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휘가 진(璡)이고 자가 중선(中仙)이며 행와(幸窩)는 그 자호(自號)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고려 시대 금오위(金吾衛) 선행(先幸)을 시조로 한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자경(子璥)이 있다. 그 뒤로 높은 벼슬을 하는 이가 이어졌다. 휘가 가신(可臣)이고 호가 만전(晩全)인 분에 이르렀으니, 가신은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이분이 한성 서윤(漢城庶尹) 영(榮)을 낳았다. 이분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호가 남파(南坡)이고 휘가 우원(宇遠)인 분을 낳으니, 곧 공의 5세조이다. 고조는 휘가 면(冕)이니 선공 직장(繕工直長)을 지냈다. 증조는 휘가 일지(日知)이니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조부는 휘가 건(健)이다. 고(考)는 휘가 복전(福全)이며, 비(妣)는 한양 조씨(漢陽趙氏)이니 첨추(僉樞)를 지낸 모의 따님이다. 영묘(英廟) 경신년(1740, 영조16) 정월(正月) 모일에 공은 태어났다.
공은 영특함이 평범한 이보다 더 뛰어났다. 5, 6세부터 이미 엄한 아버지의 가르침을 능히 받들었고 마음을 침잠하여 글을 부지런히 읽어서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고 공부하였다. 타고난 본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니, 아버지가 공의 할아버지 상(喪)을 치를 때, 공의 나이는 겨우 열한 살이었지만 상장(喪葬)을 두루 행함이 마치 성인과 같았고, 3년 동안 상식(上食)을 할 때 모두 아버지를 따라 참여하여 한시도 빠지지 않았다.
이미 장성하여서는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심에 하루에 세 차례를 법도로 하여 항상 이어서 끊이지 않게 하였고, 아버지가 오랜 벗들을 좋아하시기 때문으로 자주 음식을 갖추어 초청하여 즐기시도록 해 드렸다. 어버이가 이미 늙으심에 비록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일찍이 어버이 곁을 비우고 떠나지 않았고, 따뜻한지 시원한지를 살피며 달고 부드럽고 맛난 음식을 해 드림에 그 마땅함을 더욱 극진히 하였다.
공은 47세에 선공(先公)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송종(送終)에 유감(遺憾)이 없게 하였으며, 몸을 상함이 예제(禮制)를 넘어 거의 지탱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머니가 나이가 더해 감에 쇠하고 병이 깊어지자, 공은 낮이나 밤이나 부축하고 간호하며 옷을 벗지 않고 취침한 것이 5, 6년에 이르렀다. 어떤 때는 어머니를 업고 외당(外堂)으로 나가 막힌 마음을 풀어드렸고, 속옷에 오물이 묻어 있으면 반드시 공이 몸소 세탁하였고, 모시고 식사할 때는 반드시 마치 어린아이처럼 밥상에 마주앉아 어머니가 기뻐하고 달게 여기시기를 바랐다. 어머니의 병이 심해지면 밤에 반드시 하늘에 기도하며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기를 기원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고, 몸을 상함이 아버지 상 때와 같았지만, 몸이 쇠하였다는 것으로 예제 지키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매달 초하루에는 반드시 성묘(省墓)하고 매양 새벽마다 반드시 사당에 참배하였다. 기일(忌日)에는 슬퍼서 몸이 훼척됨이 상을 치를 때와 같았다. 무릇 제사를 지낼 때에는 역량에 따라 제수(祭需)를 갖추었는데, 몸소 마련하고 지극히 정결(精潔)하도록 힘썼다. 선공(先公)이 남기신 뜻을 본받아 여러 대의 선영(先塋)에 석역(石役)을 마쳤다.
공은 종조숙부(從祖叔父)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였으니, 매사를 반드시 자문하고 여쭈어 본 뒤에 행하였다. 종중의 종질이 병이 들었을 때 마음을 다해 약물 치료를 해 주었는데, 아들 없이 죽게 되자 곧 자신의 셋째 손자를 후사로 삼도록 하였고, 그의 두 딸은 혼수를 갖추어 시집보내 주었다. 또 어떤 인척 정(鄭)을 오랜만에 만났더니 사람을 죽여 그 화(禍)를 장차 예측할 수 없는지라, 공이 자신의 재물을 덜어 구해 주어 무사하게 하였다. 종족과 향린(鄕隣)에 밥을 해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힘이 닿는 대로 구휼하여 공급해 주었고, 무릇 상장(喪葬)이 있으면 반드시 조문하고 도와주었다.
공 자신의 생활은 매우 소박하였다. 식사에는 채소를 싫어하지 않았고, 의복은 때 묻은 것도 싫어하지 않았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내 몸에는 편하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함으로써 자제를 가르쳤으며, 또 〈십규가훈(十規家訓)〉을 저술하여 복행(服行)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고도 그들이 조금 어기는 경우가 있음을 보면 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먹지 않기를 거의 종일토록 하여, 그들이 두려워하며 다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빈 뒤에 그만두었다. 집안을 단속함에는 간약하면서도 말이 적었고 엄하면서도 중후함이 이와 같은 점이 있었다. 금상 을축년(1805, 순조5) 4월 모일에 졸(卒)하였으니, 66세를 살았다. 비봉산(飛鳳山)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 뒤에 모산(茅山) 간좌(艮坐)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공이 신읍(新邑 수원)에서 친림시(親臨試 임금께서 친히 임하시는 시험)에 나아갔을 때, 일찍이 주상께서 어주(御厨) 방장(方丈)의 음식물을 거두어 여러 유생(儒生)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니, 여러 유생이 앞다투어 가져갔지만, 공은 물러서서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임금님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이와 같이 무엄(無嚴)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고, 공을 따라 함께 물러난 사람이 또한 10여 명이었다. 주상께서 특별히 불러 앞에 오도록 하고 별도로 다른 지공(支供 음식물을 이바지함)을 하사하니, 공은 곧 부복하여 절하고 받아서 물러났다.
신유사옥(辛酉邪獄)이 바야흐로 벌어짐에 주관(州官)이 도망 간 자를 살펴 체포하기 위하여 하급 관리들을 풀어서 보냈는데, 공의 처소에 있다고 잘못 알려져서 뜻하지 않게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러나 공은 전혀 요동도 하지 않고 천천히 경계하며 걸어서 관부에 들어가 고을 수령을 보고 분명히 밝혀 끝내 별 탈이 없도록 하였다. 초록하여 베껴 쓴 것 40여 권과 저술한 〈풍악록(楓嶽錄)〉, 〈치악록(雉嶽錄)〉, 〈백고경향첩(白藁景香帖)〉 등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은 동복 오씨(同福吳氏)이니 정랑(正郞) 모씨의 따님이자 상공(相公)을 역임한 수촌(水村) 오시수(吳始壽)의 증손녀로, 아들 셋을 낳으니 시영(始瀅), 요절한 시연(始淵), 시철(始澈)이다. 시영은 아들이 넷이니 관(觀), 호(頀), 저(著)는 양자로 나갔고, 하나는 어리다. 시철은 아들이 하나이니 어리다.
하루는 시영 씨가 그의 아들 관을 보내어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며, “돌아가신 문장공(文莊公)이 광해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상소(上疏)하여 노여움을 촉발하였고, 임인(壬人 마음에 흉악을 품은 사람)이 또 죄를 얽어 거의 함정에 빠뜨려 일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저의 선조 만전공(晩全公)이 당시에 물러나 전야(田野)에 계시면서 상소하여 임인의 죄를 논하였습니다. 우리 두 집안의 정의(情誼)가 이와 같은 점이 있으니, 집사께서 혹 한마디 말을 하시어 숨은 빛을 드러내어 주신다면 그 어떤 감사함이 이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위와 같이 모아 기록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부의 지기를 지니고서 / 以丈夫之志氣
군자의 행의를 도타이 하였으니 / 篤君子之行誼
안으로 집에서 닦은 것은 아름다움을 다했고 / 內而修於家者極其美
밖으로 일에 드러난 것은 굳셈을 극진히 했네 / 外而著於事者極其毅
진실하도다, 처사여 / 允矣處士
참으로 만전공과 남파공의 후손이로다 / 展也晩全南坡之孫子
그러나 시명이 이롭지 못하여 / 顧時命之不利
끝내 궁하게 죽으니 / 卒窮而死
나는 이를 위하여 가만히 탄식함을 그치지 못하겠노라 / 吾於是竊爲之歎咜不已
[주-D001] 금오위(金吾衛) 선행(先幸) : 고려 고종(高宗) 때의 무신이다. 당성(唐城)에 세거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금오위 별장(金吾衛別漿)을 지냈으며, 남양 홍씨(南陽洪氏) 토홍계(土洪系)의 시조가 되었다.[주-D002] 따뜻한지 시원한지를 살피며 : 원문은 ‘온정(溫凊)’으로, 기온에 맞게 부모님을 보살펴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은 부모님께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한다.[冬溫而夏凊]”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03] 부드럽고 …… 드림 : 원문은 ‘수수(滫瀡)’로, 녹말을 음식물에 섞어 부드럽고 걸쭉하게 만든 음식이다.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봉양함을 이른다. 《예기》 〈내칙(內則)〉에 “씀바귀나 부추는 햇것과 묵은 것을 섞어 쌀뜨물로 매끄럽게 하거나 혹은 유지를 사용하여 입에 맞도록 한다.[堇荁枌楡免薧, 滫瀡以滑之, 脂膏以膏之.]”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04] 상을 치를 때 : 원문은 ‘점괴(苫塊)’로, ‘침점침괴(寢苫枕塊)’의 준말이다. 거적으로 자리를 삼고 흙덩이로 베개를 삼는다는 뜻으로, 거상(居喪)하는 예를 말한다. 《儀禮 喪服》[주-D005] 신유사옥(辛酉邪獄) : 순조(純祖) 1년 신유년(1801)에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천주교를 전교하던 이승훈(李承薰)을 비롯하여 남인(南人)에 속한 권철신(權哲身), 홍낙민(洪樂敏), 이가환(李家煥), 정약종(丁若鍾) 등을 사형하고,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을 귀양 보낸 일을 말한다.[주-D006] 오시수(吳始壽) : 1632~1680. 자는 덕이(德而), 호는 수촌(水村)이다. 1680년(숙종6)에 우의정으로 있다가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되었고, 뒤에 탄핵을 받아 사사(賜死)되었다.[주-D007] 문장공(文莊公)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가리킨다.[주-D008] 만전공(晩全公) : 홍가신(洪可臣, 1541~1668)으로, 자는 희숙(熙叔), 호는 만전이다. 호조 좌랑, 제주 통판, 이천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30년(1597)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을 쳐들어왔을 때, 당시 홍주 목사였던 홍가신이 난을 평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