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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노정 - 1권
제2절 어린시절과 초기학습 (1920~1938. 3월)
5. 초기학습과 신앙입문
한문서당 공부
1926~1932., 7-13세
본래 한국은 유교에 가깝지요. 선생님도 유교의 논어 맹자 다 읽어 보았어요.108 다방면에 소질 있는 사람이라구요. 그림을 그리더라도 잘 그리는 거예요. 내가 열두 살에 글방 가서 체體글을 써 준 사람입니다.
내가 열 살 때 글방 다닐 때는 말이예요, 책 하루에 한 장만 떼면 됩니다. 그건 뭐 30분 내에 다 떼는 거예요. 딱 정신집중해서 하면 30분에 다 집어 넣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훈장 앞에 가 가지고 조잘조잘 외우면 되는 거예요. 30분만 하면 다 외우는데, 그걸 하루종일 공자왈 맹자왈 하고 앉아 있어요? 다 해 놓고는 말이예요. 훈장님이 힘드니까 낮잠 잘 자거든요. 훈장님이 낮잠 잘 때 나는 산으로 돌아다니는 거예요.
나는 점심을 안 먹고 사는 사람이 됐어요. 왜? 산에 가서 뜯어먹을 것이 어디 있는지 자꾸 더 알게 되니까 더 많이 뜯어먹는 거예요. 이러다 보니 저녁 때까지 배고프지 않아요. 그러니 점심이 뭐 필요하고, 저녁이 뭐가 필요해요? 그러다가 고단하면 거기 산에서 잠을 자는 거예요. 그러니 집에서는 큰일났다 해 가지고 등불 밝히고 찾아다닌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 깨우면 나는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누가 등불 밝히고 찾아와? 나 기분 좋게 자는데. 남 기분 좋게 자는데 왜 깨우고 야단이야? 내가 호랑이한테 물려 갈 게 뭐야? 자기들같이 나쁜 사람도 아니고 못난 사람도 아닌데. 호랑이가 오게 되면 냄새 맡고 벌써 도망갈 텐데’이랬다구요.
내가 옛날에 글방 다닐 때 거기에 훈장이 대개 논어 같은 것, 맹자 같은 것을 몇 장을 척 해서 강의받아 가지고 다음날 아침에 반드시 강講을 바친다구요. 못 바치면 초달받아요, 초달. 하여튼 내가 초달받던 생각이 나요. 그때는 제발…. 선생님이 들었던 그 손이 딱 달라 붙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웃음) 부들부들 떨다가 그걸 내버리면 좋겠다, 별의별 생각을 하는 거라구요.
원봉학원 수강
1933., 14세
옛날에도 학교 가기 위한 학원이 있었습니다. 서울에도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학원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때로 말하면 소학교입니다. 국가가 인정하는 그러한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전단계로 학원이 있었다구요. 그 학원에 가서 공부해 가지고 편입시험을 쳐야 되었어요. 그런 중간 교육기관으로서 학원이 있었어요. 그 학원을 가기 위해서 사촌동생을 충동질해 가지고 혁명을 한 것입니다.
학교에 가기 전에 벌써 조사를 해 가지고…. 4월에는 학교에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는 글방에 훈료訓料, 학비 같은 것을 다 지불한 것입니다. 그땐 훈료라고 했어요. 그 월사금月謝金을 다 냈는데 1년도 안 돼 가지고 도망치려니 어머니 아버지부터 설득해야 된다구요. 그래, 어머니 아버지 설득하고 할아버지까지 설득한 것입니다. 사촌까지 설득했어요. 남들은 비행기 날리고 있는데 공자왈 맹자왈 해 가지고 안 되겠다 이겁니다. 전부 내가 개척한 것입니다.
세개 이상의 박사 학위 꿈
여러분들은 지금 나름대로 많은 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돌담을 쌓을까? 무슨 담을 쌓을까? 선생님에게도 꿈이 많았습니다. 세개 이상의 학위를 따지 않고는 살지 않기로 칼을 꽂고 결심한 사람입니다. 선생님 성격은 세개 이상의 학위를 따지 않고는 누구를 가르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욕심이 많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생전에 박사 세 개 이상 안 하면 죽는다고 생각한 사람이라구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박사가 제일 쉬운 거예요. 요즘에는 서로가 무슨 영예박사인지 명예박사인지, 진짜 박사학위 주겠다는 데가 너무 많아요. 다 계산하고 저울질해 보니 그것이 포괄성이 없기 때문에, 다 집어 던지고 통일교회 문선생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보더라도 머리가 나쁘지 않고, 무슨 공부를 했어도 세계적인 학자가 됐으리라 본다구요. 그런 머리를 가졌으니 내가 공부를 해서 세계에 이름난 학자가 되면 뭣을 할 것이냐,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구요. 그 학자가 되어야 칠판 앞에서 백묵가루를 마시고 일생 동안 허리 꾸부러지도록 그저 연구하다가 죽는 게 아니냐? 그래 가지고 모든 근본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면 안 된다 이거예요. 그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러면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 중에서 무슨 길이 제일 어렵고 힘든 길이냐? ‘가기에 힘든 길이다’ 하는 길을 나는 가고 싶었다 이거예요. 인간으로서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에 어떤 누구든지 하지 못하는 일을 내가 한번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다구요.
정주 사립 오산보통학교 3학년 편입
1934., 15세
그래서 학원에 들어가서 공부해 가지고, 그때로 말하면 보통학교에 들어간 거예요. 오산소학교, 여기도 오산학교가 있지요? 그때는 오산보통학교지요. 그 학교의 3학년에 편입시험을 쳐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일년 공부하는데 열심히 안 할 수 없지요. 결사적으로 했더니 성적이 좋아서 5학년으로 월반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거예요.
내가 학교 다닐 때는 20리 길을 걸어 다녔다구요, 초등학교 다닐 때. 그거 얼마인가요? 8킬로미터. 8킬로미터를 매일같이 걸어다녔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중간쯤에 사는 애들은 내가 딱 그 시간에 지나가니까, 그때 나오면 절대 지각 안 합니다. 다 과학적이라구요. 그래서 쭉 고개마다 애들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내가 참 길을 빨리 걷는다구요. 8킬로미터를 한 시간 이내에, 45분에 가는 거예요. 차차차차 차차차차 가는 거예요. 그러면 뒤에서 따라오기가 바쁘지.
내게 그런 일화가 많다구요. 어머니 아버지가 학교 가라고 준비할 것 없이 전부 다 내가 준비했다구요. 학교 교장 선생한테 가서 구술고사 받는 것도 내가 다 교섭하고 말이예요. 전부 개척이예요.
저녁때쯤 되면 배도 출출해요. 20리를 가려면 한참 간다 이거예요. 동무들 다 가고 혼자 남아 가지고, 그때 뭘 사 먹었느냐 하면, 중국집에 들어가 가지고 만두를 사 먹었어요. 그 팥만두가 얼마나 맛있던지! 그때 5전 했어요. 15전이면 3개 사 먹어요. 세 개 먹으면 배가 불러서 더 못 먹어요. 거기에 앉아 가지고 오차물 갖다 놓고 그것 세 개 놓고 조금씩 먹으며 시간을 보내면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열한시쯤 되어서 여러 번 쫓겨났어요.(웃음) 그러니 열한시가 넘으면 뛰는 거예요. 산 고개를 넘고…. 그때는 늑대도 많고 호랑이도 많았어요. 어느 산중에서 누가 잡혀 먹었다 하던 그런 때였어요. 평안도에 호랑이가 많았어요. 그런 산골 길을 뛰어다니면서 학교를 다니고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니 그게 다 훈련이었어요.
그때 훈련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지금도 길을 잘 걷는다구요. 설렁설렁 말이예요. 아마 여러분들이 지금도 못 따라올 거예요.
몰음마을 덕흥장로교회 입교 15세
선생님은 북한에 있는 한 지방의 착실한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0여 세 때 전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개종과 더불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이 새로운 신앙에 애착을 갖고 이전에 그 누구를 사랑한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어려서 교회 다닐 때는 예배시간에 늦으면 얼굴을 못 들고 다녔습니다. 며칠 동안을 회개하지 않고는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늦은 시간에 가면 많은 사람이 예배 드리는 데 실례가 되지나 않을까 했으며, 언제나 예배 시작 전에 먼저 가서 보탬이 되도록 했습니다.
정주 공립 보통학교 4학년 전학
1935.4월~1938.3.25., 16-19세
과거 우리 나라는 아시아의 작은 반도의 한 나라로서 일본 치하에 있었던 비참했던 실정의 나라였다는 걸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소년시대를 대한민국의 자주적 국가권 내에서 자라지 못하고 일본의 압제권 내에서, 일본의 통치하에서 자랐습니다. 25세까지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러니까 점차 세상을 알게 되고 젊은이로서 지낼 수 있는, 어려운 모든 사정을 측정할 수 있는 그런 중요한 시기에 나라 없는 백성으로 자란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오산소학교―지금으로 보면 초등학교지요.―에서는 일본 말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일본 말을 못 쓰게 해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원수의 자리에서 투쟁한 대표적인 사람인 이승훈씨가 세운 학교이고 그런 학교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일본 말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보니까, 문제는 우리가 적을 알아야 된다는 거였어요. 적에 대해 세밀히 몰라 가지고는 적과 싸우더라도 대비책을 세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정주보통학교-공립보통학교예요-거기에 편입시험을 쳐 가지고 4학년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거기 들어가서는 일본 말을 유창하게 하게 돼 가지고 졸업을 한 거예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신앙길이라든가 인생의 근본문제라든가 어려운 모든 문제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학교에 가게 되면 전부 일본 말을 배워야 되었거든요. 가다가나 히라가나를 공부하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하루 저녁에 다 외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벼락같이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의 모든 책을 그저 보름만에 다 외워버렸어요. 그리고나니까 귀가 트이더라구요.
또 나는 첫번에 가 가지고 그림 그린 것을 붙였어요. 배우지도 않았는데, 벌써 측정하는 거예요. 3등분해서 따라 들어가는 거예요. 저 그림이 저 평원에 몇 등분 안에 들어가 있구나 하고 딱 잡아 내요. 센터를 중심삼고 측정을 해 나가는 거예요. 이 도화지가 3배니까 3배 딱 정해서, 센터를 중심삼고 3배에 전부 다 딱딱딱 점만 치면 다 그림이 그려지는 거예요.
선생님이 어렸을 적에 공책을 쓸 때에는 줄이 쳐진 부분부터 쓰는 것이 아니라 맨 꼭대기부터 썼습니다. 어떤 때는 한 장에 두 번씩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공책 한 권에 더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아껴 써야 됩니다.
그리고 책을 읽게 되면 저 뒷편까지 보이더라 이거예요. 옛날 초등학교때…. 일본말 국어 독본이라는 것을 5, 6학년 때는 두 권씩 떼었다구요. 한 권에 180페이지인데 이것을 하루 저녁에 다 외워버렸어요. 사람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여러분, 호롱불을 알아요? 기름을 이렇게 해 가지고 공부하던 것이 엊그제 같다구요. 두 시, 세 시, 밤을 새워 공부하게 되면 엄마 아빠는 ‘야! 잠자라. 몸이 너무 약해지면 안 된다.’이랬다구요. 늘 그랬다구요. 그때 내가 제일 친구로 했던 것이 밤벌레들이었어요. 여름철엔 밤벌레를 친구로 했다구요. 척 이렇게 앉아 가지고 두 시, 세 시까지 있었어요. 조용한 밤에…. 시골 밤은 참 고요하다구요. 벌레, 곤충들이 달밤에 우는 소리는 아주 신비롭다구요. 쓱 산으로 돌아다니던 것이 엊그제 같다구요.
졸업식 때 특별소견 발표 1938.3.25., 제29회 졸업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정주보통학교에서의 졸업식 때의 일입니다. 많은 학부형들과 전체 선생들이 졸업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고 정주읍, 그때는 읍이었는데, 정주읍의 유지들이 축하하기 위해 전부 다 모였습니다. 그 졸업식에서는 교장의 훈시가 있었고 그 다음에 손님의 축사가 있었는데 그 다음에 내가 자원해 가지고 그 단상에 나타나서 일본에 대해서 반박하던 사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그 앞에서 그랬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소년시대의 기질이 보통 기질이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선생님은 그런 자리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단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면서, 소년시대의 교육에 대한 비판과 지금까지의 학교 선생님에 대한 비판을 모두 해 버렸습니다. ‘이 선생님은 이런 성질이 있습니다. 역사 선생님은 이런 성격이고 이러이러한 사고를 하고 있으니까 이러한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고 하며 선생님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시대적 비판도 하고 또 ‘이 시대의 책임자는 이러이러한 각오를 지녀야만 합니다’고 한 시간 가까이 했는데, 그것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소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때부터 레테르가 붙여졌습니다. 경찰로부터 지목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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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