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가는 길
인천터미널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탔다. 버스는 안양, 청평, 가평을 지나 춘천으로 향한다. 춘천을 떠나온 지 30여년, 유 소녀시절 아름다운 추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친구를 만나면 먼저 어디를 가고 싶다고 말해야 할까. 춘천을 떠나온 후, 춘천을 몇 번 다녀갔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곳, 어디에도 없었다.
봉의산 절벽을 이루는 바위틈 겹 진달래꽃은 여전히 피고선 질까. 우거진 골짜기 비좁던 산능선의 산유화는 여전히 그 짙은 향 내음을 뽐내고 있을까. 봉의산과 대칭을 이루고 선 소양강 수면위의 물안개는 아직도 그 신비스러움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일렁이게 할까.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을 떠나본 적이 없는 단짝친구 정희, 그 애가 날 기다리고 있다. ‘여보 나 뭐 입고 갈까?’ 좀처럼 내 입에서 나오지 않는 말이다. 남편 대답대신 ‘신세계백화점 들렀다 갈까?’ 한다. 같이 픽 웃었다. 꾸물거리는 사이 핸드폰에 그 녀석 ‘차 탔어?’ 한다. 아무래도 좋았다. ‘여보! 나 빛의 속도로 버스터미널 고고!
지난해 말쯤, 혹시나 하는 심경으로 춘천 소양초등학교 28회 동창모임 밴드에 가입했다. 처음엔 별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내 소식을 듣고 들어왔단다. 동창모임 마당발 총무, 성호였다. 통화했다. 얼마나 가슴이 뛰고 마음이 상기되던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 애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단지 우리가 살던 소양강 유원지, 성호 아버지는 골프연습장을 경영했고, 먼저 생을 달리한 개구쟁이 내 오빠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 지금까지 살면서 평생 잊혀 지지 않던 기억, 같은 동네 살던 언니가 만화가게 주인아저씨한테 성폭행 당해 우두벌판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그를 포박한 채 현장 검증했던 장소에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그 자리에 있었다. 피차 기억을 되살리기에 좋을 충격적인 사건이 그것이었다면 과한 걸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사건은 본인은 물론 자녀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제소 끝에 최근 무협의 판결이 났단다. 당시 파출소장의 딸로 장기화되던 살인사건 종결에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사건은 무모한 한 사람의 소중한 인생을 앗아갔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단짝 친구 정희를 찾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나지나 유독 내게는 각별했던 단짝친구 한명씩 있었던 것 같다. 그 애는 나와 달리 체구가 작았다. 야무진 옷매무새, 잘록한 허리라인은 물론, 항상 밝고 쾌활한 성격 탓에 그 애 주변에는 늘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유머감각도 풍부해서 볼펜을 마이크 삼아 노래 부르며 엉덩이를 실룩거리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소리 없이 빙그레 미소하던 나와는 달리 까르르 크게 웃어 제치던 모습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참 달랐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를 가든 같이 붙어 다녔다. 삼사십 분 등하교길,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고 옆으로 새서 해가 저물도록 놀다 터벅거리며 쌍둥이 그림자가 되어 집으로 향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버스에 올라 옛 기억을 더듬으며 사뭇 설레는 마음으로 몇 시간을 달렸다. 가평쯤 가니 친구에게 문자가 온다. 이제 곧 내리마 하고 채비를 하려는데, 아직도 30분이 남았단다. 그 순간 30분이 왜 그리도 길고 지루하던지. 가슴은 또 왜 그렇게 요동치듯 쿵쾅거리는지. 드디어 춘천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멀리서 한눈에 알아보고 그 애가 달려온다. 얼마만의 재회인가. 우리는 부둥켜 않고 서로를 확인하기에 바빴다. 그대로다. 어쩜 그리도 옛 모습 그대로 일까. 두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삶을 일구어온 세월이 수십 년이다. 그럼에도 옛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좋아보였다. 유쾌 발랄했던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오랜 세월 연애한 뒤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단다. 그 애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울컥하는 것이 살짝 얄 굿은 생각이 든다. 출가하여 오랜 세월 혹한의 시집살이를 한 뒤 찾아온 친정집 문턱을 밟는 며느리의 심정이 이럴까.
호반의 도시 춘천은 나에게 늘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했다. 근무하다 허리를 펴고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리면 여지없이 그곳에 춘천 시내가 들어와 있다. 소양강, 봉의산, 중도, 위도섬, 소양 땜으로 이어지는 샘밭, 충혈탑이 위치한 우두산, 나룻배, 둑방길 등등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가 옅은 파스텔 톤으로 채색되어 펼쳐진다. 살면서 춘천에서의 기억이 얼마나 내 삶을 풍요롭게 했는지. 아름다운 유년시절 기억들이 얼마나 많은 세월 나를 안위하고 보듬고 감싸주었는지.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면서 꿈을 키웠던 강둑길은 내가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새로 단장한 강둑길 주변‘테라스’커피전문점, 밖이 환히 내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석양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강물위의 노을, 꿈에 그리던 단짝친구 정희와 기억에 없지만 나를 기억하고 있는 천상여자 향자, 그리고 테이블 사이 아메리카노 한잔이 있어 얼마나 가슴가득 행복했었던지.
그 동안 동강난 내 유년시절은 친구 정희를 통해 비로소 연결되었고, 목 젓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느라 난 또 허공에 시선을 묻어야 했다. 먼 후일 생을 마감하는 날 ‘내 생애 아름다운 날,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친구야 고맙다. 살아있어 너를 추억하고 보고 만질 수 있는 엄청난 행운을 내게 돌려줘서. 사랑해. 친구야!
(보육정책과 김정희)
첫댓글 향수 가득 밴 슬픈 추억을 통해
삶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