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취산은 고려 때 지공(指空) 법사가,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천축국(天竺國)의 영취산과 모양이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의 북녘 기슭에 자리한 청련사는 영취산에 있던 대흥사(大興寺)의 작은 암자로 세워졌으며, 대흥사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암(東庵)이라 불려왔다.
대흥사는 청련사뿐만 아니라 인근의 극락암(極樂庵)ㆍ삼성암(三聖庵)의 기록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일대의 많은 암자들을 거느릴 만큼 사격이 높았던 듯하다. 따라서 청련사의 중창주 덕암(德庵) 스님 또한 사라져버린 대흥사를 아쉬워하며 퇴락한 암자를 새롭게 일으켜 세울 목적으로 법당을 창건했을 것이다.
현재 청련사에 남아 있는 현판자료에는 하나같이 청련암 앞에 ‘영산 대흥사’를 붙이고 있어, 대흥사는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청련암이 그 법등을 잇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중에 전하는 1842년(헌종 8)의 중창기(重創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어, 청련사가 자리한 자연적 입지를 짐작케 한다.
좌우에 둘러 있는 봉우리들이 높이 솟아 있어 마치 많은 별들이 북두성을 향하는 것과 같고, 앞뒤로 흐르는 골짜기 시내가 잔잔하여 수많은 옥가루가 허공에서 부서져 내린 듯하다. 이는 반드시 하늘이 아까워 숨겨놓은 곳이며 땅이 내보이기 인색하게 숨겨놓은 명승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가람을 세워 법당을 창건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청련사 부도
청련사 비로나자불
청련사 천왕문
청련사에 들어서는 대문 역할을 하는 천왕문은 1993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영취산청련사(靈鷲山靑蓮寺)’라는 편액을 내걸고 있다. 건물의 내부에는 중앙 칸의 좌ㆍ우측에 각각 2구씩 모두 4구의 사천왕(四天王)을 벽화로 그려 놓았으며, 사천왕 위쪽으로는 비천상이 한 구씩 그려져 있다. 또한 대문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져 있다.
천왕문에서 바라다본 극락전
청련사 요사채
청련사 요사채
청련사 범종각
청련사 다보탑
1993년에 완공된 다보탑은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탑의 조성기에는 “아쇼카왕이 팔만사천 탑을 조성하고 남은 진신사리를 인근 각국에 봉안케 했다. 이때 나란다대학에서 수학하던 태국의 와펜자 왕자가 귀국하면서 사리 3천과를 모시고 와서 궁전에 봉안했던 사리를, 태국 종정 뷰다 붕사가 1980년 부산 대각사에서 주최한 국제보살계를 설할 때 300과를 모시고 왔으며, 이 중 3과를 모셔와 탑에 봉안했다”고 기록하였다.
청련사 극락전
청련사 극락전내 삼존불
청련사 금고
법당 한 켠에 놓여 있는 금고는 조성기(造成記)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지만 ‘건륭(乾隆)’이라는 연호(年號)가 확인되고 있어, 18세기 중엽에 조성되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청련사 극락전 벽화
청련사 관음전
청련사 관음전앞 삼층석탑
청련사 산령각
1830년(순조 30)에 기록된 현판 산령각신건기(山靈閣新建記)의 내용을 보면, “읍지(邑誌)에 이르기를 ‘산신이 강림하시여 대대로 문무 인재들이 배출되어 훌륭한 명신들이 되었다’고 하였고, 이백첨(李伯瞻)의 시에 ‘영취산 높고 높아 사방을 굽어보니 문무의 영재들이 많은 문중에서 나온다(鷲嶺??鎭四村 英材武略幾家門)’ 라고 하니 영취산은 드높고 또한 영험이 있어 기도를 하면 반드시 성취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령각 벽화
산령각내 산신상
청련사 수조
청련사 찾아가는 길
창녕IC를 통해 창녕읍으로 들어섰을 경우 5번 국도를 이용해 함안 방향으로 약 10Km 정도를 가다보면 계성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 어귀의 다리를 건너 청련사 표지판에 따라 바로 좌회전한다. 계성천을 따라 관룡사(觀龍寺) 방향으로(1080번 지방도) 약 2.7Km 쯤 가면 왼편에 청련사 표지판이 크게 나타나고, 오른편에는 ‘화왕산 맷돌순두부’라는 음식점이 보인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약 700m 정도를 더 가면 청련사가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