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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항상 십자가로 영적 시력 검사하기>의 줄거리 :
십자가 너머가 환하게 보입니까 아니면 어두워서 잘 안 보입니까? 십자가 너머가 광명이면 구원받고 흑암이면 구원은 없습니다. 십자가 너머에 하늘이라고도 하는 천국이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이 천국이 늘 의식에 켜져서 환하게 보이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건히 하는 것이며 영생을 보장 받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너머 천국이 생활 현장에서 잘 보이지 않고 어둠에 덮여 있으면 그에게 천국의 삶은 죽어서도 없습니다.
항상 십자가로 영적 시력 검사하기
(베드로후서 1:5~11)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9절을 보면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런 것’이란 5~7절에 나오는 여덟 가지 덕목을 가리킵니다. 이런 여덟 가지 덕목을 열매 맺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멀리 보지 못하는 맹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멀리 보지 못함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8절에 자세히 언급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입니다. 에피그노시스를 영어로 직역하자면 ‘~위에’라는 전치사 on을 붙여서 on knowledg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on의 뜻을 힌트로 삼아 전체 문맥에 어울리게 해석한다면 우리가 기억하고 습득한 많은 지식 중에서 늘 의식에 켜놓는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경험한 예수님은 뼈에 사무치게 기억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며 눈앞에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난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아계심에 대한 지식을 늘 의식 속에 켜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여덟 가지 덕목이 생기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멀리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고 했습니다. 멀리 보지 못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어 땅을 떠나 부활 승천하여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따라갈 때 천국을 보게 됩니다. 천국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천국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이 생겨납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가 계신 천국,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 예수님과 하나님을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은 모두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때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언제나 의식에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멀리 보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따라갈 때 마음의 시선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천국을 보게 됩니다. 천국은 지금도 있습니다. 그 천국에는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 곁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늘 켜놓으면 이러한 사실들이 함께 켜지게 됩니다.
제목에서 ‘항상 십자가로 영적 시력 검사하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시력을 검사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가정에 있을 때, 직장에 있을 때, 시장에서 장을 볼 때, 여러분의 의식에서 십자가 너머에 있는 천국이 환하게 보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 너머의 천국이라는 사실 세계가 어둠 속에 묻혀서 전혀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다면 맹인의 상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모든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 너머에 있는 천국의 세계가 언제나 우리 의식 속에 환하게 켜져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고 자녀를 대하고 이런저런 일을 할 때도 내 의식이 집중되어야 하는 일은 십자가 너머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십자가 너머의 세계가 깜깜함 속에 보이지 않는다면 여덟 가지 열매는 하나도 맺힐 수 없습니다. 여덟 가지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1절을 보면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식에서 십자가 너머의 세계가 켜있지 못하고 여덟 가지 열매가 맺힐 수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 자체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베드로는 앞선 10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를 택하셨음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세례를 받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건히 하라고 요청합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건히 하지 않으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였고,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덟 가지 덕목이 생길 정도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크레신(κλῆσιν)은 ‘부르다’는 뜻을 가진 칼레오(καλέω)를 어원으로 합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고 하는데 여기서 전치사 에크(ἐκ)는 ‘~바깥으로’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마음이 잠겨있는 우리들을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 바깥으로 불러내셨다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택하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천국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 아들의 자리에 앉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아들로 삼으신 것을 택하심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밖에 있는 천국으로 오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택하심은 천국에 온 우리의 마음을 독생자의 자리에 앉히셔서 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갈 것을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고 부르심과 택하심은 굳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여덟 가지 덕목이 나타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덟 가지 덕목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늘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앎으로써의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받아들인 지식 중에는 켜놓을 지식이 있고 꺼놓을 지식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항상 켜있어야 합니다. 이 지식 외에는 다 꺼야 할 지식들입니다. 다 꺼놓아도 괜찮은 이유는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지식만 켜놓으면 천국이 환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셨기에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켜놓을 때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의식에 천국이 환히 켜지고, 하나님이 환히 켜진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이 환히 켜져 있으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지식들을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기억나게 하셔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지식은 꺼놓아도 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한 지식만을 늘 의식 속에 켜놓음으로써 십자가 너머 천국의 상황이 환히 보이면 됩니다. 천국 상황이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일체가 되어 계심을 뜻합니다. 이 삼위일체 되심에 인격의 핵심인 마음을 가담시키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십자가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이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내 마음이 둘러싸여 있음이 보이는 상황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 십자가 너머에 있는 천국의 세계가 내 의식에서 환히 켜진 믿음의 상태가 지속되면 그 위에 덕이 쌓이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믿음에 덕을 더할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가 덕을 더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지속적으로 십자가 너머를 환히 볼 수 있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레텐(ἀρετήν)은 헬라 문화에서 전쟁의 신으로 여겨지는 아레스의 이름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당시 고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좋은 일이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전쟁에 나가 싸우다가 승리해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승전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사도 베드로가 언급한 덕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만날 때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같이 기쁨이 되고 좋음이 될 수 있음이 바로 덕입니다. 타인에게 기쁨이 되고 좋음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행복과 불행 사이에 낀 전쟁터라 할 수 있습니다. 승리하지 않으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터에서 내가 덕을 갖게 된다는 것은 승전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자유와 구속 사이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과 진정한 승리와 진정한 자유가 성취되었음을 내 존재 자체로 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덕이란 나를 통해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승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유익함이 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이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을 켜놓은 상태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식을 갖고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 지식이 켜있지 않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당을 다니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다는 지식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켜놓지 않으면서도 믿는 사람이라 여기며 살았습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건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원은 희미해져 버리고 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믿음이란 예수님이라는 지식을 켜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 계신 천국은 지금 우리 마음의 의식에 켜져 있어야 합니다. 사는 동안에 천국에 대해 시력이 없는 맹인처럼 살다가 죽고 나면 갑자기 천국이 환히 보이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렇게 십자가 너머가 의식에서 환히 보이는 영적 시력을 유지할 때 사람을 만나면 나는 무조건 그 사람에게 유익함의 덩어리가 됩니다. 나는 타인을 통해서 유익을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너머의 영적 현실이 환히 보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환히 보고 있는 내가 천국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아야 할 도움이나 유익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천국이 환히 켜져 있는 상태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는 무조건 전쟁에서의 승전 소식을 알리는 좋음의 덩어리가 됩니다. 그 사람에게 정말로 유익한 것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덕이 생기는 상황에서 지식이 더해집니다. 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지식이란 앞서 살펴보았던 켜놓아야 하는 지식으로써의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가 아니라 우리가 습득하고 기억하는 지식인 그노시스(γνωσις)입니다.
믿음과 덕으로써 하늘을 향해 의식이 환히 켜져 있는 시력을 회복하여 유지하는 사람은 하늘을 환히 보는 가운데 타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진정한 유익을 주는 유익 덩어리가 됩니다. 여기에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식을 의미하는 그노시스(γνωσις)는 체험적 앎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야다(ידע)입니다. 헬라어 사전에서도 그노시스를 ‘알게 되다, 동침하다’라는 뜻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서신들은 의식에서 천국이 환히 보이는 가운데 사람들을 만나서 관계해 본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환히 보시는 가운데 사람들을 만나서 전적으로 그들의 유익만을 위해 사신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뉴스로 들어 알고 사전에 기록된 지식이 아닙니다. 십자가 너머에 천국이라는 현실이 환히 보이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실제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나누는 십자가 복음 방송의 모든 내용, 매주 십자가 온라인 교회에서 나누는 모든 내용들은 제 나름대로 마음에 천국을 환히 켜놓은 상태에서 사람과 더불어 사는 중에 나타나는 경험적 지식들을 토대로 삼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식으로 알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문자 배후에 담겨져 있는 믿음과 덕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 관계하는 경험적 지식들을 꺼내어 나의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말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덕에 이어지는 지식이란 바로 여러분이 듣는 모든 말씀들입니다.
예수님과 천국에 대한 지식이 켜진 상태에서는 사람을 만날 때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것처럼 좋음과 유익의 덩어리가 됩니다. 그런 바탕에서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 요구되는 일이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천국이 켜져 있고, 사람에게 덕이 되는 삶을 사는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지식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몇 년이고 들으신 분들은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 너머 천국의 현실을 켜놓은 상태에서 사람을 마주하는 지식을 많이 갖고 계실 것입니다. 다만 그런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사람을 만나거나 상황을 접할 때 곧바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너머의 세계가 환히 켜진 상태가 되고, 사람을 향하여 온전히 그에게 유익이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 상태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됨을 의미합니다. 내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지식으로부터 곧바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서 기억되고 있는 지식 중에 하나님이 그때그때 기억 속에 끌어올리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게끔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절제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절제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수많은 지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환히 켜놓은 상태에서 사람들을 만나셨고, 사람들에게 유익만 되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절제의 내용입니다.
주석가들은 이 절제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중시했던 절제와 동일시하며 착각하기도 합니다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절제는 믿음이 있고 십자가 너머 천국에 대한 지식을 환히 켜놓은 상태를 전제로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을 향하여 덕을 끼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믿음과 덕으로써 살아가는 지식이 보화와 같이 쌓여있는 창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을 통해 많은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지식을 습득했다고 해서 곧바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선생으로서 가르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선생 노릇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된 상태에서 아버지가 선택하여 기억 속으로 꺼내주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또 사도 베드로는 인내를 언급합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이런 단계를 거쳐서 말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바람직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인내가 요구됩니다. 하나님과 호흡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꺼내주시는 지식을 따라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세상은 우리를 거부하거나 탄압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에 대해 눈에 보이는 열매가 맺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그네 된 우리는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의 단계를 거쳐 말하고 행동할 것이되 절대로 말과 행동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열매를 얻는 기쁨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나그네, 산 소망과 같은 표현들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절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선별하신 지식을 따라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또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승전 소식을 전하는 기쁨의 덩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본향이 아닌 타지를 통과하는 동안에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인내로써 소망 속에서만 기쁨과 만족을 얻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기에 하늘만이 우리의 기쁨과 만족의 근거가 됩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 하나님과 호흡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할지라도, 그에 대한 열매와 결실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또한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이 정해주신 말을 입에 담으셨고 정해주신 뜻을 따라 행동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를 따라 말하고 행동했지만 결국은 각각 68년과 67년에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유익만을 구하고, 오직 절제함으로써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 사는 정말로 의로운 삶을 살지라도 열매와 결실과 결과와 반응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인내를 통해 이 점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내에 이어서 경건이 언급됩니다. 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해서 절대 세상을 마구잡이로 살 수는 없습니다. 경건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경건으로 번역된 헬라어의 구성 성분을 따라 생각하면 ‘좋게 예배드리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기쁨이나 만족이 주어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절제는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와 있는 지식 중에 선택하셔서 입과 몸에 담아주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기쁨도 만족도 기대하지 않는 인내가 요청됩니다. 삶에 주어지는 경건의 의미는 ‘좋게 예배드림’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좋게 예배드린다는 뜻의 경건을 언급하지만, 당시에 지금과 같은 예배당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배는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관공서에서, 모든 장소에서 기쁨도 만족도 기대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이 나를 내려다보심을 기억합니다. 인내는 세상에서 기쁨을 소망하지 않고 하늘의 기쁨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내의 상태에서 오직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경건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내 눈앞에 계심을 느끼면서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그 시발점은 내 의식에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의식에 켜놓는 것입니다. 그럴 때 천국이 환히 켜지게 됩니다. 이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하면 그 위에 덕이 쌓이고, 그 위에 지식이 쌓이고, 그 위에 절제가 쌓이고, 그 위에 인내가 쌓이고, 그 인내 위에 경건이 쌓이게 됩니다. 한편 이어지는 7절에서는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늘 저녁 십자가 온라인 교회에서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의 요지를 정리해 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 너머의 세계가 환히 보이십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시력은 십자가 너머의 세계를 광명의 세계로 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언급한 여덟 가지 덕목이 생겨날 것입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견고히 하며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게 됩니다. 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십자가 너머 천국의 세계가 환히 보여야만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와 관련하여 십자가 너머 이 세상을 떠나 천국을 바라보는 영적 시력이 살아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의식에 천국이 환하게 켜져 있고 보여야 부르심과 택하심을 견고히 할 수 있습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견고히 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맺을 수 없는 여덟 가지 덕목의 열매들이 맺힐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 덕목을 증거로 우리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견고히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늘 십자가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 의식이 환하게 켜져 있는 시력 2.0의 상태를 유지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너머의 세계가 가정에 있을 때, 직장에 있을 때, 언제 어디서든지 환하게 보이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영적 시력을 점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