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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세숙(世橚)이고, 자는 무숙(茂叔)이며, 성은 권씨(權氏)이고, 자호(自號)는 도계(道溪)이다. 고려(高麗) 태사(太師) 행(幸)의 후손이다. 태사는 아부공신(亞父功臣)으로서 고창군(古昌郡)에 봉해졌는데, 고창군은 바로 안동(安東)이니, 이제는 안동 사람이다. 고려 시대에 줄지어 나온 이름난 석학은 역사서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추밀사(樞密使) 수평(守平), 문정공(文貞公) 단(㫜), 부원군(府院君) 국재(菊齋) 부(溥)는 더욱 저명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 휘 극관(克寬)은 감역(監役)을 지냈으나 자식이 없어 형인 이조 판서 휘 극례(克禮)의 둘째 아들 득기(得己)를 양자로 삼았으니 득기는 공에게 5대조이다. 득기는 예조 좌랑으로서 광해군의 패륜을 보고 성문을 걸어 나와 바닷가에 은둔해 살다가 삶을 마치니, 세상 사람들이 만회(晩悔) 선생이라 불렀다.
고조 휘 시(諰)는 유현(儒賢)으로 등용되어 관직이 우윤(右尹)에 이르렀고 좌참찬(左參贊)에 증직되었는데, 이분이 탄옹(炭翁) 선생이다. 이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어 학자들이 존경하였다. 증조 휘 기(愭)는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가학을 이어받아 명망이 높았으며, 조부는 휘 이종(以鍾)이다.
아버지 휘 한징(漢徵)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고 문장과 덕행으로 선비들에게 존중받았다. 어머니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부사(府使) 정행백(鄭行百)의 딸이자 대사간 정지호(鄭之虎)의 손녀로, 자애로우면서도 엄하여 부인의 규범이 정연하였고, 숙종 정해년(1707, 숙종33)에 공주(公州)의 도산(道山)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6세 때부터 글을 배워 시를 지었다. 8세 때 여종이 종이를 다듬이질하던 방망이를 공의 손가락에 잘못 떨어뜨려 손톱이 빠졌다. 어머니가 몹시 진노하여 여종에게 죄주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여종은 잘못이 없습니다. 왜 죄주려 하십니까.”
하니,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기를,
“아이의 아량이 이러하단 말인가.”
하였다.
10세 때 진사공(進士公)의 상(喪)을 당하였다. 한창 병든 아버지를 모실 때는 한 해 넘도록 간호하며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상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며 그리워하였다. 형이 밖에 나갔을 때 한 조문객이 왔는데, 그의 행동거지에 실수가 많아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입을 가리고 웃었으나, 공은 마치 보지 못한 듯이 곧게 서서 서글피 통곡했으니, 어른처럼 예를 지킨 것이 이와 같았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형을 따라 함께 지내면서 강독했는데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신 듯이 하였고, 역병에 걸려서 땀을 흘릴 때도 책 읽는 소리가 입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찍이 밤에 일어나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고아이다. 또한 나이는 지학(志學)의 나이에 가까운데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뜻이 서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니, 이것은 참으로 나에게 달렸다.”
하고, 이에 학문 탐구에 더욱 힘썼으며, 《증전(曾傳)》에 더욱 독실하였다.
영조 을사년(1725, 영조1)에 형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합격 소식이 뒤따라 왔으나 공은 말고삐를 돌려 서울로 들어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절하고 나서는 문득 전에 본 책을 다시 펼쳐 보자, 형이 놀리며 말하기를,
“사람은 참으로 만족할 줄 모른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몸소 밥을 지어 우리 형제로 하여금 학업에 전념하게 하고 계십니다. 마땅히 어머니가 계실 때 분발하여 입신양명한다면 어쩌면 노고에 보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성취를 했다고 하여 게을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족조(族祖)인 판서공이 자주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속유(俗儒)로 보아서는 안 된다. 장차 나를 이어서 흥기할 것이다.”
하였다.
을묘년(1735)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시신을 목욕시키고 염하는 것을 사람들이 대신하지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자식으로서 어머니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이 하루에 달렸다.”
하였다. 무더운 여름에도 최질(縗絰)을 입고 앉아서 조금도 몸을 기대지 않았으며, 죽 끓이는 장소를 따로 두어 집안사람들이 맛있는 조미료 섞는 것을 막았다. 소상복을 입은 뒤에는 채소나 과일 따위도 맛이 좋은 것은 먹지 않았다. 겨우 3년이 지났을 때 형이 오래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공이 애통함으로 중병이 들어서 피를 토하며 여러 번 위태롭게 되었다.
경신년(1740)에 증광 문과 회위(會闈)에 급제하였다. 시험을 관장한 사람이 말하기를,
“훗날 문형(文衡)을 맡을 솜씨로구나.”
하고, 사람을 통해 말을 전하기를,
“만나 보고 싶다.”
하였으나, 공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진(新進)이 권문세가에 빌붙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신유년(1741)에 승문원에 소속되었다.
갑자년(1744)에 조정에서 한림천법(翰林薦法)을 중지하고 한림소시(翰林召試)를 창시하였는데, 공이 선발에 들었다. 시험 보는 날이 되자 공은 머뭇거리며 나가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기예를 겨루는 한림이란 것이 정면어사(呈面御史)와 무엇이 다른가. 옛날 사람이 부끄러워한 것을 나도 부끄러워한다.”
하였다. 날이 저물자 재촉하는 하교가 엄하여 마지못해 응시했다가 그만두었으니, 합격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이다.
병인년(1746)과 무진년(1748)에 잇따라 만녕전 별검(萬寧殿別檢)과 강릉 별검(康陵別檢)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였다가 두어 달 뒤에 모두 버리고 돌아왔다. 공은 늘 말하기를,
“왕릉을 봉심하면 저절로 공경하게 되고 저절로 엄숙해져 감히 하루도 게을리하지 못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자못 힘을 얻은 것이 없지 않다.”
하였다.
기사년(1749)에 전적(典籍)으로 승진했다가 곧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 대궐 문에서 근수(跟隨)를 제한하는 것은 오래된 법규이다. 공은 대궐에서 입직(入直)할 때 엄중히 징계하여 들어오는 것을 막았는데, 마침 상신(相臣)의 하례(下隷)가 횡포를 부리는 일이 일어나서 법대로 잡아 다스렸다. 상신이 원한을 품고 훗날 어떤 일 때문에 공을 불러 곤욕을 주려 하였다. 공은 상신과 겨루지 않고 웃으면서 나와 말하기를,
“재상이 선비를 업신여기는 것이 이와 같으니, 떠날 만하구나.”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랑(正郞)에 올랐는데, 홀연히 잠 가주(岑嘉州)의 “가련하다, 머리 하얗게 세어서야 낭관이 되었네.”라는 구절을 읊고, 드디어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공이 입직할 때면 밤마다 등불이 창에 비쳤으나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적막하였다. 장관이 사람을 시켜 공을 엿보게 했는데 공은 책을 마주하고 조용히 사색을 하고 있었다. 장관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학문에 독실한 선비로구나.”
하였다.
경오년(1750)에 연일 현감(延日縣監)에 부임하였다. 연일현은 동남해(東南海)에 닿아 있고 잘 다스리는 사람이 수령으로 온 적이 없어서 온갖 부족한 부분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공은 부임하자 억울한 옥사를 다스리고 교활한 아전을 단속하며 명분을 삼가고 예속(禮俗)을 진작하여 민풍(民風)을 권면하였다. 연일현에는 해세전(海稅錢)이 있어 해마다 균역청(均役廳)에 수송했는데 관리들이 기화(奇貨)로 보고 소금과 미역을 헐값에 거두어 비싸게 팔아 수천 금의 이익을 얻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농단(壟斷)하는 일이다.”
하고, 돈을 거두는 것으로 결정하고 충분히 세금을 완납하면 그쳤다. 또한 매일 쓰는 물품을 줄이고 명분 없는 세금을 중지시켜 백성의 힘을 펴게 하였다.
그런 뒤에 공은 고을의 자제들이 학문의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여 말하기를,
“집 안에 있을 때는 나의 자제를 가르쳤다. 고을의 수령이 되어 도리어 고을의 자제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되겠는가.”
하고, 이에 준수한 자제들을 뽑아 학교에 모아 놓고 선(善)을 분명하게 알고 독실하게 행하는 방법을 가르치니, 원근의 학생 중에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어사가 고을의 경계를 지나다가 일부러 들어가지 않고 돌아가 상에게 아뢰기를,
“연일 한 고을은 태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동안에 누님의 상을 당하여 휴가를 얻어 돌아왔는데, 백성들이 서울로 달려가 하소연하고 관찰사가 급히 장계하고 돌아올 것을 독촉하여, 마지못하여 할 수 없이 다시 부임하였다.
계유년(1753) 봄에 사헌부 지평으로 부름을 받았다. 아전이 말하기를,
“녹봉으로 받으실 금전이 수백 민(緡) 남아 있고, 창고 곡식 중에 아전의 간교를 적발한 것이 또한 수백 섬입니다. 노자(路資)에 보태십시오.”
하여, 공이 말하기를,
“녹봉이 남은 것은 관직을 비웠기 때문이다. 관직을 비우고서 매달 녹봉을 받아서야 되겠느냐. 그리고 아전을 죄주고 그 곡식을 사사로이 갖는 짓은 내가 하지 못하겠다.”
하고, 금전과 곡식의 수량을 장부에 기재하고 남겨 두었다. 이대산 상정(李大山象靖)이 공을 대신하여 부임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정사를 따를 만하구나. 남은 녹봉을 남겨 둔 것은 탐하지 말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이다.”
하였다.
공이 돌아오자,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청렴하였으니, 명예를 가까이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자, 공이 말하기를,
“돌아와서 두어 달 굶주림을 면한 것은 아침에 체직되어 저녁에 쌀을 빌리셨던 나의 증조부에 비하면 참으로 부끄럽다.”
하였다.
갑술년(1754)에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때 세자(世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어서, 현(縣)과 도(道)를 통해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의 선조 우윤 권시가 효종(孝宗)께 말씀을 올리기를 ‘매사는 반드시 옳음을 구해야 하니, 제이의(第二義)에 떨어지게 하지 마소서.’ 하였습니다. 권시의 아들 대사간 권기도 이 말을 숙종께 올렸습니다. 신이 듣건대 제일의(第一義)는 수연(粹然)히 섞임이 없어 천리의 공변됨에 순수한 것이고, 제이의는 인심의 사사로움에 섞임을 면치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일이 아무리 선(善)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한 터럭만큼이라도 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하는 것이 있으면 제일의가 아니고, 겉보기에 아무리 아름다운 것 같아도 혹시라도 마음에 겸연쩍은 것이 있으면 제일의가 아닙니다. 이른바 ‘이것도 하나의 도리이다.’, ‘허물을 보면 알 수 있다.’ 등의 말은 모두 제이의입니다.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참으로 옳은 것이 있는 곳을 찾고, 참으로 옳은 것을 찾았으면 단연코 그것을 실행하여, 혹시라도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을 세우고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 늘 제일의 위에서 이루어져 혹시라도 제이의에 떨어지지 말게 해야 하니,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세상의 도를 만회하는 계책은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전달되기 전에 체직되었다.
잠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어 부름에 응하며 수천 자의 상소를 지었는데, 첫머리에서는 황정(荒政)을 거행하는 것을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고 불난 집에서 구하듯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한 근세에 이끗만을 탐하는 습속을 금지할 것과 칠진(七鎭)에 드는 동래진(東萊鎭)을 복구할 것을 말하고, 나라의 큰 근본은 예학(睿學)의 진보에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다시 매사를 제이의에 떨어지게 하지 말 것을 거듭 말하였다. 그러나 상소가 들어가기 전에 또 체직되었다.
을해년(1755)에 흉년이 크게 들어, 조정이 황산역(黃山驛)의 피폐함을 염려하여 별도로 공을 뽑아 찰방으로 삼았다. 공이 부임한 뒤에 민가의 지붕이 모두 하얗게 덮인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물어 보니, 백성들이 양식이 없어서 소나무 속껍질과 칡뿌리를 햇볕에 말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자신의 녹봉을 박하게 하고 징수할 공물을 줄이며 속히 이웃 고을에서 조를 옮겨 와 마음을 다해 구휼하니, 백성은 여위지 않고 말도 튼튼하였다.
병자년(1756)과 정축년(1757)에 잇따라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혹은 길에서 체직되고 혹은 국장(國葬)을 만나서 서울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도사가 재차 조사하는 법이 폐기된 지 오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흉년 때문에 특별히 공을 파견한 것이다. 공은 곧 조령을 넘어가서 날마다 말을 몰아 주현(州縣)에 달려가 재해를 검사하고 사실을 밝혔는데 엄정하게 하면서도 가혹하게 하지 않으니, 조사를 받는 자도 스스로 억울하지 않다고 여겼다.
이때는 추위는 심한데 공이 옷을 받기 전이어서, 관찰사와 읍재(邑宰)가 새 옷을 지어 서로 이어서 공에게 입을 것을 권했으나 공은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복명(復命)할 때 병이 심해진 것은 여러 달 동안 마른 땅과 젖은 땅에서 추위 속에 엷은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무인년(1758) 여름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는데, 이조(吏曹)가 미처 주의(注擬)하지 못하자 상이 특명으로 교리(校理)에 제수하고 이르기를,
“권세숙은 전에 겸사(兼史)로서 출입했는데 행동거지가 보통 법도와 달랐다. 등용이 늦었도다.”
하고, 이어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공을 재촉하여 길에 오르게 하였다. 이때 공은 지난날 걸린 병이 점점 심해져 마침내 글을 올려 대조(大朝)의 은명(恩命)에 사례하고, 이어서 힘써 경계할 것을 진술하였다.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시골 선비가 부모상을 치르고 나면 학업이 갑절 진보하는 것은 대개 화려한 물건이나 오락 기구를 모두 물리치고 눈과 귀로 접하지 않기 때문에 의지와 기운이 맑고 밝으며 생각이 한결같아 덕이 날로 새롭고 학업이 날로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제왕(帝王)이 공손히 침묵하며 치도(治道)를 생각하는 것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체직되었다가 다시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상이 또한 도신에게 명하여 공이 길을 떠나게 할 것을 재촉하게 하였는데,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권세숙의 병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상이 타이르기를,
“그대가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섭하고 올라와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공은 명을 듣고 한없이 감격하여 울었다. 그러나 병이 이미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해 9월 8일 도산(道山)의 시골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2세이다.
부음이 들려오자 상이 애도하며 부의(賻儀)를 더 내릴 것을 명하고 분부하기를,
“권세숙은 영남의 제일인자이다. 지금 이에 이르니 애석하다.”
하였다.
처음에는 옥천(沃川) 보우동(普雨洞)에 장사를 지냈다가, 경자년(1780, 정조4)에 진산(珍山) 막현동(莫顯洞) 미좌(未坐)의 언덕에 이장하니, 곧 대간공의 묘소 아래였다.
공은 덕기(德器)가 점잖고 무게가 있으며 풍도가 공손하고 엄숙하였다. 몸가짐을 태만히 하지 않았고 비루하거나 패악한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가짐이 평탄하면서도 과감함과 확고함으로 견지했으며, 식견이 매우 뛰어난 데다가 공평함을 더하였다. 공은 평소 거처할 때 무릎 꿇고 앉아 있으면 마치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다가가서 보면 해맑은 얼굴이 온화하고 순수하여 공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행을 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칭찬해 주기를 좋아하고, 허물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충심으로 말해 주고 잘 인도해 주었다.
어머니를 모실 때는 어머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미리 그 뜻을 받들어 행했으며, 글을 읽거나 학업을 익히는 경우가 아니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공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녹봉으로 봉양하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며 관아에서 내려 준 음식을 받을 때마다 번번이 눈물을 흘렸다. 연일에 있을 때 집안사람이 엷은 이불을 두꺼운 이불로 바꾸려 하자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필요 없다. 지난날 돌아가신 아버지를 염할 때 가난해서 큰 이불을 쓰지 못했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이것을 쓰겠느냐.”
하였다. 선대의 제사를 받들 때에 가제(家祭)보다 한 그릇 더 놓고 말하기를,
“만일 풍족하게 받던 녹봉을 받지 못하면, 녹봉을 받지 못해 범죄를 저지르게 되니, 범죄를 저지르고 올린 제사를 나의 선조가 흠향하시겠느냐.”
하였다.
바야흐로 백씨의 상이 났을 때 공도 박 숙인(朴淑人)의 상중이었는데,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자식들을 개의치 않고 종가의 일만을 급하게 여겼다. 형수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며 바깥일을 주간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종가는 유지될 수 있었으나 공의 집은 더욱 쇠락해져 아침과 저녁을 보리밥 한 사발로 때웠는데, 어떤 때는 그것마저 없기도 하고 겨우 잇기도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종가의 재물 중에 남는 것을 빌려서 자급하지 않습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차마 종가의 일을 대신 봐 주면서 스스로 그 재물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에 형의 아들이 죽자, 곡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내 두 아들로 형의 한 아들을 바꿀 수 있을까.”
하였다.
장사 지낼 무렵 선공(先公)의 묘 옆에 장지를 정했는데, 풍수가가 말하기를,
“남겨진 아이에게는 이로우나 고인의 아우에게는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여, 친한 이웃들이 모두 말리자, 공이 말하기를,
“진실로 아이에게 이롭다면 어찌 내게 이롭지 못함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의 아들의 아이가 또 어린 나이에 죽었다. 형수가 공의 둘째 아들 상병(尙炳)을 그의 양자로 삼고 싶어 하자, 공이 말하기를,
“예(禮)에 옳지 않고, 또한 종가의 맏며느리가 처음 남편의 상을 당하였다. 나는 차마 또한 그 세대를 끊어지게 하지 못하겠다.”
하고, 드디어 종조형제(從祖兄弟)의 손자로 후사를 세워 주었다.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의 형수를 섬기고 과부가 된 며느리를 대할 때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반드시 공경을 다하며, 농지와 노비를 감히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서책의 목록을 만들어서 맡기며 말하기를,
“종손이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 너희가 가져가서 읽다가 잃어버리거나 심지어 혹 자기 소유로 삼을까 염려해서이다.”
하였다. 일찍이 공이 서울에 들어갔을 적에 둘째 누이 집이 전염병에 감염되어서 그 집에 들어가 보기를 매우 자주 하였으나 끝내 탈이 없자, 사람들이 찬탄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관직에 임명되면 나아가고 관직에서 해임되면 물러났는데, 오직 의(義)에 맞는지를 따져 볼 뿐이었다. 자신을 단속하기를 마치 벼슬하지 않은 선비처럼 하고 몸가짐을 처녀처럼 하였다. 공은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다투는 세태를 개탄하면서도 벼슬자리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었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대문과 골목을 나간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공이 당론에 준엄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곧은 도(道)로 자신을 지키는 것을 알게 되자 공경하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늘 말하기를,
“한번 마시고 한번 먹는 것에 모두 정해진 분수가 있다. 아무 일도 경영해서는 안 되니, 경영하는 것이 또한 수고롭지 않은가.”
하였다.
공이 일찍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올 때 사람들이 간혹 “오래 벼슬하는 것이 앞길에 이로울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관직을 어찌 계교(計較)로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조정에 선 19년 동안 외직에 보임된 것은 겨우 두어 해이고 임금 앞에서 기주(記注)를 맡은 것도 겨우 수십 일이었으나 용모와 의표와 진퇴의 사이에서 임금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어찌 중심에 쌓인 것이 절로 외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평소 북쪽을 등지고 앉은 적이 없었다. 공은 늘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세상을 잊은 자이겠느냐. 감히 하루도 국가를 잊지 않았으나 신하가 되어 섬기는 의(義)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로구나.”
하였다.
벗들 중에 공이 마음을 허락한 자는 참의 김변광(金汴光), 정언 이종연(李宗延), 참판 정언충(鄭彦忠), 승지 이수일(李秀逸), 흡곡 현령(歙谷縣令) 김광악(金光岳)인데, 당시에 호중육군자(湖中六君子)라 불렸다. 공은 별세하기 며칠 전에 간곡한 어투로 잠꼬대를 했는데 모두 이 정언, 김 흡곡에게 공손하게 대답하는 것이었으나 임금을 사모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말 아닌 것이 없었다. 이공과 김공은 공보다 앞서 별세한 지 이미 여러 해 되었다.
공이 살던 집은 비바람을 가릴 수 없고 거친 밥도 늘 이어지지 않았으나, 공은 오직 방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깊이 생각하며 익히고 탐구하여 경전(經傳)에서 정수가 되는 말들을 외우며 마음으로 터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은 문장을 지을 때는 반드시 이치가 지극하고 말이 전달되게 했는데, 모두 시무(時務)에 절실하면서도 일용(日用)에 도움이 되었으며 아로새겨 실속 없이 화려하게 꾸미는 습관이 없었다. 저술에는 《근사록차의(近思錄箚疑)》 및 잡록(雜錄)과 시문(詩文) 약간 권이 있다.
공은 자식들을 훈계할 때마다 말하기를,
“말과 행동은 정성과 공경에서 나오고 효도와 우애는 몸과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내가 해야 할 바를 다 할 뿐이지, 남에게 아름답게 보일 필요가 없다. 가문이 장구하게 유지되는 것은 조상이 쌓은 덕이 미친 바이고, 가문을 망치는 것은 곧 선조의 덕을 잃고 가문의 전통을 무너뜨리는 것에서 시작될 따름이다.”
하였다.
〈언계(言戒)〉를 지어 말하기를,
“말이 근본으로 삼는 것은 마음이고, 마음을 잡는 것은 공경이다. 사람들의 말을 전하지 말고, 사람들을 비방하지 말며, 사람들을 기리지 말라. 자기가 한 일을 말하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말하지 말며, 내게 관계되지 않는 일은 말하지 말라.”
하고, 또한 말하기를,
“마음에서 싹튼 것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반드시 낯빛에 드러나고, 입에서 나온 것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퍼진다. 기뻐할 만한 것이라 해도 갑자기 기뻐하지 말고, 그 끝을 천천히 살펴보면 기뻐할 필요 없는 점이 있다. 성낼 만한 것이라 해도 가벼이 성내지 말고, 그 실정을 천천히 살펴보면 성낼 필요 없는 점이 있다. 네게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자족하지 말고, 네게 작은 능력이 있더라도 자만하지 말라. 오직 고요해야 일을 생각할 수 있고, 오직 주밀해야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해야 하는 것은 기필코 반드시 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은 기필코 반드시 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는 반드시 강직하고 굳세게 하고, 집에 있을 때는 반드시 엄숙하고 장중해야 한다.”
하였다. 후세 사람이 공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알고자 한다면 이것으로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초배(初配) 숙인(淑人)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진사 박내신(朴來新)의 딸로 공보다 22년 먼저 별세하였으며, 아들 둘을 두었으니 상탄(尙炭), 상병(尙炳)이다. 계배(繼配) 숙인 보성 오씨(寶城吳氏)는 학생 오덕주(吳德周)의 딸로 3녀 1남을 낳았으니, 사위는 조영보(趙永寶), 박헌묵(朴憲默), 윤재(尹縡)이고 아들은 상신(尙昚)이다. 손자와 손녀 약간 명이 있다.
아, 공은 당세에 군자라고 불렸다. 삼대(三代) 이후 상하 수천 년 사이에 군자들이 무리 지어 나온 것은 전혀 없거나 겨우 있었으며, 설령 있더라도 또한 끝을 맺지 못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천수(天數)이다. 지난날 육군자(六君子)는 성스러운 영조께서 임금이었으나 오히려 침체되고 실의하여 백에 하나도 능력을 베풀지 못하였다. 공 같은 자는 상이 막 알고 등용하려 했으나 갑자기 죽음을 알리고 수명이 중년에 그쳤다. 비록 성스러운 군주가 탄식하며 아쉬워하였으나 천수를 어찌하겠는가.
공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세도(世道)에 대한 걱정으로 이미 끝없이 뜬 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제공 같은 후생은 쓸쓸히 이 세상에 몸과 그림자만 남아서,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추락하고 참소하는 혀가 더욱 참혹해지는 것이 지난날보다 백배가 될 뿐만이 아님을 눈으로 보고 있으나 누구와 모욕을 막고 누구와 곧음을 함께하겠는가. 때때로 간혹 글을 읽다가 “훌륭한 사람이 죽으니, 나라가 끊기고 병이 들리라.”라고 한 구절에 이르면 반복해 읽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다래나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가 되고 싶은 바람을 지닌 나는 육군자가 황천 아래에서 함께 따르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마음이 또한 슬프다. 지금 공의 아들 상탄의 요청으로 말미암아 거칠고 졸렬한 문장력을 헤아리지 않고 공의 평소 언행을 차례대로 서술하였으며 여기에 재삼 뜻을 표현하고 전달하여 언론을 남길 만한 군자의 취사선택을 기다린다.
성상(聖上) 6년 임인년(1782, 정조6)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 원임 겸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손좌빈객 규장각제학(行判中樞府事原任兼兵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孫左賓客奎章閣提學) 채제공이 짓다.
[주-D001] 권공(權公) : 권세숙(權世橚, 1707~1758)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무숙, 호는 도계이다.[주-D002] 행(幸) : 권행(權幸)으로, 안동 권씨의 시조이다. 본성은 김(金)인데 견훤(甄萱)과 싸울 때 공을 세워, 고려 태조로부터 사태의 조짐을 잘 파악하고 권도에 능란하다 하여 권씨 성을 하사받고 대상(大相)에 제수되었으며,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 아부공신(壁上三韓三重大匡亞父功臣) 태사(太師)에까지 이르렀다.[주-D003] 수평(守平) : 권수평(權守平, ?~1250)이다. 관직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다.[주-D004] 단(㫜) : 권단(權㫜, 1228~1311)으로, 자는 회지(晦之), 호는 몽암(夢巖),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高麗史 卷10 權㫜列傳》[주-D005] 부(溥) : 권부(權溥, 1262~1346)로, 초명은 영(永), 자는 제만(齊滿), 호는 국재(菊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권단이다.[주-D006] 극례(克禮) : 권극례(權克禮, 1531~1590)이다.[주-D007] 득기(得己) : 권득기(權得己, 1570~1622)로, 자는 중지(重之), 호는 만회이다. 1610년(광해군2)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 좌랑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덕으로 정치가 혼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주-D008] 시(諰) : 권시(權諰, 1604~1672)로,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이다. 기호학파의 거두로 예론(禮論)에 밝았다.[주-D009] 기(愭) : 권기(權愭, 1633~?)이다.[주-D010] 정지호(鄭之虎) : 1605~1677.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피, 호는 무은(霧隱)이다. 부친은 증 이조 참판 정응원(鄭凝遠)이다. 승지, 형조 참판, 대사간 등을 지냈고, 죽은 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記言 別集 卷18 贈判書鄭公墓碑銘》[주-D011] 진사공(進士公) : 권한징(權漢徵)으로, 권세숙의 아버지이다.[주-D012] 형 : 권세헌(權世櫶, 1702~?)으로, 자는 문숙(文叔)이다.[주-D013] 증전(曾傳) : 증자(曾子)가 공자의 가르침을 전한 것, 곧 《대학(大學)》을 가리킨다.[주-D014] 경신년에 …… 급제하였다 : 권세숙은 1740년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3위로 급제하였다. 회위는 대과(大科)를 가리킨다.[주-D015] 한림천법(翰林薦法) :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한림이라 하는데, 이 한림을 뽑는 법이다. 전임(前任) 또는 현임(現任) 한림과 의정(議政), 제학(提學) 등이 검열 후보자의 명단에서 가장 적격한 사람을 선발하였다.[주-D016] 한림소시(翰林召試) : 예문관 검열 후보자에 대한 특별 시험이다. 적임자를 선정하여 상주(上奏)하면, 왕명으로 불러 위원(委員)을 시켜 시(詩), 부(賦), 논(論), 책(策) 등을 시험 보여 합격한 자를 임용하였다.[주-D017] 정면어사(呈面御史) : 고관에게 인사하여 자신의 얼굴을 알림으로써 벼슬에 오르려고 하는 행위로, 정신어사(呈身御史)와 같은 말이다.[주-D018] 만녕전 별검(萬寧殿別檢) : 만녕전은 영조의 영정(影幀)을 두었던 곳으로, 강화도에 있었다. 뒤에 장녕전(長寧殿)으로 영정을 옮겼다. 관원(官員)으로는 별검 1명, 참봉(參奉) 1명이 있었다.[주-D019] 잠 …… 구절 : 당나라 때 가주 자사(嘉州刺史)를 지낸 적이 있는 잠삼(岑參)의 〈추석독서유흥헌병부이시랑(秋夕讀書幽興獻兵部李侍郎)〉에 나오는 구절이다.[주-D020] 해세전(海稅錢) : 어선(漁船)에 부과된 세금이다. 균역법(均役法)의 시행 규정을 실은 《균역사목(均役事目)》에 규정되어 있다.[주-D021] 이대산 상정(李大山象靖) : 이상정(1711~1781)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시호는 문경(文敬)이다.[주-D022] 세자(世子)가 …… 있어서 : 당시 영조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장헌세자(莊獻世子)가 1749년부터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주-D023] 제이의(第二義) : 최선책이 아닌 것이다. 원래는 불교 용어로, 긍극적인 진리를 제일의, 방편적인 진리를 제이의라고 한다.[주-D024] 한 …… 아니고 : 《근사록(近思錄)》 권7 〈출처류(出處類) 맹자변순척지분(孟子辨舜跖之分)〉의 주(註)에 “사적인 목적이 없이 하는 것이 의이고, 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하는 것은 이이다.[無所爲而爲之者義也, 有所爲而爲之者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25] 이것도 하나의 도리이다 : 최선의 도리가 아닌 차선의 방편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서, 제 선왕(齊宣王)이 맹자를 방문하려 하다가 자신이 감기에 걸려서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며 조회 때 보기를 청하자, 맹자가 자신도 병에 걸려 조회에 나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추씨(景丑氏)가 맹자에게 임금이 부르면 멍에 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달려가는 것이 예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맹자는 인과 의로 부유함과 작위에 맞서겠다고 한 증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것도 혹 하나의 도리이다.[是或一道也]”라고 말하였다.[주-D026] 허물을 …… 있다 : 《논어》 〈이인(里仁)〉에 “사람의 허물은 그 무리에 따라 각각 다르다.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의 인을 알 수 있다.[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斯知仁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27] 칠진(七鎭)에 드는 동래진(東萊鎭) : 《반계수록(磻溪隨錄)》 보유 권1 〈군현제(郡縣制)〉에 경상도에서 경주, 안동, 대구, 상주, 진주, 김해를 묶어 육진(六鎭)이라 하는데, 육진에 동래를 넣어 칠진이라 하기도 한다는 내용이 있다.[주-D028] 대조(大朝) : 당시 영조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장헌세자가 1749년부터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영조를 대조, 장헌세자를 소조(小朝)로 구분하였다.[주-D029] 기주(記注) : 주서(注書)가 사료(史料)를 만들기 위해 임금과 신하의 대화 등을 글로 적는 것이다.[주-D030] 김변광(金汴光) : 169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실(景實)이다.[주-D031] 언계(言戒) : 말을 조심할 것을 훈계한 글이다.[주-D032] 육군자(六君子) : 호중육군자인 권세숙, 김변광, 이종연(李宗延), 정언충(鄭彦忠), 이수일(李秀逸), 김광악(金光岳)이다.[주-D033] 훌륭한 …… 들리라 :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仰)〉에 나오는 내용이다.[주-D034] 다래나무처럼 …… 존재 : 정사가 번거롭고 사회가 혼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다래나무가 부럽다는 말이다. 《시경》 〈회풍(檜風) 습유장초(濕有萇楚)〉에 “진펄에 다래나무 그 가지 곱기도 하다. 예쁘고도 윤기 나는 모습 아무것도 모르는 너가 부럽기만 하다.[隰有萇楚, 猗儺其枝. 夭之沃沃, 樂子之無知.]”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