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군(禮山郡)에 합장한 묘소가 있는데, 팔봉산(八峯山)의 동북쪽에 있는 것으로 바로 한산 이공(韓山李公) 찬직(讚稙)의 묘소(墓所)이다. 그 마을은 망주(望珠)이며 그 묘소의 언덕은 곤방(坤方)을 베고 누워 있다. 본래 처음에 그 배위(配位) 한씨(韓氏)를 먼저 이 곳에 장사 지냈었다. 그런데 아들 오규(五珪)가 그 터가 길하다 하여 장차 공의 묘소를 이리로 옮겨서 합장하려고 하면서 광(壙)의 남쪽에 묻을 문(文)과 지(誌)를 지어 달라고 나에게 청하여 왔다. 아, 공이 본래 일찍부터 영특하다는 칭송이 있었으며 부인 또한 부덕(婦德)이 훌륭하였음을 내가 진작부터 족당(族黨)으로서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니 차마 명(銘)을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공은 단정하고 깨끗하여 의표(儀表)가 있었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그 뜻을 거스름이 없었고 여러 아우들과의 사이에 우애가 독실하였다. 아우가 죽었을 때에는 방에 빈소를 마련하고 이를 지키면서 떠나지 않은 채 말하기를, “내가 차마 동생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 하고는, 남겨진 고아들을 친자식과 다름없이 사랑하여 길렀다. 손님이나 친구들을 대함에 있어 나태한 모습을 보이거나 부질없는 농담을 하는 일이 없었으며, 또한 남의 허물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전대(前代)의 선악(善惡)이나 성패(成敗)의 문제와 같은 것들에 대해 토론을 할 경우에는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옳고 그름에 대한 구별이 분명하였으며, 국조(國朝)의 사실로서 믿을 만하여 그 증거가 있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상의 유사(遺事)로서 은미(隱微)하여 나타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까지도 모두 술술 막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경사(經史)를 두루 꿰뚫어 관통하였으며 겸하여 제자(諸子)에도 통달하였으니, 글을 짓고자 하여 붓을 잡으면 깊이 생각하는 바도 없이 어느 사이에 수천 수백 글자를 써 내려갔으나 글이 매끈하여 가히 외울 만하였다. 글읽기를 좋아하였으며 더러 손수 책을 베끼기도 하였는데, 긴긴 겨울 밤에 첫닭이 울도록 그치지 않았다. 공은 문장과 덕행으로 당대의 여러 명공(名公)들에게 알려졌는데, 장차 이를 한번 시험해서 써 보고자 하여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한번 응시를 했지만 합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낙방을 했다고 해서 그렇게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공이 죽고 나자 원근의 사람들이 다들 한결같이 공이 수명과 지위를 누리지 못한 것을 아까워하였다.
공은 자가 경실(景實)이다. 아버지 건병(建秉)은 성균관 진사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권위전(權韋銓)의 딸이다. 선계(先系)에 관해서는 진사공의 묘갈에 실려 있다. 공은 계묘년 6월 7일에 태어나서 정축년 5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공이 돌아가시던 날에 내가 꿈에 공을 보았는데, 옷이 아주 깨끗하였으며 흰 말을 타고 어슬렁어슬렁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공이 일찍이 충청도의 도회(都會)에 응시(應試)한 적이 있는데, 하루 세 번의 시험에 모두 수석(首席)을 하였다. 이 때 상국(相國) 김병시(金炳始)가 이 곳 방백(方伯)으로서 이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이에 크게 감탄하여 공을 칭찬하였던바, 이리하여 공이 당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실천하는 일에 독실하였으므로 글재주란 공에게 있어서는 한갓 말기(末技)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니 애써 한때 시험에 응시해서 지은 글을 가지고 무슨 말할 만한 것이 될 수가 있겠는가. 만약 세상에서 이것을 가지고 공을 칭찬한다면 그것은 공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씨(韓氏)로 말하면 청주(淸州)의 저성(著姓)으로서 그 연원(淵源)이 오래 되었다. 그 뒤 중세에 와서 진사를 지낸 분으로 한이명(韓以明)이라는 분이 있는데, 이분이 바로 문익공(文翼公) 한준겸(韓浚謙)의 손자로서 양자로 들어와서 우의정 한흥일(韓興一)의 아들이 된 분이다. 그리고 5대를 전하여 휘 치성(致性)에 이르러서 아들 한진서(韓鎭序)를 두었는데, 이를 대종(大宗)에 입계(入繼)시키고 당신은 족제(族弟) 한홍재(韓弘載)의 아들 한진상(韓鎭庠)을 데려와서 후사로 삼았다. 한진상은 음직(蔭職)으로 벼슬하여 두 고을 수령을 역임하고 돈녕부 도정을 지냈는데, 이분이 곧 부인의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정숙공(貞肅公) 윤승길(尹承吉)의 후예(後裔)이며 휘 양선(養善)의 딸이다.
부인은 임인년 4월 30일에 태어나서 신축년 2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성품이 유화(柔和)하고 정숙(靜淑)하여 모든 처신에 예의와 범절이 있었다. 친정에서 자랄 때부터 이미 효성으로 이름이 났으며, 또한 집안을 다스림이 훌륭하여 가난을 이유로 어버이의 봉양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었다. 시집을 온 뒤로는 부모를 섬기던 효도로써 시부모를 섬겼으며, 여기에 다시 시댁에 대한 예절을 더 보태었다. 그리고 부군(夫君)을 존경하였으되 부군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부당(夫黨)을 대하였으며, 자녀들을 사랑하였으되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조카들을 건사하였다. 또 동서들과 시누이들을 대하는 것이 마치 친자매를 대하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시아버지께서 부인을 매우 소중하게 여겨서 집안 일을 전부 맡기었으며, 큰일 또한 대부분 며느리에게 물어서 결단(決斷)하였다. 그리하여 일가와 집안 사람들이 모두 그 법도를 칭찬하고 비복(婢僕)들이 그 은혜와 의리에 감복해서, 한결같이 ‘어진 부인’이라고 칭송하였다. 부인은 예문(禮文)에 익숙하여 언제나 집안에 길흉사가 있을 때면 폐백 등의 혼수나 반함(飯含)과 습렴(襲殮) 등의 상구(喪具)들을 반드시 몸소 점검해서 이를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미망인(未亡人)이 된 뒤에도 더욱 열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였는데 조심해 살펴서 소홀함이 없었고, 자녀들을 잘 길러서 장가보내고 시집보내었으며 손자들까지 두게 되었다. 시아버지께서 임종에 즈음하여 오규(五珪)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의 어미는 여자이기는 하지만 사군자(士君子)이다. 그러니 너는 어미를 섬기기를 아비와 같이 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모든 것을 순종하고 따라서 어기는 일이 없다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 하였다. 시아버지로부터 이처럼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 현명함이 어떠하였는지를 가히 알 만한 일이라 하겠다.
공은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곧 오규인데 전임 주사(主事)이며, 딸은 진사인 이시우(李時雨)에게 출가했다. 주사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현구(賢求)이며 두 딸은 아직 어리다.
아, 슬프다. 공은 행실이 있고 또한 문장이 있었으니, 장차 이름을 세워서 부모를 빛내고 몸소 자손들을 감싸서 덮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만 오래 살다가 졸(卒)하지 못하고 일찍 몰(歿)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유감이 끝이 없는 바라 하겠다. 그러나 마침 어진 아내가 있었으니, 법도를 따라 위로 받들어 모시고 아래로 가르쳐 길렀으며, 그리하여 능히 넘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한 것을 바로잡음으로써 다시 가도(家道)를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주사(主事) 군이 바야흐로 글공부에 종사하고 있는바 총명하여 스스로 수립하는 바가 있으니, 공이 저 새 밭에 뿌린 씨앗을 이제 비로소 거두어 먹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로써 다만 얼마간이라도 공에 대한 위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풍족하게 받은 재능 인색하게 베풀었으니 / 豐畀嗇施
사람들이 그래서 한탄을 했다네 / 衆之喟也
고통을 참고 위태로움을 극복했으니 / 忍荼扶危
부인으로서 마땅하였구나 / 家人之宜也
합장으로 모시고 지문을 함께 씀이 / 合兆幷識
효성스러운 아들의 마음일레라 / 孝子之志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