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원 - 십자가를 내가 지고 - 5. 새로운 출발과 전도의 열기
1 1955년 10월, 선생님께서 무죄로 석방되신 후 식구들이 힘을 모아 청파동 1가 71—3 청파 성결교회였던 낡은 집을 사서 이사했다. 식구들이 양잿물을 가지고 수세미로 닦고 문지르고 하여 새로운 교회로 단장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원리 말씀 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유효원 협회장님께서는 하루에 15시간 원리 강의를 하였다는 것은 통일교회의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2 퇴학 당한 우리들은 학교에 못 가는 대신 선생님을 모시고 영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앞으로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영어 실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격려하시었다.
3 그다음 해 나는 다행히 대학에 다시 가게 되었다. 부친은 나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집안에 남은 재산을 신흥대학에 기증하신 것이다. 그 당시에 1억 5천만 원에 상당한 재산을 신흥대학에 기증함으로써 그 학교는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교 인가를 받아 경희대학교로 승격되었다.
4 나는 인생관이 바뀌게 되었으므로 전공하던 법과를 버리고 역사학과 2학년에 편입하였던 것이다. 나는 교육열이 대단하신 아버지의 덕분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부친에게 감사를 드린다.
5 1957년, 배고픔을 모르고 지내왔던 나에게도 7일 금식의 날이 왔다. 그러나 나는 학교의 중간고사를 치르면서도 7일 금식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실시하는 전국 120개소 개척 전도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직접 단상에 나오시어 동원된 사람들의 임지를 정하여 주셨는데, 나는 엄순태 부인 식구님(전본부교회 부인회장)과 같이 전북 이리시로 결정되었다.
6 우리는 7월 20일, 기차를 타고 이리시에 도착하여 이미 통일교회와 약간의 인연을 맺고 있던 여자 청년인 김인애씨 집으로 짐을 가지고 찾아갔다. 그 식구는 반갑게 우리를 환영하였으며 며칠간 그 댁에 머물면서 소개장을 가지고 사람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7 4-5일 후 장영창씨 동생들이 공부하는 집으로 짐을 옮기어 거기서 본격적으로 40일 전도를 시작하였다.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 수리조합장 부인과 인연을 맺어 그곳에 근무하는 기성교회 집사, 장로들에게 말씀을 열심히 전하였다.
8 그때 내 나이 23세, 대학 3학년이었는데 성경을 안다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장로, 집사들의 질문에 답이 막히면 전주에 계신 한충화 선생께 문의하였고, 그래도 안되면 군산에 계신 이상헌 선생께 부탁하여 말씀을 듣게 하였다.
9 어떻든 열심히 전도를 하였으며 수리조합장 부인은 마음이 고운 분으로 우리들에게 최대의 호의를 베푸신 분이다. 과일이며 고기를 잰 것이며, 서울 사람이 시골 와서 고생한다고 심지어는 양동이, 수돗물을 짚차로 실어다 주기까지 한 분이었다.
10 또 군산에 사시던 강의홍씨(후에 36가정으로 축복받으심)께서는 김치며 먹을 것을 수시로 보내 주신 고마운 분이셨다. 장영창씨 부모님께서도 여러 가지로 협조해 주셨다. 이러한 분들의 도움으로 재미있게 열심히 전도하였다.
11 주일 예배 시간에는 성경을 봉독하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프린트를 읽음으로써 은혜를 받았다. 40일 전도가 끝난 후에도 그 말씀집을 이리에 놓고 상경하였다. 그때 식구로 남아진 분은 72가정 축복을 받은 김인애씨, 장영랑씨가 있다.
12 장화일, 장원일 등 많은 학생들이 장성하여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40일 전도를 마치고 나는 상경하였고 엄순태 식구님은 그곳에 계속 머무시며 전도를 하여 이리 교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