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내 삶의 든든한 원천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중에서
2023. 4. 향기 이영란
옷장 안에 안 쓰는 가방이 나왔다. 들고 다니는 가방 몇 개만 줄창 가지고 다니는 나는 손잡이 부분만 손을 보고는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죽을 세로로 재단해서 이어 만든 재질인데, 가죽이라는 것도 비쌀 뿐더러, 그 수공과정이 품이 많이 들어 비싸게 주고 산 가방이었다. 50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내 돈 주고 그만한 돈을 들여서 사지는 않는다.
기억에 의하면 이 가방은 2014년 경, 내가 광도초로 갈 때 강구안에 있던 이새라는 가게에서 겨울 옷 몇 벌과 함께 산 것이다. 그 때 함께 샀던 옷도 그렇고, 뒤에 가서 한 두벌 샀던 그 브랜드 옷은 오래 입지 못했다. 오버핏에다가 구김이 잘 가서 나는 옷을 잘 살려 입지 못했고, 많이 어색했다. 어쨌든 당시에는 가방을 포함해서 비쌌다. 엄마가 돈을 지불했다.
우리 엄마는 노령연금, 국민연금 포함해서 50여만원, 내가 드리는 생활비와 무슨 일이든지 일을 해서 버는 조금 부정기적인 월급과 밭농사에서 나오는 채소를 팔기도 해서 수입을 얻는다.
나라면 엄두조차 내지 않을 가방이나 지갑을 한번씩 사서 준다. 함께 계를 하는 아줌마들이 어쩌다가 백화점을 가거나 할 때, 1층 매장에서 파는 가방을 사 온다. 나는 백화점 입구 안쪽에서 세일해서 파는 곳에서도 가방을 산 적은 별로 없다. MCM 같은 브랜드는 거제시 사등면 청포마을에 사는 강둘재 여사 덕분에 알게 되었다.
아들 둘이 성인이 되어 집을 나가서 살다보니,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실감을 한다. 남남 비슷하게 되는 관계, 걱정은 되지만 알아서 잘 살기를 바라는 관계, 굳이 도와줄 필요가 없으면(이 지점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해석이 달라지게 된다) 어느 정도 선을 그으며 사는 관계. 그러나 이 정의는 강둘재 여사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강여사는 어릴 적에 그럴듯한 부잣집은 아니었으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풍족한 사랑 속에서 살았다. 나는 부자에 대한 기준이 높지는 않다.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느나 벼농사를 지을 땅이 있었고, 쌀이 떨어지거나 할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실제로 엄마가 열일곱여덟살 때 친구들과 한산도 제승당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에 있는 입성은 50여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꽤 근사하고 예쁘다. 나보다 훨씬 더 복스럽게 생긴 강여사는 지금도 웬만한 옷을 잘 소화시켜낸다. 당시에 배를 타던 선원이었던, 기름때에 절어 꼬질꼬질했던, 꿈도 야망도 그저 그랬던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강여사는 결혼을 하고 난 후 인생이 풀리기는커녕, 그야말로 고생길이 열렸다. 시댁에서 금전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받은 지원은 없었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큰아들내외에게 모든 수입을 일임했다. 할아버지는 6.25때 세 아들을 잃고 국가유공자였다. 작은 동네 아래채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악착같은 생활력이 없었던 아버지는 조선소를 조금 다니시다 그만 두고, 이런 저런 일을 전전했지만 나중에는 그나마 객지에서 그 당시 도로건설에 한창이었던 때에 일을 해서 생활비를 댈 수 있었다. 그러나 집을 떠나 지내느라 불규칙한 생활리듬과 지나친 음주로 인해 몸이 망가져 노후에는 많은 고생을 하셨다. 아버지는 객지에서, 엄마는 집에서 밭농사와 논농사를 지으며, 살림을 건사하며, 장을 다니며, 때로는 공장을 다니며 일했다. 그리고 우리 남매를 키웠다. 그 세월을 나는 결코 가늠할 수 없다. 그 시간들을 엄마 스스로의 언어로 그려보게 하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하다.
나는 어린 시절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좋은 걸 많이 먹고, 예쁜 옷을 사 입은 것은 아니지만(그랬을 리가 없다), 어렸을 적 사진을 보면 촌스럽긴 하지만 계절에 맞게, 상황에 맞게 입었다. 엄마가 내게 성질을 부린 적도 물론 있었지만, 엄마라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해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면 단위에서 지냈던 중학교를 떠나 통영의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는 부유해? 보이는 아이들의 옷차림과 돈의 씀씀이에 주눅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나를 지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질적인 가난은 엄마의 크고 큰 절대적 사랑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아내와 남편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그저 싸우지만 않으면 큰 관심이 없다. 자주 싸우긴 했지만 두 분 모두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걷어치우지는 않았다. 울타리 안에서의 시간은 두 사람만이 알 것이다. 딸이 결혼한 후에도 그 사랑의 강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강여사는 두 아들을 모두 건사해 내었다. 내게 그런 사랑을 퍼부었던 것처럼 아들에게도 그런 따뜻한 사랑을 전했다. 어쩌면 내게 못한 사랑까지 모두다 부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할머니가 되면 내가 아들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전해주고 싶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6.25 전쟁 때 빨치산 활동으로 18년 여간의 감옥생활을 한 아버지를 둔 정지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다. 부모님 모두 빨치산 활동을 한 분들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3일간의 장례를 치르며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진 소설이다.
작가는 말한다.
아버지는 그냥 현실을 살았던 사람이다. 어느 순간 사회주의를 믿지 않았으니까. 다만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애썼다. 환경운동 단체를 만들고 젊은 친구들이 뭘 하면 거기에 가고 눈 오면 눈을 치우고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산 것 같다. 빨갱이라서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이데올로기는 옛날부터 생활이었는데 나만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한겨울에도 차가운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다. 엄마가 심장에 품어서라도 따뜻하게 녹였다. 아버지는 나만 보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발이 땅에 닿지 않게 했다. ‘어디 여자가.’ 이런 말 한번 들어본 적 없다. 부모의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자랐다. 가난이나 부모의 이데올로기 같은 건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이해할 수 있다. 부모가 미성숙해 아이를 학대하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건 다르다. 다 커서 언제까지 부모 탓을 할 거냐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는데 지나고 보니 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교정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거고 누구의 사랑이나 지원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그걸 극복할 힘이 없는 게 아닌가 싶더라. 그래서 어디 가서 고생했다는 말 안 한다.
엄마는 내게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주었고, 아버지는 곁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다. 나는 내 삶의 든든한 원천은 부모가 준 그 사랑의 힘이라는 생각을 오래오래 했다. 60이 다 되어가는 작가에게 지금도 어머니는 “니는야 미스코리아 깜이여”라고 말한다고 한다. 되지도 않는 말을 많이 들은 작가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하루는 정색하고 따져 물었다고 한다. “그게 니는야 귄(귀여움의 전라도말)이 있어야”라고 돌려댔다고 말한다.
살림이 어렵지도 않은 딸에게 안긴 50만원짜리 가방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나는 아들들에게 내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과 희생의 얼마를 물려줄 수 있을지, 살아계신 엄마에게 얼마를 돌려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서는 부끄러워지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