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기원
오페라의 탄생은 바로크 음악(16세기 말 ~ 18세기 중반)의 르네상스 말기의 이탈리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7년 피렌체, 베르디 백작 궁정에 모인 귀족들은 고대 그리스극을 상연하자는 논의에 몰두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여 4개의 악기만으로 이뤄진 음악극 '다프네'. 현재 이를 오페라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완전한 오페라는 초기 바로크 시대인 1600년, 프랑스의 앙리4세와 마리아 데 메디치의 결혼식때 상연된 '에우리디체(Euridice)'이다. 이는 '카메라타(Camerata)'라는 일종의 클럽에 의해 발명되었다. 카메라타는 피렌체의 음악가, 문필가, 화가들의 그룹으로 구성원은 천문학자 갈릴레이의 아버지인 빈첸쪼 갈릴레이, 줄리오 카치니 등의 작곡가들을 비롯한 귀족계급의 인문학자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희랍의 음악적이고 연극적인 예술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음악은 가사의 힘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개념으로 처음엔 시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으나 차차 연극에 적용된 것이다.그 후,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는 몬테 베르디(Monte-Verdi)에 이르러 오페라는 비로소 현대와 같은 제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의 특성은 1607년 작 '오르페오(Orfeo)'부터 1608년 작 '그대는 죽었다(Tu se' morta)'에 잘 나타나 있다. 바로크 오페라는 레시타티브와 아리아, 중창과 합창 등 음악분야의 위대한 형식들을 창조해냈다. 하지만 제후들의 궁정을 위한 오페라였고 봉건 계급의 사회관을 구현한 사람들의 오락이었다. 사랑과 명예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이 품위있는 음악에 맞춰 낭독하는 동안 시간은 고대나 중세기 상상의 영역에 멈춰 서 있었다.18세기에 들어서 광범위한 사회 변화는 오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바로크 오페라는 이 변화의 현장에서 설 자리를 얻지 못하고, 문필가들은 오페라의 허식에 대해 더욱 실랄히 풍자하는 가운데 프랑스 궁정 오페라 애호가들과 이탈리아 희가극에서 사실적 예술을 발견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명 '익살광대의 싸움'이 일어났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신진 부르조아와 몰락해가는 귀족의 대결이었다. 이 때 오페라 역사의 방향에 크게 영향을 끼친 작품이 글룩(C.W.Gluck, 1714~1787)에 의해 탄생한다. 독일태생으로 이탈리아에서 수업한 그는 과다한 장식으로 짓누름없이, 시를 돕는 음악의 진정한 임무에 충실했다. 글룩은 프랑스 비극의 거대한 합창과 희가극의 활기찬 중창 그리고 이탈리아와 독일, 유럽 오페라의 모든 것을 융합시켜 극적 진실성과 표현의 풍부함으로 오페라의 방향을 잡아나갔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지로 확산돼 나간 오페라는 이제 전세계적인 예술의 장르로 자리매김해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페라는 연극처럼 말이 아닌 노래로 하는 장르이다. 그러나 뮤지컬과 달리 대사 자체가 없이 오로지 노래로만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오페라의 꽃은 바로 ‘아리아(aria)’이다. ‘오페라의 꽃’이라 불리는 아리아 중에 유명한 것으로 <카르멘>의 ‘하바네라’, <아이다>의 ‘이기고 돌아오라’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아리아는 단순히 음악적 아름다움이나 극의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아리아는 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당시의 추구하던 가치관을 드러낸다. 어렵다고 느껴지는 오페라를 당시 배경과 함께 쉽게 풀어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다. 또한 오페라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과 오페라에 등장하는 인물들, 내용들을 분석하여 오페라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