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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새해에는 꼭 세월을 아끼세요!>의 줄거리 :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할 새해 인사말을 준비하셨나요? '여전히 복 많이 받으세요!' '아니면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입에 붙어버린 상태인가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께서 우리 모두에게 새해 인사를 하십니다. "새해에는 세월을 아끼세요!"라고. 이 뜻이 무었일까요? 그리고 세상에 취하지 말라 하십니다. 세월을 아낄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꼭 세월을 아끼세요!
(에베소서 5:15~21)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신 은혜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1월 1일 새해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해에는 꼭 세월을 아끼세요!’라는 제목은 본문의 내용과 잘 어울립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본문은 우리에게 전해주는 덕담이자 새해 인사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낌은 내게 이미 주어졌거나, 주어지고 있거나, 주어지도록 결정된 것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주어진 적도 없고, 주어져 있지 않으며, 주어질 것도 아니라면 아끼는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다양한 인사를 합니다. ‘부자 되세요, 건강하세요, 하는 일 다 형통하세요.’라는 말들을 합니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더 벌려고 하지 말고 아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어졌거나, 주어지고 있거나, 주어지도록 결정된 것을 마땅히 아낄 수 있어야 합니다. 없는 것을 향해서 더 벌려고 할 것도 없고, 모으려고 할 것도 없고, 받으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없는 것에 주목하여 그것들을 있게 하려고 하는 삶은 힘이 듭니다. 우리가 아껴야 하는 것은 바로 세월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을 아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려 두시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반드시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지는 시간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려두시는 동안에는 똑같은 시간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이 시간을 아끼는 데 주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돈이 있든 없든 시간은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벌려 하지 말고 아끼고, 모으려 하지 말고 아끼고, 받으려 하지 말고 아낄 수 있어야 합니다.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살아있는 한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는 시간을 아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아끼는 사람이 결국 승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세월이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카이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4장에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과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둘 다 시간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만 그 구체적인 의미가 다릅니다. 카이로스는 수직 하강의 시간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때를 말합니다. 한편 크로노스는 수평의 시간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며 이 땅과 수평으로 흘러가는 날짜의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직 하강의 시간을 아끼라는 뜻입니다. 아낌은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낌으로 번역된 헬라어 엑사브라조메노이(ἐξαγοραζόμενοι)는 낭비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허비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직 하강의 시간을 쓸데없이 허비하지 말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새해 인사라 할 수 있습니다.
낭비하지 말라 함은 곧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카이로스의 수직 하강의 시간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일까요? 이제 202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며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려야 할 뜻과 계획을 점선으로 갖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점선에 실선을 그려나가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방비 상태 혹은 백지상태의 하루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매일, 매시간,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인 점선을 실선을 그려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수직 하강의 카이로스의 시간을 아끼는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뜻이 내려와서 이루어지는 카이로스 시간의 연속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향해 수평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 시간만을 염두에 두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크로노스의 시간은 수직 하강의 시간인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흘러가는 모든 시간에는 그 순간마다 정해놓으신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내려와서 이루어지는 순간마다 우리에게서는 세월을 아낌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 때 크로노스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월을 아끼지 않는 삶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18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방탕이란 단어는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으로 퇴폐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낭비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이루어져야 될 타이밍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지 못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 방탕함입니다. 나의 뜻과 생각을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카이로스의 시간을 낭비하고 없애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 대해 1월 1일에 이루어지도록 정해놓은 뜻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무관심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뜻이 허비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 또한 하루를 헛되이 살고 낭비한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은 70년을 살면서도 단 하루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결정하신 뜻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수평으로 흐르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하늘과 연결시켜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면 그 사람은 하루도 산 것이 아닙니다. 365일 곱하기 70년이라는 세월을 다 허비함으로써 인생다운 인생을 산 시간은 하루도 없는 상태입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청년들이 취직의 포부를 갖습니다. 그러나 지금 직장이 있고 없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직장 문제를 나보다 더 먼저 아시고 계십니다. 어느 때까지 직장이 없으리라는 것도 아시고, 아직도 직장이 없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에 당장 내게 직장이 없다는 문제는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직장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추구해 나갈 수 있으면 됩니다. 남자면 남자인 대로, 여자면 여자인 대로, 재벌이면 재벌인 대로, 노숙자는 노숙자인 대로, 대통령이면 대통령인 대로, 말단공무원이면 말단공무원인 대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점선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참된 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설령 대통령의 자리에서 5년의 임기를 채우더라도 단 하루도 참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노숙자의 자리에서 5년을 있더라도 하루하루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채운다면 365일 곱하기 5년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꽉 채워진 참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세월의 아낌을 염두에 두자면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여 받을 복이란 이미 다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수평적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그 시간마다 일어나야 되는 수직적 시간도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수평의 크로노스의 시간을 수직의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기만 하면 모든 복은 다 받은 것입니다. 점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실선으로 그리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면 됩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에 담긴 뜻입니다. 돈을 벌든지 못 벌든지, 승진을 하든지 말든지, 건강하든지 않든지 따져야 할 일이 아닙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점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려갈 수 있으면 됩니다.
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다시 16절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때라고 번역된 에매라(ἡμέρα)는 시절, 시대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오늘은 2023년 1월 1일입니다. 이날에 하나님이 점선으로 그려놓으신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받아서 그릴 때 세월을 아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저런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를 하늘을 바라보며 뜻을 받으려고 하는 자리에서 자꾸 밀쳐냅니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기운은 전부 수평면을 따라 횡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움직이는 기운이라면 우리를 밀쳐내지 않고, 오히려 덩달아서 하늘을 바라보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세상은 심지어 가족까지도 수평으로 움직이려는 기운으로 충만합니다. 앞서 본 2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이 수직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우리의 흐름을 방해하고 끊어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수평으로 움직이며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자 합니다. 그 기운은 끊임없이 지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우리를 방해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이 수평의 힘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수평을 끊어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수직 하강으로 내려오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수평으로만 움직이려고 하는 악한 시대에 대항하기 위해 의식 속에 늘 십자가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들 틈에 살면서 수직 하강의 시간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악한 시대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시켜 나가야만 세월을 아낄 수 있습니다.
한편 15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복된 새해를 살아야 합니다. 복된 새해는 내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렸고, 지혜 있는 자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17절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함이 곧 지혜 있는 자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다소 어색함이 느껴집니다. 차라리 지혜 있는 자가 되라고 했으면 직관적일 텐데 사도 바울은 굳이 지혜 있는 자같이 행하라고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면 있는 자이고, 없는 자면 없는 자인데 굳이 돌려 말하는 것 같은 표현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에 담긴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혜는 지금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혜란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의 상황에 대한 가장 적절한 생각이고, 가장 합당한 말이고, 가장 최선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해로부터 15~17절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것이 지혜 있는 자같이 행함이고 세월을 아낌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지금 이 시간에 하늘에서 정해진 뜻을 받아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앞서 4장에서 심령이 새롭게 된다는 말씀을 살펴볼 때 심령이란 곧 ‘이해의 영(The spirit of your understanding)’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무엇인가 이해한다는 것은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영의 지배를 받는다는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봅니다. 17절에서 이해로 번역된 쉬니에미(συνίημι)는 구분되지 않도록 옆에 둔다, 같이 놓는다는 뜻입니다. 주의 뜻을 이해함이란 곧 주님의 뜻 옆에 나의 생각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직 하강의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더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내가 뜻하고 생각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의 뜻을 받아서 생각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어찌 보면 무척 생소합니다. 어떤 종교나 문학에서도 발견될 수 없으며, 어떤 자기계발서나 참고서에서도 주장하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나의 생각의 재료가 주의 뜻이 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이기에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내가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속에서 발생한 내용을 생각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생각의 재료로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앞서 지혜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말하느냐 행동하느냐에 대한 정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지혜는 곧 주의 뜻 옆에 내 생각을 둘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하는 능력이 주의 뜻을 받음으로써 주의 뜻을 생각하게 되고, 내가 말을 해도 주의 뜻대로 말을 하고, 내가 행동하지만 주의 뜻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구분이 되지 않게 옆에 둔다, 같이 놓는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 주의 뜻을 이해함인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주의 뜻을 이해함이 지혜 있는 자같이 행하는 것이라 말한 것일까요? 지혜 있는 자는 확고한 자입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정답을 알고 있기에 확고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바위처럼 든든한 말과 행동을 한다고 느낍니다. 주의 뜻을 이해하는 자는 바로 그렇게 확고함을 보이게 됩니다. 주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에는 주저함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이러한 모습이 지혜 있는 자같이 확고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 안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정답은 주의 뜻에 있는 것이고 나는 생각을 주의 뜻 옆에 놓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내 생각을 주의 뜻 옆에 놓음으로써 주의 뜻이 나의 생각의 내용이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나를 확고한 생각을 가진 자로써 보며 지혜 있는 자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지혜 있는 자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지혜 있는 자같이 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 예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곧 듣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이 듣고자 했던 것은 주의 뜻이었기에, 주의 뜻 옆에 내 생각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받아서 한 아기를 놓고 서로 자기의 아기라 우기는 두 여종의 싸움을 해결하였던 사건이 유명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하늘에서 청천벽력과 같이 갑자기 떨어져서 내려왔던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두 여종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듣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생각 옆에 자기의 생각을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모르기에 솔로몬이 대단한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솔로몬 자신에게 답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주의 뜻 옆에 둘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주의 뜻이 우리의 생각 안에 들어와 계심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지만 주의 뜻대로 말하는 것이고, 내가 행동하지만 주의 뜻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 있는 자같이 행함이고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면서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신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의식의 주머니와 욕구의 주머니는 하나님 아버지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 옆에 놓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이러한 모습을 새사람이 빛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의 주머니는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가득 차고, 좋음을 느끼는 욕구의 주머니가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 옆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의식의 주머니와 욕구의 주머니가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만 하면 새사람이 되고 빛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방법을 알려주세요.’라고 나의 바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붙잡음이 분명할수록 하나님의 뜻이 나의 생각을 돌리는 재료가 됩니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감을 일등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일등으로 소망하고 있을 뿐인데 이로부터 생각이 생겨납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같이 놓여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각이 하나님 곁에 놓여있기 때문에 나의 생각 속에서 돌아가는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땅에서 크로노스의 모든 시간들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해갑니다. 그 시간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월을 아낌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일등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있음을 느끼는 의식의 주머니와 좋음을 느끼는 욕구의 주머니가 하나님 대신에 가족, 돈, 건강에 대한 있음과 좋음을 먼저 느낀다면 그 상태에서는 내 생각은 하나님의 뜻 옆에 놓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제가 몸이 아픈데 A병원을 갈까요? B병원을 갈까요?’라고 아무리 물어도 하나님의 뜻은 전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같이 놓여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하나님께 최대한 많이 여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제가 사업을 해야 되는데 사무실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라고 묻고, 하나님이 ‘어디에 사무실을 두라.’고 대답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법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꿈이나 계시를 통해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내가 그것을 구해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구하는 시점에서 이미 마음은 세상에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내 생각이 하나님 생각 곁에 놓여있지 않기에 하나님의 뜻이 알려질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세상일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고 아무런 관심이 없을 때 하나님의 생각 곁에 내 생각이 놓이게 됩니다. 의식의 주머니는 하나님의 존재감만으로 충만하고, 욕구의 주머니가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망하는 상태라면 이 세상일에 대한 꿈이나 계시도 주어질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이 아버지의 뜻과 같이 놓여 있기에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아버지의 뜻이 내 생각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의 2023년은 365일이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숨이 끊어지기로 정하신 그 순간까지 모든 날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뜻을 받아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지 않더라도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지 않아서 낭비한다면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우리의 삶을 섭리해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주권적으로 역사해나가시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를 기점으로 하나님이 발산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형극에서 인형을 줄에 매달고 강제로 움직여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2023년을 사도 바울의 새해 인사를 따라서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버지의 뜻과 같이 놓일 때 지혜 있는 자같이 되고, 정답을 아는 자같이 되어서 크로노스의 모든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는 하루로부터 시작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새해 인사가 현실이 되는 2023년 새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