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크리스천문화예술원
 
 
 
카페 게시글
세미나& 강좌 스크랩 코끼리가 본 클래식 음악 1: 독일 코랄음악
비파와수금 추천 0 조회 76 16.04.24 18: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독일 신교음악 코랄의 대략적 사항을 쓰기 전에 밝혀두는 사항

코랄(Choral)음악이라면 한국인들에게는 흔히 찬송가로 통합 된 총체의 장르인 양 알려져 있지만 이 자리에서는 종교개혁 이 후 독일에서 루터의 개혁에 의한 신교의 확산과 함께 발달해 오면서 오늘까지 이르른 찬양음악인 코랄의 기원과 발전사,그리고 루터를 시작으로 한 독일 코랄 음악의 발전에 공헌한 음악가들을 살피면서 적어 나갈 것 이다.

종교개혁은 유럽역사에서 큰 변혁을 일으킨 사건인 만큼 음악역사는 물론 교회음악 발전사에도 직접 영향을 주었다. 크리스트교는 이미 동, 서 두 갈래의 파로 갈라져 서유럽의 여러나라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로 통일되었으며 이 교파에서는 용어도 라틴어로만 드리면서 예식의 양식도 교황의 허락 없이는 변경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로마 카톨릭에 속해 있는 교회음악과 예배의식의 성가까지도 마음대로 더하거나 삭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종교개혁의 움직임인 신교의 확산에 반대하는 카톨릭의 전통을 고수하는 반 종교 개혁가 사이에도 반성운동은 있었지만 모든 제도가 그대로 계승되어 카톨릭의 정신은 여전히 입지를 굳히고 있다. 1500년대 독일을 기점으로 서유렵의 각 처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카톨릭의 본 고장인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남부 독일등지 에서는 중세시대부터 계승되어온 카톨릭 음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신교인 프로테스탄트역시 세 갈래로 나누어져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과 또 다른 교파인 제 3의 교회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어, 카톨릭 교회의 의전과 행정적 개혁, 그리고 부패를 없에려 하였고,동시에 교회를 통하여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닌 직접 신을 만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찿으려는 움직임으로 드러나 종교 개혁가들을 선두로 예배의식에서 라틴어 만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필연적으로 각 국가의 신교 교회에서는 그들의 언어를사용하는 예배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를 선두로 해서 루터교와 감리교의 코랄이, 프랑스, 스위스, 네델란드의 쯔빙리, 칼빈을 선두로 오로지 성경에 명시된 것만을 음악으로 성경의 시편 가사만을 부르는 쌀터(Psalter), 장로교의 ‘시편가’가, 영국의 헨리 8세와 탈리스, 버드, 기븐스와 같은 성공회 음악의 큰 공헌을 한 음악가들에 의해 라틴어 모테트에서 영어 모테트로 독립한 장르라 할 수 있는 안템(Anthem)이 발전 했는데 다음 장에서는 종교개혁과 마르틴 루터의, 그리고 그의 이상을 펼치는데 보탬이 되었던 음악가 동지들의 노고의 결과인 독일 의 신교 음악 코랄만을 중점적으로 발전사와 주요 음악가와 작품들을 살펴 나가도록 하겠다.  








2.독일 신교음악 코랄의 기원

마르틴 루터와 그의 주도 하에 융성하기 시작한 코랄을 살펴 보기 전 이 전부터 독일 민중들 사이에서 애창되고 불리워 지고 있던 전신 음악과 이의 배경을 먼저 살펴 보고자 한다. 중세를 통하여 독일의 다성음악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뒤쳐진 상태 였으므로 단성 세속노래인 마이스터 징어는 16세기 동안에도 독일도시와 네델란드에서도 성행하였다. 1530년경에 와서야 네델란드 작곡가들의 다성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독일에서는 15세기 까지에도 아직 일류 수준의 작곡가가 한 사람도 배출되지 못 했지만 15세기 후반부터 16세가 초에 걸쳐 독일에서도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독일 적인 양식이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도 부유한 상인들의 수가 증가하고 그들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다성리트(Lied)가 생기게 되었다. 독일 선율과 네델란드 다성음악 기법을 잘 조화시켜 작곡된 이 리트들은 주선율이 테너에 놓이므로 <테노르 리트>(Tenorlied)라고도 하는데 하인리히 핑크(Heinrich Finck 1445경-1527)와 하인리히 이사악(Heinrich Isaac.1450경-1517)이 초기의 리트 작곡기들이다. 이사악의 제자인 루드비히 젠플(Ludwig Senfl, 1486경-1543)에 이르러서 리트는 그 예술의 절정에 이르며 그의 곡들은 가사가 독일어라는 점만 제외하면 가장 아름다운 네델란드기법의 모테트와 같다. 16세기 초반에는 많은 다성리트 모음집들이 출판되었는데 이들은 가정이나 모임에서 연주될 음악이었던 것 같으며 악보에는 모든 성부에 가사가 붙어 있지만 악기와 인성을 자유로이 섞을 수 있다는 지시가 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독일인들의 흥미가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이나 빌라넬라로 기울어 지면서 리트는 쇠퇴하게 되지만 이들은 독일 신교음악인 코랄의 음악적인 원천이 된다.



3.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의 교회음악

북유럽의 종교개혁은 독일의 작센 주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종교개혁의 중심인물인 마르틴 루터는 작센 주 아이슬레벤의 광부의 아들로서 이 개혁을 옹호한 사람은 작센주의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Friedrich)였다. 원래 농부였다가 광부로 직업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가난했던 가정에서 태어난 루터였지만 그는 향학심에 불타서 마그데부르크와 아이제나흐에서 어린시절부터 교구의 소년 성가대에 가입하여 음악교육을 받았고, 계절이 오면 길거리를 걸으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결국 이러한 그의 모습을 눈여겨 본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고타 부인이 그에게 학비를 줌으로서 1501년 여름 당시 유럽에서 제일 유명한 에르푸르트(Erfurt)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1505년 1월에는그 대학의 17명 중 두 번째로 석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이런 그에게 부친은 법률을 전공하도록 권유 했지만 같은해 7월 2일 만스펠트에서 에르푸르트로 가는 도중 슈토데하임 부근에서 폭우를 만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친구 한 사람이 목숨을 잃게되자 죽음의 공포와 두려운 심판주의 환상을 보고 그 자리에서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결국 부친에게 그의 뜻을 전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원의 도서관에 있는 성서를 연구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사도의 신앙을 직접 이해 하기까지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었다. 그가 존경하는 신앙과 사상의 선배인 에르푸르트 대학의 학장을 지냈던 슈토피처의 추천에 의하여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 문학부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신학을 연구했다.그 후 로마로 가서 수도원들의 타락을 목격하고 크게 실망을 하여 머지안아 루터 그의 마음 속에 종교개혁의 핵심이 될 복음-바울의 서신 로마서의 구절‘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이 성구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그가 수도원 예배당에서 확신에 찬 라틴어의 설교는 항상 초만원을 이루었고 대학에서의 성서강의는 학생들에게 감명을 주었으며 비텐베르크시 교회에서의 설교는 독일어로 했기 때문에 놀라운 감동을 주었다고 전한다. 1515년 로마 교황 레오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기금을 얻기위해 죄를 없에 주는 표 격인 속죄권 즉 ’면죄부‘를 발행하였지만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속죄권 판매인 테젤(Tetzel)이 작센 주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1517년 국외에서는 작센 민중들을 유혹하였고, 이 때 루터는 이 면죄부가 종교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 끝에 그 해 10월 31일에 “속죄권의 효력을 밝히는 논의”라는 제목으로 95개 조문으로 작성한 라틴어의 토의 제목을 그 당시의 관례에 따라 비텐베르크성 교회의 정문에 계시했다. 결국 이로 인해 그의 논의 글로 인해 도화선이 되어 2주도 못되어 독일 전체에 영향을 미치다가 한 달만에 온 유럽에 파급되어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 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이 조항들은 토론하려는 의도로서 종교개혁을 의도하고 이를 붙인것이 루터의 의도가 아니었지만 결국 이것은 카톨릭 교회의 분열의 효시가 된 것이었다. 루터는 카톨릭 교회가 제정한 라틴어의 성서보다는 독일 국민들에게 성서의 보급률을 높혀 더 많은 독일인들이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작센 제후의 성안에 있는 한 방에 들어가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1534년 번역에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착수한 작업은 두 명의 동지와 함께 <독일 찬송가집>을 153년에 발표한 것이었다.   루터는 음악을 무척 사랑했고 그 자신이 좋은 테너 음성의 소지자였으며 플룻과 류트를 연주할수 있었을 뿐만아니라 음악이론과 작곡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음악은 신이 주신 선물로 신학 다음으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사상은 16세기 루터교회의 음악에 반영되었다.

“하나님의 말씀말고, 찬양받을 만한 것을 들라면 오직 음악 뿐 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고 또한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을 주고 기뻐하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오만한 사람을 겸손케하며  연인을 진정시키며, 증오에 찬 사람을 달래고자 할 때 음악보다 효과적인 것이 과연 어디 있을까?”

-마르틴 루터<음악에 대한 찬사>(1583년)  

이처럼 음악에 적극적인 호감을 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루터는 음악은 신이 주신 선물로 신학 다음으로 생각하였으며음악분야에서 루터의 활동은 ‘노래하는 것은 두 배로 기도하는 것’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따랐다. 음악은 루터에게 마르지 않는 영적인 샘이자 하나님과의 확실한 매개체였던 만큼 이러한 그의 사상은 16세기 루터교회의 음악에 반영되어 신교의 분리가 이루어진 후에도 루터 교회에서는 라틴어를 포함한 재래의 카톨릭 교회의전을 많이 유지하였으며 음악에 있어서도 새로 작곡한 음악과 함께 종래의 카톨릭 음악이 그대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 가사는 라틴어 가사를 그대로 부르거나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로 번역하여 불렀고 아니면 독일어로 아주 새로운 가사를 붙여서 노래를 불렀다.

루터가 1523년에 출판한 독일 신교 최초의 찬송가집인 <독일 찬송가집(Choral)>은8곡 이었는데 그 중 4 곡은 루터가 작시한 것이고 3곡은 그의 동지인 파울 스페라토스의 것이고 니머지 한 편은 작자 불명이었다. 다음해인 1524년에 출간된 일반인을 위한 최초의 체계적인 예배용 성가집은 43곡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 중 독일어로 된 23 곡은 마르틴 루터의 것이었다. 또한 그 외에도 코랄<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비롯한 13곡의 다른 노래들도 있었다.루터가 작곡한 36곡의 코랄은 16~17세기의 모든 예배용 성가집의 근간이 되었다.비텐베르크에서 발표한 루터의 유명한 1517년의 의견서 이상으로 코랄은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프로테스탄트식 삶의 일부가 되었다. 코랄은 민요에 기원을 두고있으며 그것의 멜로디는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서 한 예로 코랄<임하소서, 광야의 구세주여>는 성 암브로시안 성가<오소서, 진정한 창조주여>의 가사를 독일어로 바꾸었고 멜로디 자체도 차용한 것이다. 일반 신도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던 독일 가곡 리트가 세로운 종교의식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채 루터는 이를 자신의 예배에 도입했다. 프로테스탄트 예식의 기둥 역할을 하는 이러한 종교음악은 17세기 독일음악의 확고한 발판이되었으며 바흐에 힘입어 고전주의로 가는 길을 열기에 이르렀다. 아른슈타트 시대의 바흐는 평생을 간직할 음악형식인 코랄을 탐구했으며 이는 그의 작품세계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음악적 출발점인 신도들의 집회용 찬가나 <푸가의 기법>같은 가장 난해한 작품들에서도 코랄은 항상 등장하며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음악의 구현으로 그의 음악적 길잡이가 되었다.

루터는 같이 종교개혁에 협력한 음악가 발터(Johann Walter,1496-1570)의 <작은 종교노래책 Geystliches gesangk Buchleyn)>의 서문에서 “나는 그리스도 교리 때문에 모든 예술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모든 예술, 특히 음악이 그것을 창조하신 신에 대한 예배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던 만큼 그의 기악음악에 대한 생각 역시 그의 1526년에 발간한 <독일 미사(Deutsche Messe)> 서문에서 “언제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될 때에는 모든 종과 오르간을 울릴 것이며 무엇이든지 소리나는 것은 사용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는 음악이 교육적으로 유익하며 윤리적인 힘이 있다고 믿어서 합창학교를 권장하였고, 예배에서 회중도 노래부를 것을 주장하여 젠플과 발터를 포함한 당시의 작곡가들의 도움을 얻어 회중이 부를 노래를 작곡하기도 하였다.앞에서도 말했듯 라틴어 가사를 가진 미사와 모테트도 계속 신교에배에 사용되어 바흐시대의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몇 고세서는 18세기 까지도 에배음악의 일부를 라틴어로 불렀다. 이 가운데서 상당히 길고 복잡했던 괴거의 미사를 짧고 간단하게 했으며, 그 중에서도 독일어의 성서를 낭독하고, 장려하고자 다음과 같은 형식을 만들었다.

1)회중 찬송가, 코랄이나 독일어 시편

2)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3)집도문(集禱文)

4)서한(書翰)=편지

5)공중 찬송가

6)복음서

7)독일어 신경과 설교

8)주기도문과 성경에 앞서 권면

9)교훈과 떡을 드리는 것 

10)떡을 나누는 것

11)독일어의 ‘성송’ 혹은 “우리들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독일어로 부름

12)포도주를 나눈다

13)하나님의 어린양, 독일어 찬송가(코랄) 혹은 독일어 성송

14)감사의 충성기도

15)축도


신앙의 아버지 루터파의 코랄은 독일교회 음악의 원천이고 저기서 수난곡, 칸타타, 오라토리오가 한없이 흘러 나와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게 한 것이다. 그리고 코랄은 주일마다 독일의 각도시에서 방방곡곡의 교회에서 지금도 변함없이 단순한 신앙의 노래가 거의 원곡 그대로의 소박한 모습으로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제창되면서 신교의 본고장으로서의 위상을 드 높이고 있다. 



4.코랄의 발전과 유형들: 1

루터와 친구들의 음악적인 공헌은 음도 고정화음의 진행에 의해 다음에 오는 고전음악과 화성진행의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는 성부가 대위법적인 진행을 시도하는 복선율 음악이 오로지 추구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코랄은 독일 대중이 감정을 노래하며 얼마 안되어 10만 곡에 이르는 독일의 코랄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루터의 동지 요한 발터를 효시로 독일의 옛 민요나 성가의 선율이 편곡되어 부르게 되었고, 대부분이 코랄로서 부르게 되었다. 루터음악의 핵심으로서 코랄(Choral 영어로는 Chorale) 은 교회노래(Kirchenlied)라고도 하고 현대 용어로는 찬송가라고도 한다. 원래 코랄은 원래 가사와 하나의 선율만으로도 이루어진 독일 찬미가로 반주없이 불렀으므로 이것은 중세의 단성성가 Chant에 비견된다. 중세 이후의 구교음악이 단성성가에서 발전된 것과 마찬가지로 17,18세기 루터교회의 음악도 이 코랄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코랄은 초기 루터교회에서 회중이 부르기 위한 것으로 대부분 유절 형식이며 일부는 새로 작곡된 선율이고 또 일부는 성가, 비 의전적인 노래 세속노래 또는 민속노래의선율에 종교적인 내용의 독일어 가사를 붙인 것으로서 이렇게 빌려온 선율에 가사만 바꾸는 것을 콘트라팍툼 이라(contrafactum 복수는 contrafacta) 한다. 그 당시 루터교회에서는 회중이 부를 코랄이 많이 필요하였으므로 새로 작곡하기도 했지만 많은 곡을 콘트라팍툼으로 만들어 작곡하였다.그런 만큼 루터의 대표작 <내 주는 강한 성이요>도 슈바이처와 같은 연구자들에 의하면 본래 멜로디가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하며 바흐가 <마태 수난곡>과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중에서 반복한 <오 거룩하신 주님(찬송가 145장)>의 코랄선율 같은 것 역시 힌스 하슬러(Hans Leo Hassler,1562-1612)의 <연애의 번민>의 노래에서 따 온 것이다. 그리고 독일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온 <그렇다면 인스부르크여>라는 민요도 하인리히 이사악이 4성의 화음을 붙여 널리 전파한 것을 루터파 목사이고 시인이었던 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1653-?)의 <산천도 초목도 잠에 빠졌다>의 시에 붙여 코랄이 되었다. 하슬러의 선율에는 여러 가지로 독일어의 시가 삽입되어 지금도 널리 독일 국민들에 의해 코랄로 불리어 지고 있다. 또한 개혁당시 및 직후에 나온 코랄은 순박하고 힘차며, 바흐도 자신이작곡한 30여 곡의 코랄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중에게 잘 알려진 옛 코랄을 많이 사용했다. 예를 들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바흐의 <교회 칸타타>작품 80의 주제로 썼고, 마이어베어는 오페라 <위그노 교도>에서 썼으며 멘델스존은 <종교개혁>교향곡에서 바그너는 <황제 행진곡>에서 루터의 곡을 주제로 사용했다.이러한 코랄은 음악적으로는 단순한 구성이지만 그 선율진행에 있어서는 심각한 독일민족의 신앙과 고뇌, 환희, 그리고 평화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많은 예술의 원천이 되었다. 루터가 쓴 독일어 성가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1)라틴어에서 번역한 것: 여기서는 라틴어 찬송가, 라틴어 응답가, 부분적으로 라틴어였던 개혁전의 찬송가 번역이 포함되어 있다.


2)개혁 전에 일반에게 알려졌던 찬송가의 확대 개편


3)시편의 음문화, 예를 들면<내 주는 강한 성이요>(시편46편)와 같은 것


4)성서의 다른 구절의 음문화


5)대부분 창작된 것


바흐의 <부활절 칸타타>No.4의 테마로 되어있는 <그리스도는 죽음의 쇠사슬에 얽매셨네>는 루터가 자신의 사랑하는 막내아들 한스를 위해 쓴 것으로 크리스마스의 코랄<어느 집에도>가 여기 포함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 중에서 약 절반은 아직도 독일에서 많이 애창되고 있으며 특히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독일 국민들의 애국가처럼 불리워 지고있다.


5.코랄의 발전과 유형들 : 2

다성 코랄의 등장

루터교회의 작곡가들은 일찍부터 합창대를 위하여 다성코랄을 작곡하여 여기에 수록된 곡들은 다양한 종류의 다성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양식들을 보면, 첫째로 독일 리트에서와 같이 코랄선율이 정선율로 취급되어 긴 음표로 테너에 놓이고 3개 이상의 다른 성부들이 모방이 아닌 독립된 모티브로 자유롭게 감싸거나, 둘째로 네델란드 모테트와 같이 코랄의 각 악구가 모든 성부에서 모방적으로 발전되고, 셋째로 코랄선율이 테너에 놓이고 다른 성부들은 수직화성적 짜임새에 가까운 대위선율로 이루어 지며, 넷째로 코랄선율이 제일 윗성부에 놓이고모든 성부가 수직화성적 짜임새로 되어있다. 코랄이란 장르는 이제 단선율 성가가 아니고 루터가 말한 것처럼 4성부로 쓰여졌지만처음에는 테너성부에 선율부가있고 회중은 제창하며 3성부는 중세로부터 시작된 소년들로 주축이 된 성가대가 부르게 함으로서 이 같은 개청운동과 소년합창단의 제도는 기독교음악을 보편화 시켰을 뿐 아니라 독일국민을 세계 제일의 노래하는 민족으로 키우게 된 것이다. 16세기가 경과함에 따라 점차로 윗성부에주선율이 놓이는 양식이 우세해져서 마침내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코랄은 대부분 모든 성부가 수직화성적 짜임새이고 찬미가풍으로 단순한 리듬이며 주선율이 윗성부에 놓이는 칸티오날(Kantionale)양식으로 작곡된다. 코랄은 16세기에는 무반주로 불렀던 것으로 추측되며 17세기에 들어서부터는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회중이 제일 윗 성부를 부르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코랄 모테트

단성성가가 중세 모테트의 원천이 되었던 것처럼 코랄선율은 신교 작곡가들의 코랄 모테트(Choral motet)의 원천이 되었는데 이 발전과정은 중세 모테트의 발전과 유사한 경로를 거치게 되어 2성 혹은 3성 코랄 모테트는 중세의 모테트에서와 같이 코랄선율이 최저성부인 테노르에 놓이고 다른 대위선율들이 첨가되었다. 이는 중세의 작곡가들이 성가를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나 해석을 첨가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코랄의 가사와 선율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의도였다.그러다가 16세기 말에 이르면 이러한 태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여 15세기 종교음악 작곡가들이 했던 것처럼코랄선율을 자유로운 예술창작의 재료로 사용하고 여기에 예술가들의 해석을 첨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코랄선율이 모든 성부에서 모방적으로 다루어 지거나 또는 이 선율을 한 성부에 놓고 다른 성부들이 모방 대위적으로 진행되는 코랄 모테트를 작곡하게 된 것이다. 코랄 모테트의 출현으로 신교의 교회음악은 회중이 부르는 단순한 칸티오날 양식의 찬송가와 전문적인 합창단이 부르는 장식적인 음악으로 구분이 확연해 지게 되었으며 한스 레오 하슬러와 미하엘 프라에토리우스등이 대표적인 코랄 모테트 작곡가들로 이들에 의해서 확립된 독일 신교음악양식은 바흐에 이르러그 절정에 달하며 향후 200년간 독일음악의 원천이 되었다.


 

6.바로크 시대 코랄음악의 발전과 변형

바로크 시대의 특징이 ‘극단적 대비’로 요약할 수 있는 만큼 성강의 비중에 비해 비중이 적고 무시받앗던 장르인 기악음악이 점차 동등하게 부상하기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기악음악인‘소나타’와 성악음악인 ‘칸타타’의 분화가 확연해 진 것과 더불어 기악음악을 성악음악에 비해 달가워 하지않았던 교회에서도 점차 기악음악인 오르간과 다른 현악기들의 사용 빈도를 높이게 되어 이런 환경 안에서 루터 교회의 코랄 역시 기악음악의 장르로도 발전하게 되었다.


바로크 시대 독일 루터 교회의 음악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독일의 북부지방에서는 코랄을 예배음악으로 쓰는 전통을 이어왔지만, 바로크 시대의 새로운 악풍이었던 모노디 양식과 콘체르타토 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헤르만 샤인(Hermann Schein 1586-1639)에 의해 출판된 <신 이탈리아 방식에 의한 종교적 콘체르토(1618-26)>는 제목 그대로 이탈리아 방식을 따라서 코랄가사나 선율을 활용한 작품으로 1-2개의 악기와 계속저음을 사용하는 독창, 이중창의 단악장들을 모은 것이다. 계속저음 앞에서 상성부는 자유롭게 진행하는데 대위적 다성음악과 화성짜임새가 대비 되고 또 가사음절의 단음적 처리와 멜리스마 처리의 대비도 가사의 내용에 따라 사용되었다. 작곡자가 곧 설교자로 인식되는 당시 루터교회에서 이러한 언어의 강조는  당연한 것이었다.

샤인 이후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콘체르토가 성경과 코랄, 비 성서적 유절 형식의 찬송가의 가사를 담은 독창아리아나 합창곡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하인리히 쉿츠(Heinrich Schütz  1585-1672)는 17세기 중엽에 가장 nleo했던 독일 작곡가로 콘체르타토의 원리를 창안한 가브리엘리의 애제자였고, 국제적 명성을 가진 첫 독일 작곡가였다.그의 작품은 500여공의 종교음악이 현존하며 그의 독일어 모테트는 <작은 종교적 콘체르토(Kleine geistliche Konzerte)>러 출판 되었고, 세 개의 연곡 <종교적 심포니(1629,1648,1650)로도 출판되었다. 이 작품들은 소수의 성부와 계속저음의 짜임새인데 기악성부를 다양하게 배치하여 극적 요소를 갖는 부분들도 이루어진 것도 있고 경건한 명상과 교훈의 내용을 합창이 끝에 오기도 한다.



ꊲ 오르간 음악으로서의 코랄의 발전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기에 작곡가들은 코랄을 여러 작품의 기초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한 작품들은 루터교회의 예배와 관련된 기능적인 오르간 곡들로, <코랄푸가(Choral fuga)>, <코랄 프렐류드(Choral prelude)>, <코랄 파르티타(Choral partita)>,<코랄 판타지아(Choral fantasia)>들이다. 코랄푸가는 짧은 곡으로 코랄의 첫 악구를 푸가의 주제로 사용하는 작품으로서 루터교회 의식에서 이 작품은 회중 찬미가를 부르기 위한 전주로 연주되었다. 코랄 프렐류드도 역시 회중 찬미가의 전주로 연주되었는데 코랄선율 자체를 다성부의 대위적 처리를 한 작품이다. 코랄선율은 상성부에 긴 음가로 그대로 나타나기도 하고 장식되기도 한다. 코랄 판타지아는 코랄선율은 주제전율로 한 변주곡 모음이다. 루터교회에서 이 코랄 파르티타가 가진 기능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가대의 참석이 여의치 않았을때 주로 연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코랄 판타지아는 코랄선율을 자유롭게 발전시킨 작품인데 각 악구들이 여러번 나타나 각기 다르게 전개된다. 이 작품은 예배적 기능을 갖지는 않았으나 많은 청중이 모였던 뤼벡의 저녁음악회(Lübeck Abendmusik)에서 연주되었다.


7.루터파의 교회 음악가들

르네상스 말기인 종교개햑 이후로 바로크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르는 코랄 음악세계의 변천과 발전을 지금까지 대략적으로 살펴 온 만큼 이제 그 코랄 음악을 일구고 확립시키는데 각자의 노고를 쏟아부어 공헌하였던 코랄 주요 음악가,작시자들에 대한 사항들을 간단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루터의 음악 협력자였던 요한 발터는 코랄을 작곡하고 편곡해서 개혁운동에 협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작센의 궁정음악가 로서 많은 독일어의 합창 모테트를 썼다.이 합창집은 1524년에 비텐베르크에서 출판되었다. 종교적 합창곡은 3성-5성의 성가 합창집으로서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합창곡집이다. 발터의 작곡전집은 3권인데, 오트 슈레터와 막스 슈나이더 (Max schneider, 1875-1967)의 공동편집으로 1953년부터 1955년에 걸쳐서 카셀에서 출판되었다. 작품중에는 루터의 부인이 어린이들을 위해 쓴 성서가 있는데 이것은 어린이를 위해 쓴 찬송가로서의 첫 시도였다. 발터는 1554년에 튀링엔 주의 고향 토르가우에 돌아와 연금으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에만은 그를 가리켜 신교교회 최초의 거장이라고 했는데, 그의 성배로서 모국어인 독일어 가사에 의해 코랄뿐만 아니라 합창모테트와 수난곡을 썼고, 자신의 신앙노래인 코랄을 테마로해서 오르간 전주곡(Prelude)과 환상곡을 계속해서 썼다. 코랄 전주곡(Prelude)은 소년성가대 대신 오르간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에 코랄을 위한 전주곡이었지만 나중에는 독립된 전주곡으로 되었다.

이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작곡가들은 주로 북독일에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바흐의 할아버지인 한스 바흐(Hans Bach,1604-1678)와 그의 아들 파이트 바흐(Veit Bach,1619-?)가 있고 그밖에 일족이 얼마나 독일교회에 공헌을 했는가는 대전 속에 독일에서 바흐 250년제를 기념으로 하여 출판한 바흐 조상 문고(1935년판)제2권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어느 것이나 숫자같은 것이 붙어있고 현악을 중심으로 한 관현악과 복합창의 것이 많으며 가사는 독일어로 되어있다.  루터나 발터의 후계자인 신교 음악가 중에는 특히 특출한 재능이 있는 요한 에카르트(Johannes Eccard,1553-1611)가 있다. 그는 아우구스부르크, 카에니스부르크, 베를린 궁정에서 악장을 지낸바 있으며 1574년 이후 많은 성가합창곡을 쓴 바 있다. 그 작품은 당대의 유일한 창조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연주되는 대표작으로서는 무반주 복합창의 <크리스마스 모테트>가 있다. 그리고 <아 이에 더 할수 없는 기쁨>같은 무반주 5부합창과 코랄을 주제로 한 모테트<귀여움을 받을 어린양>이 있으며 즐거운 분위기의 마드리갈 <한스와 그레첸>이 있다.

또한 바톨로마우스 게지우스(Batholomaus Gesius, 1569-1623)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처음에 신학을 공부하였지만 후에는 프랑크푸르트의 안 델 오델교회의 악장이 되어 많은 합창곡을 썼는데 그 중에는 모테트, 시편가(Psalm),미사,축제노래들이 있고 코랄을 주제로 한 단순한 성가합창곡들도 있다. 그의 대표작은 <성 요한의 수난곡>과 지금도 부르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양한다>사 있으며 이외에도 게지우스의 작품에는 초기 루터파 예배에 사용된 여러 가지음악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코랄에 4성과 5성을 붙인 것이 많다.

종교개혁 초기에 최대의 음악 이론가이고 작곡가였던 미하엘 프라에토리우스는 목사가정에서 자라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오르간을 배웠으며 35년간 볼펜뷔텔의 궁정악장으로 지냈고, 50세에 세상을 떠났다.그의 놀랄만한 작품량의 대부분은 신교 코랄을 바탕으로 한 교회음악으로서 당시의 이탈리아 적곡가를 연상시킬 만큼의 대위법적 기술을 보이고 있다. 4성에서 12성부의 합창곡이 있으며 성가곡, 세속곡의 작품들도 있고, 그의 무반주 합창곡의 대표작들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여 주님은 태양이요 빛이라>

<이새의 뿌리에서(찬송가106장)>

<모든 이방인들이여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주기도문)


위의 곡들은 어느 곡이나 4성 코랄로 되어있으며 모범적인 화성결합으로 되어있다. 또한 그의 저서인 <Syntagama Musikum.은 3권으로 구성된 당시 음악이론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문헌이다. 루터 이 후 독일은 대체로 신구(新舊) 양 교회가 같은 세력으로 오늘날 까지 이르고 있는만큼 결과적으로 신교회의 코랄작가가 늘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은 개혁파 목사 니콜라이(Philip Nicolai,1556-1608)이다. 드는 비할 수 없는 아름답고 맑은 코랄을 작곡했다. 니콜라이 목사가 작곡한 <동이 터 온다Wake Awake for Night is Flying>이라는 곡은 베스트팔렌 지방에 부서운 질병이 번져 고통을 당했을 때 쓴 신앙의 노래이며  이 코랄은 ‘코랄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이 밖에 한 곡이 더 있는데 이 곡은 <야곱의 자손 광명한 새벽별>인데 오르간 주자인 요한 크류겔(1630)에 의해 안서된 감상의 코랄이다. 멘델스존에 의해 칸타타 가운데에서 사용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번에는 찬송가 작시자들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먼저 게오르그 바이셀(Georg Weissel,1590-1635)은 프러시아의 학자이며 교사,목사인 사람으로 20여편의 찬송시를 작시했다. 그의 유명한 시를 소개하면 <영원한 문아 열려라(찬송가 107장)>기 있으며 시편24편을 주제로 한 가사이다.

그리고 마르틴 링카르트(Martin Rinkart,1586-1649)는 목사로서 어린시절에 독일의 유명한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의 소년 성가대원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라이프치히 대학을 졸업한 후 교장직에 있었고, 그 후 지구교회의 가수로 있었으며, 집사 그 다음에는 목사가 되었다. 30년 전쟁으로 인하여 그 시내에 전염병이 돌아 하루에 3~40명의 장례식을 치러야만 했는데 나중에는 사망자가 너무도 많아 링카르트 목사의 아내를 포함하여 6,000여명의 사망자를 장례도 못 치르고 매장을 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목회에 힘써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링카르트 목사의 대표작은 <다 감사드리세(찬송가 20장)>가 있다. 그리고 루터에 이어 가장 고명한 찬송가 시인은  독일의 화려함을 노래한 파울 게르하르트(1607-1605)이다. 그는 작센 주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아버지는 시장직에 있었고 30년 전쟁의 화마와 위협 속에서 시장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면불휴의 모든 책임을 완수해야 했다.전쟁으로 전염병과 기아飢餓가 최악의 지경에 이르렀을때 밤이 되면 적군을 격퇴하자는 종소리가 울려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고, 상점은 페쇄되고, 학교도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사상자, 전염병,재해 이러한 것들은 게라르트 그에게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는 그러는 와중에도 집에서 많은 찬송시를 썼으며 40세가 되는 해에 베를린의 변호사인 베르드로의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변호사의 딸인 안나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가정사정의 문제로 결혼은 여러번에 걸쳐 미루어 졌으며 그 후 얼마 안되어 목사가 되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46세 때 게르하르트는 숲 속의 작은 오막살니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이 동안에 그는 지금까지 쓴 찬송시를 출판하였고, 이 중에는 <밤이 되면 조용할 때>와 <천사 노래 가까이에서> 등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다음으로는 폰 칸니츠(Von Canniz,1654-1699)로서 그는 별로 어려운 일 없이 두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다. 황제로부터 남작의 작위까지 받았던 그는 영적인 눈이 열리어 복음사업에 힘썼고, 시편 24편의 찬송시를 작시했는데 대표작은<영혼이여 너의 잠을 깨어라>가 잘 알려져있다.

그리고 35년간 쉴레 시에서 어려운 목회 활동을 하며 30년 전쟁으로 두 아들을 잃은 독일의 루터교회 목사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molk,1672-1731)는 찬송 작곡가로서 900편에 이르는 찬송가와 칸타타를 썼으며  두 아들이 살해당한 걸 보고 절망한 이 후에도  처절한절망을 체험한 자신의 고백을 훌륭한 찬송시로 만들어 마침내 <내 주여 뜻대로(찬송가431장)>로 나오게 되었다. 이 곡은 홀브록(Joseph P. Holbrook,1822-1888)이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의 주제에 찬송시를 붙인 것이다.


8.코랄의 발전상과 대략적인 세부적 사항들

지금까지 현대 교회에서도 불리워 지고 이어지고 애송되는 음악 코랄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그 작시자들과 작곡가들의 사항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코랄의 형삭들 역시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하고 화려함이 더해진 형식으로 분화되어 발전해 갔고, 이런 발전의 배후에는 당시 독일의 전쟁과 낙후된 환경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적 열정을 통한 신앙심의 발로를 표현하고 나누고자했던 인재들의 분투와 활약으로 인해 독일이 이탈리아와는 다른 성악강국이자 음악대국으로 발판을 다지게 되었는지고 감지 할 수 있었을 것 이다.







*참고문헌*

•<바흐 - 천상의 선율>_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폴 뒤 부셰Paule Du Bouchet 저, 권재우 옮김

(초판 1쇄 발행 1996년 5월 3일; 초판 9쇄 발행 2005년 1월 31일)


•<서양교회 음악사>_신아사; 篳川主一 저, 장대덕 옮김

(1999년 12월 초판; 1999년 12월 30일 1쇄)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본문 1(개정증보판) _심설당; 김문자, 노영해, 박미경, 이석원, 허영한(음악학 연구소 총서 201)

(1993년 2월 27일 초판인쇄; 2005년 2월 14일 중판인쇄)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