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행 지 : 지리산 태극유람 10차(천왕봉) 경남 함양군, 산청군.
산 행 일 : 2023. 09. 22. ~ 23.(토)
산행코스 : 중산리 주차장 ~ 중산리탐방안내소 ~ 칼바위 ~ 홈바위 ~ 유암폭포 ~ 장터목대피소 ~ 제석봉(1,808m) ~ 천왕봉(1,915m) ~ 중봉(1,875m) ~ 써리봉(1,685m) ~ 치밭목대피소(1,425m) ~ 무제치기폭포 ~ 유평삼거리 ~ 대원사 ~ 대원사 주차장 (22km, 10시간 예상)
산행참석 : 17 백두.
<산행지도>
지난 팔공기맥 효령재~오로고개 구간은 비록 8월에 진행하는 여름산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짧고 업다운도 약한 편이어서 그다지 힘들지 않게 걸었지만, 그다음 구간인 오로고개~내밀재 구간은 산행거리도 20km가 넘고 산행 후반부에 있는 베틀산 구간의 업다운이 심한 편이라서 아직 여름의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하는 것이 약간 부담스러웠다. 하여 지난 8월 둘째 주 산행에서 태풍으로 미루었던 지리산 태극유람 천왕봉 구간이 고도도 높아 다소 서늘할 것으로 짐작되어 날씨가 맑다는 것을 전제로 지리산 태극유람 천왕봉 구간 산행을 진행하기로 한다.
지리산 천왕봉 일출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증조부와 할아버지께서 덕을 얼만큼 쌓아 놓으셨는지는 알 길이 없으니, 혹여 산행을 함께 하는 분들의 조상님들이 쌓아 놓은 덕에 의지해서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일기에보를 살피는데, 약간의 구름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맑은 날씨로 예보되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지리산행 버스에 오른다.
사실 서울에서 3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의 산행 출발지인 중산리에 새벽 3시쯤에 도착하여 천왕봉 일출(6시 15분쯤)을 보려면, 3시간 만에 천왕봉에 올라야 하는데 거의 사력을 다해 올라야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나 우리는 지리산태극종주 능선을 따라 이 골짜기 저 능선을 두루 탐방하는 유람 코스를 산행하는 터라, 이번에는 장터목 산장을 거쳐서 천왕봉을 올랐다가 대원사로 하산할 예정이므로 애당초 지리산 천왕봉 일출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지리산 주능선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면 하는 은근한 기대는 가지고 있었기에 버스가 중산리에 도착하자 바로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지리산 천왕봉을 최단거리로 오를 수 있는 출발점인 산청군 중산리버스정류장이 있는 운동장처럼 넓은 주차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산행준비를 마치고 버스를 나서니, 천왕봉 일출을 보려는 산객들은 이미 한 시간쯤 전에 모두 출발한 생태여서 대체로 한산한 편이고, 날씨는 맑은 듯한데 하늘의 별들이 듬성듬성한 것으로 보아 높은 구름이 있는 듯하다.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청군 시천면(矢川面)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시천천을 이루어 덕천강에 합류하는데, 시천천 상류로부터 흐르는 물이 '화살과 같이 빠르다'하여 '화살 시(矢)', '내 천(川)'자를 써서 시천(矢川)으로 불린다. 즉 물이 빠르고 계곡이 깊어 주변경관이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유래한 지명이고, 중산리는 이름 그대로 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개국 당시 패망한 고려를 지지했던 세력들의 은둔지였던 탓에 조선의 탄압을 받았던 곳이 중산리 마을이다. 이조시대 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 기록 속 중산리는 계단식 논을 경작하는 농민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중산리버스정류장에서 산행들머리인 중산리야영장 입구까지는 1.8km를 더 가야 하는데, 중산리야영장 바로 아래에 있는 중산리주차장은 소형차만 주차가 가능해서 도로를 따라 걸어 오르는데 지리산국립공원 입간판을 지나고,
<지리산국립공원>
1967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경남의 하동, 함양,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483.022㎢의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둘레가 약 320km나 되는 지리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동과 서, 영남과 호남이 서로 만나는 지리산은 단순히 크다, 깊다, 넓다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버스도 턴이 가능할 듯 보이는 중산리야영장 주차장 입구도 지나서,
지리산국립공원 산청분소를 통과하여 잠시 더 오르다가,
중산리계곡을 건너는 법계교를 건너면 따르던 도로를 두고 좌측 천왕봉 방향 등산로로 접어들어야 한다.
<법계교(法界橋)>
법계(法界)란 크게 나누어 세계·우주 전체와 진리 그 자체인 진여를 의미하는데, 이 둘을 종합하면 인과(因果)의 이치에 지배되고 있는 범위를 뜻하며 원래는 18계의 하나로서 의식의 대상인 법경이나 대승불교의 진여(眞如)·법신(法身)과 같은 말인데, 이 다리의 이름은 법계사로 가는 다리라는 뜻이란다.
애초의 계획에서는 조금 쉬운 산행을 원하는 분들은 이곳에서 순두류(경남도 환경교육원) 방향 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법계사를 둘러보고 칼바위 방향 등로를 따라 원점회귀하기로 하였지만, 오늘은 모든 분들이 천왕봉을 향해 가는 데까지 가 보겠다며 모두들 이곳에서 칼바위 방향 등산로로 접어든다.
중산 두류 생태체험장이란 아치형 간판이 걸린 등로로 들어서서 널찍한 포장 등로를 잠시 오르면,
이내 통천길이란 표지판이 걸린 아치 문이 나오는데 저 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돌계단길 등로로 바뀌며,
꾸준히 고도를 높이면 등로 좌측으로 뾰족한 바위를 만나는데 그 유명한 칼바위이고,
<칼바위(800m)>
칼날처럼 뾰족하게 생긴 바위는 원래 하나였다가 벼락을 맞아 갈라졌다고 하는데, 칼바위에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임금에 오른 직후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지리산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 자의 목을 베어오라고 자객을 보냈다. 자객이 바위틈에서 수행 중인 사람을 발견하고 칼로 내리쳤더니 바위가 갈라져 유암폭포 아래 ‘홈바위’가 되고, 그 칼은 부러지며 아래로 2km쯤 날아가 꽂힌 것이 지금의 '칼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내 우측 법계사 능선의 지계곡의 출렁다리를 건너,
칼바위 삼거리에 도착하여 잠시 쉼을 하며 행장을 점검한다.
칼바위 삼거리에서 좌측 장터목대피소 방향 등로로 들어서서,
법천골을 따라 다소 완만한 돌계단 오름길을 오르다가 깊은골 물길을 건너는 출렁다리를 건너면,
캄캄한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가 유난히도 우렁차게 들려오는데,
네이버 지도를 봤더니 이 부근 어디쯤에 법천폭포가 있을 듯한데 야심한 새벽이라 계곡의 작은 물줄기는 여럿 보이지만 어디가 어딘지 법천폭포를 찾기란 쉽지가 않고, 그럴 여유도 없어서 그냥 이 물소리가 법천폭포려니 생각하며 지나친다. 직폭(直瀑)인 법천폭포는 높이가 15m정도로, 장터목에서 흘러내리는 법천골도 이 폭포의 이름을 따서 법천골로 불리고 있다.
법천골로 합류하는 깊은골 물을 건너는 데크목 다리를 건너고,
법천골을 급하게 내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바위계단길을 오르다 보면,
태조 이성계가 보낸 자객이 칼로 내리쳐 바위가 갈라졌다는 홈바위쯤을 지나게 되고,
미명조차 스며들지 않는 터널 같은 숲길을 오르다가 별안간 하늘이 보이며 바위들이 나뒹구는 너덜지대로 들어서는데 앞서 가던 김전무가 쉼을 하고 있기에 곁에 자리를 만들어 새벽 커피를 나누며 잠시 여유를 찾는다.
꾀나 넓어 보이는 바위지대를 자세히 보니 바위들이 둥글둥글한 것이 계곡 범람부인 듯하며, 사람들이 쌓은 작은 돌탑들도 산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홈바위 돌탑지대쯤인 듯하고,
어둠속에서도 드러난 너덜겅의 규모가 대단히 커서 마치 백담사 앞의 계곡을 연상케 하는데, 천왕봉 남서쪽에 위치한 이 너덜겅은 천왕봉 사면의 암석들이 떨어져 나와 급류에 떠밀려 쌓이면서 산비탈이 아닌 계곡 중앙에 형성된 것으로 그 길이만도 500m가 넘는다고 한다.
아직은 어둠속이라 너덜겅에 산재한 돌탑들을 볼 수 없다는 약간의 아쉬움을 가지고 홈바위교를 건너서,
바윗돌이 깔린 등로를 따라 오르는데 우측 아래로 말안장 같은 큰 바위를 넘어서 떨어지는 유암폭포가 내려다 보이고,
<유암폭포(油岩瀑布, 1,210m)>
법천골 상류에 자리한 폭포로 칼바위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등로 우측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계곡 상류에 자리하여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으나 10여 미터 남짓한 매끈한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어제 내린 비로 제법 폭포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지명은 미끌미끌한 바위에서 떨어지는 폭포라 ‘기름 유(油)', '바위 암(岩)’자를 쓴다는데, 1998년 지리산 대폭우 당시 위에서 굴러 내려온 돌들이 매워져 버려 폭포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곳이 되어 버렸다 한다.
점점 더 가팔라지는 계곡길을 따라 오르면,
나무 그늘에 몇 개의 벤치가 있고 '병기막터'라는 이정목이 세워진 쉼터를 지나게 된다.
병기막터라는 이름은 옛날 지리산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빨치산들이 지은 이름으로 보이는데 그 정확한 내력은 알 길이 없고, 이제 장터목까지 1.2km 남았다고 하니 30분이면 오르지 않을까 짐작해 보지만 실제로는 1시간가까이나 걸렸는데, 지금까지는 보통의 오르막길이었지만 이곳부터는 급경사의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병기막터교를 건너며 돌아본 남동쪽 하늘이 일출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데 천왕봉 일출을 보겠다며 달려간 서여사님이 천왕봉에 올랐는지가 궁금해지고,
더욱 가팔라지는 바윗길 등로를 올라,
칼바위 삼거리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등로에서 마지막 목교인 명성교를 건너면,
장터목대피소까지 0.8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데 금방이라 짐작했던 장터목이 천리길인 듯 느껴지게 된다.
장터목까지 500m 남았다든 이정표를 지나고,
잠시의 여유도 없는 가파른 돌계단길이 이어지는데,
돌아본 나뭇가지 사이로 황금능선의 구곡산쯤이 아침햇살을 후광 삼아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리일출>
3대가 공덕을 쌓아야만 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오늘 천왕봉에서의 일출 시각은 06:17이었기에 이미 해는 동쪽에서 떠올랐다. 그래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구름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장면을 본다는 것조차 다행으로 생각한다.
“적선지가(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經)이라” 즉, '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받을 경사가 있다'라고 했으니 부지런히 공덕을 쌓아 언젠가는 멋진 지리일출을 맞이하고 싶은 산꾼은 공덕 쌓을 일이 새삼 육중한 무게로 다가온다.
살짝 당겨본 구곡산과 진양호 방향.
04-08 구조목의 고도가 1,552m이니 장터목까지 93m만 더 오르면 될 터인데 가파른 돌계단에는 로프까지 설치되어 있고,
돌아본 남쪽 방향으로는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에서 올랐던 하동의 금오산이 도드라져 보이며,
그 우측으로는 사천의 와룡산도 아스라이 가늠되고,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을 힘겹게 오를수록 달라지는 풍경이 신기하여 힘든 줄도 모르지만,
멋진 남해 바다 방향 조망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주저앉고 싶은 심경이 되어갈 즈음에,
장터목대피소 아래에 있는 산희샘(장터목샘) 위치에 설치한 식수장에 도착하여 션한 계곡수로 목을 축이고는,
가을의 전령이라는 구절초가 환영 나온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니 하동의 금오산 우측으로 남해의 망운산도 가늠된다.
<장터목 대피소(1,645m)>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위치한 장터목 대피소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람들과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이 물물 교환과 물건을 사고팔던 장(場)이 섰다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1971년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지리산 산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 1997년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장터목 대피소에서는 2005년 10월 18일 '한국의 명산 시리즈(두번째)'우표가 발행된 날부터 관광객들에게 추억을 제공하고 산행의 즐거움을 함께할 수 있도록 국내 최초로 현지에서 관광우편날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현지 날인 서비스를 시행하였으며, 이곳에서 발송하는 우편물은 장터목대피소 관광우편날짜 도장이 찍혀 산청 시천 우체국을 통해 전국으로 배달된단다. 대피소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20여 미터 내려가면 산희샘(장터목샘)이란 식수가 있다.
장터목대피소 남서쪽 테라스 전경.
<장터목>
장터목은 문자 그대로 장이 서는 고갯마루이다. 옛날에 산청군 시천면 사람들과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물교환을 하거나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팔았다고 한다. 시천 또는 마천에서 최소한 다섯 시간 이상을 그것도 험하고 가파른 길을 무거운 등짐을 지고 장터까지 왕래했다고 하니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엄연히 장이 섰던 곳이다. 현재는 언덕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운영하는 대피소가 위치해 있다. 장터목대피소는 주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목으로 특히 천왕봉 일출을 보러가기 위하여 하룻밤 묵는 곳이다.
장터목에서는 천왕봉 쪽으로 제석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함양 백무동 쪽으로는 내림폭포가, 노고단 쪽으로는 연하봉과 삼신봉이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또 산청 중산리 쪽으로도 갈 수 있다. 제석봉에는 원래 숲이 우거져 있었으나 1960년대에 도벌과 산불로 황폐하였다. 그래서 고사목이 즐비하며, 장터목대피소 아래에 위치한 샘물이 마를 수도 있는 원인이 되었다.
장터목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 말기에 왜적이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를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는데, 조정에서는 현상금을 걸고 왜적을 물리치도록 하였다. 성장군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모집하여 죽창, 농기구 등을 무기로 하여 장터목에 진을 치고 지키게 되었다. 왜적이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 막히자 함양, 운봉, 인월 등지에서 이성계에게 패한 패잔병들이 장터목 고개를 넘어 도망치던 중 장터목에 진을 치고 있던 성장군이 이들 패잔병들을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장터목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숙연한 마음이 든다. 천왕봉에서 내려온 사람, 천왕봉으로 오르려는 사람, 식사를 하고 잠시 쉬어가는 사람 등이 각자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거나 준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터목은 장터 같지 않고 오히려 장엄하다. 특히 아침 무렵 만물을 비춰오는 햇살은 산꾼들의 마음을 한결 푸근하고 여유롭게 한다.
살짝 당겨본 지리산 주능선과 서북능선 방향.
남쪽 사천만 방향.
반야봉 방향의 지리산 주능선과 서북능선 방향.
장터목대피소 취사장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땀냄새와 온갖 음식냄새가 뒤섞여 음식 맛이 느껴지지가 않는데, 조리가 필요치 않는 우리는 약간 서늘하기는 하지만 멋진 조망과 상쾌한 아침공기가 있는 테라스가 훨씬 더 좋았을 듯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지리산 주능선과 반야봉을 배경으로.
다시 본 남쪽 방향 조망.
천왕봉을 올라 대원사까지 진행해야 하기에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장터목대피소를 뒤로하면,
장터목대피소까지의 오름길에 비해 훨씬 수월한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돌아본 연화봉과 지리산 주능선 방향.
처연한 고사목들이 지키는 제석봉 고사목지대로 들어서니,
'제석봉 고사목' 안내판이 예전의 뼈저린 상흔을 떠올리게 하지만,
<제석봉(帝釋峰)의 고사목지대>
천왕봉(天王峰, 1,915m)과 중봉(中峰, 1,874m)에 이어 지리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봉우리 근처에 산 신에게 제를 올리던 제석단이 있고, 그 옆에 늘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제석봉 일대 약 33만㎡의 완만한 비탈은 고사목으로 뒤덮여 있으며, 나무 없이 초원만 펼쳐져 있다. 한국전쟁 직후까지만 해도 아름드리 전나무·잣나무·구상나무로 숲이 울창하였으나 자유당 말기에 권력자의 친척이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리고 거목들을 무단으로 베어냈고, 이 도벌사건이 문제가 되자 그 증거를 없애려고 이곳에 불을 질러 모든 나무가 죽어 현재의 고사목 군락이 생겼다고 한다.
돌아본 지리산 주능선 조망.
20여년 전부터 심기 시작한 구상나무가 차츰 덩치를 키우고 있어 속살을 드러낸 고사목의 아우성도 곧 멈출 듯이 보이고,
이내 출입을 막아놓은 정상 대신에 제석봉 이정표를 세워놓아 제석봉 정상 노릇을 하는 전망데크에 도착한다.
<제석봉(帝釋峰, 1,806m)>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시천면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의 봉우리로, 제석신이 머무는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봉우리 아래에 제석단과 향적대가 있다. 불교에서 가져온 지명으로 제석천신은 도리천의 주석하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불교적 의미에서 볼때 제석(帝釋)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임금을 말하므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 밑에 제석이란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작명인 것 같다. 옛날 민간신앙으로 제석천(帝釋天)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제석봉이라 한다.
동쪽 의령의 한우산과 자굴산 방향.
남쪽 사천만 방향.
서쪽 지리산 주능선 방향.
제석봉 이정표 앞 바위에 큼지막한 족적을 남기고는,
하얀 속살을 드러낸 고사목의 애처로운 응원을 받으며 천왕봉을 향하는데,
제석봉과 통천문 사이의 저 암릉(톱날능선)은 고산 특유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곳이지만 좌회하여 지나는 능선이고,
제석봉과 천왕봉 사이의 안부를 지나는데,
좌측 북서쪽 장수군 방향 산그림이 드넓은 대양의 파도인양 넘실대고 있고,
고사목과 어린 구상나무가 서로 위로하며 서 있는 능선을 따르는데,
우측 사천만 방향의 산그림도 질세라 그 모습을 일렁이고 있다.
바위암릉(톱날능선)을 좌회하여 오르면,
예로부터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전설이 있는 통천문의 좌측 바위에는 고색창연한 옛날 필적의 '通天門'이란 대각자(大刻字)가 암굴의 신비와 위엄을 더해주고 있고,
<통천문(通天門, 1,814m)>
하늘로 통한다는 뜻을 가진 통천문 즉 이 문이 세상과 하늘의 경계인 셈이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의 지리능선의 비경에 흠뻑 젖어 걷다가 만나는 문이 통천문이다. 통천문은 그 자체가 천연암굴로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못한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지금은 철제사다리를 놓아 산꾼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혹여나 부정하여 통과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통천문을 통과하여,
통천문 위 바위에 올라 돌아본 제석봉이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천왕봉을 향해 데크목 계단길을 올라서면,
돌아본 제석봉과 지리산 주능선 방향.
좌측 칠선계곡 갈림길이 있는 칠선계곡상단 이정목이 천왕봉까지 200m 남았다고 알려준다.
< 칠선계곡(七仙溪谷)>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한국 3대 계곡의 하나로 꼽힌다. 지리산의 원시림에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沼)가 천왕봉에서 칠선폭포를 거쳐 용소까지 18㎞에 걸쳐 이어진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골이 깊고 험해 죽음의 골짜기로도 불린다. 총연장 18㎞ 가운데 추성마을에서 천왕봉까지의 14km 정도가 등반코스에 해당한다.
계곡 입구의 용소를 지나 두지마을과 옛 칠선마을의 독가촌을 지나면 울창한 잡목 숲을 따라 전망좋은 추성망바위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험한 산길이 선녀탕까지 계속된다. 선녀탕에는 일곱 선녀와 곰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즐기던 일곱 선녀의 옷을 훔친 곰은 옷을 바위틈이나 나뭇가지에 숨겨 놓는다는 것을 잘못해서 사향노루의 뿔에 걸쳐 놓아 버렸다.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본 사향노루는 자기 뿔에 걸려 있던 옷을 가져다주었다. 이에 선녀들은 옷을 입고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 후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노루는 칠선계곡에서 살게 해 주고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았다고 한다.
선녀탕을 지나면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옥녀탕이 나오고, 벼랑을 오르면 비선담이 나온다. 비선담과 옛 목기막터를 지나면 청춘홀이라 불리는 굴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부터 경사가 더욱 심해지며 계곡을 상징하는 칠선폭포와 대륙폭포·삼층폭포의 물줄기를 따라 합수골로 이어진다. 합수골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면 두 갈래의 물줄기가 만나는 마폭포가 나온다. 이 마폭포를 지나 원시림이 울창한 등산로를 3km 오르면 천왕봉이다.
특별보호구 지정으로 출입이 금지된 칠선계곡을 제한적ㆍ한시적으로 탐방예약ㆍ가이드제를 시행하여 칠선계곡의 아름다운 경관 및 동ㆍ식물에 대한 해설로 국립공원의 새로운 탐방문화를 조성하고 있다.
다소 완만해진 바위 능선길을 따르면,
산객들이 올라서 있는 지리산 천왕봉이 지척으로 다가서더니,
<지리산(智異山, 1,915.4m)>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로, 지리산의 산세는 유순하나 산역(山域)의 둘레가 800여 리에 달한다. 총면적은 440.4㎢이며, 전라북도에 107.7㎢, 전라남도에 87.9㎢, 경상남도에 244.7㎢ 분포한다.
주능선 방향은 서남서∼동북동으로,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 1,915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칠선봉(七仙峰, 1,576m)·덕평봉(德坪峰, 1,522m)·명선봉(明善峰, 1,586m)·토끼봉(1,534m)·반야봉(般若峰, 1,732m)·노고단(老姑壇, 1,507m) 등이, 동쪽으로는 중봉(1,875m)·하봉(1,781m)·싸리봉(1,640m) 등이 이어진다.
또 주능선과 거의 수직 방향으로 발달한 가지능선은 700∼1,300m의 고도를 나타내며, 종석대(鐘石臺, 1,356m)에서 북으로 고리봉(1,248m)·만복대(萬福臺, 1,433m) 등의 연봉이 나타난다.
이 산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섬진강 지류들의 강력한 침식작용으로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고 산지 정상부는 둥근 모양을 보이는 험준한 산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들 계곡이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지의 주변에는 동쪽에 산청, 남쪽에 하동·광양, 서쪽에 구례, 북쪽에 남원·함양 등의 도시와 계곡에 마을이 발달하고 있어 원상(圓狀)을 이룬다.
지리산에는 이칭(異稱)과 별칭(別稱)이 많다.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이라 쓰지만 읽기는 지리산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리산을 그 음대로 지리산(地理山)이라 쓴 기록도 많다. 원래 ‘智異’는 지리라는 우리말의 음사(音寫)일 뿐이며 지리는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나온 이름이다.
두래는 "돌"(달)의 분음(分音)으로서 ‘두리’·‘두류’ 등으로 변음하여 ‘頭流’·‘豆流’·‘頭留’·‘斗星’·‘斗流’ 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이 많다. 이 중 두류(頭流)는 백두산의 맥세(脈勢)가 흘러내려서 이루어진 산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러한 지리산(地理山)·두류산(頭流山) 등이 지리산의 이칭이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삼신산은 중국 전설의 발해만(渤海彎)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으로, 이곳에 신선(神仙)과 불사약(不死藥)과 황금(黃金)·백은(白銀)으로 만든 궁궐이 있다는 ≪사기 史記≫의 기록이 있는데 지리산은 이 중 방장산에 대비가 된다. 그 밖에 봉래가 금강산, 영주가 한라산이다. 여기에 묘향산을 더하여 4대 신산(四大神山)이라 하고, 그에 구월산을 합하여 5대 신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나 지리산을 신산(神山)으로 꼽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지리산을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壯而不秀)고 표현하였다. 또 ≪팔역지 八域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산수론(山水論)에서 지리산을 조선의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기도 하였다.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에 해당되며 12종산(宗山)의 하나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호남읍지≫, 신경준(申景濬)의 ≪산수고 山水考≫, ≪대동지지 大東地志≫ 등에도 모두 지이산(智異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류산·방장산·지리산(地理山)·남악 등의 이칭이 소개되어 있고, 두류의 류(流)자는 백두산의 맥이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류(留)로 씀이 옳다는 제안도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두류산(頭留山)이라는 이칭이 하나 더 추가된다.
거대한 지리산 덩어리에 볼록 솟은 암괴 꼭데기인 천왕봉 정상에 도착하는데,
<천왕봉 정상석의 뒷면>
현재의 표지석은 1982년 초여름 당시 경남 도지사 이규호씨와 민정당 실력자였던 권익현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상남도가 세웠다고 하며, 높이 1.5m의 자연석을 옮겨와 세운 이 표지석의 전면은 '지리산 천왕봉 1,915m'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영남인의 기상 여기에서 발원되다를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란 글로 언제부터인가 바꿔 새겨 놓았다.
예전의 정상석 뒷면에는 남명 조식선생의 시(詩)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請着千石鐘 (청간천석종) 청하여 천석종을 보니
非大叩無聲 (비대구무성) 큰 종채가 아니면 소리가 나지 아니한다네
萬古天王峰 (만고천왕봉) 만고의 천왕봉은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은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아니하네
천왕봉을 힘겹게 올랐음에도 천왕봉일출을 놓친 산꾼을 위로라도 하듯, 동으로는 대구의 비슬산이 서로는 광주의 무등산이 그리고 북으로는 덕유산, 남으로는 남해도의 망운산까지의 장쾌한 조망을 선사하여 지친 산꾼을 감동케 한다.
가야 할 동쪽 중봉 방향.
서쪽 지리산 주능선과 반야봉 방향.
북서쪽 장수군 방향.
남쪽 사천만 방향.
"줄을 서시요!" 산객들이 지리산 천왕봉 정상 인증을 위해 줄지어 기다리는 정상 전경.
<천왕봉(天王峰, 1,915.4m)>
지리산은 한반도에서 세 번째,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백두산(2,750m), 한라산(1,950m) 그다음이 지리산 천왕봉(1,915m)이다. 그러나 지리산은 단순히 해발 고도만으로는 다른 산과 비교할 수 없는 민족의 영산이다. 천왕봉은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끝자락을 얼마 두지 않은 곳의 최고봉이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근본 산줄기로,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백두산과 지리산을 성산(聖山)으로 숭배하였다. 또한 지리산은 신라 5악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렀고, ‘멀리 백두대간에서 뻗어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옛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면서 유람록을 남겼을 뿐 아니라 등산객들이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도착하는 곳이 천왕봉이다. 천왕봉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크게 네 갈래이다. 대개 경남 산청군 중산리, 유평리 대원사 계곡, 경남 함양의 칠선계곡 그리고 제석봉 아래에 위치한 장터목 등에서 천왕봉으로 향한다. 천왕봉 정상은 크고 작은 암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는 근래까지 성모상과 성모상을 모신 사당이 있었던 곳이다. 성모상은 여러 번 훼손되는 수난을 겪다가 누군가에 의하여 결국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현재 산청군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천왕봉 성모상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태고 시절 옥황상제가 그의 딸 마고에게 지리산을 지키라고 명한 후 후토지신(后土之神)이 신라왕의 꿈에 나타나 “경주옥돌로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상봉에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황적사를 지어 향화(香火)를 받들라”(손성모, 143) 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성모상은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설,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설, 석가여래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설 등이 전해온다. 설(說) 마다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가지지만 지리산을 수호하는 상징적 여신(女神)임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성모상은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숱한 수난을 겪는다. 고려 말에는 침입한 왜구가 칼로 석상을 내리 쳐 석상의 귀와 코가 떨어져 나갔는가 하면, 1970년대에는 누군가가 석상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두 차례나 사라진 적도 있었다. 1987년 진주에 사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찾아내어 중산리 천왕사에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천왕봉의 백미는 일출이다. 운해(雲海)를 헤집고 세상천지를 밝게 하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지 않고는 천왕봉을 제대로 올랐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천왕봉일출’이 ‘지리 10경’ 지리 10경은 1경 - 천왕일출(天王日出), 2경 - 노고운해(老姑雲海), 3경 - 반야낙조(般若落照), 4경 - 벽소명월(碧宵明月), 5경 - 연하선경, 6경 - 불일현폭(佛日顯瀑), 7경 - 피아골단풍(직전단풍, 稷田丹楓), 8경 - 세석(細石)철쭉, 9경 - 칠선계곡(七仙溪谷), 10경 - 섬진청류(蟾津淸流)이다.
중 제1경이며,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3대에 걸쳐 덕을 쌓고 적선해야 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선인들도 비바람 속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일출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에도 동이 틀 무렵에는 천왕봉 정상에는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1월 1일 또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는 2~3,000명이 운집할 때도 있으며, 정상으로 오르지 못하고 주변 대피소 또는 등산로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정상에 오른 사람보다 더 많을 때도 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소원을 빈다. 천왕봉 정상은 크고 작은 바위가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눈비가 오거나 이슬 또는 운무(雲霧) 때문에 미끄럽다.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이른 새벽 동틀 무렵 끝없이 펼쳐진 회색 구름바다가 서서히 주황색으로 물들면서 그 속에 해가 솟는다.
천왕봉 주변에는 장터목산장 쪽으로 고사목 지대이자 구상나무 식재지인 제석봉(1,806m), 칠선계곡 쪽으로 마폭포, 치밭목산장 쪽으로 중봉(1,875m), 제석봉과 천왕봉 사이의 통천문, 로타리산장 쪽으로는 천왕샘, 개선문 등이 있다.
한참을 기다려 남긴 지리산 천왕봉 인증.
즐겁고 여유로운 산행을 하시는 분들은 이곳 천왕봉에서 다시 중산리로 원점회귀 산행을 하게 되지만, 우리는 중봉과 치밭목대피소를 지나 대원사로 하산해야 한다. 남아있는 산행길에 대한 부담으로 천왕봉 정상에 앉아서 장쾌한 조망을 즐길 기회조차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아직도 중봉과 써리봉에서의 조망을 기대하며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머문 지리산 천왕봉을 뒤로하고, 천왕봉에서 분기하는 웅석지맥 능선으로 접어들어 중봉을 향하는데,
이정표의 중산리 방향 급경사 내림길은 새벽에 출발한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직진의 능선은 지리산 동부능선으로 중봉, 하봉, 밤머리재,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덕천지맥(신산경표상 웅석지맥)의 시발점이기도 하고 화대종주꾼들이 가는 대원사코스와 지리태극종주 길이기도 한데 일반 등산객들은 잘 다니지 않고 비탐구간이 많다.
<웅석지맥(熊石枝脈)/덕천지맥(德川枝脈)>
지리산 천왕봉(1915m)에서 북쪽으로 가지를 쳐 중봉(1875m), 하봉(1755m), 쑥밭재를 지나 1315m 봉에서 동진하여 왕등재, 밤머리재를 지나 웅석봉(1099.3m) 어깨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백운산(515m)을 일구고 고도를 바짝 낮춰 아미랑재, 제마재를 지나 경남 진주시 귀곡동 진양호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54.5km 산줄기로 덕천강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덕천지맥이라고 부른다.
천왕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진 능선에 암릉도 보이지만 잘 정비된 우회 등로를 따라 멀리 덕유산과 가야산의 호위를 받고 있는 듯이 보이는 중봉을 향하면,
고사목과 어린 구상나무 그리고 잡목들이 뒤섞여 통행이 어려울 듯 보이지만 등로가 잘 나있어서 걷기에 지장이 없으며,
바위 암릉에는 어김없이 안전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고산지대 식생을 살피며 걷기에도 문제가 없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헬기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에 돌아보니,
헬기가 커다란 마대자루를 달고와서 천왕봉 정상에 내려놓고 있는 것으로 보여,
응급구조 헬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소리나는 천왕봉을 수시로 돌아보며 중봉을 향해 오르면,
지리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이지만 이정표를 제외한 별다른 표식이 없는 중봉에 도착한다.
<중봉(中峰, 1,874m)>
중봉(中峰)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와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일대에 걸쳐있는 산으로, 천왕봉(1,915m)에 비해 겨우 40m 낮은 지리산 제2봉이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봉우리다. 지리산 주능선의 천왕봉이 동쪽으로 맥을 뻗은 첫 봉우리가 중봉으로, 중봉에서 북쪽으로는 하봉과 두류봉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써리봉으로 연결된다.
중봉과 중봉에 있는 마암(馬岩)은 '두류전지'에 지리산 명승지의 하나로 기재되었다. 남효온(1454~1492)의 『유천왕봉기(遊天王峰記)』에, "천왕봉의 봉우리 형세가 북쪽으로 내달리다 멈춘 곳이 중봉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여러 유학자들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곤 하였다. 1871년 9월에 중봉과 천왕봉을 유람하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쓴 배찬(裵瓚, 1825~1898)은 "중봉의 산막에서 잠시 쉰 다음 곧장 일월대(日月臺)에 이르렀다."라고 기록하였다. (한국 지명유래집 경상편)
중봉에서 본 남동쪽 진양호 방향.
돌아본 천왕봉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진 지리산 주능선 방향.
<행복>
- 허형만 -
지리산에 오르는 자는 안다.
천왕봉에 올라서는
천왕봉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천왕봉을 보려거든
제석봉이나 중봉에서만
또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매한가지여서
오늘도 나는 모든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
순해진 귀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행복해 하고 있다.
- 시집 《첫차》 (황금알, 2005)
천왕봉 정상에서는 볼 수 없지만 중봉에서는 보이는 천왕봉!
남쪽 사천만 방향.
중봉 이정표를 뒤로하고 잡목이 빼곡한 등로를 10여 미터 진행하면,
가야 할 써리봉과 치밭목대피소 방향 능선이 내려다 보이는 조망바위가 있고,
조망바위를 내려서서 써리봉 능선으로 들어서자 앞쪽 진양호 방향 조망이 시원스레 펼쳐지며 산꾼의 걸음을 느리게 하는데,
등로에 핀 용담의 속삭임도 떨쳐내면,
중봉에서 북쪽 하봉과 두류봉으로 이어지는 태극능선 분기점을 알려주는 '출입금지' 표지판이 "하봉 방향 태극종주는 언제 올래?"라며 유혹하고 있지만,
호기심이란 놈의 유혹을 뿌리치고 동쪽 능선으로 들어서서 잠시 가파른 암릉을 내려서면 가야 할 써리봉과 치밭목대피소가 내려다 보이고,
거칠고 가파른 능선에 설치된 데크목 계단을 연이어 내려서면,
중봉 안전 쉼터(1,741m)를 지나게 되는데 중봉에서 이곳까지는 200m 거리지만 벌써 고도를 130m나 낮춘 지점으로, 마침 쉬고 있던 산객들이 떠난 벤치에서 잠시 나른해지는 초가을 분위기를 즐긴다.
중봉에서 써리봉 가는 길도 계속해서 내려가는가 싶더니 산허리를 돌고 돌면서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다가,
움푹 들어간 암릉을 연결하는 데크목 다리를 지나는데,
좌측으로 태극종주 능선인 두류능선과 우리가 따르고 있는 치밭능선 사이의 골짜기인 조개골이 내려다 보이고,
<조개골 유래>
조개골의 지명유래는, 6.25 이전까지 골짜기 입구에 조계사란 절이 있어 조계골로 불리다가 조개골로 음운변화 했다는 설과, 옛날 바다였다가 지각변동으로 해면이 융기되어 조개화석이 발견되어, 또는 지리산에서 아침이 가장 먼저 열리는 골짜기여서 조개골(朝開谷)로 불린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우측으로는 지나온 천왕봉이 또다른 모습으로 다가서며,
이제 좌측 두류능선 방향으로는 하봉쯤도 건너다 보이더니,
천왕봉과 중봉을 바라보고 있는 새 머리 모양의 바위가 있는 암봉을 올라서니 '써리봉'이 괜히 써리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앞으로 몇 개의 암봉을 더 넘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써리봉에서의 조망이 멋지다니 기대를 가지고 써리봉 정상을 향해 작은 암봉 오르내림 길을 이어간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 암봉을 내려섰다가,
이내 다시 데크 계단을 오르면,
가야 할 써리봉이 잡힐 듯 건너다 보이고,
다시 암봉을 내려섰다가 오르면 조망이 좋기로 소문난 써리봉 정상에 도착하는데, 이정표는 바위 봉우리 옆사면에 있다.
<써리봉(1,685m)>
써리봉은 바위 봉우리들이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는데, 마치 그 모양이 농기구 써레를 닮아 붙여졌다. 농기구 중에 '써레'라는 것이 있는데, 쟁기로 갈아엎은 논바닥의 흙덩이를 잘게 부수는 빗살처럼 생긴 농기구를 말한다. 그 써레를 경상도 사람들은 '써리'라고 하였고, 써렛발을 닮은 봉우리라 하여 '써리봉'이라고 한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천왕봉과 중봉 모습.
북동쪽 황매산 방향의 산그림.
동쪽 진양기맥의 조망 맛집이라는 한우산과 자굴산 방향.
써리봉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진 S자 모양의 황금능선.
천왕봉과 중봉의 호위를 받으며 유려한 S라인의 황금능선과 진양호를 하릴없이 조망하고 싶지만,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하산한 분들의 기다림이 조바심으로 바뀔까 저어되어 써리봉 정상을 내려서는데 바로 써리봉 정상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황금능선이 굽이쳐 향하는 방향에는 하동의 금오산쯤이 가늠되며,
치밭목 대피소까지 1.6km 구간도 쉽사리 내어주지는 않으려는 듯, 여전히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좀체 고도가 낮아지지를 않는데,
황매산 방향으로 이어진 능선에 가야 할 치밭목대피소가 내려다 보이더니,
황금능선 갈림길쯤에서 우측 황금능선 방향의 희미한 등로를 두고 좌측의 뚜렷한 등로로 들어서서,
완만한 등로와 데크목 계단 내림길이 연이어 나타나는 편안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취나물 밭'에서 유래했다는 치밭목대피소에 도착하는데,
<치밭목 대피소(1,425m) >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지리산 새재와 천왕봉 간 중간에 위치한 대피소다. 2017년 8월 16일에 지상 2층, 연면적 297㎡의 규모로 신축 개장하였다. 6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기상 악화 시 대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특히 이용자 편의를 위해 독립형 침상을 설치해 편안하고 쾌적한 공간을 제공한다. 이 대피소는 해발 1425m에 위치해 삼장면 유평리 새재 탐방로 입구에서 약 3시간(4.8㎞)이면 오를 수 있다. 치밭목 대피소에서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까지는 3시간(4.0㎞) 가량 소요된다.
'치밭'은 원래는 곰취, 참취 등 '취나물 밭'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천왕봉으로 가자면 비탈길로 치받아 올라가는 고개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국립공원 초창기 대피소는 '산장'으로 불렸고, 무인으로 운영되거나 관리인을 두고 있었다. 산행 시 조난 및 사고에 대비하는 대피 기능은 물론, 간이 휴게소 또는 숙박시설의 기능까지 제공했다. 20~30명 정도의 소규모로 지어진 초기 대피소는 1980년 후반 들어 증가하는 탐방객 수용에 한계에 봉착했고 시설이 낙후되어 조난사고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어려웠다. 1987년 국립공원공단 설립 후 기존 산장을 증개축하거나 신축했고 '대피소'로 변경했다. (국립공원 역사아카이브)
앞서 갔던 일행들이 테이블 벤치에서 쉼을 하고 있다가 용호형이 두통과 어지럼 증세를 보인다며 약을 구하고 있다.
늘 배낭에 갖가지 비상 물품을 넣어 다니는 만식형이 건넨 아스피린을 복용한 용호 형이 금세 말끔해진 표정으로 다시금 배낭을 메기에,
대원사까지 7.7km, 대원사 주차장까지는 9.8km 남았으니 부지런히 걸어야 2시쯤에 도착할 듯 보여 서둘러 하산길에 나서니,
밀림에라도 들어온 듯 손톱만큼의 하늘도 보이지 않는 숲속으로 가파른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작은 지계곡을 건너는 목교를 건너면,
'추락주의' 팻말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무제치기폭포 상단 전망대쯤인 듯 보이지만 시간 여유가 없어서 우틀하여 데크목 계단길로 들어서서,
길고 가파른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니,
작은 돌탑이 있는 지점 좌측으로 제법 뚜렷한 길흔적이 나오는데 무제치기폭포가 50m라는 표지판이 걸려있다.
함께 가던 만식 형에게 예까지 와서 그냥 갈 수 없지 않으냐며 동의를 구하고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나뭇잎 사이로 폭포의 모습이 살짝 보이더니,
이내 어제 내린 비로 시원한 물줄기를 떨구고 있는 무제치기폭포 아래에 도착한다.
< 무제치기폭포>
장당계곡은 써리봉에서 발원하여 치밭목대피소 아래에는 해발 1,000m상에 위치한 무제치기폭포를 품고 있다. 스스로 무지개를 만드는 폭포라 하여 ‘무지개치기’의 준말인 ‘무제치기’로 불리는 폭포는 40여 m의 거대한 암벽 위에 3단을 이루고 있다. 위쪽 1단에서는 세 가닥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2단에서는 여덟 갈래로 흩어졌다가 3단에서는 다시 양갈래로 모아져 쏟아진다. 우륵이 이곳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무에 실을 매달아 튕겨 가며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3단으로 이어진 무제치기폭포 모습.
마음이 급한 산꾼은 시원한 폭포수에 손 한번 담그지 않고, 바로 무제치기폭포 갈림길로 돌아나와,
무제치기교를 건너,
정글을 연상하는 험한 계곡을 지나는 데크목 등로를 연이어 지나며,
키높이를 넘는 빼곡한 조릿대숲을 만나서는 길흔적을 놓쳐 잠시 혼란을 격기도 하다가,
고마운 옛 산꾼의 배려를 이정표 삼아 다시금 하산길을 이어가면,
좌측 새재 방향 갈림길인 용수동 삼거리를 만나는데, 무제치기폭포에서 10여분 남짓을 소모했지만 치밭목대피소에서 1.8km 내려오는데 1시간 걸렸다.
용수동 삼거리를 지나자 장단계곡 좌측 산사면으로 이어진 등로는 험하지만 제법 잘 정비되어 있어서 사뭇 지루한 느낌조차 들며 길게 이어지다가,
데크목 계단길을 올라서자 앞쪽으로 가을 단풍이 장관이라는 장당골과 치밭목능선의 끝자락이 또렷이 조망되고,
<단풍 보러 가야 할 장당골>
장당계곡은 써리봉에서 발원하여 치밭목산장 아래 해발 1,000m상에 위치한 무제치기폭포를 품고 있다. 장당골은 내원사 앞에서 내원골 물줄기가 더해져 내원사계곡을 이루어 흐르다가, 대포리 어귀에서 대원사에서 흘러온 계류와 합쳐지면서 대포(大浦)란 이름 그대로 큰 물바다를 이룬다.
이름처럼 길고 긴 장당골은 산꾼들 사이에서는 지리산의 마지막 비경으로 꼽힌다. 중산리와 대원사 쪽 등산로가 잘 개발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비탐구역으로 묶이면서 원시적 모습이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장당골은 그만큼 일반인들의 접근은 쉽지가 않다. 내원사 앞에서 경상대학교 연습림까지 널찍한 길이 있고 대원사 쪽에서도 무제치기폭포까지 쉽게 갈 수 있다.
장당골의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래가 있다. 지금의 장당(長堂)은 글자 그대로 골짜기가 길고 깊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다른 글자인 장당(將堂)은 이곳 삼장면(三將面)의 지명과 더불어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절이 많아 부처 앞에 불을 밝히는 장등(長燈)이 언제나 골짜기를 환히 비쳐 ‘장등이 많은 골짜기’라는 말이 변하여 장당골로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도 있다.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서 잠시 더 사면길을 따르면 전망이 트이는 바위 암릉을 지나는데,
날씨가 흐려지는지 구름이 하늘을 가렸지만 오히려 멀리까지도 조망되며 치밭목능선 끝간데로 사천의 와룡산쯤도 가늠되고,
계속해서 다소 거친 사면길과 데크목 계단길을 오르내리며 장단골 물소리와 점점 멀어지며 다소 지루한 사면길을 따르다가,
빼곡한 조릿대밭으로 들어서며 등로가 능선 위로 이어지더니,
치밭목능선을 좌측으로 넘는 지점에 대원사까지 4.1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일부 산행기에는 이 지점을 장당봉이라고 하는 곳이라 잠시 배낭을 내리고 목을 축이며 쉼을 한다.
능선 북쪽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웅석지맥의 왕등재쯤 모습.
치밭목능선을 뒤로하고 나무와 돌계단 그리고 데크목계단이 연이어지는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다가,
지계곡을 건너는 목교를 건너자,
등로는 계곡 좌측 사면을 따라 다소간 완만하게 이어지고,
또다른 지계곡 물길을 건너는 목교를 지나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그늘이 드리워진 편안한 등로를 따르면,
우측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등로 갈림길이 나오지만,
유평마을로 이어지는 직진의 너른 수레길을 따르면,
국립공원 차단기를 지나 감나무밭과 농가주택이 있는 유평마을 안으로 들어서게 되고,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우틀하여 아래로 내려가면,
대원사 주차장에서 새재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에 접속하게 되고, 다시 우틀하여 유평마을과 대원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곳부터 대원사주차장(소막골야영장)까지는 대원사계곡길 트레킹 코스로 대원사까지는 도로를 따르다가 이후 대원사 주차장까지는 새로이 개설된 걷기길을 따르게 되는데,
이내 우측 유평~천왕봉 등산로 입구 갈림길을 지나고,
유평마을 표석과 안내판도 지나면,
소리만으로도 시원해지는 대원사 계곡을 내려다보며 걷게 되고,
<대원사 계곡>
기암괴석을 감도는 계곡의 옥류소리, 울창한 송림과 활엽수림을 스치는 바람소리, 산새들의 우짖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대자연의 합창을 들을 수 있는 계곡이 대원사계곡이다. 30여 리에 이르는 대원사계곡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발재와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로 해서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산자락 곳곳에서 발원한 계류가 암석을 다듬으며 흘러내린다. 조그만 샘에서 출발한 물길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면서 신 발골과 조개골, 밤밭골로 모여들어 새재와 외곡마을을 지나면서는 수량을 더해 대원사가 있는 유평리에서부터 청정 비구니가 독경으로 세상을 깨우듯 사시사철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로 깊은 산중의 정적을 깨운다. '나 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은 대원사계곡을 일컬어 남한 제일의 탁족처(足處)로 꼽으면서 "너럭바위에 앉아 계류에 발을 담그고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먼데 하늘을 쳐다보며 인생의 긴 여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으라' 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음식점들이 즐비한 거리도 지나,
자동차의 통행이 거의 없는 도로를 따르다가,
도로 옆에 새로이 설치한 무장애탐방로를 잠시 따르면,
이내 대원사 계곡을 건너는 방장산교와 대원사에 도착한다.
국내 3대 비구니 사찰로 알려진 대원사 전경.
<대원사(大源寺)>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에 있는 사찰이다. 지리산의 동쪽 기슭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합천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신라 548년(진흥왕 9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平原寺)라 불렀다. 그 후에 폐사되었던 것을 조선조에 와서 1685년(숙종 12)에 중건하여 대원암(大源庵)이라 하였고, 1890년(고종 27)에 고쳐 지으며 지금의 대원사라 칭하게 되었다.
이후 1913년 화재로 1917년에 중건하였으나,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면서 빨치산의 웅거를 우려한 진압군에 의해 다층석탑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955년부터 만허당 스님이 35년간 중창하여 비구니 선원을 개설하였는데, 이 절의 선원은 석남사(石南寺), 견성암(見性庵)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참선 도량으로 꼽힌다. 건물로는 대웅전·원통보전·응향각·산왕각·봉익루 등이 있고, 절 뒤쪽의 사리전(舍利殿)에는 비구니들이 기거한다. 절 입구에 부도와 방광비(放光碑)가 있고, 선비들의 수학처인 거연정(居然亭) 등이 있다. 또 보물 제1112호인 대원사다층석탑이 유명하다.
대원사 입구 정면의 2층 누각인 봉상루(鳳翔樓)에는 '방장산 대원사(方丈山 大源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려 왔다. 또 백두산의 맥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뜻에서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불가(佛家)에서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의 그 깊은 의미를 빌어 방장산(方丈山)이라고 하였다. 대원사 입구 봉상루 현판에 쓰인 산 이름이 '방장산'인 이유다.
대원사 경내를 둘러보고 싶지만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일찌감치 하산하여 기다리고 있을 분들께 누가 될까봐 발길을 돌려 다시 대원사계곡길을 따르면,
대원사 일주문을 나가게 되는데,
일주문 정면 현판에도 '방장산 대원사(方丈山 大源寺)'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잠시 더 길 가에 설치한 데크목 걷기길을 따르다가,
대원교를 따라 계곡을 건너서는,
계속 도로를 따라도 되지만 우측 대원사 계곡 옆으로 이어진 데크목 걷기길을 따르면,
멀리서도 깊은 계곡의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쌓인 산꾼의 피로를 씻어주고,
군데군데 마련된 쉼터가 지친 산꾼을 유혹하지만,
기다리는 분들의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줄이려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며 발걸음을 재촉하여,
소막골야영장 입구 출렁다리를 지나서,
넓은 대원사 주차장에 도착하였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애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앞서 하산한 분들이 파전을 시켜놓고 하산주를 나누고 있기에 10시간이 넘게 메고 있던 배낭을 내리고 하산주 잔을 받아 든다.
매번 짧고 즐거운 산행을 하는 분들을 기다리게 해서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은 계획된 코스를 완주한 사람들이 오히려 1시간 반쯤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어 역지사지의 경험을 하였다. 연애를 할 때 애인을 기다리는 것도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데 동료산꾼의 하산을 기다리는 게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래도 기다리는 시간이 30분쯤이 지날 때는 '왜 늦어질까?'라며 약간은 원망도 섞인 기다림의 시간이었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1시간이 넘자 '뭔 사고가 났나?'라며 무사히 와 주기만을 바라게 되고, 마침내 1시간 반쯤이 넘어서 나타나자 '한겨울에 꽃을 본 듯' 반갑고 고맙기까지 하다.
옛날 학창 시절에 효자가 되는 방법을 전해주신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보통의 자녀들은 저녁 식사시간까지는 귀가를 해야 했는데,
1~2시간이 늦게 귀가하면 아버지께서 화를 내신다. - 불효 레벨 보통.
3~4시간이 늦어 밤 11시쯤에 귀가하면 아버지의 화가 하늘을 찌른다 - 불효 레벨 최악.
5~6시간이 늦어 자정이 넘어서 귀가하면 아버지는 무사히 귀가하는 자녀가 반갑고 고맙다. - 효자
무사히 하산하여 반갑고 고마운 분들이 탑승한 버스가 도착하자 산청의 목감탕으로 이동하여 땀을 닦고,
진양기맥 산행 때 같던 식당에서,
모처럼 장쾌한 조망을 선사받은 지리산 천왕봉 산행 예기를 안주삼아 푸짐하고 즐거운 뒤풀이 시간을 가지고는,
말없이 기다리던 애마에 올라 서울로 향한다.
지리산 천왕봉이 속삭였다.
가파른 돌계단길을 즐겁게 올라줘서 고맙다.
이제 발아래로 펼쳐진 장관을 마음껏 즐기고,
네 발길 닿는 데로 가거라!
첫댓글 지리산은 언제가도 또 가고 싶은 산입니다.그날 못 가본 천왕봉을 산행기로 대신 산행을 했습니다. 즐감했습니다.감사 감사 감사 드립니다.
대장님~~천왕봉을 떠오르게해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천왕봉찍고 너무감동받았어요 또 언제오를까요?? 너무가기힘듣곳이라~~희망을갖고..백두님들 건강하게 산행때뵈어요 ^^
천왕봉에서 남긴 인증사진 보며
힘들게 오르셨겠지만 나름 멋진 산행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홧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