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옛날 중종(中宗) 33년 기해년(1539)에 시강원(侍講院) 습독관 (習讀官)이셨던 청원정 안공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태어난 성종(成宗) 8년 정유년(1477)에서 향년 63세이었으며 묘소(墓所)는 삭단(朔丹) 와동(瓦洞) 간좌(艮坐) 언덕에 있는데 지금 460년이 되었다. 옛날 짧은 비석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 후손들이 장차 비석을 다시 세우려고 영선(泳鮮), 선극(善極), 은호(殷鎬), 기경(基慶), 완호(琓鎬) 씨 등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석에 새길 비문(碑文)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계종(繼宗), 자는 선지(善之)며 청원정은 호(號)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풍채가 준수하고 자태와 성품이 영리하여, 처음 배울 때 한 번 들으면 곧 기억하여 어른들이 가르치고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가다듬고 삼가 읽으며 문장의 뜻에 정통(精通)하고 행동거지(行動擧止)도 법규에 맞으니 선친께서 매우 기특히 여기며 사랑하였다.
스승에게 취하(就學)한 지 수년에 조예(造詣)가 정밀히 깊고 시(詩)나 글을 쓰는 재능이 솟구쳐 발휘되니 명성과 칭찬이 자자하고 무성하였다.
일찍이 연방(蓮榜: 문과)에 올라 시강원(侍講院)의 습독(習讀)에 천거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에 힘쓰고 경전(經典)에도 힘쓰며 돈독하게 효제(孝悌)를 행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하면서 예(禮)를 다하였고 선친을 섬기며 뜻과 몸을 편안하게 하도록 갖추어 봉양하였으며 계비(繼妃) 안동김씨를 섬기기를 자기를 낳은 모친을 섬김과 다름이 없었다.
식량이 여러 번 떨어졌으나 달고 맛있는 음식을 공급함이 끊이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림을 더욱 부지런히 하였으며 병환이 들어 곁에서 시탕(侍湯)하면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좋은 음식도 반드시 친히 검사하였으며 치아를 드러내어 웃지 않고 허리띠를 풀고 자지 않았으며 그러다가 상을 당하게 되어서는 예법과 슬퍼하는 마음을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조석으로 성묘함을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거르지 않고 삼 년간을 하루와 같이하니 사람들이 지극한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일찍이 예천(醴泉) 검암(劍巖) 위에 선친께서 마치지 못한 정자가 있었는데 삼년상을 마친 뒤에 재목을 모아 완공하고는 당호를 ‘청원정’이라 하였다.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이 운자(韻字)에 화답(和答)하는 시(詩)를 지어 읊기를 ‘완연히 당시의 무극옹(無極翁)을 보았네.’라 하였고, 간와(艮窩) 양배선(楊拜善) 공이 서문을 지었으며, 간재(艮齋) 최연(崔演) 공과 재종(再從) 좌랑(佐郞) 관(瓘)이 기문을 지었다. 당시의 유명한 석학들이 화답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이것으로 공께서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았음을 알 만하다. 또한 백공(伯公)인 노계(蘆溪)와 계공(季公)인 집승정(集勝亭)과 더불어 항상 이 청원정(淸遠亭)에 모여서 책을 옆에 끼고 토론하고 질문하여 형제간에 우애가 화락(和樂)하니 원근에서 부러워하며 칭송하였다.
후에 공은 풍서(豊西) 지동(池洞)에 터를 잡고 살았으니 백공(伯公)과 계공(季公)이 계신 곳과 거리가 일사(一舍: 30리)였는데 왕래하며 안부를 묻기를 일찍이 부지런히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혹 진귀한 과일이나 특이한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친히 싸 와서 함께 먹으니 더욱 즐거워하며 우애가 돈독하였다. 계공(季公)이 또 청원정(淸遠亭)과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정자를 짓고 매년 좋은 때와 아름다운 계절에 자제들에게 술과 안주를 수급하게 하고 유명하고 좋은 벗들을 양쪽 정자에 초청하여 시(詩)를 지어 주고받고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면서 여유롭게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면서 장차 노년이 이르는 것도 모르고서 호탕하게 진경으로 돌아가셨으니 그 마음씨가 조용하고 밝았으며 풍류가 고상하였으니 거의 가히 세상에 은둔하면서 고민함이 없었던 군자라고 하리라.
아! 공은 똑똑하고 빼어난 자태로서 돈독하고 착실한 공부를 추가하였으니 행실은 충분히 향리(鄕里)에 모범이 되었고 학문은 충분히 세상에 베풀 수가 있었으니 자질구레하게 장구(章句)를 공부하는 무리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는데도 다만 낮은 벼슬을 지내고 70년을 임천(林泉)의 아래에서 맑게 수양하다가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공이 남긴 주옥(珠玉)같은 글로써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다만 이 몇 편뿐이니 이것이 실로 거듭 한탄스러운 것이다.
안씨(安氏)의 본관은 순흥이니 고려(高麗)의 상호군(上護軍)이셨던 휘 자미(子美)로부터 비롯하였으며 3세를 거쳐서 휘 문개(文凱)는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정승(左政丞)과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에 봉하여 지셨으니 시호는 문의공(文懿公)이요. 호는 질재(質齋)이다. 3세를 지나 휘 준(俊)은 봉상시(奉常寺)의 판사(判事)이셨는데 고려의 정치가 혁파(革破)됨을 보고 포은(圃隱)의 당파인 우현보(禹玄寶)·김진양(金震陽) 등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내세워 쓰러지는 나라를 부축하려다가 의령(宜寧)에 유배되었다가 예천(醴泉)의 노포리(蘆浦里)로 이배(移配)되어 도롱이와 삿갓으로 노년(老年)을 마쳤으니 시호는 충정공(忠靖公)이요 세상에서 ‘노포선생(蘆浦先生)’이라 칭하였으며 기천서원(箕川書院)에 배향되셨으니 공과는 5세 간격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수진(守眞)이니 황간현감(黃澗縣監)에 제수되셨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증조의 휘는 질(質)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과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조(祖)의 휘는 숭도(崇道)니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을 지냈다. 고(考)의 휘는 건(建)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냈는데, 기묘사화에 영변(寧邊)으로 귀양 갔다가 전리(田里)로 방면(放免)되어 돌아왔다. 비(妣)는 풍산류씨(豊山柳氏)이니 생원(生員) 갑손(甲孫)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으셨다. 배(配)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청계선생(淸溪先生)의 고모이며 부도(婦道)를 잘 닦으셨다. 1남 2녀를 두셨으니 아들 순(洵)은 습독(習讀)이고, 딸은 인동(仁同) 장응필(張應弼)과 진주(晋州) 류의(柳義)에게 출가하였다. 순(洵)의 아들로서 경로(景老)는 진사(進士)이고, 인로(仁老)는 훈도(訓導)이고, 국로(國老)는 호군(護軍)이고, 태로(台老)는 첨정(僉正)이다. 딸은 습독(習讀) 평산(平山) 신림(申霖)과 감찰(監察) 신형(申珩)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번거로워 다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을 한다.
아 ! 빛나구나. 안씨(安氏)들이여
순흥(順興)의 옛 문벌(門閥)이었네
높은 벼슬과 석학(碩學)의 덕망 가가세세(家家世世)로 계승하며 끊어지지 않았네
공께서도 또한 돈독하게 태어나 능히 가업(家業)을 지키셨으니 효우(孝友)함은 천성(天性)으로 주었고 시례(詩 禮)는 가문에서 전해 왔네
이름이 연방(蓮榜)에 올랐으니 천거되어 춘방(春榜)에 들어가셨고 어찌하여 붕(鵬)새의 장도를 접고 미련 없 이 고향으로 돌아왔는고?
칠순(七旬) 동안을 임천(林泉) 아래에서 고상한 정취(情趣)를 굳게 유지하셨고 순리대로 살다가 돌아가셔서도 편안하니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으셨네
깊숙하고 아늑한 와동(瓦洞)은 군자(君子)의 유택(幽宅)이며 비석에 새겨 아름다운 행적(行蹟)을 실었으니 떳떳하게 길이 백세토록 훈계하리라.
단기 4331년 10월 하완(下浣) 풍산(豊山) 류용우(柳龍佑) 삼가 지음
18대손 영선(永鮮) 삼가 씀
단기 4332년 8월 일 19대손 종식(宗植) 삼가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