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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예수님을 돕는 배필, 예수님과 연합, 한 몸
18.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2:18-25)
18절의 '돕는 배필'과 24절의 '연합'과 '한 몸을 이룰지로다'하신 것을 중심으로 말씀드리
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고 결혼한 부부는
헤어지지 말고 하나 되어 잘살아야 한다는 남녀의 결혼을 말씀한 것이라면 사실 여러분이 더
들을 필요도 없고 저도 이것을 말해야 할 이유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녀의 결혼을
말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으신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의 연합 속에다 하나님의 뜻을 넣으시고
사람이 하나님의 깊으신 그 사랑의 뜻과 마음을 깨달으라는 데 뜻을 두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 구절들을 인간 생각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어서 그 속에
넣으신 하나님의 생각을 다 놓치고 있어 하늘의 생명과 능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도덕, 윤리에다 초점을 둬 버리는 것으로 성경이 그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가르치는
최고의 책인 줄로 알고 있는 겁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윤리, 도덕만 만나면 사람의
양심을 수양시키는 것은 될지언정, 그래서 양심적인 사람이 되게 할 수는 있겠으나 그러나 그
속에는 용서도 구원도 천국도 하나님의 생명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영생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고 주신 말씀에서는 도덕, 윤리를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생명의 복음을
만나야 합니다.
바로 오늘 말씀도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부부가 한 몸 이루어
헤어지지 말고 잘 살라는 것이구나 하는 정도의 말씀으로 본다면 그것은 성경의 뜻이 아니라
인간 부부의 강령, 즉 부부의 윤리나 도리 책 만난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복음도
생명도 없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신 것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남녀가 만나 결혼하는 그 결혼을 말씀하는것 아닙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 결혼이 아니라 인간끼리의 일이 아닌 더 높은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기
위해 인간 삶의 것 직접 보고 경험하는 삶의 것들을 들어서 말씀하심으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본뜻을 깨닫도록 하시는 데 뜻을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하신 의도는 곧 '연합'입니다. 연합! 연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연합하라는 것인지 그 연합의 본뜻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연합을 알려면 먼저
'돕는 배필'에 대한 뜻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깨달아야 말씀하신 연합의 뜻을 아는 것이요, 또한
'한 몸'이 되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의 생명의 뜻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눈이 열려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 안에 아가서가 있잖습니까? 이 아가서가 8장으로 구성된 짧은 내용의 책인데
이것은 젊은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경험하는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가'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라고 하는 뜻인데 솔로몬 왕이 술람미라는 여인을 만나서
사랑한 것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 아가서는 인간과 예수님의 사랑을 그린 노래가 아니라는 것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이성 간의 사랑은 인간이 경험하는 사랑이예요. 그래서 이런 인간 최고의 이성적 사랑보다
더 위,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 그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목숨까지도 다 내어주실
뿐만 아니라 영생까지 주시는 영원한 사랑이시라는, 인간 사랑 그 위에 더 높고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아가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자 그와같이 인간이 경험하는 그 속에다가 하나님의 것을 집어넣으심
으로써 깨닫는 방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자기 삶의 그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뚜렷하고 확실하게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성경이 쓰인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육체을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살 수 있게 하시고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을 경험케
하시면서 바로 인간이 예수님으로 살지 않으면 도무지 살 방법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살 수 없다는 것이 뚜렷하고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잖습니까?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 예수님이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구나!'하는 것을 인간 자기가
경험하는 것 누구나 겪는 삶의 것들은 누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기가 아는 것이기에
깨달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인간이 육체를 위해 살게 하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먹어야 살도록 하시면서 바로 인간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고 말씀을 받아먹어야 사는,
예수님으로만 사는 것임을 가르치시는데 뜻이 있는 것이요 깨닫게 하시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옷을 입으려는 것도 예수님으로 옷 입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데 있습니다. 목마름을
통해서 육체의 주린 것을 통해서 인간의 영도 그같이 하나님을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 주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볼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주리는 자가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가
마실 물을 애타게 찾잖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손만 뻗치면 마실 수 있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게 뭔 소리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우리가 그같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찾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사모함을 정말
목마른 자같이 배고픈 자같이 하는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같이 목마름으로
사랑하시면서 또한 사람도 하나님을 그같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이 인간의 기본적인
것과 삶을 말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심으로 그 이상의 것을 보게 하시는 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것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깨달아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것이 바탕이 되어 쓰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십니까?
오늘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하셨는데 여기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위하여 즉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을 히브리어로 '에젤 크네그도'라고 하는데 에젤은 '돕는 자' 또는
'구원자'라는 뜻이고, '크네그도'는 '그 사람과 동등한' 또는 '그와 같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울에 누가 비칩니까? 마주 보는 내 모습이 있잖습니까?
마주 보이는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마주 보고 있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크네그도'의 뜻이에요. 이 사람에게 서로 돕는 관계로서의 배필이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신 이 말씀은 말씀 그대로 사람을 위한 배필을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하게 구분을 좀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18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이라 했습니까? 아니지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라고 했을 때는 영적인
것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사람의'라고 한 것은 영적인 뜻이
있지 않고 단순히 그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남자만 사람일까요?
반대로 남자는 사람이 아니고 여자만 사람입니까? 남자도 여자도 사람 맞습니까? 그러면 여기서
'사람'하는 것이 남자니 여자니 하는 특정의 구분을 할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것 분명히
아셨지요?
그다음 20절 하반에서부터 2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20절 하반에 여기서는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했습니다.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절에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여자를 만드시기 위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였다 했습니다. 아담이라고 했을 때는
영적인 뜻과 연결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담의 갈빗대로 취해서 여자를 만드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안에 계신 신성과 인성(육체로 오시기 전에 계시던 예수님)
으로부터 나왔고, 또 만드신 그 여자는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그 생명으로부터 교회가 탄생할 것임을 예표로 보인 것입니다. 바로 영적인 뜻을
담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18절에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고 그다음 20절 이후에서 돕는 배필을
말씀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영적인 뜻을 담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그
예수님으로 구원 얻을 영혼들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로 교회가 탄생할
것에 대한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이해됐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을 가지고 사람들이, 또는 말씀을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의 더 나아가서는 부부의 관계, 즉 남편이 우위니 아내는 남편의 그 주도권에 복종해야 하는
관계로 지으신 것처럼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오로지 남자를 위해서 지음 받은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놓으신 말씀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지음을 받았구나,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위해 존재하게 되었구나!'하는 것으로
연결해버리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속에 특히 남자들 마음에
스스로 우월적인 의식을 두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폐단이 있는가 하면, 창3:16에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신 말씀도 여자가 선악과를 먼저 따 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줘서 죄짓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
께서 여자에게 벌을 내려 여자의 위치, 여자의 신분을 정해주신 증거의 말씀인 것처럼 해석을
내려놓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남자 도우라고 지음 받았는데 거기다가 그
남자를 죄짓게 했기 때문에 그 벌로 이제 남편의 말만 들어야 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할 말 없는 여자가 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열리지 않은
눈 가지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교회서도 여자는 잠잠하라, 여자는 안 된다, 여자가 먼저
꼬임에 빠져 남편에게도 줘서 먹게 했으니 여자는 집에 가서 자기 남편에게 배우라,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다 하고 나옵니다.
제가 과거에 설교자들의 설교를 많이 듣게 되었을 때 이런 사상들이 담긴 설교를 계속 들었
습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에서 반감이 많이 있었습니다. 설교 말씀을 들으면 저의 마음에 동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반감만 들었습니다. 이후 성영님이 저를 친히 가르치신 말씀을 통해
설교 말씀들의 방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뜨이지 못한 눈들
가지고 성경을 본다고 말한다고 했기 때문에 자기도 구덩이에 빠지고 남도 구덩이에 빠지게 하는
거짓말들 열심히 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두렵고 부끄러운 일인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사단을 도와 사람들의 영혼을 구덩이에 빠지게 하는
사단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임을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남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가 되었을지라도 남성 속에 있는 죄로
심겨진, 사단이 뿌려 넣어준 더럽고 추한 우월의식을 가진 상태의 그(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함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관점에서 말씀을 보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여자는 남자의 수발을 돕기 위해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한
것처럼 보이고 또한 자기 자신(우월의식)을 대변해 주는 말씀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의식과 맞는 것이니 맞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근히 속에다 우월감과 자만을 두고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죽었다
살아난다 해도 절대로 하나님 입장에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는 이 같은 인간 중심적인 해석들로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왜곡
하여 놓았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남자들 속에 가진 여자에
대한 우월의식이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속에 여전하여서 그런 눈으로 성경을 보니 여자가 남자를
돕기 위해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한 것으로, 그것이 합당하다는 것으로 봐 버린다는 말
입니다. 그래서 자기 믿음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요, 영적 저주를 스스로 품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의 저주가 그들 속에 여전하면서 자기에게 내려질 심판을 더 크게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경을 가르치려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이 남자라고 하신 그 '남자'의 영적인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여자'를 말씀하시면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인가? '남편'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열리지 않은 눈
가지고 성경을 보니 여자는 열두 지파에도 없었고, 제자들도 여자는 없었으니 여자가 가르칠 수
없다, 목회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못 박듯이 하여, 성경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남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인 것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주도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전한 것이
되었으니, 지금까지 언급한 바대로 속에 깔린 우월의식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말씀에 큰
오류를 범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관성 없는 그 모순 앞에 여성들 마음에 따라붙는 것이 있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은
아담에게 직접 하신 말씀인데 그럼 그것은 뭐냐?'하는 반발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끼리 그런
오해가 될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데 남성들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여성들 마음에 그 같은
반발심이 일어나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아담은 받아먹고 여자만 잘못한 것처럼 남자의 지배에 들어
가야 하느냐? 이건 너무 불공평한 처사다'하는 억울한 마음과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있게 되지
않느냔 말입니다. '누가 여자를 지어 달라 했느냐? 왜 하나님은 여자를 지으시고 이런 비천한
모멸감을 당하게 하시는 거냐?'하는 원망 조의 반발심이 들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평하지 않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런 질문 잎에 답변이 궁지에 몰리고 궁색해지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입막음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마음에서 시원
하게 동의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입 다물어 버리는 것이지 이런
식의 설교에 마음에서는 의문과 불평들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저도 또한 그랬습니다. 위의 말은
성경의 뜻을 깨닫기 전 제 모습이었습니다. 제 속에서 풀리지 않는 불쾌한 의문이 싹 터 '도대체
그러면 여자는 뭐냐? 누가 언제 지어달라고 했느냐? 왜 하나님은 여자를 지어놓고 이렇게 비천
하게 하느냐?'가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미 불의한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 나간 가인의 후예인 남자들 속에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과 같은 존재로 여기도록 뿌려 넣었습니다. 사단은 자기의 유혹하는 말을 받아들여
선악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고 먹게 한 여자를 '남편을 죄짓게 한 여자'라는
구실로 하여 남자들로 하여금 여자를 무시하고 소유물과 같은 존재로 여기도록 교만한 죄의
기질을 뿌려넣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죄의 속성이요, 이스라엘 남자들이
그같이 사단이 뿌려준 우월의식의 이기심으로 여자를 대하고 흘러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을
땐 결국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 속에 그런 저주의식을 가졌으므로 모두가 사단의
후손들이 되어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3장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좋은 씨, 생명의 씨를 뿌렸는데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그같이 자기의
소유인 인본을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사람들 속에 뿌려 넣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자기 사람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이 심지 않은 흡사한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사람들 속에 뿌려 넣는 일을 창세 때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은 뽑아 버리신다, 추수 때에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는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강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이기
전에 지금 가라지들을 묶는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어마어마한 가라지 단체들을 속속히 드러내
주시면서 지금 단으로 묶으시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때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1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입니까? 그러면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입니까?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아담을 놓고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아담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사람, 즉 남자든 여자든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서로 상호 간에 돕는 관계, 아담과 똑같은 사람이 있어서 서로
돕는 관계 그런 배필을 지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에젤 크네그도'의 뜻입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주인이 종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위해서 여자를 짓겠다, 오직 남자 시중을 들어주게 하려고 여자를 지으시겠다는 말씀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 위에 있어서 그 권위를 가지고 여자를 종처럼 지배하고
부리게 하려고 그 남자의 배필을 지으시겠다고 하는 말씀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는 말입니다.
남자의 육신적인 삶을 위해서 도우라고 여자를 남자의 시녀처럼, 여자를 종처럼 남자 도우라고
지었다 하신 말씀은 성경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서로 인격도 동등하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로서의
사람,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시겠다는 것을 말씀
하신 것입니다.
혼자 있는 것이 왜 좋지 못합니까? 남자들이 빨래를 못하고 밥 못해 먹어서 좋지 못합니까?
그런 것들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1:28에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신 것, 이 말씀의 뜻은 여러분이 이미 다 들었
습니다. 그러니까 이같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온 땅에 하나님의 사람들로
충만한 수가 되려면 혼자서 생육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생산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으므로 '사람의 배필을 짓겠다'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아담 한 사람만 창조하시려고 했는데 창조해놓고 보니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쓸쓸해 보이고 혼자 사는 것이 보기 안쓰러워서 그때야 '아! 안 되겠다, 아담을 위해 여자를
만들어서 시중 좀 들게 하고 심심풀이 도구가 되게 해야겠다!'라고 즉흥적으로 생각하여 여자를
지으신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아! 아담 혼자 사는 것이 참 쓸쓸해 보이구나,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 보이는구나!'하는 이런 유치한 따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난날 이런 식으로
해석해 주고 있는 징그러운 사람들, 징그러운 말들이 많아서 제가 일부러 지금 들먹거리는
것입니다.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께서도 누가 누구를 지배하시거나 지배당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또한,
창조주라고 해서 인간을 지어놓고 인간의 지배자처럼 폭군처럼 공산당같이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지 지배하시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인격을 넣어 지었기에 인격으로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지배자처럼 행하시는 분이
아니면서 또한 사람도 누가 누구를 지배할 수 있도록 지으신 적도 없고 지배하라고 권리를 주신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지배하려고 하는 그 지배욕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 아닙니다.
사단에게서 온 것입니다. 지배욕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해되고, 아셨습니까?
그러므로 남성이 여성을 하찮게 여겨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 남존여비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그의 속에 가진 지배욕에서 오는 것이요, 결국 자기 자신이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드러
내는 일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 아내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 자녀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 다 사단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악한 행위요, 교만한 행위입니다. 또한, 자기
자녀라고 해서 그 자녀에게도 명령하듯 하는 것 지배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단의 영향 아래
있는 세상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사단이 그렇게 남성들 속에다 지배욕과 우월의식을 뿌려
넣었습니다. 죄의 성품, 죄의 기질들을 뿌려 넣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성영님의 도우심에 의하여 하나님이 말씀하는 자기가 누구인가인 죄의 본질(본성)을
보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변화를 받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 20절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라고 시작해서 25절까지는 여자를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만드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으로 구원 얻는 뜻에 대한 예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담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아담'이라고 했을 때는 예수님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님을 깨달아 볼 수 있습니다. 또 '여자'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자는 누구를 예표한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의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넣으신 이스라엘을 예표한
것이요 또한 예수님으로 생명 얻는 신약의 교회입니다.
20절 하반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과 에덴과
선악과를 통해서 우리 인간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늘과 하늘의 일을 알리시고, 이루실 뜻에
대하여 예표로 보이신 것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다 들었고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 안에 계신 인성에게, 하나님의 뜻이 되신 분에게, 뜻이
되신 분이 누구예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에 계셨던 때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되시는 그 분과 함께할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자기의
형상을 따라 영과 인격을 넣어 아담과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여자가 바로
예수님의 배필입니다. 예수님을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는 뜻이에요. 알아듣습니까? 여러분이 항상
남자 여자 관계로만 돕는 배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여자는 아담을 돕게 하려고 지었다는
말만 듣다 보니까 이상한 말 듣는 것처럼 하시는데...., 아담과 여자가 예수님을 돕는 배필로
지어졌다 하니까 이해가 안됩니까?
다시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 그분이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 말씀(신성과 인성)으로 계셨다고 사도 요한이 말했잖습니까? 만물이 그로 말미암았고
인성이신 그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인성은 사람의 본체요 예수님이 사람의
본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 사람입니다. 참 사람의 실체이신 그를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의 형상을 한 아들을 많이 두시고 아버지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체이신 인성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다음 하나님의 형상이신 인성이 하나님에게서 나와 육신으로 오셨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시고, 그 맏아들의 부활의 생명을 얻은 자는 아들의 영, 맏아들의 영(성영님)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이 같은 뜻을
이루시는 데 돕는 배필이 될 사람, 즉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돕는 자로 지음을 받은 예수님의 배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돕는
하나님의 배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덴동산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담과 여자가 돕는 역할을 분명히 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눈으로 겉의 표면만 볼 때는 '여자가 선악과 따 먹고 아담에게 줘서 그야말로 죄짓게
했기 때문에 뭐 남편보고 다스려라' 그런 뜻으로 받아들여 엄청난 모순이 따르고 있지만, 영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신 말씀을 듣고 보니, 바로 아담과 여자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 배필의
역할이었다는 것, 그것이 곧 사람이 지음을 받은 뜻이요, 영원히 행복한 아버지 나라에 가는
길이라는 것 우리가 알 수 있었잖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아멘의
동의가 기쁘게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또한, 그 사람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살아가야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생명을 공급받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선이 되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고, 모든 인간은 선이신
하나님께 나와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과 창3:16에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는 말씀을 포함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하시는 뜻을 보지 못하면 어디로 흐르느냐, 곧 사람끼리만 생각하고 남자, 여자만
중심이 돼서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인간 도덕, 윤리나 도리로 흘러 버리고 만다는 걸
이제 알아들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앞서도 말했다시피 '아, 여자는 남자를 도우라고 지음을 받았으니'하는 그런 남존
여비의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자기 아내에게 당연하게 하인 부리듯 하는 태도를 고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믿는다는 사람들이 목회자고 신자고 남자고 여자고 간에 할 것 없이 하나님이
주신 권리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 믿는다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명령하고 지배하는 존재요,
여자는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뻐 보이려고 얼굴을 화장으로 분장하고
옷차림으로 분장하고 아양을 떨고, 이런 음욕 적이고 세상 적이고 정욕에서 나는 더러운 죄들을
여전히 풍기고 있습니다. 참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권리, 예수님의 돕는 배필의 관계
로서의 권리를 찾아야 하는데 찾을 능력들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더러운 권리 육체의 욕망에 붙들려서 그것을 목적처럼 여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곳에는 하나님 말씀의 뜻, 본뜻을 보지 못하면 여전히 타락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고 겉으로만 거룩한 척 탈만 바꾸어 쓰는 것입니다. 영적인 간음, 영적인 음란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배필로서의 권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신부의 자격입니다. 그것은 곧 오늘 하나님의 의도인 돕는 배필의 뜻에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는 단연코 남자들 쪽이 더욱 깨닫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성편도 여성
편도 아닙니다. 편 가르자고 이 말씀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런 뜻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래서 21,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구원의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과정입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했다, 죽은 것과 같게 했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여자는 교회를
예표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을 때, 그러니까 숨이 끊어지셨을 때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했습니다(요19:34). 피는 죄를 대속하신
것이요, 물은 영생수가 되시는 성영님이 죄 씻음을 받은 자 안에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오
신다는 것이요, 그래서 요일5:5-8에 예수님이 물과 피로 임하셨는데 이것을 성영님이 증거하
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여 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드신 것은 예수
님이 물과 피를 쏟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기의 신부가 되는 배필, 즉 교회가 나올 것임을
예표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이끌어 온 자기 몸의 일부인 여자를 보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아주 감격하며 감탄을 했습니다. 아담의 이 감탄사는 남자의 뼈 중의 뼈로 살 중의
살로 만들어진 흠이 없는 최고의 배필이라는 말입니다. 곧 자신에게서 나온 가장 아름다운
유일한 배필이라는 뜻이에요. 생육의 능력을 갖춘 완벽한 짝이라는 말입니다. 생육의 능력을
갖춘 짝! 하나님이 말씀하신 생육의 능력을 갖춘 아주 완벽한 배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말하기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전부 아담에게로 이끌어다가 이름을 짓게 하셨잖아요? 그 많은 동물의
이름을 지으면서 보니까 전부 암수 짝이 있어서 새끼가 생산된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혼자서는 생육을 못 하는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아담 마음 속에(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성영님께서 주신 감동으로 드리는 말씀인데)'아, 생육하려면 짝이
있어야 하는구나!'하고 안 겁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이것을 자기 의지로 바라기를 원하셨
습니다. 그냥 무조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에요. 오늘날도 우리가 바라지 않으면 안 주
신다 그랬잖아요?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는 분이요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시잖아요? 그러므로 아담에게 그것을 바라도록 모든 동물을 아담 앞으로 이끄시고 이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아담이 자기에게도 생육할 수 있는 생육을 돕는 배필을 바라게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아, 남자에게서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생산되는 것이구나! 아, 남자에게 사람이 나는 씨가 있구나!'하는 것을 아담이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씨를 받아 키워 내는 것이 여자라는 것을 아담이 영감(직감)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자기 몸에서 나온 또 다른 사람을 밭이라는 뜻을 가진 여자라 칭한 것입니다.
아담이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한 것은 남자 홀로 있는 것은 생육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었으나, 그 생육을 돕는 여자가 있어 완전케 되었다 라는 말입니다. 또다시 말하면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고 여자에게서 남자가 나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다고 할 때 남자는 누구를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여자는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교회를 말합니다. 신앙입니다. 그러면 여자에게서 남자가
나온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생명의 뜻을 가진 하와, 즉 여자의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첫 사람인 아담과 여자가 예수님을 돕는 배필의 역할이
었습니다. 사단에게는 비밀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맞으러 오시는 그 뜻에 아담과
여자에게 예수님 오실 길의 돕는 배필의 역할이 되게 하셨습니다.
제가 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씀에 관심 있었다면 이제는 영적 이해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예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예수님 없이 살 수 있도록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이제 육체가 이 땅에서 떠날 때는 정말로
핑계 댈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속에다가 예수님이 아니면 살 길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놓고 이것을 교회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으로 살게 하는데다 목적을
두도록 가르쳐 전하라 하셨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핑계치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아무
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핑계 댈 수 없어요. 아셨습니까?
또한, 부부에게도 적용되기도 합니다. 24절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는 부부의 의무와 책임과 권리가 부여되었다는 것을 알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부모에게 의존하던 것을 떠나서 독립된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부부가 서로
존중하며 예수님을 중심한 사랑으로 하나 되어서 어려움도 이겨 나가고 성실함으로 연합하고,
육체로도 정신적으로도 영으로도(예수 그리스도로) 연합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시는 뜻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굉장한 책임입니다. 이 책임에 관해서는 제가 여러분에게
누누이 말했습니다. 결혼은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자녀를 혼인시켜도 사명감을
부여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나 현세적으로 잘돼서 잘 먹고 잘살라고 하는 것들을 넣어줘서
그것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 일생을 육체를 위해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결혼이란 굉장한
책임이요, 사명이요, 하나님의 일을 돕는 배필로서 두 사람의 결합 속에 사명을 부여하여 세운
것이 결혼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 안에서 부부에게 주신 사명,
가정에 주신 사명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돕는 배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도록 하는 일에 하나님을 도와
그 영적인 일을 수행했고, 그다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자녀 생산의 복을 주시고 명을 받은
구약의 결혼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게 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뜻도 모르는 인간끼리의 결혼을 말하기 위해서라면 성경이
기록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성경이 이것을 말하지 않아도 본능으로 알아서 다 결혼합니다.
만일에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지라'만 말씀했다면 이것이 짐승하고 다를 것이 뭐
있겠습니까? 가정이 한 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무릎 꿇어 섬기는 복을 받은
사람들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충만해질 때까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이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한 몸을 이루는 사명을 깨닫고 오직 그
목적이 되어 결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볼 때 참 안타깝고, 결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결혼은 짐승과 일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두려운 감마저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성경에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골1:18,
엡1:22,엡5:23). 그러면 교회는 예수님의 무엇이라 했습니까? 예수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엡1:23). 그렇다면 누구를 교회라 했습니까? 예수님 안으로 들어온 그 믿음이 교회다, 그
믿음들이 있는 곳,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교회라 했으니 이 교회가 예수님의 무엇이 된다고 했습니까?
지체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예수님 몸 안에 들어온 지체요 한 몸입니
다(고전12:27,골2:17).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한 몸입니까? 아닙니까? 바로 예
수님과 우리가 한 몸을 이룰지로다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남자와 여자만의 관계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으로 연합된 관계, 예수
님은 신랑이요, 우리는 그의 신부니 '예수님과 연합하고 한 몸을 이룰지로다' 까지를 말씀하
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2:24에 남자가 누구를 떠나서 아내와 연합하라고 했나요?(부모를 떠나서) 그래서
오늘날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이 땅에 신부를 맞으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 연합
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과 한 몸을 이뤘습니까? 아버지
뜻으로 연합해서 참으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 뜻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사는 길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24절 말씀의 뜻입니다.
호2:19에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하셨습니다. 신앙 가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했습니다
(호2:19-20).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즉 네게 장가들리니 나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부부라는 것은 바로 경험의 관계잖습니까?
부부의 귀중함은 바로 사랑인데 육체적, 정신적 이런 사랑이 귀중한 것이 아니라 바로 끝없이
용서가 필요한 것 가정을 지속하는 것은 용서밖에 없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귀중한 사랑입니
다. 성경은 용서가 없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데, 긍휼히 여기시겠다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진실함으로 너에게 장가들리니 네가 나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하신 겁니다.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장가들러 오셨잖아요?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신부인 우리에게
오셔서 장가들어 같이 영원히 살 것이라 하고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에 혼인잔치
이야기들이 나오잖아요, 계3:20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셨는데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너희가 내 안에
들어오고 나는 너희 안에 들어가서 같이 먹고 마시고 자고 생활하겠다'하셨으니 이 이상의
연합과 한 몸 이룬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과 연합하기 원하는 그 간절하심을 사람이 결혼하는 경험 위에 두시고
하나님 자신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연합의 관계를 중심하여 말씀하시는 데 목적을 두신 것이지 인간 결혼에
대해서 다루시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결혼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죄는 아닌데(바울도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신약 때는
결혼 안 할 수만 있으면 안 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왜냐? 구약의 가정의 사명은 생산의
사명이었는데 거기에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은 가정을 통해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시는 일이였
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졌으니까 이제 너희가 복음 전하는 사명을 가졌으면 그냥 혼자 살면서
복음 전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을 섬기려면 또는 아내를 섬기려면 가정과 자녀를
돌보려면 고난이 있고 거기에 묶여 버릴 수밖에 없으니 시집가고 장가간 자는 세상일에 염려에
매일 수밖에 없으니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말한 겁니다. 더욱 복이 있으리라.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 죄는 아니지만 묶일 수 있기에 너의 영적인 것이 손해가 되지 않겠느냐?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혼자 지내면 영과 몸을 거룩하게
하면서 어찌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에 마음을 둘 수 있는 것 아니냐, 혼자 지내면서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참으로 동의합니다.
정말 오늘날은 날이 가면 갈수록 아주 심각하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믿는다 해
도 믿음보다는 인간 혈통 잇기 위한 데다 두고 있는 것 보면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예수님과 교회를 예표하고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하나 됨으로, 참 하나님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임을 예표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보았습니다.
이 엄청난 비밀,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만남의 관계를 '연합한다, 한 몸을 이룬다, 장가든다'
라고 표현하시면서 바로 인간의 영도 혼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도 의지도 감정도 예수께 순
종하고, 삶도 예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그런 전인격적인 사랑, 전인격적인 순종, 전인격
적인 헌신이 되어 하나 된 사랑이 되기를 원하신 뜻을 우리에게 두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는 자 이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멘입
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믿음을 바르게 인도하신 삼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제9장 예수님을 돕는 배필, 예수님과 연합, 한 몸. p197-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