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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2
마태복음 1장 21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3문부터 58문까지가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인데, 지난 시간까지 성부 하나님과 관련하여 창조와 함께 섭리까지의 내용을 살폈습니다. 오늘부터는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과 관련하여 살필 것인데, 사도신경의 내용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자의 이름과 관련하여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의미를,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고 우리 주라고 부르는 의미를 살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지위에 대해서도 살필 수 있는데, 그의 낮아지신 신분과 높아지신 신분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그분의 직분, 즉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부분에서 그의 신성을, 그런 그가 성육신하셨다는 부분에서 그의 인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라고 할 때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성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할 때 참된 믿음은 반드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습니다. 이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특별히 인성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삼위일체와 관련해 살핀 바 있지만 성부는 전 신성의 근원이십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신 분이십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는 역순이 성립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성경에 그렇게 기록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보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할 때 성령이 성자를 보내실 수 있는가?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의 인성과 관련해서는 보내실 수 있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그가 보내신 자’라고 할 때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아는 것이라고 할 때도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정도만이 아니라 그 지식이 영생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지식과 함께 신뢰가 있는 참된 믿음에 대한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믿음인가? 앞에서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는 그의 이름과 그의 지위, 그리고 그의 직분과 그의 본성을 살필 수 있다고 했는데, 그의 이름을 통해, 그의 지위를 통해, 그의 직분을 통해, 그의 본성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첫 번째 내용으로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29문. 하나님의 아들을 왜 예수, 즉 구주라고 부릅니까?
답. 그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이요(마1:21, 히7:24-25), 또한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을 찾아서도 안 되며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행4:12, 요15:4-5, 딤전2:5, 사43:11, 요일5:11).
오늘 본문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통해 친히 성령으로 잉태된 자의 이름을 주시는데,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이름의 뜻을 밝히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말은 구약의 여호수아의 헬라어식 표기인데, 구약의 여호수아, 신약의 예수가 다 같은 의미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성령으로 잉태된 자의 구원이 어떤 의미인지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경우 여호수아라 이름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모세의 후계자로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이 여호수아 외에 또 다른 한 사람을 주목할 수 있는데, 학개 1장 1절에 나오는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여호사닥의 아들로 대제사장입니다. 학개서의 배경이 바벨론 포로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는 바벨론 포로 생활 중이던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나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을 총독 스룹바벨과 더불어 수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 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광야 생활 가운데서 가나안으로 인도한 사람이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포로 생활 가운데서 가나안으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으로 구원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베푸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 생활에서의 구원과 포로 생활에서의 구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지상적인 것입니다.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입니다.
반면 성령으로 잉태된 자의 구원은 지상적인 구원, 일시적인 구원과 분명 다릅니다. 광야 생활에서의 구원, 포로 생활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그러면서도 총체적인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에서 보여준 여호수아의 구원, 다시 말해 지상적인 구원, 일시적인 구원은 영적인 구원, 영원한 구원을 보여주는 그림자요, 모형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실상과 관련하여 본성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살폈습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창조하실 때는 선하게 만드셨지만 선하게 만들어진 사람이 불순종함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그 타락은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우리는 조금의 선도 행할 능력이 없고, 오히려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지녔을 만큼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그리고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형벌을 피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도록 하셨는데,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 구원하시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이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오늘부터 배우게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구원하신다는 것은 죄로 인한 형벌을 피하게 만들고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죄로부터 구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 우르시누스는 그가 죄책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가장 먼저 죄책에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고, 죄책의 결과 형벌이 있기 때문에 죄책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그 결과인 형벌에서도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형벌 또한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설명하자면 죄는 원죄와 자범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원죄는 죄책과 부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 혹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할 때 그 죄는 원죄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지만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함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죄책에 대한 형벌로 전적 부패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가 죄를 짓는 것, 이것이 자범죄입니다.
조금 전에 죄책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할 때 죄책은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죄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형벌은 우리가 부패 아래 놓이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책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죄책과 그것의 형벌인 부패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온전히, 완전히 구원하신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24절과 25절에 보면 이런 구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온전히 구원한다는 것은 죄와 관련된 모든 것들, 즉 죄책, 죄의 권세, 죄의 결과물들로부터 온전히, 조금도 남김없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는데,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피 흘림이 없다면 사함도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즉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피 흘러 죽어야 하는 일이 있는데, 본래 우리가 피 흘려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이 사자를 통하여 마리아에게 말씀하시면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21)고 하실 때 이미 그 이름 안에 이런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자체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할 때 그 대상이 누구냐에 대한 언급도 분명히 하고 있는데, 다시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는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신데, 그 대상이 누구냐? 자기 백성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입니다. 모든 자가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칭해지는 자들, 그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자기 백성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은 누군가? 어떤 사람은 불특정 다수를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다수, 좀 더 그럴듯하게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믿는 자가 구원을 받기 때문에 믿는 자가 자기 백성으로 칭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믿는 자, 그것도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자기 백성으로 칭해지는 자들이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특정 다수라고 말할 때는 영원 전에 정해진 바가 없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믿는 자에게 달린 문제처럼 말하는데, 이런 이해는 결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일단 선택과 관련된 몇몇 말씀을 찾아보면, 우선 사도행전 13장 4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자기 백성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은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지만, 누가 믿는가 할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그가 믿습니다. 믿음에 앞서 부르시는 일에 있어서도 누구를 부르시는가? 로마서 8장 3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물론 부르심에 있어서 일반적인 부르심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부르심이 있다고 해서 다 믿음을 가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효력을 발휘하는 부르심은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2장 14절은 이렇게 증거 하기도 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에베소서 1장 4절에서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씀하기도 하며, 5절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택과 함께 성경은 유기에 대해서도 말씀하는데, 로마서 9장에 보면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과 관련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1-13) 같은 로마서 9장 22절과 23절에서는 다음의 말씀도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는 말씀도 있고, 마태복음 13장 11절에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유기와 관련하여 말할 때 요한복음 6장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라는 말씀도 하시고, 요한복음 8장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7)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이란 결코 불특정 다수일 수 없고, 영원 전부터 어떤 이들은 선택하시고 또 어떤 이들은 유기하셨다고 할 때 영원 전부터 선택하신 그들이 자기 백성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입니다. 이때 영원 전에 어떤 이들은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유기하신다고 할 때 유기로 인하여 하나님은 불의하신 것이 아닌가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9장 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불의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일단 유기의 원인과 정죄의 원인을 구분해야 합니다.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입니다. 간혹 죄가 유기의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선이 선택의 원인이 아니듯 유기의 원인도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정죄의 원인은 죄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정죄를 받는 것이지, 유기가 되었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지만, 그래서 정죄를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구원자로 주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대신하여 받으심으로 더 이상 우리가 정죄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죄의 원인은 죄이고, 죄는 사람의 자유의지로부터 온 것이지만, 구원의 원인은 우리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선택에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라는 이름 안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가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사실과 그 대상에 있어서 자기 백성이라고 칭해지는 자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우리의 모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라고 할 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예수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을 찾아서도 안 되며 발견할 수도 없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로, 또한 구원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은 여러 명이 아니라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사도행전 4장 11절과 12절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한 구절만 더 언급하자면 요한일서 5장 11절과 12절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물론 성자만이 구원자는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창조와 관련해 성부 하나님만의 일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부도 창조주시지만, 성자도 창조주, 성령도 창조주이십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자만 구원자이신가? 성부도 구원자시고, 성령도 구원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가 유일한 구원자는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삼위 모두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에 개입하셨지만, 구별할 필요는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구원의 근원으로서 성자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중생의 직접적인 시행자 혹은 성취자로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성자는 유일한 구원자가 되사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를 위해 죗값을 지불하시고 성령을 주사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효력은 삼위 하나님 모두에게 공통적이지만, 그러한 구원의 방식은 성자에게만 고유한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그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오직 성자만입니다. 그래서 유일한 구원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자를 가리켜 유일한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구원자가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시지만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예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면서도 동시에 자기들의 구원을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자들에 대하여 비판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0문입니다.
30문. 그렇다면, 성인들에게서나 자기 자신에게서나 혹은 다른 데에서 자신의 구원과 복락을 찾는 사람들도 유일하신 구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그들은 말로는 유일하신 구주 예수를 자랑하나,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합니다(고전1:13,30-31, 갈5:4). 예수가 완전한 구주가 아니시든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하는 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그에게서 찾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인 것입니다(히12:2, 사9:6, 골1:19-20, 2:10, 요일1:7, 요1:16).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중보자요,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위한 다른 어떤 것도 믿지 않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라고 하면서도 그들이 행하고 있는 바들을 보면 그들의 말이 무색한 것처럼 나타날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리문답 질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성인들을 의지하거나 자기 자신을 의지하거나 다른 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중보와 관련된 부분에서 언급한 바가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성인들과 천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중보 사역을 행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구원 사역을 이룬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하지만, 중보 기도 사역에는 다른 중보자들이 동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들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중보자로 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죄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고백하는 고해성사는 어떻습니까? 고해성사와 함께 자신의 죄를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르는 보속 교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중보자로 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런 것에 대하여 그들은 말로는 유일하신 구주 예수를 자랑하나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한다고 말합니다. 말로는 성경에 따라 고백하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중보자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구원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구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톨릭의 교리는 결코 구원의 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톨릭만의 문제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0문이 가톨릭에 대한 비판으로 온 것은 분명하지만, 개신교 안에서 성인들 혹은 자기 자신 혹은 다른 데서 자신의 구원과 복락을 찾는 사람들이 없는가? 알미니안주의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여기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구원이 하나님께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인간의 중생과 회심은 성령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인간 의지의 제한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신율법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개혁교의학 3권 49장 421, pp.661-62).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자의 칭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가 아니라, 비록 불완전하지만 신자 자신의 신실한 의에 둔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량했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그들 모두를 ‘구원 가능 상태’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옛 율법인 행위언약의 율법이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의를 요구한 반면, 이제는 그리스도가 믿음과 회개, 비록 불완전하지만 참회하는 죄인의 신실한 순종에 만족하는 ‘새로운 법’인 은혜의 법을 도입했기 때문에 새로운 법에 대한 우리의 순종, 즉 우리의 믿음과 회개를 통해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믿음과 회심을 강조할 때 이런 의미에서 강조하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율법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 리차드 백스터인데, 청교도 인물이란 이유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집니까?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요리문답 30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하고도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그 구원을 다른 이에게 넘기거나 혹은 부분적으로만 구원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만이 홀로 구원 전체를 지극히 완전한 방식으로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곳에서 찾는 자들은 모두가 실상은 그가 유일하고도 완전한 구원자이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에게 돌리는 모든 공로의 내용은 행위로 우리의 유일하고도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라고 해서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자고 하면서 구원의 길이 종교마다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데, 이러한 사상은 성경에 대한 도전이요 성경의 참된 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전이 기독교를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로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교회를 누가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안으로는 거짓된 교리로, 밖으로는 수없이 많은 박해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 갔습니다. 마치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참된 교회를 보존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교회를 보존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본문으로 살폈지만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면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을 소개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 7장에 있는 부분을 인용한 말씀인데,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그러나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가 주의 몸 된 교회를 보존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번역하면 하나님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죄란 무엇입니까? 우르시누스가 정의한 것에 따르면 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이요, 의의 결핍이든 혹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는 성향이나 행동이든, 무엇이든 간에 율법을 대적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하나님을 거스르며, 피조물을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복속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인으로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예수라는 이름의 뜻 안에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 받은 자는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 된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 된 자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이상 누구도, 어떤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혹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의 손을 놓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신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로 계시며, 우리의 구원자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중보자요,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다고 할 때 우리의 중보를 위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기 때문에(고전1:3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합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과 1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또한 히브리서 4장 14절 이하 16절은 이렇게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마지막으로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히브리서 7장 24절과 25절입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