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봄에 효자 정인묵(鄭人默)을 정문(旌門)하였다. 그리고 나서 또 좌장례(左掌禮)의 벼슬을 이증(貤贈)하니 그 품계가 종3품이었다. 그런데 이 때 바깥의 도둑들이 날뛰고 조야(朝野)에 일들이 많았으므로 미처 이런 일에까지 겨를이 미칠 수 없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성상(聖上)께서는 지금의 천박하고 게으른 풍습을 바꾸고 신서(臣庶)들의 정신을 일신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교화를 분명히 하고 강상(綱常)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셨다. 그래서 만일 누구든지 충성이나 효도의 행실이 있다고 할 경우 그것이 만약 거짓이 아닌 사실이기만 하다면 처소의 멂과 유심(幽深)함을 불문하고 모두 은총의 표장을 내렸던 것이다. 이에 공 또한 여기에 참여하게 되어서 포장(褒奬)을 받았으니, 이 어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은 겨우 성동(成童)이 되면서부터 밖에 나가서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분상(奔喪)하여 돌아왔는데, 어버이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지극한 통한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말이 혹시아버지에 미치기만 하면 항상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이로 인하여 거업(擧業)을 폐지하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오로지 어머니를 즐겁게 하고 그 뜻을 맞추어 드리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는바, 단지 감지(甘旨)를 봉양하는 일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모신 산소가 위치한 곳이 천토(淺土)라 하여 이를 개장(改葬)코자 한 지가 여러 해였다.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한 등성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곳을 그대에게 주겠다.” 하였다. 그래서 잠이 깬 뒤에 그 곳을 찾아가서 살펴보니 과연 길지(吉地)였으므로 그 곳에 면례(緬禮)를 하였는데, 그 안에 천연의 석곽(石槨)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다들 공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집에서 그 산소까지의 거리가 수십 리나 되었지만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늘 산소를 찾아서 전배(展拜)를 드리고 보살폈으며, 늙어 몸이 쇠한 뒤에도 이를 늦추지 않았다. 만약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사흘 동안 재계(齋戒)를 하고 소식(素食)을 하였으며, 슬퍼서 애통해하는 모습이 마치 단문(袒免)하고 괄발(括髮)하는 초상(初喪)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반드시 산소를 찾아 곡을 하곤 하였는데, 원근의 사람들이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문득 말하기를, “저기 정 효자(鄭孝子)가 온다.”고 하였다. 집이 원래 가난하였으나 공이 생판 맨손으로 살림을 일궈서 차츰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자 먼저 제사에 쓸 제기(祭器)들을 마련하였으며 선대(先代)의 묘소에 각각 제전(祭田)을 사서 두었는데, 그 방조(旁祖)와 방친(旁親)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동생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 소생의 딸을 어루만져 길러 주었는데 마치 자신의 소생처럼 하였다. 자손의 교육에 법도가 있어서 스승을 따라 배우도록 하였으며 때로는 스승을 초빙하여 가르치기도 했는데, 감히 공부를 게을리 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거처와 의복을 모두 검소하고 절약하도록 하여 감히 남들에게 화려하게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집안의 공복(功服)이나 시복(緦服)의 친당(親黨)들 중에 가난한 자들이 많았으므로, 이들에게 혼인이나 상장(喪葬) 등의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와 주어서 혹시라도 그 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언젠가 흉년이 들어서 일가 몇 집이 세금의 독촉으로 인해 관가로부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자 공이 자신의 토지를 팔아서 이 세금을 대신 갚아 주었다.
남들의 급한 일을 도와 주었으며, 상장(喪葬)을 당한 경우에는 더욱 마음을 써서 거들어 주었다. 한번은 호중(湖中)에 사는 어떤 자가 초라한 모습으로 최복(衰服)을 입고는 공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가 없기에 친척의 도움이나 받을까 하여 서울로 찾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으로부터 공께서 의기(義氣)가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안면이 없음을 무릅쓰고 감히 찾아와서 뵙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공은 그를 위하여 도와 준 다음 그 이름조차 물어 보지 않고 그냥 보냈다.
공은 바닷가에 살았는데, 마을의 인호(人戶)가 백여 가구나 되었다. 그런데 그 곳 사람들은 일이 있으면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반드시 먼저 공을 찾아와서 결단을 들었으며, 평생토록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송사하는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공을 저 관녕(管寧)과 왕렬(王烈)에 비유하곤 하였다. 공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화기가 훈훈하였으며 그 말씨는 괴격(乖激)한 법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의리를 논하여 분변(分辨)하는 일에 이르면 반드시 세밀하게 분석하고 철저히 따져서 조금이라도 주장을 굽힌 적이 없었다.
국법에 유생(儒生)으로서 나이 90에 이르면 관례적으로 3품의 품계를 주었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어 은택(恩澤)을 함께 나누고자 할 경우에는 나이가 80이 되면 90세와 같이 보아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품계 받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를 완강히 사양하여 거절하였으니, 이 때 공의 나이가 89세였던 것이다. 그런데 공은 결국 이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우와(止于窩) 이상규(李祥奎) 선생이 제문을 지어서 공을 곡(哭)하였는데, 말하기를, “세상을 피하여 바닷가로 가서 살았는데, 남들이 후덕한 군자(君子)라고 일컬었다.” 하였으며, 권공 기헌(權公基憲)은 그의 뇌문(誄文)에서 말하기를, “여섯 가지의 행실[六行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이 질서가 있어서 이를 일상의 생활에 미루어서 실천하였는바, 효도를 근본으로 삼아서 어떤 경우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를 잊은 적이 없었다.” 하였으니, 공이 당시의 교우(交友)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음이 실로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은 자가 유안(幼安)이다.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고려의 좌복야 휘 목(穆)으로부터 비로소 세상에 현달(顯達)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우참찬 익혜공(翼惠公) 휘 난종(蘭宗)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에게 13대조가 된다. 그 뒤 8대를 전하여 휘 광주(匡周)에 이르러 음사(蔭仕)로 익찬(翊贊)을 지냈으며, 이분이 휘 운서(雲瑞)를 낳았다. 휘 운서는 진사를 하고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는바, 곧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그리고 증조는 휘가 언유(彦儒)인데 호조 참판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가 호(灝)인데 재능과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휘가 익동(益東)인데 참판공의 동생인 휘 언철(彦喆)의 손자로서 들어와 종자(宗子)가 되었다. 어머니는 광주 이씨(廣州李氏)인데 이희연(李希淵)의 딸로, 전랑(銓郞)을 지낸 이수위(李秀葳)의 후손이다.
공은 정조 경자년(1780, 정조4) 11월 6일에 태어나서 금상(今上) 무진년(1868, 고종5) 2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수원(水原)의 안중(安中) 뒤에 장례를 모셨다가 나중에 다시 철원(鐵原)의 번포리(藩蒲里)로 천장(遷葬)하였는데, 선영을 따른 것이다.
배위(配位)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지평 권홍(權
)의 딸로, 신축년(1781, 정조5) 2월 15일에 태어나서 을해년(1815, 순조15) 4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계배(繼配)는 진천 송씨(鎭川宋氏)로 송영길(宋永吉)의 딸이니, 계축년(1793, 정조17) 12월 11일에 태어나서 기사년(1869, 고종6) 7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모두 합부(合祔)하였다.
권씨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규용(圭容)이고 딸은 이명칠(李命七)에게 출가했다. 송씨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규헌(圭憲)은 양자로 나가서 공의 동생 의묵(儀默)의 아들이 되었고, 규성(圭宬)은 진사를 하고 문음(門蔭)으로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으며, 다음은 규복(圭宓)이다. 그리고 여남(餘男 서출(庶出))으로 규채(圭寀)가 있다. 형진(衡鎭)과 신맹휴(申孟休)의 아내 및 이철구(李徹九)의 아내는 규용의 소생이고, 조종악(趙鍾岳)의 아내와 오은상(吳殷相)의 아내는 규헌의 소생이며, 진사 헌진(
鎭)ㆍ최진(最鎭)ㆍ주사 창진(昌鎭)ㆍ숙진(
鎭)ㆍ석진(
鎭)과 교리 정홍섭(丁弘燮)의 아내는 규성의 소생인데, 최진은 규헌의 후사가 되었고 창진은 규복의 후사가 되었다. 시진(是鎭)과 김면(金湎)의 아내, 정인봉(鄭寅鳳)의 아내, 조종익(趙鍾益)의 아내, 안철원(安哲遠)의 아내, 심정익(沈正翼)의 아내는 규채의 소생이고, 이정근(李鼎根)은 이명칠(李命七)의 소생이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매우 번성해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진사군과 주사군이 추원공(樞院公)의 명으로 편지를 가지고 와서 공의 묘도(墓道)에 새겨 넣을 명문(銘文)을 부탁해 왔으며, 그리고 또 석진의 아들 우범(雨範)을 시켜서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거듭 부탁하였으니, 의리상 이를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세상의 변고를 만난 이후로 이 한 몸이 죽고자 하여도 죽을 수조차도 없었는데, 이런 형편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필연(筆硯)의 역사(役事)를 맡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것을 이유로 사양하였더니 우범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바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의 변고가 이와 같기 때문에, 자손들은 그들의 조상에 대하여 지금 매몰되어 있는 덕을 천양(闡揚)하여 멀리 후세에 전하는 일을 감히 늦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안일과 타성을 바꾸어 강상(綱常)을 세우고자 하시는 성상의 뜻을 우러러 체인(體認)해서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운 일을 발양함으로써 세상의 인심(人心)을 풍동(風動)하는 일이 선생에게 달려 있으니, 이 또한 응당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급한 일일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만약 갈명(碣銘)을 얻지 못한다면 장차 돌아가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를 뵈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는 이와 같은 저의 사정을 부디 가련하게 여겨 주소서.” 하였으며, 그 뒤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고 머물러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범은 겨우 약관의 나이에 벌써 준수하고 글도 잘 하였으며, 지금 그 정성이 참으로 진지하고 말씨가 완곡해서 족히 사람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다. 그러니 내가 또다시 무슨 말로 이를 사양한단 말인가. 그래서 마침내 이를 위해서 명(銘)을 지었으니,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순수하고 성실한 자질을 주어서 / 與之以醇慤之質
효우의 성품이 온전토록 했으며 / 俾全其孝友之性
팔구십 세의 높은 수명을 주어서 / 與之以耄期之壽
자손들이 경사를 누리게 했다네 / 俾有其子孫之慶
그러니 공이 받은 하늘의 복이 / 公獲天餉
성대하지 않다고 할 수 없건만 / 不爲不盛
더러는 아쉽다 말을 하는 건 / 猶或以憾
명성과 지위가 맞지 않아서라네 / 名位未稱
그런데 정문을 하고 추증했으니 / 乃署乃貤
이제야 충분하고 공평하다 하리라 / 以足而平
그 누가 이처럼 안배하여 도왔던가 / 孰是錯輔
바로 하늘이 그 권한을 쥐고 있다네 / 默司其柄
세상의 모든 아들과 신하들이여 / 百爾子臣
그대들의 행실을 게을리 마오 / 無怠于行
이 정문(旌門)에 경의를 표하고 / 有扁斯式
여기 새긴 빗돌을 거울 삼게나 / 有鑱斯鏡
[주-D001] 관녕(管寧)과 왕렬(王烈) : 모두 중국 삼국 시대의 인물로, 고상한 행실로 유명하였다. 관녕은 자(字)가 유안(幼安)인데, 난리를 피해 요동의 공손탁(公孫度)의 경내로 옮겨 가서 37년 동안을 살았으며, 돌아온 뒤에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검은 모자에 베옷을 입고 일생을 마쳤다.《三國志 魏書 卷11 管寧傳》또 왕렬(王烈)은 자가 언방(彦方)인데, 의로운 처신으로 부근에 이름이 났으므로, 어떤 도둑이 소를 훔치다가 들키자 애걸하기를,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지만 제발 왕언방에게는 모르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한다.《後漢書 卷81 獨行列傳 王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