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어릴 적 친구들
요즘은 갑자기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나도 벌써 나이가 들어서 고향이 그리운 가 봅니다. 내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입니다. 충절과 효성이 남다른 고장이기도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스물일곱 살에 고향을 떠났으니까 참으로 오래 타향살이를 하였습니다. 홍성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지어진 이름이고 본래는 홍주(洪州)골입니다. 충청도 홍주목사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도청 소재지였고, 지금은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가 되었습니다. 홍성은 우리나라 천주교 박해 초기(1792)부터 병인박해까지 약 80년 동안 지속적으로 순교자들이 탄생한 곳입니다. 홍주성지는 기록상 220명의 순교자가 있고, 무명 순교자까지 거의 1,000여명이 순교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가 많은 곳입니다. 현재 원시장(베드로), 방(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황일광(시몬)등, 4명은 복자품에 올랐고, 많은 분들이 ‘하느님의 종으로 공경을 받도록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향인 홍성을 찾을 때마다 성지를 순례합니다. 고향을 가면 친구들이 보고 싶고,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을 생각하다보면 인생의 덧없음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백은 춘야연도리원 서(春夜宴桃李園 序)에서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부천지자는 만물지역려요, 광음자는 백대지과객이라, 이부생이 약몽하니, 위환이 기하오, 고인병촉야유 양유이야로다. 夫天地者는 萬物之逆旅요, 光陰者는 百代之過客이라, 而浮生이 若夢하니, 爲歡이 幾何오, 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로다. “대저 천지라는 것은 만물이 쉬어가는 나그네 집이요, 세월이라는 것은 영원을 흘러가는 길손이다. 그 가운데 우리네 덧없는 인생은 짧기가 꿈같거니 그 동안에 환락을 누린다 한들 겨우 얼마이겠는가! 옛 사람이 백년도 못 사는 인생으로 천 년의 근심을 안고서, 낮은 짧고 밤은 길어 놀아볼 겨를이 없음을 한하다가 밤에 촛불을 켜고 밤을 낮 삼아 놀았다고 하더니 참말로 이제야 그 까닭이 있음을 알겠구나!”
이백이 봄밤에 복숭아꽃이며 오야 꽃 만발한 동산에서 형제와 친족들, 친구들을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고 각기 시를 짓고서 시의 편 머리에 서문을 쓴 글입니다.
해방 된지 얼마 되지 않아 태어나 한국전쟁 난리 통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잘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따뜻한 잠자리 한 번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내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어서 운동화 꿰매어 신고 도시락 한 번도 싸지도 못하고 이십 리 길을 걸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부러움을 사가면서 다녔습니다. 덧없이 산 것 같은데 벌써 75이 넘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모두 잠시 몸을 의탁하는 여관이고 인생은 나그네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천 년의 근심을 안고서 모든 병고에 시달리며 이를 악물고 산 날도 많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로 재롱을 부리면서 동네방네 다니면서 처음 배운 글씨를 곱돌로 쓰고 돌아다니면서 자랑하던 때 그 때의 친구들을 만나 등산을 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옛날 가난했던 그 시절 얘기를 하면서 웃고, 울기를 매번 나눕니다. 한 얘기를 또 하고, 들은 얘기를 또 들어도 조금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감출 것이 없고, 가릴 것이 없이 모두 형제 같은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외롭고 힘들 때 서로 걱정해 주고, 도와주고 웃어주고 울어주는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으니 어린아이가 되는 가 봅니다. 나이가 들으니 어릴 때 친구가 좋은 가 봅니다.
친구들은 하나 같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은 가난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친구는 부모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건강한 근골(筋骨)을 물려 주셔서 그보다 더 귀한 유산이 없다고 자랑합니다. 또 한 친구는 부모가 부지런함을 유산으로 주셨다고 감사해 합니다. 철없이 자란 것 같아도 우리는 부모님에게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젊어서는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어도 나이 들어서는 효자소리도 들어가면서 살았습니다. 어려서는 가난 때문에 학교를 갈 수도 없었고 일에 파묻혀 공부할 새도 없었지만 그렇게도 공부를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독학과 고학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 어렵게 공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그 꿈을 이루고 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소박한 꿈을 이루면서 좌절과 절망을 견디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의 그 억척스러움이 일생의 방향을 잡아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가난에 도전하고, 공부에 도전하고, 삶에 의지를 가지고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자리 잡은 가치관이 그릇되지 않고 옳게 성장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한문 서당에서 훈장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이나 어른들의 가르침이나 학교에서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지금까지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학원에 보내고, 학교에 보내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큰일입니다. 좋은 교육환경과 교육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부모로서 참 교육에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학교 교육도 학부모의 올바른 교육관으로 인성교육의 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인성교육은 가정과 학교와 교회와 사회의 공동 몫입니다. 특히 교회에서의 인성교육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주일학교에서의 인성교육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역할도 아주 중요합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들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자랑스러운 친구들처럼 우리의 어린이들을 자랑스럽게 키워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