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隨處作主)
처하는 곳에 주인이 되라.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은 임제어록(臨濟語錄)에 나오는 법문이다. 처하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말이고,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다 진리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은 내가 주인이라는 말이다. 노예근성으로 살지 말라는 인간성 현창의 회복 선언이다. 임제선사는 당나라 선승(禪僧)이다. 황벽희운(黃蘗希運) 선사의 법맥을 이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법문을 보면 하루는 임제선사가 대중에게 말을 하였다. 도(道)를 추구하는 벗들이여! 불법은 억지로 공(功)을 쌓지 않는다. 그저 평상시 대로 자연스럽게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이다. 똥 싸고, 오줌 누고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이 말라기를 자기 자신을 바깥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놈들이라고 했던것이다. 그대들이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의 주인이 된다(隨處作主)면 그대들이 지금 여기 그대로가 모두 참된 곳이 될 것이(立處皆眞)다. 자기 바깥의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설령 번뇌로 인한 묵은 습관과 무간지옥에 들어갈 다섯가지 죄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대들이 머무는 지금 여기는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공부하는 자들은 죄다 이러한 불법을 알지 못한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고서는 입에 닿은대로 입안으로 집어넣은 것처럼 노예와 주인을 분별하지 못하며, 손님과 주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어쩌다가 불도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해득실과 시시비비의 번잡스러운 일에 곧바로 빠져버리니, 결코 진정한 수행자라고 부를 수가 없다. 그야 말로 참으로 속된 인간일 뿐이다. 수처작주의 임제 선사님의 고구정녕한 법문이다. 수행자는 당당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노예 근성은 버려야 한다. 자기 내면의 불성을 찾으라는 말이기도 하다.
붓다가 부처라면 자기도 부처라고 당당하게 수행자로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수행자가 특별상을 가지면 일생을 망친다. 불법은 억지로 공을 쌓지 않는다고 했다. 밥먹고 잠자고 옷입고 똥싸고 오줌 누는 이곳 지금 여기에서 주인 노릇하며 살라는 활(活句) 법문이다. 몇 년전에 어느 절에서 있었던 일화다. 평생을 절에 다닌 노보살이 어느 큰스님 화장실 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랬다는 일화다. 어떻게 큰스님이 화장실에 가서 똥을 쌀수가 있느냐? 이다. 도가 높은 큰스님들은 똥 오줌도 싸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3천년전에 부처님께서도 밥 먹고 잠자고 똥 싸시고 사셨다. 진리는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면서 살았을 뿐이다. 임제 선사님께서 수처작주 입처개진 법문을 하신 것으로 보면 당나라 때 그때도 이런 부류의 수행자나 불자가 많았다는 증거다. 그런 노예 근성을 타파하기 위한 법문이 수저작주 법문이다. 관념의 틀을 깨야 한다. 요즘 세상에도 노예근성으로 일생을 허송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고등 종교를 표방하면서도 노예근성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심화되고 있다. 한번 그런 관념 신념에 빠지면 좀체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세상은 내가 주인이고 내가 진리라는 말씀이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진리는 바깥에 있지 않다는 임제선사님의 활구 법문에 눈들을 크게 뜨라. 인터넷 여여법당에 수년을 수행의 글을 올렸는데 세상 사람들은 돈 물질에 온 정신을 쏟고 인생 근본 문제는 관심 밖이다. 개중에 몇몇 사람은 관심 가져주니, 반가운 일이다. 절집 선가(禪家) 에서도 한 개 반개라고 하는데, 말세에 돈보다는 인생의 근본 당처 문제에 틈틈이 관심을 가져주니, 다행한 일이로다. 찰칵, 찰칵 초침 소리가 무상법문(無常法門)이네. 들어온 숨 나가지 못하면 이생이 저승일세!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금쪽같은 오늘 하루 주인 노릇, 하고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