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29년(1303) 계묘에 출생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4년(1317) 정사에 과거에 급제하여 충숙왕 7년(1320)에 우상시(右常侍)에 재수되었으며 국자시(國子試)의 시관(試官)이 되어 정종보(鄭宗輔)등을 선발하였다.
그해 왕이 정방(政房)을 설치하여 대언(代言) 안규(安珪)와 공에게 전주(銓注)를 맡아보게 하였다. 충숙왕 8년(1321) 10월에 밀직부사로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2월에 공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어 중국에 가는 사신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충숙왕이 참소를 당하여 원나라에 불려가 있을 때 충절을 다하여 보좌하므로서 충숙왕 11년(1324) 본조제신에게 포상을 할 때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으로 그해 5월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재수 받았으며 충숙왕 12년 을축에 왕이 본국에 돌아와 교문(敎文)을 내리어 순창군(淳昌君)에 봉작하고 충숙왕 14년(1329) 정묘에 2등 공신을 제수하고 전답과 노복을 하사하여 부모처자에게도 차등 있게 작록을 주었다.
이듬해(1328) 4월에 찬성사로 임명 되였으며 전주(銓注)에 참여하였다 공께서는 충혜왕 집권기간(1330년-1332년)에는 찬성사(贊成事)에서 물러났던 것 같으며 그후 충숙왕이 다시 복위하자 복위원년(1332년) 2월에 다시 찬성사로 임명되어 정동성사(征東省事)를 섭행(攝行)하였다.
충숙왕이 기묘년에 돌아가시자 공께서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절하고 고향에서 천명으로 세상을 마치니 고려 공민왕 22년 계축(1373)으로 향년 72세 이였다.
배(配)는 정부인 평양조씨와 초계정씨니 찬성사 련과 첨의 평리 희는 전후 배의 친정부친이시다. 공의 아들 여말의 충의사인 두문제공 휘 선미는 고려가 망하자 충의를 지키며 만수산 동구에 항절불굴 분사순절하니 용배(用倍) 용달(用達) 용계(用桂) 삼형제는 구사일생으로 화를 피하여 용배공은 순창에 은거하여 아들 치지를 두었는데 이분이 화순에 입향하였으며 용달공은 개성에 용계공은 홍성에 은거하여 이곳이 각각 세거지가 되었다.
화순에 종인이 병인년(1746)에 사첩을 정리하여 개성을 왕래하며 같은 조상의 자손임을 학인하고 족보를 발행코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89년 기유년에 개성에서 두종인이 화순에 찾아와 순창군 휘 중연공을 관조(1세조)로 하고 순창임씨 세보를 처음 발행하게 되었다.
초보발행후 110년간은 초보와 같이 지속되었는데 신축년(1901) 수보시 평택임씨 세보로 개칭 4회의 수보도 동일하게 오늘에 이르고 있다.
2.杜門齊公 諱 先味 事蹟
공(公)의 자(字)는 양대(養大)요 호(號)는 휴암(休庵) 또는 두문제(杜門齊)이시며 시호(諡號)는 문정공(文正公)이시다.
고려 인종때 대문호이신 서하공(西河公) 휘(諱) 춘(椿)의 육세손이며 찬성사(贊成事)며 순창군(淳昌君)이신 휘 중연(仲沇)의 아드님으로 고려 충숙왕 5년 정축에 낳으셨다.
일찍이 벼슬하여 랑관(郞官-正五品)을 엮임하고 태학생(太學生)이 되었는데 고례(古禮)를 참작 퇴폐한 세속을 바로 잡기에 힘썼다.
간성왕(杆城王) 4년(1392) 고려가 망하게 되자 오정문밖 두문동 산골짝이로 들어가 은거하며 충의를 지키고 마음을 고려에 두고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니 마침내 이성계가 두문동에 불을 지르자 이에 항절불굴(抗節不屈)하고 분사순절(焚死殉節)하였다.
영조 27년(1751) 충신이 순절한 두문동에 영조(英祖)의 어제비(御製碑)를 세운바 또 정조 7년(1783)에 유수 서유방의 상소로 표절사를 건립하고 충신을 향사하고 치제(致祭) 사액(賜額)하였다.
뒤에 공의(公議)로 두문동서원과 경현사(景賢祠)에 배향하였으며 시호는 문정이고 아들은 용배(用倍) 용달(用達) 용계(用桂)이다. 지금은 송월사와 호계사에 배향하고 있다.
영종대왕어제(英宗大王御製)
두문동비(杜門洞碑)
공은 인종(仁宗) 1년 3월 14일 출생했고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서학교수 장낙원 예조정랑(禮曹正郞) 벼슬후 사헌부 대사성 경연춘추관사 홍문관 예문관 판돈녕금부사 대광보국 증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문간(文簡)이라는 나라의 호가 내려졌다.
공은 성품이 매우 인자하고 자애로우며 부모에게 효성있고 친구에 믿음있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일찍이 시(詩)와 문장(文章)이 세상에 울리어 알려지고 대명가정(중국연호) 신해년에 명간(命簡 - 임금이 명령하여 선발함) 팔문장(八文章 - 여덟 사람의 문장가) 중에서 공이 제2위이셨다. 제1위에 이판(吏判)이신 이율곡 선생이고, 공이 제2위이시며,
다음 차례로 영의정(領議政) 심수경이시고, 대사헌(大司憲) 오상부이시며, 선당 이량(李樑)이시고, 승지(承旨)이며 호가 농암인 김수이시고, 승지이며 호(號)가 관물재(觀物齋)이신 민기(閔箕)와 이조판서(吏曹判書)이며, 호가 임당인 정유길(鄭惟吉)이시다.
재주가 영발(英發 - 재기가 현저하게 뛰어남)하여 모든 시험에 합격(合格)하니 마땅히 국기(國器 - 나라 다스릴 수 있는 학식과 덕행이 겸비한 사람)로 추대되어 마땅하였다. 이퇴계선생은 공과 더불어 여러 취미가 맞았다. 똑같지 않은것에 특히 관심깊고 매사 기이한 남자라 평하였고 만년에는 홀연히 생각하여 말하기를 [모든일에 어찌 선비만 상대하리오]하더라.
하서(河西) 김선생이 공의 죽음을 슬퍼하고 단가(短歌)를 지었는데 동량(棟樑 - 기둥과 대들보)의 재목에 비교하였으니 이것으로도 공을 가히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공의 뛰어난 글을 모아 지은 책 두 권이 있으니 그 깨끗한 이름과 곧은 절개를 간책에서 밝히어 오래될수록 더욱 빛난다. 아드님 오 형제를 두셨으니,
일남은 휘(諱) 종수(宗遂)인바 홍성을 중심으로 그 자손들이 살고있고, 이남은 휘(諱) 종원(宗遠)이요, 삼남은 휘(諱) 종우(宗遇)이며, 사남은 휘(諱) 종해(宗邂)인바 순창군 유등면 일대에 그 자손들이 세거(世居)하고 있으며, 오남은 휘(諱) 종건(宗建)이다.
공(公)의 고손자 송담공(松潭公) 휘(諱) 규(葵)는 16세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사헌부 대사성(司憲府 大司成), 춘추관사에 이르렀으며 증직으로 숭록대부 예조판서(崇祿大夫 禮曹判書)에 이르렀다. 한편 공(公)의 팔세손(八世孫)인 오천공(梧川公) 휘(諱) 우택(遇澤)은 무과에 급제하여 원종공신의 녹공을 받고 판돈녕판의금부사(判敦寧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5. 隱庵公 諱 時啓 七從兄第丙子倡義 史蹟
은암공(隱庵公)을 중심(中心)으로 칠종형제가 병자호란을 당하여 서로 거의(擧義)를 모의하고 순국(殉國)을 맹서(盟誓)한 것은 지난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공(公)은 찬성사(贊成事)요 순창군(淳昌君)인 휘 중연(仲沇)공의 구세손(九世孫)이며 예빈시주부 휘(諱) 협(莢)의 증손(曾孫)이며 통덕랑(通德郞)공 휘(諱) 숙(塾)의 아드님이시다.
타고난 성품이 강의(剛毅)하여 과거(科擧)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독서(讀書)에 열중하였으며 공(公)의 아우인 옥림공(玉林公) 휘(諱) 시태(時泰)는 부모님의 병환에 백 약이 무효인지라 작지(斫指) 수혈하여 생명을 구하니 천지간에 둘도 없는 효자라 칭찬하였다. 한다 셋째 아우인 임천공(林泉公) 휘(諱) 시민(時敏)은 십물계(十勿戒)를 지어 자제(子弟)들을 경계(警戒)하며 제자제(諸子第)를 위해 노력(努力)한 흔적이 뚜렸하였다 한다.
수은공(睡隱公) 휘(諱) 시진(時震)은 공(公)의 넷째 아우인데 천품이 준걸하고 성격이 관대하였으며 여섯째 동생인 학정공(鶴汀公) 휘(諱) 시약(時若)은 기유년(己酉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율봉찰방(栗峰察訪)을 지냈다.
송계공(松溪公) 휘(諱) 시준(時儁)은 공(公)의 종제(從弟)인데 자품(姿品)이 단아(端雅)하고 기질이 온화(溫和)하여 경학(經學)에 열중(熱重)하였다. 묵암공(默庵公) 휘(諱) 시익(時益)은 공(公)의 삼종제(三從第)인데 천성이 순수하고 학식이 뛰어나며 효우(孝友)에 마음을 두고 충절(忠節)을 다짐하면서 살았다.
인조(仁祖) 14년 병자년(丙子年) 1636년 12월에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왕이 팔도에 교서(敎書)를 내려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했다. 그해 12월 25일에 교서(敎書)를 받고 즉시 거의격문(擧義檄文)을 사방(四方)으로 보내고 화순현(和順縣) 객사(客舍)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출정 준비를 서둘러 군수물자를 수집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보여 들었다. 옥림공(玉林公)으로 모의도유사(募義都有司)를 삼으니 은암공(隱庵公) 칠종형제는(七從兄弟)는 의기(義氣)가 배격(倍激)하여 하늘에 죽기를 맹서(盟誓)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義兵) 500명을 모아 진격에 앞서 군약(軍約) 팔조(八條)를 강론하고
군율(軍律)과 대오(隊伍) 및 군용(軍容)을 갖추어 진군(進軍)하여 다음해 1월19일 청주 서평원에 다다르니 호기병(胡騎兵)이 산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 각기 선봉장이 되여 창칼을 휘둘러 돌격한 끝에 적기병(賊騎兵) 9급(級-1級은 20首)을 참수하고 많은 군기물을 노획하고 돌아왔다.
다시 30리쯤 진격하였을 때 강화(講和)가 성립 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마주보며 통곡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자취를 감춘제 산수간을 오가며 살다가 세상을 떠나니 세상 사람들은 은암공(隱庵公) 칠종형제(七從兄弟)의 창의(倡義)한 아름다운 자취를 마음속으로 흠양하였다.
그후 영조(英祖) 27년(1751)과 영조 31년(1755)에 그 공이 인정되어 정려를 내렸으니 이름하여 칠충각이며 화순군 화순읍 대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한편 은암공 휘 시계는 예조참의에 옥림공 휘 시태는 좌승지겸경연참찬관 임천공 휘 시민은 예조참의 수은공 휘 시진은 호조참의 학정공 휘 시약은 호조참의 송계공 휘 시준은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의 묵암공 시익은 좌승지겸경연 참찬관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6. 參判公 諱好禮 行狀
공의 휘는 호례이고 자는 문숙이며 공의 부는 조산대부행 군자감주부하시고 증 통정대부승정원 좌승지 벼슬을 하신 휘 계(繼)이시고 자는 중승이시다.
공의 모는 숙부인 광산김씨이며 그 부은 생원 응태이고 조부는 정랑 광우이다.
공이 태어나신 해는 명의 만력 31년 계묘년이신바 조선조 선조 36년에 해당되며 그해 9월 9일이 생신일 이시다, 그리고 인조 24년 병술년 5월 10일에 돌아가셨다. 부인 정부인 여흥민씨는 선조 임인년에 태어나시고 부는 가선대부 참판이요 무인년 정월사일 돌아가셨다.
공은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내시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벼슬하시었다. 공은 천성이 매우 순하고 후하여 부모님 뜻에 따라 잘 뫼시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효자 칭호를 들었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고 뛰어나
사서삼경을 완전히 읽어 익히고 종친 집안 사람들과 매우 화목하게 지내실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사귐도 믿음으로 이루고 부모님에 효와 어른 공경하는 도리등 모든 행동 범절이 한결같다. 한편 형(兄)인 승지공(承旨公) 휘 호의(好義)는 통정대부 행승정원좌승지에 이르렀다.
7. 松岩公 諱 世戊 行狀
공의 휘(諱)는 세무요 자는 계춘이며 호는 송암이고 부는 우택이시며 순창군 15세손이고 숙종 갑오년 8월 2일생이시다.
공께서는 숙종 갑인년 2월에 무과 급제하여 선전관 통예원 인의하시고 사헌부 감찰과 공조정랑을 역임하시고 곽산군수직을 수행하신 후 오위장군 첨지부호군 우림장군과 호위장군 안주우복 대흥중군 한성판윤을 역임하시고 병조참판을 하시었다. 의성김씨에 장가드시니 모제의 후손 한정의 따님이시다.
영조 임금께서 일찍이 무경 즉 병법에 관한 글 강하는 것으로 시험을 하였는데 공이 문득 한번 외우면 임금은 무릎을 치며 일컫기를 [내가 임공의 강하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시원해서 더위에 바람을 만난 듯 하다]하였다.
또 그 당시에 국문 즉 큰 죄인을 심문하는 옥사가 있었는데 영조가 좌우에게 이르기를 [이번 국문하는 자리에서 조정신하들이 휴식하며 편의를 취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오직 임공 한 사람은 반열에서 이동하지 않고 한 달이 지나도록 하루와 같아 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임공의 성심을 나 매우 아름답게 여기노라,
임기가 차고 차지 않음을 따질 것 없이 변방에 한 자리로 추천토록 하라]하고 아이 집으로 차출해서 보내는데 사은하고 물러가는 날에 임금이 전교하기를 [나라 일은 크고 작음을 따지지 말고 힘쓰도록 하라]하였다.
공은 정미 5월 4일 사망하셔 현몽한 예산군 덕산면 대치리(한티골) 가야산 남록 임좌로 모셔져 있다.‥‥‥
이곳은 일산대가 세 번 올라간 곳이니 즉 공과 공의 아드님 평산공, 손자인 통진부사공 장례마다 이었다.
공의 아들 삼 형제가 있었으니 큰아들 휘 봉한은 영조 갑술 무과 급제하여 선전관 조전설 사간원을 거쳐 언양군수로 부임하신 후 의금부 도사 훈련원 도총부도사 중추부경력 경상도병마우복 안동부사 무안군수 온성군수 운산군수 장단부사 평산도호부사를 역임하셨고 호는 죽천이시다.
손자 휘 형수는 무과 급제에 비변낭 법성첨사 광양군수 통진도호부사 단천부사이시였고 증손에는 우현이 문과에 급제하여 위원군수겸 병마절제사 상현은 오위장헌대부 기현이 있다. 공의 차남 휘 경한(同樞公)은 영조 신사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도총부도사 상원군수 대구부사 금위장군 호위대장 가선대부행 동지중추부사 병조참판에 호는 향은이시다.
손자 휘 형관은 한성판윤(홍문집)에 공의 셋째 아들 휘 서한은 자는 운도요 통정대부행 죽산현감 고성군수 겸 병마첨절제사를 역임하셨다.
비록 무과로 출신하였으나 조용하고 깨끗해서 빈한하고 궁핍함을 참는 선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공의 아들 평산공이 나이가 50이 지나서 백발 노인이었지만 반드시 의관을 정돈한 후 공에게 배우며 부지런히 어머님 봉양을 다하는 효자이었다. 한편 공(公)의 장형 세화공(世華公)은 통정대부행 서산군수겸 서산진병마첨절제사에 이르렀고 중형 세영공(世英公)은 통정대부행 능주목사겸 병마절제사에 이르렀다.
8. 梅谷公 諱 魯郁 行蹟
공의 휘는 노욱(魯郁)이요 자는 경일(敬日)이며 호는 매곡이니 두문재선생의 17세손이다. 공의 기우(氣宇)가 범인보다 뛰어났다. 성장하기에 이르러서는 오직 백성을 기르고 다스릴 자격이 있었는데 정해년에 이르러 이름이 무과에 올랐고 계사년에 성은을 입어 홍주영장 겸 토포사로 제수 되었다.
군에 나가 백성을 다스리는데 치적(治跡)이 청백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경내에 진동하였다. 이때가 어느 때인가 이때 국사가 변천하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소유 재산을 조금 분산하여 시골의 궁한 친구와 전제 가문의 가난한 겨레를 빠뜨리지 않고 골고루 구휼하였으니 누가 자선가라고 아니하겠는가, 만년에 이르러 순창군 유등면 고반리에 정자를 만들고 정자의 이름을 고반정(考槃亭)이라고 하였다.
사경에 이르지 아니하였던가. 『즐거움이 냇물 골짜기에 있으니 훌륭한 사람의 마음이 너그럽도다(시 위풍衛風고반편에 있는 구절이다)』라고 하였다. 아! 이 어른이 소요 당양(逍遙 洋 -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유유자적하여 지내는 것이다)에 뜻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자취를 감추고 숨어사는 일이 아니겠는가. 혹 한가한 날이 있으면 기붕 시우(棋朋詩友 - 장기 두는 벗과 시 짓는 친구)와 더불어 정자에 올라 즐기면서 날이 저물어도 돌아감을 잊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지나간 날 백성을 기르던 재격이 완연히 오늘날 자취를 숨긴 분이라고 하겠다.
또 물에서 고기잡고 산에서 나무하는 것으로 만년에 맑은 취미를 붙이었다. 그 아드님 정주(程周)가 갑오년에 성균진사에 합격이 되었으니 역시 그 아버님의 유업을 지키었다. 그 맑은 지조를 아름답게 여기어 드디어 기록하노라.
9. 琦波公 諱 魯洙 行蹟
공의 휘는 노수(魯洙)요 관명은 용현(鏞炫)이며 호는 기파(琦波)이니 공의 기우가 영특하고 위대하였다. 고종 계사년에 사헌부 감찰로 있다가 무술년에 흥덕군수로 제수 되었고 기해년에 하동군수로 옮기었다가 신축년에 김천으로 옮기었고 임인년에 또 임실군수로 제수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악한 성은(聖恩 - 임금의 은혜)이 아니겠는가. 부임하신 군에는 치적(治跡)이 청백하야 백성의 정이 변화하므로 친송하는 소리가 지경에 진동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뽕나무에 붙은 가지가 없고 보리가 두이삭이 빼어난다는 (옛사람이 정치를 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기이한 일일 것이다.
다만 일편단심으로 국가의 은혜를 만분지일이라도 갑고자 하였으나 시운이 불행하야 상전 벽해가 번복하였으니 국운인데 어찌하겠는가. 만년에 이르러 구례군으로 이사를 가서 산수의 아름다운 곳을 선택하여 거주하면서
자제들을 교육하고 종족과 돈목하게 지내며 경향의 사림이 와서 자리에 차있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이 또한 만년의 즐거운 일이다. 혹 한가한 날이 있으면 산에도 오르고 물에도 임하여 해가 지도록 돌아가기를 잊으니 그때 사람들이 진나라 도연명과 한나라 엄자릉(嚴子陵)에게 비하였다.
아! 오직 후손이 이공의 유업을 추락시키지 아니하기를 바라면서 기록하노라.
10. 淸海公 諱 相鶴 行蹟
공의 휘는 상학(相鶴)이요 초휘는 두학(斗鶴)이며 관명은 명주(命柱)요 호는 청해이니 중조 순창군 휘 중연의 17세손이요 두문재선생 휘 선미의 16세손이다. 공의 천성이 돈후하야 이를 갈 나이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종족에게 화목하였다.
고종 신미년(고종8년)에 외람히 성은(聖恩)을 입고 운봉현감을 지냈으며 또 기상이 웅장하고 위대하야 동학난리에 의병을 일으키어 비적을 토벌하였으므로 위에서 특별히 소모관(召募官)을 제수 하였다. 재물 이천삼백여냥을 내어 장정 수십 명을 모집하고 군포(郡捕 - 군포는 郡砲의 오자인득 하다) 수백인을 거느리어 도내(道內) 비적의 괴수 수십명을 토벌하고
그 나머지 졸개 수백명은 훈계하여 귀순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영웅의 위대한 수완이 아니겠는가. 공은 훈록(勳錄)에 기재되었고 의병 사실은 옥천일기에 소명하게 드러났다. 그때 특별히 대원군의 난초 병풍과 창림당 호를 받어 후손에게 전하였다.
시사(時事)가 변천하야 국운이 불행하게 되는 것을 보고 결연히 고향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물에서 고기잡고 산에서 나무하는 것으로 소요 당양(逍遙 洋 -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유유자적하여 지내는 것이다)하였으니 누가 벼슬할만하면 벼슬을 하고 그만둘만하면 그만두는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내가 그 출처(出處)가 뜻에 맞음을 감동하여 기록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