跋
先君子께서 髫齔嗜書하시고 長而服習益深하여 厯四十年無閒寒暑라 自歐趙入門하여 假途顏柳하고 復由顚素하여 希蹤二王하고 旁及篆籒에 無不究心이라 遇古刻名蹟에 不惜重貲하여 購藏하고 曾倩馮君棲霞*하여 繪臨池契*古圖하고 以志嚮往이라 又喜蓄古硯하여 藏石中有松皮鸜鵒*하니 兩硯尤爲異品이라 署所居曰雙硯草堂하여 屬沈君竹賓*作圖하고 紀之니라 每不肖侍側에 必論及作書體勢하고 並一一指示用筆用墨之法이라 諄切不倦하나 今雖欲再聞提命이니 何可得哉리오 臨池心解一書는 固自言其生平致力之處니라 有覽古而得者하고 有會悟而得者하니 隨筆錄存不更次第니라 曩偶撰詩文하여 成卽棄去러니 以意非專屬也라 惟百雁詩*가 尚留篋中이러니 是書曾擬刊本問世이나 久而未果에 而先君子遽棄養矣라 因亟付梓하여 人以爲後學津筏러니 庶稍慰先靈於泉壤云이라 不肖男運鴻運開運馨運瀾百拜謹誌라
선친께서는 유년 시절부터 글씨를 좋아하셨고 성장하여서는 학습이 더욱 깊어 사십여 년 동안 한가한 날이 없었다. 구양순ㆍ조맹부로 입문하여 안진경ㆍ유공권의 도움을 받았으며, 다시 장욱ㆍ회소를 따라 왕희지ㆍ왕헌지에 도달하였고, 널리 전서ㆍ주문에 이르기까지 진심으로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옛날의 각석이나 이름난 묵적을 만나면 거금을 아끼지 않고 구매하여 소장하였고, 일찍이 풍서하를 청해 임지의 모임에서 옛 그림을 그리게 함으로써 마음으로 숭배하였다. 그리고 옛 벼루 모으기를 좋아하였고, 수장한 것 중에 송피(松皮)와 구욕(鸜鵒)이란 두 개의 벼루가 있었으니 기이한 물건이라고 했다. 거처하는 곳에 〈쌍연초당〉이란 편액을 걸고 심죽빈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것을 기념하였다. 매번 나를 시켜 시봉하게 하였고, 서예의 필획이나 결구를 논하게 되면 아울러 용필법ㆍ용묵법을 일일이 일러주셨다. 다정하고 친절하게 가르치면서도 피곤한 줄 모르셨으니 지금 비록 다시 훈도를 듣고자 하나 어찌 들을 수 있겠는가? 『임지심해』 한 권은 진실로 평생 힘써온 점을 말하고 있다. 옛것을 보고서 터득하는 이가 있고 깨우쳐 터득하는 이가 있으니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였으며 다시 순서에 따라 엮지 않았다. 저번에 우연히 시문을 짓고 나서 버렸으니 뜻이 전부 속한 것은 아니다. 오직 백안시(百雁詩)가 아직 상자 속에 있으니 일찍이 간행본으로 출판하려고 하였으나 오래도록 출간하지 못하였는데, 선친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로 인하여 서둘러 인쇄하여 사람들이 후학들의 지침서로 삼았으니, 바라건대 지하에 계신 선친께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못난 아들 운홍ㆍ운개ㆍ운형ㆍ운난은 백번 절하며 삼가 쓰다.
*馮君棲霞(풍군서하) : 인명으로 여기지만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臨池契(임지계) : 서예를 공부하는 모임을 가리킨다.
*松皮鸜鵒(송피ㆍ구욕) : 송피 무늬가 있는 벼루와 구욕안(鸜鵒眼) 무늬가 있는 벼루를 가리킨다. 구양수는 『연보(硯譜)』에서 “단석은 단계에서 나온다. …… 구욕안이 있는 것을 귀히 여긴다[端石出端溪 …… 有鸜鵒眼爲貴.]”라고 하였다.
*沈君竹賓(심군죽빈) : 심죽빈(沈竹賓, 생졸 미상, ?-1901後)을 가리킨다. 『中國美術家人名辭典』에 “자는 죽빈(竹賓)이고 원명은 심락(沈雒)이며 호는 묵호외사(墨壺外史)로 강소 오강(江蘇吳江) 사람이다. 그림을 잘 그렸고, 필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왕학호(王學皓)를 모사하였고, 다른 하나는 해강(奚岡, 1746-1803)과 신채가 유사하였다”라고 하였다.
*百雁詩는 주화갱의 시로 추정된다.
跋
余既有金壺字攷*之刻이라 南沙顧耐圃茂才*한대 見而韙之曰 學書者에게 庶有津梁乎아 因手示臨池心解一編하여 謂此亦書家標準也라 盍彙而刊之爲하여 後學導先路耶리오 余受讀一過하고 覺其言約其義가 顯於八法體會라 極深闡發極透하고 蓋從閱厯甘苦中에 得來非附會陳言剿襲名論者니라 可比原板에 鋟於咸豊壬子는 不數稔卽遭兵燹하고 既欽名論*之堪傳이나 又惜殘編之將失이라 因徇顧君之囑하고 爲之重付手民하니 當亦臨池家所樂寓目焉이라 光緒五年歲次己卯冬十一月에 仁和葛元煦*理齋는 識하노라
나에게 『금호자고』의 각본이 있다. 남사의 고내포는 수재였는데, 보고서 좋아하며 이르기를 “학서자들에게 하나의 방편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로 인하여 손으로 『임지심해』 한 편을 가리키며 “이 또한 서예가들의 표준이라고 이를만 하다. 어찌 모아서 간행하여 후학들에게 앞뒤를 인도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나는 받아서 한 번 읽고 그 언약과 뜻이 영자팔법의 깨달음에서 나타남을 깨닫고 깊이 탐구하여 밝혀내고 지극히 투철하게 하여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디던 중에, 견강부회하여 유명한 논저를 표절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가히 원판에 견주어 보매 함풍 임자년(1852)에 새긴 것은 자주 글이 여물지 않아 전쟁의 폐해를 만났고 이미 명가의 논리를 흠모함이 전해졌으나 또한 애석하게도 잔편들은 잃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고내포의 부탁을 좇아 거듭 백성들의 손에 들게 되었으니 또한 서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기뻐하게 될 것이다.
광서5년(1879) 기묘 겨울 11월 인화의 갈원후 이재는 쓰다.
*金壺字攷(금호자고) : 남송의 괄지(适之, 생졸 미상) 스님이 저술한 『금호기(金壺記)』를 가리킨다. 내용은 서화예술류의 잡록으로 서체 및 유명 서예가들을 수록하였다.
*南沙(남사) : 지명으로 지금의 광주시(廣州市)에 속한다.
*顧耐圃(고내포, 도광ㆍ광서연간 활동) : 남회(南匯, 지금의 上海市 浦東) 사람이고 이름은 극소(克紹)이며 장서가(藏書家)이다.
*茂才(무재) : 초시에 급제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수재(秀才)를 가리킨다. 동한시기 광무제 유수(劉秀)를 피휘하였다.
*葛元煦(갈원후) : 만청시기 인화(仁和, 지금의 杭州) 사람으로 생졸 미상이다. 호는 이재(理齋)이고 당호는 학고재(學古齋)이다. 젊어서 전서ㆍ예서를 잘 썼으며 사교를 좋아하였고 소장한 서화가 매우 많았다. 『소원총서(嘯園叢書)』가 전하고, 저서는 『호유잡기(滬遊雜記) 한 권이 있다. 이 번역서도 소원장판(嘯園藏板)의 판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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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마치고
화풀이 4탄
겨울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역질이 사람들을 움츠리게 하여도 남쪽의 매화는 봄소식을 알리고 있다.
매주 화요일 화풀이가 서론을 윤독한지 몇 해인가. 2016년 봄에 劉熙載의 『書槪』, 2018년 가을에 項穆의 『書法雅言』, 2020년 여름에 朱履貞의 『書學捷要』의 공부 결과를 책으로 내고 이어서 2022년 봄에 朱和羹의 『臨池心解』를 발간하게 되었다.
낯설고 애매한 단어 하나를 놓고 사전을 뒤적이며 토론을 하여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담비 꼬리에 개 꼬리 잇는 게 아닌가 싶어 부끄러운 마음이다. 본문 11조목에 있는 다음과 같이 문장에 이르러서는 글씨 쓰기에만 급급하였던 일들이 또다시 고개 숙여진다.
글씨를 쓰려면 자기의 성령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며 절대로 다른 사람의 울타리 밑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각 서예가를 임모하는 것은 그 용필법을 절취하는 것에 불과하며 형상을 비슷하게 본받는 것도 아니다. 요즘사람들은 매번 한 서예가를 임모함에 다만 그 사람의 필획만을 모방하는데 그치고 마음을 가다듬어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에 이르러서는 온전하게 깨닫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형상을 비슷하게 하는 것은 끝이 있지만 고상한 운치를 깨닫는 것은 끝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덕행이 높은 군자가 비록 뛰어난 기예가 있더라도 입신에 한 번 무너지면 세상에 수치거리가 되니 경계로 삼지 않을 수 없다며, 글씨 쓰기는 하나의 기예일 뿐이니 인품과 학양을 키워야 한다고 제창하는 선인들의 말씀이 어찌 그릇됨이 있겠는가.
그동안 괴이한 역질로 인하여 대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인터넷 화상으로 진행한 횟수가 많았다. 의사전달이 원만하지 못하여 고충이 있었지만 임지심해강독반의 집념어린 학구열을 막지 못하였다. 인생이나 학문의 길에 동무가 있으면 지혜가 생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중국의 원서를 번역하겠다고 들이민 우매한 동학들을 지도하고 깨우쳐주신 玄巖 蘇秉敦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그리고 원전과의 校勘에 애쓰신 月泉 趙貞禮 님, 매의 눈으로 오탈자 찾아내신 蘭槎 姜惠英 님, 원고 정리하느라 늦게까지 컴퓨터와 씨름하신 如松 孫官順 님, 서론강독교실을 수줍게 들어오신 藝仁 權甲順 님과 모두의 가족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다음엔 어떤 책을 읽어볼까 가슴이 설렌다.
이천이십이년 정월에 허갑균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