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학개 2:10-23 / 2020년 3월 22일 주일 오후 예배
우리 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이지만 수십만이 모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 크기와 규모로는 비교가 안 됩니다. 수천억의 돈으로 엄청난 규모의 성전을 건축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드러나는 교회의 외모와 외형과 세력은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영광과 명예가 되지만 하나님도 동일하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외모로 판단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마음과 그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자기 이름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 것이지 예배당의 규모와 그 곳에 모이는 사람의 세력으로 교회의 경중과 가치가 판단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작은 교회에 소속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작은 배를 타면 불안함을 느끼게 되지만 큰 배와 그 배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이곳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배의 크기와 그 배 안에 탄 사람들의 세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힘을 의지하는 인본주의를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하며 인도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력과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시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사야 66장에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정성으로 헌금한 돈으로 지은 건물과 많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전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는 나를 위하여 집을 지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신 예수님이 교회에 오셨을 때 성도들은 사람들이 손으로 지은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예수님께 자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의지하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본주의와 율법주의로 타락한 옛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에도 포로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인 율법 준수로 종교의 옷을 입고 거룩한 성전인척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위선은 자신들의 사는 집은 날로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반면에 하나님의 성전은 황폐해져 가는 가시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 11절부터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물인 고기를 쌌던 그 옷이 떡과 국과 포도주나 기름에 닿았어도 그 거룩함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부정한 제물이며 죄인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로 죽은 시체임을 드러내는 것이 율법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타락한 죄인들을 향해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죽은 시체와 같이 부정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 내놓는 것들은 모두 불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와 제물을 드리고 절기를 지키며 그것으로 의를 삼았지만 하나님은 불의로 받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위선에 하나님은 그들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전은 인간의 열심과 행위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되는 것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본문 15절부터 읽겠습니다.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본문 19절에서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자 하나님을 복을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건축함으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세우시는 그 성전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 성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21절부터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건축이 저주와 축복과 심판과 구원의 기준이 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은 심판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은혜로만 세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안으로 택한 성도들을 인도하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자기 인생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봉헌하는 길은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탐심을 위해 사는 자로 타락한 그 옛 성전을 십자가로 파멸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드리기 위해 세상에 오실 때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다 버리고 아버지의 말씀과 뜻만을 그 마음에 채우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자신의 자아를 부인함으로 예수로 충만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져서 내 안에 예수님만이 사시게 하는 것이 성도가 이루어가는 성전건축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성전건축은 고난의 십자가와 자기부인으로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연예인 중에 임영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90년대에 부모에게 165억의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집에 하인이 일곱 명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많던 재산으로 호위호식하며 사업에 투자하였는데 불과 2년 반 만에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가정은 깨어지고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거리에서 노숙하며 운이 좋으면 찜질방에서 자며 남의 가게에서 청소하며 주차관리를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맨 정신으로 잠을 잘 수가 없어 술로 밤을 지새다보니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크고 작은 여러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지금은 교회에서 청소를 하며 산다고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타락한 인생이 자신을 섬기는 그 옛 성전을 허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통입니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잘 관리하여 몇 배로 불리고 가정을 지키고 그 영화를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건강하게 살다가 성공한 사람이라는 명예를 갖고 죽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은 아닙니다.
세상은 눈이 보이는 그 사람의 외모로 한 사람의 인생의 성공을 판단하겠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처절한 실패와 절망과 좌절과 극심한 고통 중에서 자신의 옛 성전이 무너져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새 성전을 영접한다면 그가 마지막에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가는 길은 내가 죽어야하는 십자가의 길이기에 고난의 길입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와 지혜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은혜로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면목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면목 없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며 주님과 함께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몸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전부터 계신 주께서 영 죽을 죄인을 보혈로 구해 주시니 그 사랑한 없네. 나 예수 의지함으로 큰 권능 받아서 주님께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