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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2
에베소서 1장 11절 [2장 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은 하나님과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으로 1항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열거합니다. 먼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다는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데,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 그러나 여럿이 아닌 오직 한 분만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신데,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만드셨습니다. 거기에는 공간과 시간과 함께 사람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공간에 매이지 않습니다. 시간에 매이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매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무한하신 하나님은 광대하시며, 영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부분에 있어서 측량할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실 뿐만 아니라 가장 순수한 영이십니다. 그래서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 성정들이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처럼 변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또한 가장 지혜롭습니다.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고,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속성은 이어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신앙고백서 제2장이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서 나열하고 있다고 할 때 여기서의 강조는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역사하시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영원 전부터 정해지는 것을 작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1항에 보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셨습니다.” 이러한 작정이 실행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이 섭리인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1항에서는 이렇게 고백입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의 무오한 예지와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의논을 따라 그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자비의 영광을 찬양토록 하기 위해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섭리에 의해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모든 행동들과 [그(것)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유지하고(히1:3) 지도하고 배치하고 다스리십니다.” 그러니까 2장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열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설명되고 있고, 제3장은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내용 안에서, 또 제5장은 작정의 실행으로서 섭리라는 내용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바대로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내용으로 오면 하나님은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신다고 할 때 이 표현은 정확하게 오늘 본문으로 읽은 에베소서 1장 11절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우리말 성경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신다고 되어 있지만 ‘모든 일을 그의 뜻의 의논’대로 일하신다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그리고 ‘계획’을 ‘작정’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올바르게 번역하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의논대로 일하시는 이의 작정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논리적 순서를 확인하게 되는데, 먼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뜻의 의논이라고 말함으로 의논도 있습니다. 뜻의 의논대로 일하시는, 혹은 역사하시는 이의 작정이라고 해서 작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고 말함으로 예정의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서는 하나님의 뜻, 그리고 의논, 작정, 예정 이런 순서입니다. 해당 부분에서 살피겠지만 작정이 모든 만물에 대한 것이라며, 예정은 특별히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된 것으로 선택과 유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모든 만물에 대하여 작정하실 때, 특별히 인격적 피조물에 대하여 예정하실 때, 그래서 선택과 유기가 있다고 할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의논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과 의논은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작정하실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가 없는데도 존재하거나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존재도, 어떤 일도 결코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작정이 창조와 섭리로 실행된다고 할 때 창조된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됩니다.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는데 창조와 섭리 속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없으며, 하나님의 뜻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하나님의 의지만이 모든 것의 원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이해 속에서 죄도 하나님이 원인자이신가를 묻습니다. 물론 죄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죄가 하나님의 뜻 밖에서 우연히 결과된 것인가 할 때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실 때 죄조차 그의 뜻 안에, 그의 의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의 저자이신가? 죄를 창조하신 분이신가? 혹은 하나님이 죄를 사람 안에 넣으신 분이신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살핀 바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거룩함이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과 절대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피조물과 구별되는 초월적인 존재이십니다. 유한한 피조물과 구별되는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정요석 교수는 이러한 거룩함을 ‘하나님의 위엄 있는 거룩함’이라고 하는데, 위엄 있는 거룩함은 도덕적으로도 구별되십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죄와 관련된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죄의 저자일 수 있으며, 죄를 창조하실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은 가장 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조차 죄의 저자가 아닌 방식으로, 또한 죄를 창조하지 않은 방식으로 작정하시고 섭리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때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게 중요합니다. 당연히 죄조차 하나님의 뜻 안에 두고 계시다고 할 때 죄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일단 원문에는 ‘적당하게’라는 말이 없습니다. 또한 원문에 있는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는데, 잠언 16장 4절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자신을 위해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악인을 창조하셨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성경은 죄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나왔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6일 동안 모든 만물을 만드시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지만,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죄가 들어오게 된 것, 그래서 세상이 죄로 물든 것, 아담 이후 모든 자가 죄인으로 태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뜻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서, 좀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실제로 성경은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9:17) 왜 바로를 두셨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 그를 두셨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하여 두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욥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큰 부자였지만 하루 아침에 망하게 됩니다. 도둑들로부터 빼앗기고, 또 재해로 말미암아 부자에서 거지 신세가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없었는가? 있었습니다. 도둑들의 역사 속에도, 재해와 같은 일들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욥과 관련해 좀 더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하나님만 일하시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사탄의 역사도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역사도 있습니다. 사탄의 경우 어떻게든 욥을 넘어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역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역사는 악인들을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악인들은 사탄의 사주를 받아 그 일을 하지만, 억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악한 일을 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원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자신의 뜻 안에서 허락하시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나아가 욥의 신앙을 위해서 사탄도, 악인도 두십니다. 그래서 욥기 마지막 부분에 가면 욥이 어떤 고백을 하게 됩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분명 욥기 1장에서 욥을 소개할 때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고 하지만, 그런 그도 더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그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해 사탄도 두시고, 악인도 두시고, 또 거기에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일도 두셔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많은 일들 가운데 “왜 이런 일이 있는가?”란 의문을 가지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남편, 지금의 아내, 지금의 자녀, 지금의 부모를 만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갈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거기서 죄인 취급까지 받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결정해서 일어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이든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도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섭리라는 항목에서 살피겠지만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마태복음 10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까지(마10:29) 세세하게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신 바를 섭리 안에서 실행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하나님께만 답을 구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하면서 따지고 원망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쪽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의 의논이라고 할 때 의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통하심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처럼 서로의 의견을 나눔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가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장 지혜롭습니다. 가장 지혜롭다는 것은 지혜에 있어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부의 지혜가 그러하고, 성자의 지혜도 그러하고, 성령의 지혜도 그러합니다. 성부의 지혜가 40%, 성자의 지혜가 30%, 성령의 지혜가 30%, 이렇게 합쳐서 100% 되는 게 의논이 아닙니다. 성부도 100, 성자도 100, 성령도 100입니다. 그런 삼위 안에서의 교통하심이 의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의논은 어떤 의미에서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통하심 가운데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의 의논을 따라 역사하신다고 할 때 조금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이때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요석 교수는 하나님께서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높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맞는 수준으로 일하신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저자, 죄의 원인자가 되실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을 역사하신다고 할 때 진행되는 과정에서 실수한 것 같다고 해서 고치시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아니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실수 자체가 없으십니다. 실수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에 대하여 두 가지 속성을 수식하는데, 하나는 불변하심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의로우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있어 변함이란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있어 불의함이란 있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앞선 내용에서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살폈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에 있어 변함이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어떤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로 무엇을 작정하신다고 할 때 어떻게 변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불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 변한 것처럼 나타나기도 합니다.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뜻은 처음부터 생명을 연장 받아 사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이루는 데 있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할 목적을 가지셨기에 병이 들게 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어 그 사실을 알리셨던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최종적으로 이것이라고 할 때 최종적으로 이것을 이루기 위한 방편들에 대한 사용도 뜻하셨다는 것이고, 그런 방편을 사용하는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있는 방편이지, 하나님의 뜻조차 바꿀 수 있는 방편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조차 바꿀 수 있는 능력 차원으로 보는 경향들이 있는데, 주의를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인간의 어떤 능력이 아닙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우리가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기도 자체가 사람의 능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내가 원하는 바를 구할지라도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구함으로 마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자세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함께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신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의로우심이라는 이 속성은 거룩함이라는 속성과 연관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거룩함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것과 절대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며, 당연히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도 구별되신다는 것인데, 정요석 교수는 거룩함의 기본 개념이 ‘분리됨과 구별됨’이라고 설명하면서 의로움의 기본 개념은 ‘율법에 맞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할 때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자신을 맞추면 의롭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의로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율법에 맞추었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존재도 하나님보다 더 크지 않음으로 하나님에게 따라야 할 법을 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을 인하여 자체 내에 법을 지니고 계시고, 자신의 본성이 반영된 법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주신 법을 따를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따르지 못할 때는 불의함으로 인해 벌하시기도 하십니다.
어쨌든 의로움의 기본 개념이 ‘율법에 맞춤’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본성의 옮음에 어긋나는 사사로운 것들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가 뜻하신 모든 일에는 자신의 의로움만 있을 뿐입니다. 의로움 없이 뜻하시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어떤 뜻을 정하신다면, 그리고 그 뜻대로 실행하신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불의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서 모든 일을 그의 뜻의 의논대로 일하시는 이의 작정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의 뜻 혹은 의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통하심으로서의 의논, 또 뜻하신 바가 정해지는 작정, 그리고 작정 안에서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된 예정의 내용, 다시 말해 선택과 유기, 특별히 선택과 관련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이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의로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럼 선택이 아닌 유기는 어떠한가? 에베소서 1장 11절은 특별히 택자와 관련해서만 말하고 있지만, 택자가 아닌 유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불의가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물론 실행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불의를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불의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율법의 수여자로서 율법 자체를 위반할 수 없는 분이시라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위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불의함에 대하여 벌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 대하여 그렇게 하시는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불의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벌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불의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 의롭게 하시는데, 이것이 죄인을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신다고 할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불변하심과 의로우심이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속성들 안에서 가지신 하나님의 뜻은 결국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예정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의 내용, 다시 말해 선택과 유기에 대한 내용, 특별히 유기와 관련된 내용에서 하나님이 불의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정론을 거부하든가, 아니면 적어도 유기와 관련해서 거부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의지의 자리를 마련해 둡니다. 인간의 의지를 100%로 두든, 아니면 인간의 의지를 50%로 두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의 절대성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예정론, 다시 말해 선택과 유기에 대한 강조가 분명 있습니다. 여러분, 시편 115편 3절에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할 때 그가 원하시는 모든 것, 그가 뜻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46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알리고 보이시되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약에서 예언한 바가 신약에서 이루어 진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지막 때 가서는 100% 다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에게도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21장 1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가 하나님과 반대되는 사람의 의지를 억지로 이끄는 게 아닙니다. 반대되는 의지라면 그 의지를 부드럽게 만들어 기꺼이 나아오게 하심으로 그렇게 이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싫은데 택자이기 때문에 억지로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 싫은 자로 하여금 믿을 수 있는 마음으로 이끄셔서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해 가장 빛난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은 예정론인데, 성경은 선택만이 아니라 유기까지 분명히 말씀합니다. 로마서 9장을 보시면 17절 바로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난 뒤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로 사람을 완악하게 하실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로 사람을 완악하게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불의하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할 때 긍휼의 대상은 누굽니까? 택자이지만 긍휼을 받을만한 자가 아니라 사실은 진노를 받는 자입니다. 그런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를 죄로 벌하신다는 의미이지, 하나님이 선한 자를 억지로 완악하게 하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어쨌든 이런 내용 속에서 21절로 가면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9:21-23)라고 말씀하시는데, 진노의 그릇이든 긍휼의 그릇이든 하나님 자신의 속성과 영광을 드러낼 목적으로 그들을 두셨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인 제3장에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겠지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는 절대적이라는 것이고, 그런 절대성은 예정론과 관련해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심에 있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고 고백하는 만큼,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만큼 우리는 이런 예정론과 같은 내용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하신다고 할 때 작정과 작성의 실행으로서의 섭리, 그리고 그 안에서 택자를 구원하시고 유기자를 그들의 죄에 따라 심판하시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고자 마신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예정론에 대한 논쟁도 있고, 이런 저런 것으로 논쟁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마지막 때 가서야 비로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가감 없이 드러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