는 도중 풍경
매홍손 가는 도로도 역시 커브길이 많다
매홍손으로 가는 미니버스의 내 좌석은 맨 앞자리로 다른 자리에 비해 조금 넓어 발을 뻗을 수 있다. 매홍손으로 가면서 전망을 볼 수 있어 좋지만 안전을 위해 항상 안전벨트를 매고 있어야 하는 불편도 있다. 치앙마이에서 빠이를 오는 만큼이나 빠이에서 매홍손 가는 여정도 만만치가 않다. 편도로 107km를 달려야 하는데, 겹겹이 보이는 산중을 통과하는 아름다운 길이이지만 커브 길도 많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도 많아 자칫 긴장을 풀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매홍손 우체국
12시경 매홍손 쫑캄 호수 앞 도로에서 내린다. 쫑캄 호수 옆 Friend G.H를 찾아 배낭을 내려놓고 게스트하우스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잠시 휴식을 취한다.
매홍손 시내 지도
이제 내가 매홍손까지 온 단 하나의 이유인 고산족 마을 중 카렌족 마을을 보러 간다. 가이드북에는 매홍손 시장 맞은편에 있는 썽태우 정류장에서 썽태우나 오토바이 택시로 갈 수 있다고 적혀 있는데 매홍손 시장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썽태우나 오토바이 택시는 보이지 않는다. 작은 도시인 매홍손 시내를 30여 분 돌아 다녀 봐도 썽태우나 오토바이 택시가 보이지 않아 최후의 수단으로 태국관광청 매홍손 지사를 찾아간다. 관광청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지도를 보여주며 카렌족 마을 위치를 알려 주는데 모든 카렌족 마을이 매홍손 시내에서 30km 이상 떨어진 산 속에 있어 걸어가기 불가능하다. 어떤 방법으로 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여행사 투어를 이용하란다. 난 오늘 밖에 시간이 없으니 방법을 강구해 달라고 조르니 여직원 한 분이 앞장 서 여행사 한 곳으로 데려간다.
매홍손 한 여행사의 내부
여행사에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아주머니와 상담해 보니 지금 갈 수 있는 차량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어딘가 전화를 하고 웃는 얼굴로 나 혼자 가려면 마을 입장료와 차량비, 보트비 등을 포함해 1,200B(43,000원 정도)를 달라고 한다. 내가 가진 태국 돈을 보여 주며 깎아달라고 하니 아주머니 관광청에서 모시고 온 손님이라 1,000B에 해 주겠다며 계약서를 작성하고 30분 정도 기다리란다.
남 삐앙 딘까지 안내해 준 가이드 차량
카렌족 마을 가는 도중에 만난 오토바이
30분 후 50대 아저씨가 여행사 안으로 들어오더니 아주머니와 인사를 하고 나더러 가자고 한다. 여행사 옆에 주차된 일본제 SUV 12인승 차량을 타고 출발한다. 운전기사 겸 가이드인 이 아저씨는 내 나이와 이름을 묻더니 자기 이름을 가르쳐주며 내게 형님(elder brother)라고 한다. 가는 길은 30km정도 짧지만 비포장 산길에다 대중교통이 없고 이따금 오토바이만 보인다.
카렌족 마을 남 삐앙 딘 전경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 안내판
산길을 30여 분 달리고 작은 보트로 강을 건너 도착한 카렌족 마을 남 삐앙 딘(Nam Piang Din) 마을은 산줄기를 따라 판자집이 늘어선 작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오피스에서 입장료를 내야만 들어갈 수 있는데 나중에 운전기사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이 입장료가 마을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태국 정부에게로 가는 돈이라고 한다.
남 삐앙 딘 마을의 골목과 가옥들
골목에 늘어선 기념품 가게
시즌이 아니라 그런지 관광객이 전혀 없이 텅 빈 마을. 마을을 보기 보다는 상점가를 구경하는 격인 카렌족 마을은 목재와 대나무로 대충 지은 듯한 집과 시궁창 냄새가 나는 골목은 그들의 궁핍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 양쪽으로 늘어선 기념품 가게들을 둘러보는데 관광객들에게 익숙해서 그런지 어른들은 사진 찍는데 거부감이 없이 너무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진을 찍고 나면 기념품을 사 주기를 바라는 눈길이 부담스럽다. 때문에 상업적이라 실망했다고 하는 여행자들도 있지만 배낭만 하나 달랑 메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여행을 하는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짐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웬만하면 현지에서 소비해 버리는 것 아니면 기념품 등 물건을 사지 않는다.
70년간 했던 목걸이를 제거한 마을 최고령 할머니
카렌족 할머니와 기념 촬영
태국-미얀마 국경 산악지대엔 ‘목이 길어 슬픈’사람들인 카렌족(빠둥족)이 산다. 카렌족 여자 아이들은 다섯 살 때부터 놋쇠 고리를 목에 착용하기 시작해 성장이 멈출 때까지 계속 늘려 평생을 차고 산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고리를 사용하고 나이가 들수록 더 굵고 무거운 고리를 쓴다. 고리는 낱개가 아니라 하나의 긴 스프링을 감는 식으로 채워진다. 고리가 늘어날수록 목이 길어지고, 목이 길어지는 만큼 고리는 늘어난다. 기록에는 고리를 최대 37번까지 감은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어린 여자아이가 롱 넥을 한 모습
놋쇠 고리를 한 아기 엄마(21세)
카렌족들은 왜 놋쇠 고리를 차고 살까? 이들이 놋쇠 고리를 목에 착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카렌족 사이에선 목이 긴 여자를 미인으로 보기에 목을 길게 하기 위해 링을 찬다는 설과, 고산지대 동물들이 여자들의 목을 물어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착용했다는 설이다. 또 잦은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 적병이 여자에게 몹쓸 짓을 하기 때문에 목에 링을 착용해 징그럽고 못나 보이게끔 했다는 설도 있다. 여자의 목에 고리를 끼워 길게 만들면 목을 좌우로 돌릴 수가 없어 평생 앞에 있는 남편만 바라보고 살면서 정절을 지키라는 발상에서 나온 풍속이라는 것이다.
카렌족 아주머니들이 모여 수다 삼매경
수다 중 촬영에 응해 준 아기 엄마
카렌족 여인들은 자세한 설명 대신 종족의 전통임을 강조한다. 그 전통 유지의 대가는 혹독해 어릴 때부터 링을 차게 되면 성장한 후에도 쉽게 벗지 못하며 잘 때에도 바로 눕지 못하고 옆으로 누워 자는 경우가 보통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차다 보면 목이 늘어나는 것은 느낌일 뿐이고, 위로는 아래턱뼈의 근육을 위로 밀어올리고, 아래로는 어깨뼈의 근육을 누르게 되어 늑골에도 영향을 준다는 보고도 있다. 3~7㎏씩 나가는 놋쇠 고리를 목에 차고 생활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고통일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링이 불편하다고 벗어버리면 착용의 관성이 사라져 고개가 꺾이게 되어 더 고통스럽다고 한다. 하지만 카렌족 여자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링 자체를 크게 의식하는 눈치가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놋쇠목걸이를 한다고
그런데 롱넥의 전통이 점점 사라지는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아니고는 형식적으로 링을 끼우고 있는 분들도 있고 아주 젊은 친구들은 아예 착용하지 않은 이들도 보인다. 아무리 전통이 중요한 것이라 해도 이런 고통스러운 전통을 고수하라고 강요하는 건 역시 비인간적이다. 이제 그들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결국 옛 다큐멘터리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되겠지.
다리에까지 못쇠고리를 찬 모습
미얀마 카렌족은 비운의 소수민족이다. 19세기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여 이때부터 전통적인 불교국가인 미얀마(버마)의 배척을 당하고 제2차 대전 당시 영국에 협력했던 대가로 독립 국가 설립을 약속받았지만 미얀마 독립 시 그들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자 카렌족은 반정부 투쟁을 벌여 미얀마 군사정부의 강경 탄압과 토벌 작전으로 일부 카렌족은 난민 신세로 태국 북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태국 북부 산악지대에 약 30만 명이 산다고 한다.
손자를 재우는 할머니(조혼으로 40세에 할머니가 됨)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해먹을 흔들며 간난아이를 재우고 있다. 아직 손도 못 내놓은 아이가 너무 예뻐 다가가 본다. 목에 놋쇠 고리를 두르지 않았지만 전통의상을 입은 아주머니가 아주 흐믓한 미소로 아이를 쳐다보기에 “아들이냐?”고 물으니 손자란다. 할머니가 되긴 너무 젊어 “실례지만 몇 살이냐?”고 물으니 40살이란다. 카렌족들도 조혼풍습이 있나 보다. 난민의 신세라 소녀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가난하고 궁핍한 삶이 이들을 조혼으로 몰아내고 있는 것 같다. 이 간난아이는 카렌족의 고달픈 삶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자고 있다.
마을에 있는 학교 전경
태국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학교(자원봉사단체 후원으로 운영)
교재를 놓고 토의하는 선생님들
마을 중간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기념품점이 도열한 길 끝 언덕에는 학교가 보인다. 아이들이 뛰어 놀 운동장도 없이 나무로 지은 학교 건물은 이들의 교육 현실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문이 열린 교사 안에는 선생님 몇 분이모여 교재연구를 하고 있는 듯하다. 태국 국기가 걸려 있으나 학교 앞에 세워 둔 간판을 보니 태국 정부에서 인정하는 교육기관이 아니다(Non-formal and Informal Education Center). 난민 처지이니 이들의 자녀 교육이 온전할 리 없다. 사는 게 궁핍하니 교육이 궁핍할 수밖에 없고 미래조차 불투명한 것이다.
가게에서 팔 수공예품을 만드는 여인
카렌족 전통 기타를 만드는 아저씨
가게에서 팔 목각인형을 제작하는 아저씨
마을 가게에 진열된 카렌족 전통 기타
그런데, 귀국 후 한 회사의 태국지사장을 지낸 친구로부터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관광객이 보는 대부분의‘목이 긴 카렌족’은 상업적으로 당국과 현지 카렌족이 합의해 만든 관광 상품이라고 한다. 전통문화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지만 자본에 종속되고 억압되는 전통은 문화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농작물을 수확하는 여인들
카렌족들의 실생활을 알 수 있는 마을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왔던 나 역시 실망을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물건을 판다고해서 무조건 상업적이라고 비난해도 되는 것일까. 미얀마에서 쫓겨 와 태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태국 정부의 고산족 관리 정책에 의해 정해진 범위 이내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을 밖에서 잠을 자는 게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매홍손 시내에 잠시 다녀오는 게 전부인 자유를 빼앗기고 다른 직업을 택할 수도 없는 이들이 기념품을 좀 판다고 해서 상업적이라고 과연 비난해도 될까? 입장료도 정부가 가져가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조금의 생활비가 나오지만 그나마도 카렌족의 상징인 링을 차지 않으면 자격에서 제외되기에 자연히 남자들의 몫은 없다고 한다.
카렌족 여인 3대(할머니와 며느리, 손녀)
놋쇠 목걸이를 하지 않은 카렌족 아주머니
가옥구조와 주변 환경
카렌족의 고단한 삶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들의 집이랄 것까지 없는 가옥구조와 살림살이, 시궁창 냄새가 나는 마을길, 그곳에서 수공예 기념품을 파는 여인들, 언덕 위에 있는 학교 등등 내가 본 카렌족 마을 사람들의 삶이 마음에 걸린다. 과연 내가 이들을 찾는 것이 옳을까? 관광수입으로 살아간다는 그들에게 나의 방문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을까? 가이드는 버마에서의 삶보다 나을 거라는데. 그의 자만이 아닐까? 노천명 시인은 목이 긴 사슴을‘무척 높은 족속’으로 노래했지만, 목이 긴 카렌족은 고고하지도 높지도 않았고, 오히려 핍박 받으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돌아오는 길 내내 그들의 맑고 슬픈 표정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매홍손 버스터미널
카렌족 마을에서 매홍손으로 돌아오다 내일 치앙마이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해 매홍손 버스터미널에서 가이드와 작별한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미널엔 사람도 몇 안 보이고 승객을 태우기 위해 대기하는 버스도 한 대 뿐으로 한적하다. 매표소 여직원에게 내일 치앙마이 행 버스표를 예매하러 왔다고 하니 치앙마이 행 미니버스는 한 시간에 1대인데 10시까지는 이미 매진됐고 11시 표를 사라고 한다. 매홍손에서 치앙마이까지 6시간 정도 걸리니 아침 이른 표를 사야 당일 다시 매홍손으로 돌아 올 수 있어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