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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7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11
설교 제목: 십자가의 비밀 4
– 복음,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설교를 위한 묵상:
십자가에 대하여 묵상하는 사순절이다. 십자가는 사도 바울의 복음에서 핵심이었다. 그것은 비방과 역사를 낳았으며, 이런 역설적인 상황은 그의 복음이 진정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복음이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 드러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지극한 자비하심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다. 그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은 구도자들의 평생 과업이며 여정이다.
모든 세대는 자신의 시대에게 복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정리할 소명을 받았다. 500년 전에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발견했다. 50년 전에 조용기 목사는 가난과 절망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복음을 발견하고 힘써 전했다. 그리고 지금의 세상은 50년 전과 다르며 500년 전과는 더더욱 다르다. 우리에게는 지금 복음을 새롭게 설명하고 진술할 필요가 생겼다.
나는 지금 십자가의 의미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다. 이번 주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말하는 구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그림을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명료하게 그림으로써 바로잡아 줄 것이다.
설교 개요:
1.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2. 믿는 자가 들어가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3.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4. 유대인이 먼저, 헬라인은 그 다음!
5.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6.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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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기 전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소개했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에게 그 동한 전한 복음을 총정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믿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전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서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복음은 부끄러운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18, 23~24)
사도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공개적으로 비방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은 어떤 사람들에게 거절되었고 배척되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을 것입니다. 요새 상황에 빗대어 생각해 본다면, 십자가의 복음은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면 안 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아마 오늘날 공영방송에서도 그런 대접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연예인을 대상으로 하는 연말시상식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여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말을 하는 것을 공영방송에서 듣기는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나 구원 같은 말을 교회가 아니라 방송에서 듣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사도 바울의 시대와 별로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적인 자리에서 복음에 대하여 아예 말할 수 없는 것일까요? 복음은 오직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일까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도를 할 때 우리는 복음을 무엇이라고 전해야 할까요? 우리의 삶에서 복음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려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믿는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되는 구원은 무엇이고, 우리를 그런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믿는 복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정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 믿는 자가 들어가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2017년도에 8회에 걸쳐서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이후로 7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때 제가 그 시리즈 설교를 통해서 구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구원을 정의한 이유는, 구원을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핵심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통해 다스리십니다. 그렇게 하여 이 세상에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번영과 충만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땅이 다시 어두워지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온 세상을 하나님의 거룩한 동산으로 만드시려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이 처음부터 예비하신 그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인간이 처음부터 받은 소명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게 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새로운 미래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이 세상과 그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 그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에게 행하신 이야기이며,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완성하시는지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미래에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물려받을 기업 또는 유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의 구원을 죽어서 천당에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마치 초대교회에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어선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이서 1장 7절을 보면,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으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이 아닌 저 영혼의 세상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사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왜곡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구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이며 또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참되고 따뜻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삶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이 세상에서 병들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들려주는 희망은 그런 개인적인 고통뿐 아니라 지구적인 고통이 결국 치유되고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야 하는 구원은 이생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신다는 성경의 약속과 우리 몸이 부활한다는 약속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진정한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3.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모습이며 그 영광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존귀와 영광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진실하고 따뜻하게 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잘 가꾸어 생명 가득한 곳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진실한 것 같지만 때로는 거짓되며 이웃을 배려하는 것 같지만 때로는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다툼과 갈등이 있고 혼란과 어둠이 자라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떠난 인간들은 살인과 전쟁, 그리고 바벨탑과 반역 등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강대국이나 약소국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그 어디나 신음과 범죄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도 단지 천국 같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그 어디나 신음과 눈물과 아픔과 죽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3~24).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형상과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쉽게 정치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 이웃의 허물을 탓하지만, 우리들도 사람들 앞에 세워진다면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과오와 허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이런 상태를 진화적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면, 사회생물학 같은 학문이 있습니다. 동물의 사회를 연구하여 그 속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행동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이런 상태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성경이 인간을 설명하는 방식은 어떤 권세 아래서 인간이 억눌려서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삶에 비하면 자기 욕심에 이끌려 자기와 타인을 해롭게 하는 삶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자와 같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소개하신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찾게 되고, 또한 참되게 살아가는 진리를 얻게 되며, 하나님이 본래부터 맡겨 주신 그 소명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바르고 참되며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려면 우리를 붙들고 있는 그 권세가 쫓겨나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 세상 임금을 몰아내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일생을 살면서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바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담대하게 증언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 십자가에 어떤 힘이 있는지를 배우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이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누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 삶은 이전의 삶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멋지고 행복하며 만족스러운 삶입니다.
4. 유대인이 먼저, 헬라인은 그 다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순서를 말합니다. 먼저는 유대인이며 그 다음이 헬라인입니다. 유대인이 먼저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헬라인이 들어갑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헬라인입니다. 헬라인은 유대인이 아닌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여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대리인을 부르시고 그들을 이끄시는 일이라면, 그 일은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택하신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의 혈통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하며 그 다음은 헬라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천하만민에게로 확대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가꾸고 관리할 대리인을 먼저 부르시고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먼저 구원하십니다. 그런 후에 그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어 세상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우는 하나님의 경륜에서 성경의 5막 드라마는 하나님의 대리인들을 잘 보여줍니다. 창조, 타락, 이스라엘, 예수님, 그리고 교회로 이어지는 이 드라마는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님과 교회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아담처럼 새로운 피조물이며, 세상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노아와 같은 사람이며, 온 세상에 복이 되라는 아브라함과 같은 존재이며, 세상 나라들을 위하여 제사장적 소임을 감당하는 새 이스라엘엡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하며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헬라인에게로 그리고 온 세상 만민에게로 흐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우리 사회와 온 세상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5.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로마서 1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로마서에서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 충실하게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끝까지 이루십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모든 생명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을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명령이며 축복이며 약속입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로 땅이 저주를 받고 살인과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노아를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고 복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한 후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다시 한번 세상에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도 허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충실하게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으로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건져 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으로 이끄셔서 거기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온 세상에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배반한 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지만 때가 차므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유대인으로 보내셔서 다시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 프로젝트를 가동하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이야기이며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복음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향하여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끝까지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6.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 그들을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고향을 떠납니다. 그렇게 해서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은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흉년과 기다림이라는 고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기도 했고, 아내 사라 대신에 후손을 이을 아들을 낳기 위해서 하갈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은 아브라함이 믿음에 이르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의 사람을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차가운 법정용어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아끼시고 양육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디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와 비슷한 글을 썼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도서 2:11~1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그를 양육하고 인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며 그 의가 자기 백성을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도록 인도합니다.
사도 바울의 글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의는 믿는 사람들을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여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선한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은혜 속에서 살아왔으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사도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마아 살리라’는 하박국 2:4을 인용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은 생존을 의미하며 생명의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것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죽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의인은 믿음 때문에 살고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담대하며 믿음으로 새로운 꿈을 꾸며 믿음으로 도전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어떤 믿음이 우리에게 그런 생기 넘치는 삶을 살게 할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이것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배운 믿음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2. 하나님은 이 세상을 생명 가득한 곳이 되도록 모든 생명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3. 하나님은 이 세상을 충만하게 하려고 인간을 동역자로 지으시고 그를 관리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4.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 선한 계획을 바꾸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하시려고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언약의 대상이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님과 교회입니다.
5. 하나님의 백성이자 대리인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다시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6. 우리는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바로 그 선한 일을 열심히 수행하면서 가장 큰 보람과 만족을 누립니다.
7.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내셔서 모든 어둠의 권세를 완전히 몰아내시고 새로운 창조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미래입니다.
8. 하나님이 완성하실 새로운 세상에서는 하늘과 땅이 하나 되며 온 세상이 성전의 지성소처럼 거룩하게 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9. 우리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와 새 창조, 그리고 부활의 이야기를 듣고 믿고 배우면서 현재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것을 추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