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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3일 주일낮 예배 설교
설교 제목:
하나님의 나라, 그 좋은 우리나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33, 표준새번역
설교 목적:
역대상 17장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실 집을 지을 생각을 한다. 그의 생각은 나단의 동의를 얻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조금 특별하다. 다윗에게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복을 약속하셨다. 같은 이야기가 사무엘하 7장에 나온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위로 하늘을 살피고 아래로 사람들을 살피는 다윗을 발견한다.
하나님이 다윗을 자기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부르셨을 때 그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상부상조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니라 쓰고 쓰이는 관계를 세워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할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것과 올바른 것을 추구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좋지 않은 모습을 바라보고 비난만 하고 있지 않고 그것을 좋은 모습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궁궐에 앉아서 다윗이 바라보고 바꾸고자 한 일이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호응을 하셨다.
이 이야기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에 다시 나온다. 하나님은 건물에 갇히는 분이 아니시다. 스데반 집사는 동족인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같은 의미의 주장을 하다가 순교했다. 사도행전 7장의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법은 늘 새롭게 좋음과 올바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전 같은 건물이나 제도 속에 하나님을 가두려 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가 왜곡된다.
설교 개요
1. 백향목 궁궐에서 휘장 아래 있는 하나님의 궤를 본다
2.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란?
3.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것에 갇히지 않으신다!
4.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5. 하나님 나라, 그 좋은 우리나라
***
1. 백향목 궁궐에서 휘장 아래 있는 하나님의 궤를 본다
지난 주에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이 살고 있는 헤브론성으로 모셔 들이고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대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역대상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찬양으로 하나된 다윗의 나라’라는 제목의 그 설교에서 우리는 만민과 만물의 지휘자로서 서 있는 다윗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모습은 사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게 하신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윗의 삶 속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섬김과 인도 아래서 사람들과 만물이 춤추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은 역대상 17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본문에서 다윗은 궁궐에서 평안하게 지낼 때에 문득 자신의 궁궐 안에 하나님의 궤가 있는 모습을 보고 이런 말을 합니다: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역대상 17:1
예언자 나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계시지 않습니까? 왕의 마음에 있는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나단이 집에 돌아가서 기도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거할 집을 짓지 말라고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4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5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6 이스라엘 무리와 더불어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고
역대상 17:4~6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집을 지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법궤가 이 장막과 저 장막으로 옮겨서 보관되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누구에게 하소연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사사시대를 지나오면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궤를 둘 집을 지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다윗이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기특하게 생각하신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재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 6:21). 다윗의 마음씀씀이를 보면서 하나님은 감동을 받은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어떤 선물을 받게 되었을 때 ‘뭣하러 이런 것을 가져오셨소! 안 가져오셔도 되는디…!’라고 말하지요. 그 말은 이 선물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그 마음에 감동받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하나님은 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선물을 담은 그릇을 받은 후에 돌려줄 때 그 그릇에 다른 선물을 넣어서 주는 우리의 풍습처럼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렇게 약속하십니다. 성경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하겠습니다:
7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8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9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들을 심고 그들이 그 곳에 거주하면서 다시는 옮겨가지 아니하게 하며 악한 사람들에게 전과 같이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여 10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또 네 모든 대적으로 네게 복종하게 하리라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한 왕조를 세울지라.
11 네 생명의 연한이 차서 네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12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3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며 14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5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전하니라
이 약속에 담긴 내용은 간단히 이렇게 정리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실 것이며, 그의 왕조를 세우실 것이며 영원히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시는 답례의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을 다윗이 받은 후에 감동과 감격에 화답의 노래를 부르며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6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17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작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대하여 먼 장래까지 말씀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존귀한 자들 같이 여기셨나이다. 18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영예에 대하여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주께서는 주의 종을 아시나이다. 19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을 위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이 모든 큰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20 여호와여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 21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려고 나가사 크고 두려운 일로 말미암아 이름을 얻으시고 애굽에서 구속하신 자기 백성 앞에서 모든 민족을 쫓아내셨사오며, 22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23 여호와여 이제 주의 종과 그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24 견고하게 하시고 사람에게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시라 하게 하시며 주의 종 다윗의 왕조가 주 앞에서 견고히 서게 하옵소서.
25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종을 위하여 왕조를 세우실 것을 이미 듣게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주 앞에서 이 기도로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6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주의 종에게 허락하시고 27 이제 주께서 종의 왕조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
2.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교제하고 소통하는 모습이 이와 같이 소개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닿아서 그 앞에서 감사하고 결단하는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자기의 뜻을 다 이루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단지 저 멀리 계시는 신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시편 16편 8절처럼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사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아마 그런 삶은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실까?’ 라는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삶일 것입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보람을 찾을 수 없고 왠지 헛수고를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힘이 빠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우리의 기도를 드리노라면 상황을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일어서서 용기를 내고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임무를 감당하노라면 하나님이 새 길을 열어 주시고 새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감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적들과 마주하여 싸우면서 많은 피를 흘렸을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백성 가운데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시편 3:1
이렇게 보면 이 세상은 서로 먹고 먹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주변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살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상부상조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쓰임을 받으며 자신도 다른 사람의 호의를 잘 쓰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으로부터 호의를 입었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요나단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잃을 위기를 면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격려에 힘입어 사울의 위협과 증오를 이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사울도 죽고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나단의 남은 가족을 찾았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서 궁궐에서 함께 지내도록 하고 사울의 시종들을 모두 그의 집안을 돌보는 일꾼으로 주고 사울의 땅도 돌려주었습니다(사무엘하 9장).
하나님이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다윗의 삶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늘 주변을 살피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삶입니다. 서로를 지탱하고 지탱해 주는 사람들의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선한 일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집이 필요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3.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것에 갇히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집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열왕기상 8:27
솔로몬은 하나님이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랐고 또 빌었습니다. 그 후 스데반 집사님은 사도행전 7장에서 이사야 66장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사도행전 7:49~50
이 말씀은 하나님이 정말로 돌아보는 것은 사람이 만든 건물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집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이사야 66:2).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기 위하여 더 온전한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백향목으로 만든 궁궐에 살면서 하나님의 법궤는 휘날리는 휘장 아래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귀한 것이고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한번도 사람에게 자신의 집을 마련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일깨워주셨습니다. 하나님에게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솔로몬도 성전을 잘 건축한 후에 하나님은 그런 곳에 갇히는 분이 아님을 먼저 고백합니다. 그래도 이곳에서 기도드릴 때 들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나 솔로몬이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면서 그들의 자리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귀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그들의 헌신에 갇히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성전이 있는 자신들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절대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바로 이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더 나은 성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전에 대해서 함부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절대화하다 보니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구리뱀에서도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의 치료를 위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만들라고 하신 구리뱀은 장대에 매달렸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사람들은 구리뱀 그 자체에 하나님의 치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게 정성을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백년이 오는 동안에 백성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뜻을 알고 따르기보다는 병낫기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왕 히스기야가 백성들의 이런 행태를 보고 사실상 이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고 확신하고 그런 ‘놋쪼가리’를 섬기느라 하나님을 잊었느냐면서 박살내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을 사람이 만든 것에 가두는 잘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예시라고 하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성전을 절대화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바르게 따르라고 설교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구리뱀을 보면서 병낫기만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습니다.
4.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에베소서 5:10)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나단에게 하나님의 법궤를 둘 집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은지 물었습니다. 나단도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내렸습니다. 그 응답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뒤에 올 아들이 그 집을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했습니다. 자신의 일은 그 일을 준비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곳간을 채우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위한 집이 어떤 모습이 되면 좋을지 설계도도 마련하고 물자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길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건물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방법에도 갇히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롭게 역사하십니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하나님은 늘 새롭게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경험이나 방법에 가두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다윗처럼 예언자 나단에게 물어야 하며 나단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태도를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본래 처음부터 자기를 부인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신발을 벗는 일부터 시작하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하나님의 법궤가 저런 곳에 있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런 마음으로 좋은 것과 옳은 것을 구하는 삶이 신앙인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이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33, 표준새번역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좋은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옳은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구하고 고민하고 시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해보고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보고 하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걸어갈 신앙인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생각에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하나님은 저렇게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때를 기다리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험에 들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는 아집에 빠졌을 때입니다. 내가 보기에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것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이유로 지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16:9, 표준새번역성경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 16:25
5. 하나님 나라, 그 좋은 우리나라
우리는 ‘몸 성히 맘 편히 선한 뜻 펼치세요!’라고 인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구하고 그 뜻을 펼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장소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며 그 뜻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는 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뜻이 펼쳐지는 세상이며 그 하나님 나라는 우리들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세상일까요? 저는 오늘 다윗이 백향목 궁궐에 살면서 하나님의 법궤가 텐트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면서 무엇인가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하여 좋지 않은 모습을 좋은 모습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과 협력하고 의논하면서 가장 좋은 길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는 말씀은 우리 가운데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내적인 평화와 만족을 의미하는 동시에 우리 가운데 서로 지탱해주고 도움을 주고받는 그 협력과 소통을 의미합니다. 협력과 소통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기준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9~10
온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온전하게 아십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다 부분을 알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점은 우리의 부분적인 것을 내놓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하며 동시에 우리의 부분적인 앎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움으로 조금 더 온전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협력과 소통입니다. 그러므로 협력과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는 부분만을 붙들고 그것이 온전한 것인 양 착각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 것을 고집이나 아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곳에는 언제나 갈등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나라에 임하기를 고대합니다. 우리나라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고 더불어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나라에 임한다는 의미는 바로 그런 뜻이니까요. 그것은 단지 국민소득이 높아진다든지 또는 남북통일이 된다든지 하는 그런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소통과 협력을 통해서 좋은 일을 올바르게 해내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행복은 바로 그런 곳에 있으니까요.
그렇게 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다툼은 시급하게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단지 헌재의 평결이 조속히 완료된다든지 또는 차기 대선이 조속히 치러진다든지 하는 방법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더 본질적인 곳에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서로에게 지탱이 되어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소통과 협력은 사실 서로에게 쓰임을 받고 서로를 쓰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이겨야 내가 사는 관계와 다릅니다.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니라 쓰고 쓰이는 관계가 우리의 관계에서 분명하고 든든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다윗은 백향목 궁궐에 앉아서 텐트 아래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보았습니다. 그는 왕좌에 앉아서 요나단의 식솔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지 않고 나단과 의논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더 온전한 계획에 자신을 맞추었습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에 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보시고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생각을 절대로 옳은 것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 중에 저는 교회 안에 청년들이 왜 적은가에 대하여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청년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는 일에 저와 교회가 무척 서툴렀거나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통과 협력이 없는 곳에 즐거움과 기쁨은 없습니다. 소통과 협력이 일어나려면 그들과 우리가 함께할 때 온전해지며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몫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몫이란 그들이 알고 느끼고 경험한 것과 좋아하는 것과 바라는 것을 포함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부인의 길, 곧 십자가의 길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참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에게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아마 소통과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 자기부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면서 함께 더 좋은 것을 찾아가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시국은 소란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는 일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지탱해주고 받는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리나라는 좋은 대한민국이 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