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남에서 왕진교를 통해 금강을 가로질러 숭선군 묘 방문을 위해 이인으로 향했다
예전엔 다리가 없어 배를 타고 부여쪽으로 이동했으나 이제는 왕진교와 백제보 등을 통해 다리로 이어졌다
예전엔 배사고로 이곳 청남면 사람들이 많이도 금강에 빠져죽어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먼저 이인면소재지를 들렀다
면사무소? 앞에 비석군들이 있었다
이인이 조선시대 도찰방이 있던 곳이기도 했지만 동학혁명이나 한국전쟁과도 좋지 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 주력부대가 바로 이곳에서 관군을 맞아 대승을 이루기도 했고 그 이후 조금 더 공주쪽으로 이동해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에 완전 몰살당하기도 한 역사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곳이다
비석군에는 이곳에서 동학혁명군을 대패시키고 나중에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박제순을 추앙하는 거사비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윗대가리 중에는 백성을 이용만 하려는 사리사욕의 악한 놈들이 많다
그 외에도 이곳엔 한국전쟁당시 금강전투에 참여해 패한 이들을 기리는 한국참전용사무공기념비가 있다
이인 면소재지 길을 거쳐 숭선군 묘로 향했다
먼저 묘역으로 오르는 길가 신도비가 아닌 귀부만이 방문객을 맞는다
숭선군도 살아생전 역모에 얽히는 등 파란만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아들인 동평군이 나중에 역적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동평군은 바로 장희빈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인물로 남인과 같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왕권을 위해 애쓴 이들을 왕인 숙종이 버려야만 한 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서인들의 권력을 왕도 어쩌지 못하는데에서 나온 조선의 비극이다
마지막 구절 마을의 좋은 기운이 귀부가 바라보는 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버드나무 숲을 조성했는데 그 나무도 두 그루 남아 있었다
숭선군 묘로 올랐다
묘역 앞 시골집에 졸고 있던 강아지가 반가운듯 맞아준다
숭선군의 이름은 이징(李澂).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貴人) 조씨(趙氏)이다.
귀인 조씨도 현 역사에선 투기많고 악한 여인으로 남아있으나 조선의 역사를 어찌 그대로만 봐야 할까? 서인들 관점에서 내려온 역사이니... 어쨋든 어머니 조씨에게선 핍박 받으며 자란 분위기이고 오히려 장렬왕후에게 사랑을 받은 듯 전해온다
1646년(인조 24)에 숭선군에 봉해지고 효종이 즉위하던 해 동복(同腹: 어머니가 같음, 낙선군) 동생들과 함께 노비 150구(口)를 하사받았다.
1651년에 누이 효명옹주(孝明翁主)의 시할아버지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사건이 일어나 어머니와 누이가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조귀인(趙貴人)이 사사되고 효명옹주는 서인이 되었는데,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656년 부수찬 홍우원(洪宇遠)의 소청으로 풀려 돌아온 뒤 관작이 복구되고, 제주에서 진상된 용종마(龍種馬)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효경(孝敬)이다.
이곳 숭선군 묘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로 이곳에 묘소가 있게 된 연유는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파천한 적이 있었는데, 훗날 숭선군이 공주 산천 구경을 한 뒤 서울에 돌아가서도 항상 공주를 그리워하였다.
임종시 생전에 그립던 공주이니 사후에라도 가고 싶다고 유언하여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봉분은 높이 2m, 둘레 18.6m 규모로 좌·우·후의 3면을 담으로 둘리고 상석과 봉분 사이에 비석을 세웠으며, 봉분 중앙에 장명등 1기와 문무인석 2기, 망주석 2기를 시립시켜 놓았다.
비의 기년으로 보아 1766년(영조 42)에 조성되었고, 현재의 위치에 묘역을 조성한 것은 후대의 일로 보인다.
전언에 의하면 본래 측근들이 숭선군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묘역을 조성하기는 하였지만 왕족의 묘가 도성에서 일정 거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법제 때문에 안치되지 못하다가 후손들에 의해 이곳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숭선군 묘 우측에도 묘가 하나 자리하고 있는데 누구의 묘인지 안내되어 있지 않다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알 길이 없다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