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2장 통일교가 세상에 태어나다
3. 통일교(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세워지다
1954년, 부산 초막집 시대를 마감하고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올라왔다. 장충단공원이 보이는 북학동에 판잣집을 얻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霊協会)' 간판을 걸었다. 아주 작은 집이었고, 대문이 3개나 있어서 '세 대문 집'이라 불렀다. 그러나 통일교 역사상, 그리고 문선명 인생에서 34년 만에 처음으로 번듯한 이름을 붙인 교회였다. 이름에 교회를 넣지 않은 이유는 어떤 교파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계기독교'는 동서고금에 걸친 기독교 전부를 의미하고, '통일'은 앞으로 나아갈 목적성, 그리고 '신령'은 부자관계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영육계의 조화를 암시한 표현이었다. 즉 '하나님 중심의 영계를 배경으로 한다'는 뜻이다. 특히 통일은 하나님의 이상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나의 이상이었다. 통일은 연합이 아니다. 연합은 둘이 모인 것이지만 통일이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웠어도 말할 수 없는 천대를 받았고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었다.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처마가 낮은 여덟 자 방에 6명이 기도를 하면 이마가 맞닿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간판을 보고 비웃었다. 기어 들어가는 집안에서 무슨 세계를 말하고 통일을 꿈꾸느냐고 비아냥댔다. 그래도 신도들은 가슴이 뿌듯했다. 부산에서는 밥을 구걸하면서 살았는데 예배드릴 방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문선명의 외모는 여전히 보잘 것 없었다. 미군 작업복에 검정 물을 들인 옷을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하지만 부산 피난시절보다 훨씬 나아진 차림새였고, 마음은 누구보다 당당했다.
교회에 나오는 신도들은 서로를 '식구'라고 불렀다(통일교에서는 신도를 '식구'라 호칭한다. 이 호칭은 1954년에 시작되었으니 6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신도가 늘어나자 대학가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1950년대에 대학생은 길거리에서 보기조차 어려운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이화여대와 연세대 앞에서 전도가 출발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이 늘어났다. 이화여대 음악과 양윤영 교수와 기숙사 사감 한충화 교수(문리학부 영어영문과 부교수, 법학부 학생과장)도 교회를 찾아왔다. 그 숫자가 한두 명씩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수십 명씩 기하급적으로 늘어나자 기성교회는 물론이고 문선명 자신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도가 늘어나는 만큼 비난과 공격도 늘어났다.
'통일교회에 나가면 가정이 파괴된다. 불법감금을 해서 사람을 묶어 놓는다. 금품을 착취하고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지하실에서 벌거벗고 요란하게 춤을 춘다. 밥에 약을 타서 맛이 좋다. 전기장치가 돼 있어 엉덩이가 들어붙어 나올 수 없다. 음란과 피가름이 교리에 의해 공공연히 진행된다.'
이러한 괴소문이 나돌았음에도 이화여대 학생들이 하루에 수십 명씩 보따리를 싸들고 나왔다. 결국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화여대 총장은 종교사회사업학과의 김영운(金永雲) 교수를 교회로 보내 실상을 알아보도록 했다. 캐나다에서 공부한 김 교수는 이화여대에서 촉망받는 여성 신학자였다. 통일교 교리의 허점을 찾아내 학생들이 교회로 몰려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타나고 말았다. 김 교수는 문선명을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열성 신도가 되었다.
이후로 신도가 눈덩이처럼 늘어났는데 사태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화여대는 김영운 교수를 비롯한 교수 5명(일부 자료에는 4명)을 해임하고 학생 14명을 퇴학시켰다. 그중에는 졸업반 학생도 5명이나 있었다. 연세대에서도 교수 1명(박상래 신학 교수, 총무처장)이 해임되고 2명의 학생이 퇴학을 당했다.
당시 연세대 교목 (校牧)은 "학교에 영향이 안 가도록 졸업 후에 그 교회를 다녀도 되지 않겠느냐?"며 학생들을 회유했지만 듣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이 "학교에는 무신론자도 많고 심지어 무당의 자식도 다니고 있는데 우리가 왜 퇴학을 당해야 합니까?"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퇴학을 당했고 언론에서는 '종교의 자유'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또 괴소문이 퍼져 교회를 괴롭혔다. 졸업반 학생 5명은 숙명여대에 편입해서 겨우 졸업을 했지만 그 사건 때문에 통일교 평판은 극도로 나빠졌다. 대부분의 신문은 '패륜적인 사교 출현'이라는 제목으로 문선명과 통일교를 비난했다.
*여신도들의 정조(貞操)를 유린 통일교회 문교주를 체포 ㅡ 평화신문, 7월 5일
*통일교 주인공 문선명씨 구속 ㅡ 조선일보, 7월 6일
*불법감금 혐의로 기독교 통일교회의 문교주 구속 ㅡ 동아일보, 7월 6일
*능변(能弁) 미끼로 능욕(凌辱) 통일교회 교주 문 구속 ㅡ 서울신문, 7월 6일
*불법감금 등의 혐의 통일교회 교주를 구속 ㅡ 경향신문, 7월 6일
통일교는 한국의 신흥종교로서 가장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지만 3가지 사건이 더 큰 성장을 가로막은 요인이라 생각한다. 첫째는 1954년 이화여대/연대 사건이고, 둘째는 1984년 탈세혐의로 미국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된 사건이고, 셋째는 문선명의 일본 입국금지령이다. 이 3가지 사건이 없었다면 ㅡ 추정은 불가능하지만 ㅡ 통일교는 한국, 일본, 미국에서 엄청난 발전을 했을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폭발적 성장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나이든 어른들을 통일교 하면, 첫 번째로 이대/연대 사건을 떠올린다. 벌써 60년 전의 일임에도 이 사건은 통일교의 발목을 붙잡은 최대의 걸림돌이 되었다.
온갖 괴소문이 나돌던 1955년 7월 4일, 경찰이 교회로 들이닥쳐 김원필(수인번호 1520번), 유효영(1709번), 유효민(1175번), 유효원 (390번)을 모두 잡아갔다. 문선명 역시 서대문경찰서로 잡혀갔으며 7월 13일에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수인번호 380번 ). 네 번째 감옥행이었다.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썼다.
"쇠고랑을 찼지만 부끄러울 것도 섭섭할 것도 없었다. 감옥살이는 내가 가는 길에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격분의 심정을 지극하는 탄탄한 동기가 되었지 나를 좌절시키는 함정이 되지는 않았으니 도리어 나로서는 장사 밑천을 번 셈이다. '감옥에서 사라질 내가 아니다. 난 죽을 수 없어. 이건 해방의 세계를 향해 도약하기 위한 발판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옥살이를 이겨냈다."
사람들은 '사악한' 통일교회가 망해 당장 신도들이 뿔뿔이 흩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신도들이 면회를 매일 왔는데 형무소 간수가 그 모습을 보고 통일교인이 되기도 했다. 일제치하나 공산치하가 아니었기에 고문은 받지 않았으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길이 없을 것이었다.
취조와 조사 끝에 3달 만에 무죄로 석방되었다. 잡혀갈 때는 모든 언론과 세상이 시끄럽게 난리를 쳤으나 무죄로 풀려나올 때는 잠잠했다. 신문 두 곳(조선일보, 경향신문)에만 '문 총재 무죄석방'이라는 단신이 실렸을 뿐이었다. 문선명에 대한 흉악한 괴소문은 전국에 떠들썩하게 퍼졌지만 그 소문이 몽땅 엉터리였다는 사실은 조용하게 묻혔다.
통일교가 사교, 즉 사이비인가 아닌가는 여기서 따질 문제는 아니다. 종교는 각 개인이 알아서 선택할 문제이며, 종교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행법을 위반했다면 벌을 받는다. 만일 문선명에게 법을 위반한 죄가 있었다면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언론과 세상에서 "문선명은 흉악한 사이비 교주이다"라고 그렇게 많이 떠들어 댔는데도 신도들은 오히려 증가했다. 그 이유를 문선명은 이렇게 밝혔다.
"나를 찾아 모여드는 이들은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의 말도 안 듣고 부모님 말씀도 듣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말을 잘 들었다. 돈을 주거나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내 말만 믿고 나를 찾아왔다. 그 이유는 내가 그들의 답답한 마음에 길을 터주었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기 전에는 나 또한 하늘을 봐도 답답하고 옆의 사람을 봐도 답답했으니 그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답이 구해지지 않자 끙끙거리게 했던 인생의 모든 의문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를 찾아오는 청년들은 내가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평소 가슴에 품고 있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비로소 얻었기 때문에 나와 함께 가는 길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우리 교회로 온 것이다."
그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 아내 최선길이 찾아와 이혼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출옥 후 문선명의 말처럼 "그녀는 수시로 교회에 들이닥쳐서는 식구들에게 욕을 퍼붓고, 교회 기물을 부수고, 교회 물건을 맘대로 내다 없애는 것은 물론 인분을 끼얹기까지 했다. 그녀만 나타나면 예배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아내와 1957년 1월 8일, 이혼했다. 한학자 총재는 1960년 문선명과 성혼 후 최선길 여사를 돌보아 주었는데 최 여사는 2001년 6월 18일에 자필 서명의 통일교 입회원서를 본부교회에 제출했다 한다. 2008년 11월 16일 노환으로 별세했으며 묘소는 통일교 춘천 원전성지에 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아주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