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추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속살
-통영이 품은 작가, 강제윤 시인의 <어머니전>을 읽고
향기 이영란
「내가 걸은 만큼만 인생이다」는 제목의 책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 자신들의 열정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청춘들에게, 소외된 사람들에게, 주눅 든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위로와 삶의 방식들에 대한 인터뷰집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좋았지만- 원래, 책이란 읽고 나면 희미해지는 법, 그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내용들은 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정혜윤씨는 그런 이야기들이 자신의 피와 살들 속에 포함되어 <나>가 만들어 진다고 하였다- 제목이 주는 위로가 좋았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거부하고, 내가 선택한 만큼, 내가 투자한 만큼 삶이 돌아온다는 것을 말하는 듯 했다.
눈웃음과 미소가 편안하고 평범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다소 직선적인 말투가 거슬리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유사제 모임 뒷풀이에서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를 막~ 부르라고 시켜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사람이다. 지금 부르라고 하면 시치미 떼고 한번 불러볼 수도 있으련만, 그땐 내가 그리 여유 있는 사람이 못되었다.
나는 강제윤 시인이 꼭 그 제목에 들어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한걸음 한걸음으로 이룩해 낸, 오히려 굽힐 줄 모르는 아집에 가까운 고집으로 자신이 가진 선의보다 훨씬 더 오해받았을 그런 사람. 나는 그 미련에 가까운 고집이 이것저것 재며, 마른 길만 걷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한다고 믿는다. 누구나 가졌을 인간적인 결함을 들추기보다 우리나라의 많은 섬을 발로 걸었고, 작고 소외된 것들, 외로운 사람들을 쳐다보았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며, 섬의 역사, 삶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록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데 1표이다. 그것이 늦게 이루어지더라도 결국 세상은 사람이 지닌 생각의 깊이와 따뜻한 마음을 지닌 글들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는 것 같다. 그의 활동 반경이 자꾸만 넓어지고, 그가 한 걸음씩 걸으며 몸과 마음으로 쌓았던 것들에 사람들이 감동해 가면서, 세상에서 등 돌려졌던 그가 환하게 웃을 일이 더 많도록 인정받아 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이 참 흐뭇하다.
나는 강제윤 시인이 섬을 돌며 만난 어머니들이 보여주는 상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불평등했던 삶, 자식을 길러 내고도 자식들로부터 외면받는 고독한 어머니, 개발과 경제 논리에 밀려 섬이라는 지역적인 고립과 가난, 노인이라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삶 등 안락하고 깔끔하다고 생각되는 우리의 삶과, 겉만 보기 좋게 번드르르하게 갖추고 살고 있다고 믿고 싶은 우리 현실에서 들추고 싶지 않은 속살일지도 모른다. 시장에서 다 팔아도 1~2만원도 채 되지 않을 푸성귀를 펼쳐 놓고, 버스를 타고, 보따리로 묶어 그냥 걷기도 힘들고 불편할 걸음걸이로 시장에서 겨우 생햇빛만 피한 채 쪼끄리고 앉아서 파는 수많은 어머니들이 겹쳐지는 것은 나 역시 그러한 부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강제윤 시인은, 늘 강자의 논리에서 외면당한 우리나라의 작은 섬들을 찾아, 그 중에서도 어머니들을 만나 글로 기록한 것은 감추고 싶은 것들에 대한 어렵지만 용기 있는 맞대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시대에는 몸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참 가난하다. 농부가 그렇고, 어부가 그렇고, 우리 생활에서 제일 지저분한 쓰레기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가장 말단의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이 그러하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폐해는 날이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다.
이 땅에서 살아 나온 어머니들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다지 생활력이 없는 남편이라는 존재를 그늘 삼아,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자식들을 부양하고, 지친 몸을 이끌며 평생을 일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남는 것들도 초라하다. 그렇고 그런 핑계를 대며 잘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을 그리며, 작은 밭을 일구고, 해초를 뜯고, 그렇게 늘 몸에 달고 살았던 일들을 계속하며, 죽는 순간까지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하는 자존심을 가지고 생활한다.
방학 중에는 급식이 이루어지지 않아 출근한 사람들끼리 교무실에서 점심을 해서 함께 나누어 먹는다. 학교 텃밭에서 깻잎과 고추를 따서 찍어 먹기도 하고, 가지를 무쳐서 반찬으로 먹기도 한다. 정직한 반찬들이다. 여자 교감 선생님이 가져오신 열무김치가 보여서 직접 담그신 거냐고 물으니, 친정어머니가 해주셨단다. 어머니들의 자녀 돌봄 유효기간은 얼마인지.
나 역시 학교에서 조금만 일이 늦어도, 아이들 점심을 차려 줄 수 없을 때에도, 운동회 때에도 내가 힘이 미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일에 “엄마, 좀 와줘~!”를 연발하고 산다. 반면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열심히 내 존재감을 부각시키며 세뇌한다. “엄마도 사람이다, 엄마도 힘들다, 너희가 쉬고 싶듯이 나도 쉬고 싶다. 엄마가 집안일 할 때 너희도 해라, 엄마도 좋아하는 일을 좀 해야 하지 않겠나?......” 정작 나는 우리 아이들을 대충 먹여도, 친정엄마는 쉴새 없이 끊임없이 먹인다. 지나가는 말로도, ‘너희 집 일은 네가 좀 하고, 나 좀 그만 불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그런 엄마이다. 그런 엄마가 집 거실에 꽂혀있는 안도현의 시집을 읽고 있을 때라던지, 저녁을 해 놓고, 정작 당신은 드시지도 않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주기만 하는 저 여인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가슴을 차고 온다.
칠흙 같이 완벽한 어둠에 쌓인 히말라야 산, 오지에서 보이는 별은 참으로 감동적인 모양이다. 그 곳에 서게 되면, ‘나’라는 사람의 존재의 근원을 하나의 가식없이 보게 된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그 감동을 적어 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순간, 사람이 켜 둔 불빛을 보면, 그 고립감이 같은 사람이 주는 위안과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고 한다.
나는 강제윤 시인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 고립 무원의 섬들을 돌며, 그 섬이 가진, 그 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이야기를 의미에 담아 내었다고 생각한다. 전국에 광범위하게 뻗쳐진 인맥이 그냥은 아닌 것 같다. 섬을 돌며, 특유의 친화력으로 엮은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담은 그의 행보는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나는 그의 의미를, 불편한 것, 힘든 것, 지저분한 것들은 모두 외면한 채 혹은 모르는 척, 눈앞에 욕망을 채우기만 급급하게 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머니와 바다와 섬, 우리 존재 본연의 모습을 일깨워 준 사람이라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