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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이 비현실이 되는 마귀 전략>의 줄거리 :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전하자 바로는 즉각 반응합니다. 바로의 거절과 대책 속에 이 세상 사람 전부를 향한 마귀의 전략이 드러납니다. 엄연히 살아계신 창조주요 주권자 하나님을 비현실로 느끼게 하려는 마귀의 전략입니다. 이 전략에 말려드는 두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름조차 모른 채로 하나님 현실감 제로의 상태에서 사는 사람과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 현실감 제로의 상태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비현실이 되는 마귀 전략
(출애굽기 5:1~23)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4.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5.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6. 바로가 그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8.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여기에는 지금도 이 세상 전체를 향하여 활성화되고 있는 마귀의 전략이 들어있습니다. 마귀의 전략은 하나님을 비현실이 되게끔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유일한 있음이며 유일한 좋음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사실이지만 내 마음에서 비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현실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서 비현실이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그렇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내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주권적으로 이끄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가장 강력한 현실감의 대상이 아니라면 마귀의 전략에 휘말렸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전략에 휘말리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 형태는 하나님의 이름조차 모르거나 알아도 부르지 않은 채 하나님 현실감이 제로인 상태로 살아가는 부류입니다. 모든 이방 종교인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두 번째 형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에서 하나님의 현실감이 제로인 상태로 살아가는 부류입니다. 전자는 마음이 세상 생활에 완전히 빠져버린 자들이고, 후자는 마음이 예배당 생활에 완전히 빠져버린 자들입니다. 마음이 예배당 생활에 빠진 것이 왜 문제일까요? 하나님을 현실로 느껴야 할 부분을 예배당이 차지하고 들어와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예배당에 소속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 생활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의 대상이시라는 것은 엄연한 최우선의 사실입니다. 마귀는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에서 비현실로 느끼게 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두 가지 형태로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 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후자의 형태로 마귀의 전략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예배당 조직에서 운영하는 행사나 예배 의식에 열심히 참여하고, 예배당에서 얻는 직분이나 인간관계를 중시한다면 마음은 예배당에 대한 현실감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하나님의 현실감을 예배당의 현실감이 쳐부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려 하지 않고 예배당 생활에 열중하는 한 마음에서 절대로 하나님이 현실감의 대상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실감을 잃음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전략을 쳐부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하나님 현실감으로 충만한 상태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현실감이 제로인 진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은 세상 생활, 예배당 생활, 신앙생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을 비현실로 느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실감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신앙생활을 깨뜨림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최우선이어야 하는 하나님의 현실감을 비현실로 만들고자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4~6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우표 수집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우표를 수집하는 앨범을 거의 끼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동네 어른들도 다 아실 정도여서 특별한 우표가 생기면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언제부터인지 우표 수집에 대한 관심이 점점 없어지고 고등학교 때는 아예 우표 앨범들을 책꽂이 한편에 꽂아두고 눈길조차 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앨범에 눈길이 닿아도 마음에서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여러 권이나 되었던 두꺼운 우표 앨범이 다 어디로 없어졌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한때는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양쪽에 스피커가 붙어있고 가운데 앰프가 달린 콤팩트 음향기기를 구해서, 어려운 형편에서도 돈을 모아 CD를 사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콤팩트 음향기기 위에 먼지가 쌓이게 됩니다. CD를 넣어둔 서랍을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표 앨범도 CD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손길이 가지 않게 되었던 것일까요?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나의 관심을 받는 대상만이 의식 속에서 빛이 납니다. 관심을 쏟아붓는 대상만이 내 마음에서 살아있는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주지 않으면 내 마음에서 비현실이 되고 비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이처럼 의식이 꺼져서 비현실이 된 대상은 내 마음에서 어떤 반응도 끌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이란 곧 하나님께 마음 쓰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쓰고 삽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하나님께 마음 쓰는 것을 믿음이자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고, 입으로 맛볼 수 있는 대상들에게 마음을 씁니다. 이처럼 육체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에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고, 입으로 맛볼 수 없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마음을 쓰는 일을 신앙이자 믿음이라고 합니다.
다만 마음 쓰는 것 자체는 누구나 하는 일이기에 원리는 똑같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관심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부르더라도 하나님은 관심 밖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엄연한 창조주요 주권자이십니다. 지금도 내 오장육부와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만 하나님을 관심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비현실이 되십니다. 저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우표 앨범이나 클래식 CD 같은 신세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주권자이심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께 지속해서 드리는 관심의 흐름이 끊어진다면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비현실이 되십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일에 지속해서 관심을 보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일에 반응하는 중에 하나님을 끼워 넣으려는 것일 뿐입니다. 절대로 하나님 자신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일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신을 찾는 것이 종교입니다. 예배당 조직을 중심으로 한 예배당 생활이 문제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아론과 함께 바로 앞으로 나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모세와 바로의 만남을 떠올려 봅니다. 당시 모세는 지구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흘려보낸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는 하나님이 가장 강력한 현실이었습니다. 한편 바로는 애굽의 왕으로서 세상이 가장 강력한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은 엄연한 사실임에도 바로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비현실이었습니다. 이제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마주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만남을 통해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마음이 육체의 오감으로는 느낄 수 없는 하나님께로 관심이 흘러가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내 의식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인 상태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로부터 구원이 없는 상태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부르지 않거나 관계가 없습니다. 이 세상 것들에 관심하는 동안 의식에서는 세상 것들이 켜집니다. 다시 말해 세상 것들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끊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비현실이 되는 상태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예배당에 소속을 두고 들락거리는 것, 예배당 생활에 전념하는 것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이 현실이 되셔야만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선적이고 또렷하고 명확한 현실로 느껴진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모세와 바로의 만남은 서로 다른 현실의 만남입니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현실인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는 애굽 경제의 하부 구조를 지켜내기 위해서 250만 히브리 노예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에게는 애굽 나라의 형편이 밝고 또렷한 현실입니다. 반면 지팡이 하나 들고 바로를 찾아온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현실입니다. 애굽의 왕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모세가 바라볼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에서 무엇이 현실인지를 비교해 보면 구원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집니다. 모세는 당시 세계 최강국인 애굽의 바로를 앞에 두고도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며 가정과 직장과 시장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야만 교인이고 구원받은 자입니다.
한편 모세의 전언을 들은 바로는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본문에는 바로의 반응을 통해 이 세상을 향한 마귀의 전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나일강 삼각주의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 때 견고함을 위해 짚을 섞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벽돌을 만들 때면 애굽 사람들이 짚을 공급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전언을 들은 바로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서 노예들에게 짚을 스스로 구하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전과 똑같은 양을 만들게 했습니다.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자기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고 희생 제사를 드리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노예들이 게으름을 피우다 못해 자기를 도발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처우에 히브리 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이들은 바로에게 부당함을 호소하지만 바로는 오히려 화를 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7절을 보면 그 모습을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이러한 바로의 심리가 잘 드러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로는 모세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모세가 찾아오기 전에도 히브리인이 자기들의 신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비현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히브리인을 놓아주라고 하셨다는 모세의 말을 거짓말로 여겼습니다.
다만 히브리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있음을 사실로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제 바로는 히브리 사람들에게도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고자 합니다. 자기와 똑같이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기를 요구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이라는 신에 대해 알았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자신이 믿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반응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에게는 하나님이 비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있음을 사실로 믿었습니다. 바로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이 하나님을 비현실로 취급하여 반응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 방법이 짚을 주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수고를 가중하여 이 세상일에 대한 마음의 신경 씀을 증폭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이 세상 일에 대한 마음 씀이 증폭되면 하나님은 비현실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이론과 교리를 다 믿는다고 고백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배당을 아무리 열심히 나가도 정작 하나님 자신은 반응해야 할 필요가 없는 비현실이 되시고 맙니다. 예배당 생활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시간을 신앙생활이라고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당 조직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된다고 속이는 것이 됩니다. 예배당이 마음의 관심인 동안에 예배당 조직이 현실이 됩니다. 예배당은 어디까지나 땅에 있는 장소일 뿐이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하여 흘러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아무리 예배당에 소속을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현실이 되실 수 없습니다. 예배당은 ‘하늘로 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매특허로 갖고 있다. 예배당에 충실하면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게 하는 대신 땅에 있는 예배당의 상황을 현실로 느끼게 합니다. 예배당을 현실로 느끼면 신앙생활이 충족되고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귀의 전략은 예배당 생활만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새 대한민국이 복잡하고 시끄럽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마음 쓸 일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바로가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바로의 상태와 똑같이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세상일이 바쁠수록 강력하게 마음을 빼앗아 가고자 합니다. 세상일에 신경 쓰는 동안 하나님께 마음 드릴 겨를이 없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비현실이 되십니다.
우리는 관심의 형태로 하나님께 마음을 흘려보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은 제가 잊어버린 우표 앨범이나 콤팩트 음향기기와 같은 처지가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열정적으로 마음을 쏟아부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이 끊어집니다. 마음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마음에서 어떤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존재감 제로의 비현실이 됩니다.
세상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빼앗는 이 마귀의 전략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엄연한 사실로 있는 하나님을 마음에서 비현실로 취급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때조차도 관심은 예배 자체에 있어요. 실제로 마음을 예배에 쏟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예배를 준비할 때 부목사님들과 함께 ‘어떻게 해야 예배 의식을 매끄럽게 잘 진행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이 아닌 예배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배당 조직에 속해 회원으로 살고 있는 한, 하나님의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분량을 반드시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당이 세상일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33절에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구원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일을 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뱀이라 부르시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하나님이 아닌 이 땅에 있는 종교에 마음을 붙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지속하여 주지 않는 대상은 사실이지만 나의 현실이 아닙니다. 비현실은 나의 마음에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사건, 유럽이나 인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이지만 내 마음의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는 비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여길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지속해서 마음을 흘려보낼 수 없다면 하나님은 나의 비현실이 되십니다. 저의 우표 앨범이나 콤팩트 음향기기 같은 처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시는 분들로부터 반복해서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는 중에 하나님께 이렇게 많은 시간과 마음을 쏟아부었던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세상 생활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흘러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화요일에 모여서 말씀을 나눕니다. 그리고 수요일과 금요일에 오늘의 번제를 보며 말씀을 숙지합니다. 주일에는 오늘의 번제와 십자가 온라인 교회로 두 번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다시 화요일이 찾아옵니다. 말씀을 숙지하다 보면 도대체 뭘 하며 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씀에 매여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본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본래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세상 생활이 있고, 예배당 생활이 있고,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세상 생활을 사는 사람은 세상일을 현실로 느낍니다. 바로는 히브리 노예들이 세상일에 더욱 신경을 쓰게 해서 하나님을 비현실로 느끼게 하고자 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노역의 중압감에 마음의 관심을 빼앗기는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어도 마음을 드릴 수 없게 되어서 비현실이 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세상 생활에 관심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응을 보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또한 마귀의 전략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모이는 예배당을 만들도록 합니다. 이 땅에 있는 예배당이라는 사실에 마음의 흐름과 관심을 다 쏟게 만듭니다. 그럴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저의 우표 앨범이나 콤팩트 음향기기처럼 비현실이 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마음이 하늘로 가지 않는 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이 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 다 보내면 세상 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오셔서 사십니다. 그러나 마음의 관심을 세상 생활에 보낸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하나님은 비현실이 되십니다. 세상 생활만 현실로 느끼고 반응하는 동안 필요하다고 여겨져서 하나님을 부를 뿐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짓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세상을 현실로 붙잡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합니다. 이것이 종교가 하는 짓이고 한 단계 더 높은 마귀의 사기 전략입니다.
동서남북 교회가 힘들게 여겨진다면 옛날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말씀도 그저 듣는 것으로 끝내고 삶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로 마음을 쏟는 양을 줄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쏟는 양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 세상 삶은 하나님이 떠맡는 영역이 많아집니다. 내가 하나님께 마음을 보낼수록 하나님을 크게 현실로 느끼게 되고, 삶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많이 내려오셔서 세상 생활이 살아지는 것입니다. 세상 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마귀의 전략에 빠져서 세상 생활에 마음을 흘려보낸다면 세상은 현실이 되고 하나님은 비현실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당에 대해서도 마귀의 전략에 빠져서 예배당이 현실이 될 때 하나님은 비현실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마귀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일반인들로 하여금 세상 생활에 마음을 보내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비현실이 되게 하는 전략,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예배당 종교조직에 관심을 두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비현실이 되게 하는 전략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귀의 전략에 맞서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 전략이 동서남북 교회 외엔 없다고 믿습니다. 바로를 통해 드러난 마귀의 전략은 세상 것을 강한 현실로 느끼게 하고, 예배당 조직을 강한 현실로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든 예배당 조직이든 땅에 있는 것임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을 강한 현실감으로 느끼고 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비현실로 느끼게 하는 마귀의 전략에 맞서는 영역은 지구상에서 동서남북 교회 외엔 없습니다.
동서남북 교회에서는 예배당 조직에 속해서 예배당 조직의 운영과 활성화를 위해 애쓰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삶의 현장에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십자가 생활화의 활성화를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실감을 증폭시킬 수 있을까를 함께 의논하고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이 시간만이 마귀의 전략에 맞서는 시간입니다.
최근에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는 분과 대화를 했습니다. 친척 장로님이 방문하셔서 댁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도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시는 분이신데, 설교 한 편을 발표하시기 위해서 A4 용지 7~8페이지를 손으로 쓰고 계시더랍니다. 일주일에 네 편의 설교를 그렇게 준비하신다고 합니다. 건축일을 하시던 분이신데 건축하실 때의 꼼꼼함을 발휘해서 매설교마다 손으로 써가면서 요약하고, 연습하고, 발표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세상 생활은 내 마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십니다. 마귀의 전략에 맞서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보냄으로써 오늘 하루 하나님의 현실감이 내 삶보다 더 강력하게 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실감이 증폭됨을 통하여 여러분이 참여한 동서남북 교회가 점점 십자가 생활화로 활성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당부드리는 것은 아직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지 못하고 계신 분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상황을 만들어 주신다면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마귀의 전략에 맞설 수 있는 당당한 신앙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만이 내 마음에서 유일한 현실로 느껴질 수 있도록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세상으로 흘러가는 내 모든 관심을 죽이고 끊고 뿌리를 뽑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