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4
꼰대의 청춘 변명
설이다. 가족이 모여 조상께 차례 올리고 덕담을 나누는 명절인데 나라의 높은 분들이 모임을 자제하란다. 추석을 날로 먹은 청춘들에겐 이어지는 은총이다. 명절만 되면 틀딱들 냄새로 코가 썩고 라떼로 귀가 아팠는데 코로나가 탈취제를 뿌리고 다니는 덕이다. 더구나 사망자가 천명을 훌쩍 넘었지만, 청춘들이 숟가락 놨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이 괴질은 편애가 심하다.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다.
이제 세뱃돈을 온라인으로 입금하라고 카톡 보낼 놈은 안 봐도 똥강아지들이다. 새 돈 구한답시고 찬바람에 고뿔을 마다하고 은행 문턱 기웃거릴 일이 없어졌으니 틀딱들도 코로나 덕을 보는 셈인데 입맛이 쓰다. 추석 때 휴대폰에 넙죽 엎드린 똥강아지가 눈에 삼삼하다. 그렇다고 먼저 전화 걸기도 겁난다. 언젠가 요물 같은 전화기에 대고 조선 시대 군말을 하였다가 치매 환자가 돼버린 기억 때문이다. 이래저래 코로나가 죽일 놈이다.
요즘 청춘들은 신기하다. 남녀가 카페에 앉아서도 카톡으로 대화하며 키득거린다. 더구나 그들이 소통하는 문자를 보면 모두가 세종임금이다. 말 줄임과 부호는 창제와 같아서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 없다. 집현전 학자를 모셔와도 해독이 안 되는 글이 태반이지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디지털 시대는 0과 1의 이진법으로 세계를 해석한다. 컴퓨터가 그렇다. 그 속에 편입한 청춘들이 조선의 언어를 개화시켜 단축어로 쓰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말이 나온 김에 틀딱과 라떼만은 따져 봐야 한다. 원래 틀딱의 원조는 꼰대다. 꼰대는 어느 순간 ‘늙은이’를 지칭하는 은어 명사로 국어사전에 올랐다. 이런 사전편찬자들의 자비라면 틀딱도 곧 사전에 오를지 모른다. ‘틀니 한 늙은이가 말하거나 음식을 씹을 때 딱딱 소리가 난다고 하여 노년층을 비하한 별칭’ 정도면 사전 풀이로는 제격이다.
그렇지만 라떼라는 말이 꼰대 짓이 된 건 좀 억지스럽다. 원래 라떼(latte)는 이탈리아어로 아침에 먹는 따뜻한 우유를 일컫는다. 웬만한 도회지는 한 집 건너 카페 간판이 매달려 있으니 라떼도 예로부터 마시던 식혜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친숙해졌다. 물론 라떼라는 말이 붙은 음료는 우유가 들어간다. 하지만 청춘들은 라떼를 혐오한다. 그네들이 새로 만든 국어사전 표기에 ‘나 때’를 ‘라떼’로 바꿨기 때문이다.
누구 탓인지 모르지만,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자주 회자 되는 데는 세대 간의 소통 부재가 원인이다. 청춘들에게 내가 너희 같은 때에는 이리저리했으니 내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는 꼰대 짓은 일방통행로에 역주행과 같아서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라떼’는 그저 꼰대의 허튼 잔소리일 뿐이다. 청춘을 만든 우유가 사사건건 아랫사람에게 가르치려 드는 상사나 꼰대들의 잔소리로 전락했으니 제 새끼를 두고 사람에게 젖가슴을 내준 소가 화낼 만도 하다.
대학교 2학년생이 신입생보고 요즘 아이들은 왜 그렇게 버릇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고 일등병은 이등병을 보고 군기가 빠졌다고 하소연한다. 하룻볕에 세대가 갈리고, 꼰대질이다. 그들에게는 미스트롯을 보면 꼰대고, 임플란트하겠다고 치아 신경을 죽인 틀딱은 미라다. 그 청춘들이 라떼 때문에 신경질 난다고 투덜거린다. 꼰대까진 참을 수 있지만, 미라의 씻나락 까먹는 소린 악성 소음이란다. 더러는 점심시간에 컵라면을 두고 왜 물 주전자를 빨았느냐고 틀딱을 머저리로 취급한다.
세기를 두고 이어온 인종이 달라지고 수백 년을 버틴 문자가 한순간에 뒤집혔다. 세대 간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다르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가치관이 다르고 보편적 상식이 다르고 관계성이 다르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가 무질서하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여긴다면 착각이다.
옛날 사람들은 날을 잡을 때 관천망기법(觀天望氣法)에 의지했다. 말 그대로 하늘이 기상대고 청개구리가 방송국이었다. 하지만 문명은 진보하고 있으며 우리 아이들은 그 문명의 바다를 새로운 항법장치로 항해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기성세대는 내비게이션을 두고 나침판을 고집하며 쩝쩝거리는 틀딱이어서 같은 밥상머리에 앉는 것이 불편하다. 기성세대들은 이러한 세대 간의 차이를 두고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하려고 하니 서로 소통 불가다.
휴대폰에 절하는 청춘들에게 나침판을 들고 동서남북을 가르친답시고 침 튀겨 훈장질해봐야 그나마 혓바닥에 몇 개 붙어 있는 미각세포만 떨어낼 것이 뻔하다. 기성세대가 청개구리 우는소릴 듣고 비설거지를 서둘렀다면 청춘들은 클릭 한 번에 구름 위를 걷는다. 세월을 씹다 보니 잇몸이 근질거려도 라떼를 차례상에 올려놓아서는 안 된다. 예법에도 없는 것이고 미래는 어차피 청춘들의 소유기 때문이다.
적자생존이든 자연선택이든 디지털 시대에 생존 우위에 있는 세대가 청춘들이라는 점을 더하면 세뱃돈이나 미리 챙겨 놓는 것이 수다. 지금부터라도 시커먼 휴대폰 액정만 애타게 바라보지 말고 침대에 누워 송금하는 법을 배우는 게 치매 예방에도 좋다.
다만 이 나라는 그대들이 놀리는 틀딱의 청춘으로 꼴을 베고 꼰대의 청춘으로 우유를 짰다. 하여, 이건 꼰대의 라떼가 아니라 권한의 명령이다. 모든 청춘은 딱 5분 휴대폰을 화상통화로 열어라! 그리고 주린 배를 물로 채운 과거의 청춘들을 향해 노랗게 염색한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어라. ‘정말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