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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의 좋으심 측량법>의 줄거리:
하나님이 좋으십니까? 이전에 배우자나 자녀가 좋고 친구가 좋고 건강과 돈과 승진과 명품이 좋았듯이 이제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고 계십니까? 그런 느낌이 없었다면 이유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좋으심은 그 좋으심의 정도를 측량할 수 있을 때라야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 측량법을 알아봅니다.
하나님의 좋으심 측량법
(마가복음 4:21~25)
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좋으심 측량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 측량법’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좋으심을 고백은 하지만 실제 삶에서 느끼는 체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느끼지 못한다면 그 고백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좋음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학력이 없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배운 사람 앞에서는 열등감을 느낄지라도 없는 사람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돈은 좋음을 주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좋음을 주는 대상이 뚜렷하다면 다소 안 좋은 일들이 겹치더라도 얼마든지 좋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부르는 성도들이라면 삶에서 좋음을 주는 대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또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좋으심을 정말로 느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다른 좋음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삶에서 좋음을 느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좋으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반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좋고 항상 기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을 요약해보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그 좋으심을 느끼게 해주실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네 가지 밭에 떨어진 씨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나타나는 마음의 반응을 네 가지로 드러내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또한 이러한 내용과 관련되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면서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마음의 반응에 공통된 속성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속성이란 바로 마음은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크기의 공백을 가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공백에서는 빨아들여서 채워지려는 힘이 발동합니다.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빨아들이고자 합니다. 좋음이라는 표현과 연관시키자면 마음은 좋게 여겨지는 대상을 빨아들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는 등불 비유가 나옵니다. 21절을 보면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2절부터의 말씀이 상당히 난해합니다. 22절을 보면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이 어려울 수 있다고 여기셨는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덧붙이셨습니다.
22절 말씀에 번역상의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부정을 다시 부정하는 표현이 어려울 뿐인데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고쳐보면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숨겼고, 나타내려 하기 때문에 감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숨긴 것이고,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친구들이 모여서 당사자에게는 비밀로 하고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합니다. 심지어 생일을 맞은 당사자는 섭섭할 정도로 친구들이 내색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는 척을 합니다. 생일을 맞은 사람은 처량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섭니다. 그러자 축포를 터뜨리고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광경이 22절 말씀의 내용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끝까지 드러내지 않으려고 숨긴 것이 아니라 가장 극적인 순간에 드러내기 위하여 숨겼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애인에게 청혼을 하려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좋은 식당을 예약하고 맛있는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디저트로 나오는 아이스크림 속에 다이아반지를 숨겨두었습니다. 반지를 숨긴 이유는 다이아반지를 감춰서 못 보게 하려고 숨긴 것이 아니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언제 나타내시고자 감추셨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실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통해 그 이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으니 숨겨져 계신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숨기고자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내고자 이름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깜짝 생일 파티처럼 숨겨진 다이아 반지처럼 합당한 때에 스스로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먼저 숨겨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베드로의 변화산 경험을 통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베드로는 산 아래에서 일어나던 모든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산 아래는 곧 인간세상입니다. 가족도 꿈도 비전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았던 것입니다. 마음에서 이러한 좋음을 느꼈던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산에서 계속 살고자하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본래 산꼭대기는 사람이 살만한 환경적 조건이 아무것도 구비되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조건이 아무런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상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뵙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천사 중 하나에게 솔로몬 왕이 누렸던 부귀영화를 줄 테니 땅에 내려가서 사람으로 살아보라고 하신다면 어떨까요? 그럴 때에 감사하다며 기뻐하고 땅에 내려갈 천사는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보고 산 아래의 일들을 모두 잊어버렸던 것처럼, 하나님을 뵙고 있는 천사들에게는 솔로몬 왕의 영광 같은 것은 관심을 둘 대상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는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만약 이 이야기에 하나님이 끼어드시게 된다면 이들의 사랑은 성립조차 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혼기를 맞이한 젊은 남녀에게 김태희 씨 같은 아내 장동건 씨 같은 남편을 얻는 것은 로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천사들에게 김태희 씨나 장동건 씨 같이 멋진 사람과 결혼을 하는 대신 세상에 내려가 살라고 한다면 아무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솔로몬 왕의 부귀영화를 세 배 준다고 해도, 광개토대왕의 영토의 열 배를 준다고 해도 오히려 저주나 형별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좋으신 하나님과 천국의 모습을 왜 우리에게 숨기시고 감추시고 계신 것일까요? 변화산 사건이나 예수님을 비롯한 성경의 말씀을 통해 증거 된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음으로 느끼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은 돈보다 좋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건강보다 좋으신 분이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듣는 대신에 믿음이라는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의 좋으심은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육체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게 드러내신다면 하나님을 믿는 데에는 아무런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천사들이 그러하듯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또한 증명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감추어진 좋으심을 느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좋으심이 측량되어야 합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헤아린다는 것은 헬라어 메트레오(μετρέω)로써 측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나타난 22절의 말씀에 이어 24절의 말씀도 난해합니다만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 자체는 정확합니다. 오히려 공동번역이나 다른 번역본에서 나타나는 번역이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면 “너희가 측량한 분량대로 받을 것이며 측량한 것보다도 더 많이 받을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믿음을 측량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측량한 만큼 좋으심을 느끼게 해주시고 그에 더해 더 많이 느끼게 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좋으심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을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은 우리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과의 비교로써 측량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한 측량이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란 안정된 삶의 근간입니다. 아브라함은 삶의 근간을 버리고 떠날 만큼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산 아래 일들을 망각한 것처럼 아브라함은 이 삶의 근간을 대단치 않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치안부재의 고대사회에서 외부인과 방랑자는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고향 밖에서는 누구도 아브라함을 반갑게 맞아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좋으심과 고향의 좋음이 마음에서 측량되고 있었고 하나님을 더 무겁게 느꼈던 것입니다.
아내인 사라에 대한 대응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라는 보는 남자마다 탐을 낼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얻고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포기했던 것처럼 아내 또한 포기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 아내를 지킬 수 없다고 여겼기에 포기함으로 나타난 행동이었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내면에서는 하나님의 좋으심과 아내의 좋음의 측량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하나님을 더 좋게 느꼈던 것입니다. 훗날 이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측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과의 비교를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한 측량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때에 내게 주어진 것들이 전혀 좋게 느껴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족도 잊고 나라의 독립도 잊고 출세도 잊은 채 예수님과 함께 살기를 바랐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천사들에게 솔로몬 왕의 부귀영화를 세 배 준대도 세상에 내려가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서는 이러한 마음가짐이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고 고백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한 여성에게 첫 눈에 반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 바에는 평생 혼자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자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마음에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여성과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게 됩니다. 이 여성이 너무도 좋지만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것보다 좋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좋아하던 마음의 크기가 하나님의 좋으심을 담는 그릇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어떤 사람이 명품백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명품백을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명품백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가질 수만 있다면 명품백을 길거리의 돌처럼 여기게 될 것이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이렇게 내게 주어진 좋은 것들, 내가 갖고 싶어 하는 좋은 것들, 내가 소원하는 좋은 것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러한 대상들이 하나도 좋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좋으심은 측량한 만큼 주어질 것이고 또 측량한 이상으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 여성을 사랑한 청년이 이 여성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측량하였고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이 청년이 측량한 만큼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게 해주시고 그에 더해 좋으심을 느끼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생각할 때에 걱정이 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어떻게 결혼을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혼이라면 이루어 질 것이기에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물건을 갖고 싶어 했을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측량하여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하다고 여기시는데도 주어지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주어지든 주어지지 않든 그것은 하나님 뜻에 달렸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끝없이 측량하는 일에 매진하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누릴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24절에서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한편 25절에서는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있는 자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한 값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느낌과 값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준이나 그 이상의 좋으심을 주실 것입니다.
반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한 적이 없는 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있는 것까지도 빼앗긴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껴서 자신의 출신이나 학식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졌기에 세상의 가치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지지도 못했는데 세상의 가치가 배설물과 같음을 느끼게 된다면 남는 것은 공허함뿐입니다.
앞서 얘기한 한 여성을 사랑한 청년이 하나님을 측량하지 않았다면 어떨까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결국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년을 살고나자 저 여성만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오히려 저 여자만 없으면 행복하겠다는 마음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0억만 벌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10억을 벌고 났는데도 마음의 기쁨은 잠시입니다. 적어도 100억은 벌어야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100억을 가진다고 해도 만족은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좋게 여겨지는 것들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수 없다면 그것들의 존재 이유 또한 사라집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쓰레기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는 기준으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적절하게 사용되어질 것입니다. 나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뜻의 과녁으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이름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진짜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숨겨진 하나님의 좋으심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계속 측량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마음에서 좋게 여겨지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이 더 크다는 사실을 측량해 나갈 때에 그 측량한 값 이상으로 좋으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러한 신앙의 원리를 모른 채로 신앙생활을 해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이것은 모를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고자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버리고 아내인 사라도 버리고 이삭을 바친 것이 바로 이 측량입니다. 욥 또한 모든 소유를 잃으면서도 하나님을 측량하고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는 모습이 얼마든지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측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측량하는 방법은 십자가 생활화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좋게 여겨지는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로미오라면 사랑하는 줄리엣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돈을 가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어진다면 돈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죽는 마음만큼 하나님의 좋으심으로 채워지기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해나갈 때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좋으심으로 채워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으심의 측량은 정말로 간단합니다. 쌀을 담던 됫박으로 보리도 담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로미오라면 줄리엣에 대한 사랑만큼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마음에 담긴 대상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좋으심을 하루 종일 측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좋으심은 측량한 것 이상으로 마음 가득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좋으심에 환호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내 마음에서 소중하고 좋다고 여겨지는 이 세상의 모든 대상들이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는 됫박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하여 됫박의 내용을 하나님으로 바꾸어가는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