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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야 그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 2023년 3월 19일 주일 예배
본문 / 사무엘상 25:1-13
전에 목사님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 한 목사님이 이런 예화를 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형편이 어려운 분에게 매 달 10만원을 봉투에 넣어 문 앞에 놓았답니다. 몇 년을 그렇게 했나 봅니다. 어려운 형편에 어느 날 문 앞에 봉투가 있어 뭔가 하고 보았더니 10만원이 있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너무 감사해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한 달 후에도 문 앞에 또 봉투가 있는 겁니다. 이게 웬일인가? 설마 또 돈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 안을 보자 10만원이 또 들어있었습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어찌할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에도 줄까? 라는 기대가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날이 기다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정확이 한 달이 되는 그 날에 봉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몇 년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봉투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봉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달, 두 달, 세 달을 기다려도 더 이상은 봉투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봉투를 준 사람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이미 집 앞에 돈을 놓고 가는 사람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 집을 찾아가서 왜 봉투를 놓지 않느냐고 따지더라는 겁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내 보따리를 내놓으란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더니 이제부터 내 인생을 책임지라고 멱살을 잡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이상 봉투를 주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서 화를 낸 그 사람이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런 사람이고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처음에는 정말 감사해도 그 은혜가 나중에는 당연한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처음에는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누구나 기대하지 못한 호의를 받으면 그게 은혜인 겁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한 번은 방안에 있는데 이런 말이 들리는 겁니다. 사람이 미안해서 살 수가 없어! 누가 뭘 갖다 주었나 봅니다. 그게 감사해서 미안해서 살 수가 없다는 말로 표현을 하는 겁니다.
땅을 파면 10만원이 나옵니까? 누가 돈을 주던 물건을 주던 그건 정말 감사한 것입니다. 제가 잊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나 교회에 생활비나 헌금을 보내주는 분들입니다. 따로 연락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잊지 않고 기도합니다.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까치도 은혜를 갚았는데 까치보다도 못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받는 눈에 보이는 은혜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은혜를 감사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은혜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딱 그렇게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는 어떻게든 갚으려고 합니다. 밥 한번 대접 받으면 자기도 한번 사려고 합니다. 얻어먹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그 기가 막힌 은혜에 대하여는 감격도 없고 감사도 없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시편 49장 20절에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짐승 같은 사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값없이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은혜 받은 자답게 살지 못하고 교만하고 오만하게 행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어 멸망하는 짐승 같이 된 나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발의 이름은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나발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의 말처럼 그에게 딱 맞는 이름이었습니다.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울을 피해 유다의 남쪽인 바란 광야에 숨어있었습니다. 그곳은 유다의 변방인지라 사울의 눈을 피해 있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지만 그곳에서 양을 치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의 출몰과 약탈이 빈번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그를 따르는 군대가 그 바란 광야에 자리를 잡자 그곳은 이방인들이 약탈할 수 없는 가장 안전한 곳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군대가 치안이 불안한 곳에서 든든한 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발은 그곳에서 안전하게 양을 치고 한 마리도 잃지 않은 것입니다.
나발의 종이 그 사실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다윗은 자신의 군대로 인하여 나발이 양을 잃지 않고 안전하게 양을 칠 수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나발에게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피해 숨어있는 신세입니다. 다윗도 나발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더군다나 나발은 상당한 부자였습니다.
다윗은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양털을 깎는 날은 추수하는 날과 같습니다. 제가 어릴 때 농촌에서 모를 심는 날과 바심하는 날은 가장 바쁜 날인데 잔칫날입니다. 그날에는 아이들이 밥을 얻어먹으러 다닙니다.
다윗은 잔칫날에 나발에게 부하들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하들이 나발의 양들을 지켜준 그 은혜에 대한 사례를 정중하게 요청한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정식 계약은 하지 않더라도 용병들이 양을 지켜주면 양털을 깎는 날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례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다윗은 나발이 받은 그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인정하고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사례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예상을 빗나가고 만 것입니다. 나발은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발은 은혜를 짓밟고 멸시하고 모욕하는 아주 미련하고 교만한 자였던 겁니다.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나발은 다윗을 주인에게서 도망한 종이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양식을 줄 수 없다며 모욕을 주며 거절한 것입니다. 정말 거저 받은 은혜를 원수로 갚아 버린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에게도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인데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결코 자기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은혜를 업신여기고 모독한 나발에게는 달랐습니다.
곧바로 부하들을 무장하게 하고 나발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몰살하기 위해 400명을 이끌고 직접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발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을 통해서 다윗이 원수를 갚는 것을 막으셨지만 하나님이 직접 나발을 심판하셨습니다.
38절에서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은혜를 멸시하는 그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를 하나님도 견딜 수 없었기에 심판하신 것입니다. 나발이 몸이 돌과 같이 되어 열흘 후에 죽었는데 그는 회개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나발은 이미 그 마음이 돌처럼 굳어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죽은 후에 그 많은 재산은 누구의 것이 되었고 그것은 어디로 가습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교만하면 끝장이라는 말이 있는데 왜 사람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교만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나발처럼 깨닫지 못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발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이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혹시 나발처럼 되가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나발이 다윗에게 거저 받은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께 거저 받은 십자가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완전하고 영원한 사망과 심판에 떨어진 자들입니다. 그 심판의 고통과 저주가 어떤 것인 줄이나 압니까? 예수님은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그 뜨거운 볼 못에서 그 영혼과 몸이 타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전기 통닭구이를 볼 때나마 지옥이 생각납니다. 그 안에 사람을 산 채로 넣고 돌린다고 해보십시오. 그런데 죽지도 못하는 겁니다.
지옥의 고통은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저주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내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인 겁니다. 내 죄를 주님이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어떤 죄든지 다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 해주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믿으면 그 끔찍한 지옥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꼼짝 없이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죄는 내가 짓고 그 고통은 주님이 다 받으신 겁니다. 그게 십자가의 한량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은혜를 정말 믿음으로 받고 그 은혜 안에 있으면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기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주님이 내 죄를 지고 저주와 심판을 받은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삽니까? 은혜는 뻔뻔스럽게 받았다고 말하지만 은혜 받은 자답게 사는 사람들은 적은 것입니다. 은혜가 그저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면 좋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거저 받은 것이 은혜이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그 사람은 은혜를 믿음으로 받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즉 믿음을,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다윗이 나발에게 요구한 것처럼 말입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내 영혼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받기만 하면 다가 아닙니다. 믿음은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은 자에게 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은혜를 받으면 그것으로 구원이 확정되고 끝난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울보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왕이 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울이 그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믿음을 달라할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저런 핑계와 변명을 대며 불순종하였습니다. 사울은 버림을 받고 만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변명이 통하지만 하나님께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연예인들이 신앙 간증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저는 TV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걱정이 됩니다. 죄악 중에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것은 정말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인데 그건 구원을 이루어가는 시작일 뿐인 겁니다. 앞으로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신 그 좁은 길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까지 믿음의 경주는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작인데 이미 다 승리한 것처럼 착각하면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은혜는 거저 받아도 그 은혜로 십자가에 날 부인하며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은 절대로 만만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간다고 노래하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로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많아도 구원으로 택함을 입은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해도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지 않으니 천국에 못 들어갈 자들이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발이 다윗이 자신의 양떼를 지켜줄 때에 처음에도 은혜를 몰랐겠습니까? 어느 날 종이 와서 다윗의 군대가 우리를 지켜주어서 이번에는 양을 한 마리도 잃지 않았다고 보고할 때 아무리 교만하고 미련해도 고마운 마음도 없었겠습니까? 자기 재산을 지켜주고 잃지 않게 해주었는데 은혜를 몰랐겠습니까? 그게 시간이 지나자 당연한 것처럼 된 것입니다. 다윗은 당연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고 나는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처럼 된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그곳을 떠나 양을 지켜주지 않아 양들을 잃으면 다윗을 원망하며 따질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양들을 잃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고 광야로 나와 자유를 얻었지만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그 과정에서 나를 위한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불순종하다 망하고 만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이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거저 받는 게 은혜입니다. 그런 기가 막힌 은혜를 받아도 감사도 없고 갚을 줄도 모르는 그 미련하고 교만한 나발이 곧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멸시하고 하나님보다 세상과 재물을 더 사랑하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며 나 자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가 지금 하나님 앞에 나발처럼 된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자들이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배만 아는 인색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는 인색하지만 명품 소비는 세계 1위인 것입니다. 가장 사치와 허영이 심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언제까지 흥청망청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이 나라의 문제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세워진 것이 교회인데 그 안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에 십자가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것입니다.
만 달란트를 은혜로 탕감을 받았지만 백 데나리온을 갚으라고 멱살을 잡는 시대입니다. 달란트를 받았지만 땅에 묻어둔 것입니다. 십자가는 강단에 폼으로 달아놓은 것이지 그 십자가를 마음과 영으로 품고 삶으로 지고 가는 교회와 성도들은 극히 적은 것입니다.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겁니다.
주여 주여 하니 다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겉은 은혜를 받은 자들 같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성도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직분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새벽에 기도도 하고, 십일조와 헌금을 하고, 봉사와 선교와 구제와 전도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에게 대하여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속이 중요한 겁니다. 내 마음과 영에 죽어야 할 죄인을, 이 벌레만도 죄인을,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할 나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기가 막힌 은혜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 은혜도 없이 번지르르한 육신의 행위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를 위한 자아숭배인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명절에 과일이나 고기를 선물로 받으면 어떻습니까? 먼저 눈이 보이는 맨 위에 있는 겉은 가장 좋습니다. 빛깔이 좋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고기도 신선하고 살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있는 속도 그렇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겉보다 속이 더 좋은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속에 있는 것은 잘 익도 않고 고기보다 지방이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이 미련한지 말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겁니다. 차라리 겉에 안 좋은 것을 놓고 속에 좋은 것을 넣으면 칭찬을 받을 겁니다. 겉과 속이 같은 선물은 거의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에 누가 선물로 사과를 보냈는데 속에는 겨만 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은 겉으로는 십자가를 알고,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속을 보시는 하나님이 그 안을 보실 때는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백성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그 마음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겉은 목사이고 성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은 음란과 정욕과 탐심과 교만으로 썩고 냄새나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며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이것이 지금 교회의 현실인 겁니다.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그 마음과 영에서 떠나고 삶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가 집단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교리만 남은 종교가 된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사라진 것입니다. 교회가 생명을 구원하지 못하는 겁니다. 교회에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죄에 대한 두려움과 애통이 없는 겁니다. 사랑이 없고 소망도 없는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다는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저 세상의 힘인 세력과 육신의 만족만 있는 겁니다. 종교적인 형식과 습관과 행위만 있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와 기복주의와 인본주의와 율법주의가 대세가 된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당연한 듯이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만 크게 짓고 사람들만 끌어 모으면 성공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런 교회를 좋아합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슬픈 눈으로 보시는 주님의 탄식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괴로움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괴로움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괴로움을 받게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서서히 식어지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다 잃어버립니다. 예배, 기도, 직분과 같은 겉모양만 남는 겁니다. 벌레만도 못한 죄인을 구원해주신 십자가의 은혜와 감사와 기쁨과 그 십자가에 날 부인하며 내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을 받들고 순종하는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떠나 심판대 앞에서 섰을 때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 두려움과 절망과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마음과 목숨을 뜻을 다하여 하나님 만날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정말 십자가의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아야 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게 그런 겁니다. 주여 주여만 하는 겁니다. 믿는 척만 하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믿는 겁니다. 그것은 은혜를 받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를 십자가에 날마다 부인해야 합니다. 내 감정과 생각과 뜻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내가 싫어해도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시는 뜻에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물어야 합니다. 제발 은혜 받은 자답게 십자가의 믿음으로 살아서 그 은혜로 구원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