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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12
마태복음 10장 29-31절 [제11문]
하나님의 작정의 실행으로써 창조와 섭리가 있다고 할 때(제8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모든 만물에 대한 창조의 역사를 제9문에서, 특별히 인간 창조와 관련해서 제10문에서 다룹니다. 이어 섭리에 대한 내용을 제11문에서 다루는데,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될 부분이 제11문 섭리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안에는 이런 일반적인 섭리에 대한 이해, 다시 말해 작정의 실행으로써 섭리만이 아니라, 작정 예정을 선행하는 섭리에 대해 말하기도 합니다. 헤페가 쓴 개혁파 정통 교의학이라는 책 제12장에 보면 이런 섭리와 관련해서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1항), 일찍이 쯔빙글리의 경우는 “섭리는 예정의 부모와 같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견해를 기반으로 부카누스라는 개혁자는 섭리를 둘로 구별하였는데, 하나는 ‘영원하며 불변의 한 배치’로, 다른 하나는 ‘온 세상의 실제적이며 시간적인 실행 자체’로 구별하였다고 합니다. 부카누스만이 아니라 아 디에스트라는 개혁자는 섭리의 두 구별을 말하되 ‘선행적 작정과 뒤따르는 집행’ 혹은 ‘작정의 섭리와 실행의 섭리’로 표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는 섭리라고 할 때 ‘작정에 선행하는 섭리’와 ‘작정을 실행하는 섭리’ 혹은 ‘영원한 섭리’와 ‘시간적 섭리’로 구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작정에 선행하는 섭리, 영원한 섭리가 아닌 작정을 실행하는 섭리, 시간적 섭리로 설명하고 있고 이런 이해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섭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11문.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는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동들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하고(시145:17) 지혜롭고(시104:24, 사28:29) 능력있게 보존하시며(히1:3) 다스리시는 것입니다(시103:19, 마10:29-31).
그러니까 섭리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가 있는데, 작정하신 그대로 실행하시기 위해서 모든 피조물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의 행동들을 자신의 거룩과 지혜와 능력으로 보존하시며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조에 대해서 살펴봤지만 하나님께서 창조만 하시고 섭리 하지 않으신다면, 다시 말해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바가 없다면 과연 창조된 것들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은 이 사실을 부인합니다. 창조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섭리는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지구의 자전, 지구의 공전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미 그 안에 어떤 법칙을 따라 스스로 돌거나 돌아가는 것처럼 여길 뿐이지, 하나님께서 지금도 보존하시며 다스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도 보면 창조는 믿는데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신론(deism)이라고 해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때 나오게 된 사상입니다. 그럼 그들만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자들인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의 행동들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신다고 할 때 그 사실을 어떤 면으로든 부인한다면 이신론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인협력을 외치는 반펠라기안주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행동들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데, 거기에 인간의 의지를 마련해 둡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를 보존하시고 다스릴 수 없는 것처럼 여기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큰 부분만이 아니라 작은 부분에서도 미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습니다. 창조하신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심지어 창조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섭리와 관련해서 여러 본문들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마태복음 10장 29절 이하 3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본문의 배경은 바로 앞에 있는 28절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즉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박해가 있다는 것인데, 그들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예수님 당시 참새 두 마리의 가격이 한 앗사리온에 팔리고 있었는데, 그것들을 잡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것들을 잡는 사람들의 실력에 따라 참새가 잡힌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그 날의 운수에 따라 잡을 수도 있고 잡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잡는 것, 잡지 못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시기를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누구로 하여금 잡게 하시기로 하셨다면 섭리의 역사로 말미암아 잡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기로 하셨다면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박해하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보편적으로 머리털이 풍성한 사람의 머리털을 세기란 쉽지 않습니다. 세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 세세한 부분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사실은 머리털 하나가 나고 빠지는 것도 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나고 빠지는 것, 그것조차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새보다 귀한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에 대하여 더더욱 지키시고 보호할 수 없겠느냐란 의미에서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32절과 33절에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물론 순교의 역사가 있고 그런 역사를 통해 혹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역사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교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부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과 그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에게 영광이 되고 또한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하실 수 있고, 바로 그 목적 때문에 그것을 작정하시고 작정하신대로 실행하시는 섭리의 역사를 펼치시는 겁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는 부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처럼 참새 두 마리가 사냥꾼에게 잡히는 것조차 하나님의 간섭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심지어 머리 하나까지 나고 빠지는 것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보면 머리가 빠져서 고민하기도 하고 머리털이 나도록 하기 위해서 샴푸를 바꾸거나 약을 써 보는 일들이 있지만 결국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 머리를 나게 하시거나 혹은 머리를 나게 하지 않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내용이란 것입니다.
이런 섭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의 실행 때부터 하나님은 한번도 쉰 적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6일 창조 후에 안식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창2:1-3). 안식은 곧 쉼이기 때문에 쉰 적이 없다고 말하면 뭔가 맞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때 쉼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지 않고 쉬셨다면, 다시 말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안식이 그런 의미라면 그것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첫째 날 빛이 있으라고 명하셨을 때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낮과 밤을 나누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태양의 뜨고 진다는 표현을 통해서 낮과 밤을 구분하고 있지만 첫째 날에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 만드셨습니다. 해를 통해 낮을 주관하게 하신 것은 넷째 날부터입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태양 없이 하나님께서는 빛을 비추셨고 빛을 거두심으로 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말은 명하시매 있게 되었지만 있게 된 그것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셨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손길이 여전히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낮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없었다면 그렇게 유지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창조라는 부분을 살피고 난 뒤 섭리의 내용을 살피고 있지만 사실 창조 직후 곧바로 하나님은 섭리하고 계셨던 겁니다. 첫째 날 빛을 만드셨는데 만드시고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것으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첫째 날부터 섭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첫째 날 그런 섭리의 역사를 보이셨다는 것은 나머지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지구의 자전과 공전, 과학에서는 마치 법칙처럼 있다고 이해합니다. 소위 자연의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섭리를 멈추면, 다시 말해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멈추면 어느 하나도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역으로 그 모든 것이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움직이고 있다면 거기에는 창조 때부터 일하기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4편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바닷가에 가 보면 바닷물이 모래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금 내려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경계를 정하시고 경계선을 넘지 못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닷물이 가만히 있느냐?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출렁이면서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합니다. 반복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경계선이 달라지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시고 정하신 그 경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물의 경계선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와 같다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물의 경계선이 달라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앞서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지만 섭리를 부인하는 이신론자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창조주에 대한 고백을 한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섭리까지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단지 만물 가운데 있다는 것만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동들까지입니다. 다시 말해 비인격적인 존재에게만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피조물, 이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대상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존되며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시 않으셨지만 창조하지 않은 죄까지 섭리하십니다. 앞서 경계를 정하여 그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하신다고 했는데, 실제로 하나님은 악인의 죄를 통제하십니다. 본래 인간 안에 있는 죄성은 전적인 타락으로 인하여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서 12절이 잘 증거 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러면서 나오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3:13-15) 때문에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는 모든 것은 사실 썩은 것이요 악한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악을 통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창조하지 않은 죄까지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잠언 16장도 보겠습니다. 우선 1절을 보시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사람이 뭔가를 계획한다고 할 때 계획한 그대로 이루어지느냐? 계획한대로 이루어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자주 1등을 합니다. 그러나 항상 1등만 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솔로몬도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전9:11)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빠르게 달리는 사람이면 그가 먼저 결승점에 도착한다고 생각합니다. 싸움을 잘 하는 사람이면 이길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똑똑한 사람이면 그가 좀 더 앞설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험하고 또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확률이 높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어떤 불변의 공식처럼 되어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전도서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람의 능력에 따라 계획한 것이 이뤄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거나 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모든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좀 더 풀어 설명하자면 빠른 경주자가 경주해서 빨리 도착하는 것은 그들이 빨라서라는 말도 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은사를 주시며 또한 그런 은사가 발휘되도록 하셨기 때문에 빨리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빠르게 달리는 은사를 주셨지만 그때 그 은사가 발휘되지 못하도록 하시면 빨리 도착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느리지만 빨리 달리는 자로 하여금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느린 자가 더 빨리 도착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신 겁니다.
방금 전도서의 말씀을 언급했지만 시기와 기회가 그들 모두에게 임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적절한 시기와 기회가 왔을 때 좋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이 좋은 선택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릅니다. 지금 보기에 좋은 선택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렇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기도 하고, 또 내가 볼 때 좋지 못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지나 보니 좋은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처음부터 끝을 볼 수 있는 분이시고, 처음부터 끝을 보는 자로서 모든 일을 작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지예정의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인간에게 어떤 공로를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 상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고 그런 분으로서 모든 것을 작정하시되 인간의 공로와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작정하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우연이 있는가? 없습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사실 우연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그분의 작정과 섭리 안에서 일어날 뿐입니다. 그분의 시각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으며, 그분의 손길 밖에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 가운데 주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우연처럼 생각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우연이 없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말도 금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행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뜻밖에 일이 잘되어 운이 좋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는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운이 좋아서 잘 되는 그런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가지고 다행이라고 말할 경우에 그것은 저절로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어 자체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말로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믿는 자들은 다행이라는 말이 아니라 감사라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운이 좋아서 잘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로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잠언 16장의 내용으로 와서 9절을 보시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그 계획대로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항상 실천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운 계획이 실천되지 않을 때 간혹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지가 있고, 의지가 약해서 계획을 세우지만 소위 작심 3일이라고 해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이성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기도 합니다. 오른손을 들고자 하면 드는 것이고, 왼손을 들고자 하면 드는 것입니다. 앉아 있다가 일어나고자 하면 일어납니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앉아 있다가 일어나고자 한다 할지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의 이성과 의지의 사용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것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앞서 모든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할 때 죄의 문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말 번역에서는 ‘적당하게’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에 맞는 번역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자신을 위해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으셨느니라”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죄인을 지으셨다는 말인가? 죄의 원인자가 되신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지으실 수도 없고, 죄의 원인자가 되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창조의 내용을 살피면서 거기에 죄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럼 잠언 16장 4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의 창조자, 죄의 원인자가 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란 측면에서 죄와 무관하다고도 말할 수도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능력과 지혜로 죄조차 그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실제로 소요리문답의 이후 내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생명언약을 맺으시고 난 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는 것을 살펴볼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방치하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범죄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처음 창조될 때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지만 그들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처음 창조된 상태로부터 타락했다고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죄는 누구로부터 왔는가?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밖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조차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혹 하나님이 죄를 기뻐하신다는 것인가란 생각을 한다면 그런 뜻이 아니라, 죄라는 수단까지 사용해서 자신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룬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해서 허용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른 것이고, 죄악된 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일 뿐이다. 의도는 하나님께 죄를 돌릴 수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허용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혹은 마지못해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께 그런 표현이 합당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물론 개혁자들 다수가 허용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한 허용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지혜롭고 권능 있는 제한에 매이되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여러 경륜 안에서 그들을 명하고 다스리신다고 표현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4항). 언어의 한계 때문에 허용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마지못해서’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있는 그런 허용의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죄의 문제조차도 하나님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칼빈의 경우 하나님의 의지는 둘이 될 수 없다는 의지의 단일성이라는 이유로 허용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방금도 말했다시피 혹 인간의 언어의 한계 때문에 사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마치 두 개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담과 하와의 첫 타락뿐만 아니라 천사들과 인간들의 다른 모든 죄들은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뜻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지혜와 권능으로 그 모든 죄들의 한계를 정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다양한 경륜 속에서 그것들을 다스리십니다. 즉 이런 섭리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한 선하심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죄조차 수단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도록 하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에 있어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기억해야 될 분명한 사실이 있는데,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지 않은 일이 갑자기 좋아진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방해할 수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백성을 훈련시키실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죄조차 그러합니다. 실제로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종종 그 자신의 자녀들을 여러 시험들과 그들 자신의 마음의 부패에 일시적으로 놔두시기도 하십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목적이 있는데, 그들의 이전 죄들에 대해 그들을 벌주시거나, 그들에게 부패의 숨겨진 세력과 그들의 마음의 속임수를 발견토록 하여 그들이 겸손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혹은 그들을 지탱시키고자 하나님을 보다 가깝고 지속적으로 의지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요, 또한 그들로 미래의 모든 죄의 경우들을 대적하여 보다 경성토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십니다. 그 외 다른 여러 공의롭고 거룩하신 목적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시는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5항), 결국 죄조차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기자들에 대해서는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사악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에 관해서는 의로운 심판자로서 하나님이 그들의 이전 죄들 때문에 그들을 소경이 되게 하고 강퍅케 하십니다. 그들의 이해를 밝혀주고 그들의 마음 안에 역사하는 그의 은혜를 그들로부터 거두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들이 지녔던 은사도 앗아가십니다. 그들의 부패가 죄들을 유발시킬 때 그들이 죄를 저지르는 대상들에게 그들과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기도 하십니다. 동시에 그들 자신의 정욕들과 세상의 유혹들과 사단의 권세에 그들을 넘겨주십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6항).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에게 행하시는 바를 통해 택자들의 심령이 부드럽게 만들기도 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단으로 그런 역사를 펼치시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깊고도 부요한 것입니다. 누가 그를 판단을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의 길을 찾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섭리의 주체이십니다.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보존하시고 다스린다고 할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짓는 죄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로부터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죄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에 의해 애굽까지 팔려 갔지만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자는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고백했습니다(창45:5-8). 다윗은 어떠합니까?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보면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삼하16:10). 욥은 수많은 것을 잃었지만 하나님은 주실 뿐만 아니라 거두기도 하신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욥1:21). 우연히 일어난 일로 생각하지 않았고, 좋지 않다가 좀 좋아지면 다행이라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도 인간의 점과 흠이 나타나긴 하지만,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만 감사, 찬송, 영광을 올려드렸던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이 자리로 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할 때 모든 것 안에는 환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곤고함이 있을 수 있고,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 내용을 쓰면서 그런 것들을 의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31절의 말씀도 여러분이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땅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 세상이 내 몸을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인 줄 알고, 우리 자신을 그분의 손에, 그분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