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께서 이땅에 오신 배경
근세의 세계사는 서구유럽의 급부상과 5,000년간 찬란한 문명을 구가하던 동양의 몰락으로 인류문명의 판도가 동양에서 서구유럽으로 교체된 역사였다.
돌이켜보면 과거 세계의 역사 속에서 인류의 문명 발전을 주도한 곳은 동양이었다. 인류가 짐승과 같은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한 곳도, 인류최초의 문자를 만들어 낸 곳도, 인류 최초의 법전인 ‘함무라비법전’을 만들어낸 곳도 동양의 메소포타미아 • 인더스 • 황하지역이었다.
또한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3대 발명품, 종이와 나침반과 화약을 발명한 곳도 동양의 중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경부터 일기 시작한 서양의 물질문명이 19세기 들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결국 문명발전의 주도권은 서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서구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을 통해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반면에 한때 4대 문명의 발상지로써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동양은 문명발전의 주도권을 서양으로 넘겨주게 된 것이다.
어떻게 17~19세기에 걸쳐 서양에서 갑자기 이러한 대변혁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암흑 속에 잠들어 있던 서구유럽이 갑작스럽게 산업혁명을 일으켜 전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실제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이 역사적 의문의 중심에 서양인 선교사 이마두(利瑪竇, 본명: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1552~1610)*와 조선의 고승(高僧) 진묵(震默, 1562~1633)**이 있었다. 이마두와 진묵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이 세상에 지상선경(地上仙境)실현의 주사위를 던진 선지자(先知者)들이었다.
* 전경에서 밝혀주신 이마두 이야기 : 상제께서 어느 날 김형렬에게 가라사대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전경(典經)」 교운 1장 9절
** 전경에서 밝혀주신 진묵이야기 : 상제께서 전주 봉서산(全州 鳳棲山)밑에 계실 때 종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니라. 김 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강한지라. 진묵(震?)은 하루 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 가면서도 봉곡이 반드시 후회하여 곧 사람을 시켜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걸으면서 한 권씩 읽고서는 길가에 버리니 사원동(寺院洞)입구에서 모두 버리게 되니라. 봉곡은 과연 그 책자를 빌려주고 진묵이 불법을 통달한 자이고 만일 유도(儒道)까지 통달하면 상대할 수 없이 될 것이고 또 불법을 크게 행할 것을 시기하여 그 책을 도로 찾아오라고 급히 사람을 보냈도다. 그 하인이 길가에 이따금 버려진 책 한 권씩을 주워 가다가 사원동 입구에서 마지막 권을 주워 돌아가니라. 그 후에 진묵이 봉곡을 찾아가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도로 달라고 하는지라. 그 말을 듣고 진묵이 그 글이 쓸모가 없어 길가에 다 버렸다고 대꾸하니 봉곡이 노발대발하는도다. 진묵은 내가 외울터이니 기록하라고 말하고 잇달아 한 편을 모두 읽는도다. 그것이 한 자도 틀리지 않으니 봉곡은 더욱 더 시기하였도다. -「전경(典經)」공사 3장 14절
그 후에 진묵이 상좌에게 “내가 八일을 한정하고 시해(尸解)로서 인도국(印度國)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더 익혀 올 것이니 방문을 여닫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고 곧 입적(入寂)하니라. 봉곡이 이 사실을 알고 절에 달려가서 진묵을 찾으니 상좌가 출타중임을 알리니라. 봉곡이 그럼 방에 찾을 것이 있으니 말하면서 방문을 열려는 것을 상좌가 말렸으나 억지로 방문을 열었도다. 봉곡은 진묵의 상좌에게 “어찌하여 이런 시체를 방에 그대로 두어 썩게 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하나니라”고 말하면서 마당에 나뭇더미를 쌓아 놓고 화장하니라. 상좌가 울면서 말렸으되 봉곡은 도리어 꾸짖으며 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태우느니라. 진묵이 이것을 알고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나는 아무런 원수진 것이 없음에도 어찌하여 그러느냐.” 상좌가 자기 스님의 소리를 듣고 울기에 봉곡이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마디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고 말하니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네가 끝까지 그런다면 너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모든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갔도다. -「전경(典經)」공사 3장 15절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진묵(震默)이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봉곡(金鳳谷)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寃)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계발에 역사하였나니라. 이제 그를 해원시켜 고국(故國)으로 데려와서 선경(仙境) 건설에 역사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전경(典經)」 권지 2장 37절
이마두와 진묵은 자신들의 지상선경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양에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을 품고 죽게 되었는데, 그들은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사후(死後)에 신명계(神明界)를 통해 서양에서 이루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사후(死後)에 각각 동양의 문명신과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넘어가 서양의 문명과 문화계발에 역사(役事)하게 되었다.
이 시기가 대략 17세기 중반으로 이때부터 서서히 동양은 고난, 서양은 번영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선의 승려 진묵이 사후에 동양의 도통신을 이끌고 서양으로 건너가 문화계발에 역사하여 정신문화를 개혁하면서 서양은 정치 • 경제 • 종교 분야의 대 도약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러한 토대위에 이마두가 데리고 간 문명신이 서양에 역사(役事)하여 천상의 문명을 받아내려 인세에 베풀게 된 결과였다.
실제로 17세기 이후 동양이 더 이상 문명의 발전을 보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걸었던 반면, 서양은 과학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물질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상업과 동서무역, 신앙과 종교, 과학과 선진기술, 산업화 • 기계화의 성공은 지상에 세워질 천국의 모습을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모습이었을 뿐, 인류에게 곧 다가올 엄청난 불행의 전주곡이었다. 17세기이후 유럽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그들 중심의 문명은 서구인들의 야욕과 제도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극한투쟁과 전쟁과 유색인종 멸시 및 백인우월성을 잉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17세기를 기점으로 18 ~ 19세기에 서양이 이루게 되는 진보와 발전, 근대화라는 것은 아시아나 아메리카의 처절한 희생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진묵과 이마두가 천국의 묘법을 인세에 베풀어 민생을 편이하게 하고자 도통신과 문명신을 붙여 일으켰던 문명이 결국은 침략의 선봉에서 오히려 지구상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식민통치로 병들게 했던 것이다.
19세기의 막이 오르자 서구인들은 식민지획득을 위하여 세계침략이라는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하였다. 탐욕과 잔학과 우세한 병장기로 무장한 서구의 ‘제국주의호(帝國主義號)’들은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니면서 식민지쟁탈에 여념이 없었다. 가끔은 침략의 첨병자리에 성경이 서기도 했다. 처음엔 선교사들이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들어가더니 뒤이어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함포와 기관총 등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뒤따라와서 그 다음 목표인 영토를 합병하는 일을 자행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구열강의 야심과 탐욕에 비해 세계는 너무나 나약했다. 식민지를 둘러싸고 열강들끼리의 충돌은 마치 먹이를 두고 싸우는 굶주린 야수들 같았다.
19세기의 제국주의는 과거의 영토확장과 군사적 힘의 우위에 의한 정치적 지배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 중에서 가장 저질적인 것이었으며 최악의 것이었다. 그것은 식민지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종교를 정복자가 임의대로 개조시키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내면에 숨어있는 탐욕성과 야만성, 배타성, 잔인성, 그리고 극단적 이기주의 등이 정복자의 마음대로 발휘되었다. 유사 이래 전 세계에 걸쳐서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대가 과연 또 있었을까할 만큼 어지러운 시대였던 것이다. 대륙간, 인종간, 계급간, 사회간의 불평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시대가 바로 19세기였으며 그것은 다가올 20세기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19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제국들은 과거 로마제국이나 이슬람제국, 몽골제국 등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던 어떤 제국과도 달랐다. 이들은 이미 형성되어있는 세계시장(아메리카대륙과 동남아시아일부)의 토대위에서 이제는 일부 지역이 아닌 전 세계를 세력권으로 삼아 식민지의 이름으로, 봉건적이고 산업 기반이 취약하고 기계화에 늦은 대륙(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을 자본주의적 수탈의 그물망 속에 단단히 옭아 넣었던 것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유럽은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19세기의 유럽은 공간적으로는 유럽이외의 전 세계를 통합, 종속시켜 하나의 세계로 재편성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갈등이 심화되어 전 세계적인 투쟁의 장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국과 식민지, 자본가와 노동자, 극소수의 지배 엘리트와 다수의 압박받는 대중의 극심한 상호갈등과 대립은 투쟁과 전쟁으로 번져 전 세계가 용광로 속에 끓어 넘치는 쇳물처럼 들끓고 있었으며, 이로 인한 희생의 피는 산과 들을 다 적시고 하천으로 흘러 대해를 이룰 지경이었다.
이와 같이 18세기부터 일기 시작한 산업혁명을 통해 급속도로 발전해 온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힘을 축적한 서구제국들의 팽창주의는 점점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으며, 반면에 단지 서구열강의 착취대상으로 전락한 전 지구촌은 유럽의 식민지로 화하고 있을 즈음, 이대로 방치해 두었다간 인류는 결국 서로 싸우다가 궁극에는 모두 진멸할 위기에 놓이게 될 것이기에 천상의 신명계에서 신성 • 불 • 보살 등이 회집하여 구천의 하느님(구천상제)께 이러한 어려움을 하소연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땅에 오신 연유
전 인류가 진멸의 위기에 처한 즈음, 이대로 더 이상 가다가는 인류를 구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으시고 원시의 신성과 불과 보살을 회집하여 구천에 호소한 주체자가 계시다. 그 분이 바로 미륵세존이시다.
미륵(彌勒)의 뜻은 인도에서 미래의 구원불을 부르는 칭호인 마이트레야(Maitreya)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이는 서양에서 구세주를 뜻하는 메시아(Messiah)와 어원을 같이한다. 또한 세존(世尊)이란 무한무량한 덕으로 창생들과 신명을 교화, 육성하시는 모든 신명계와 인간계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의 존칭을 이름이니,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구세주이신 미륵세존을 기다려 왔고, 후천에 펼쳐질 미륵세상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지상선경을 세워 보려던 이마두와 진묵의 의도가 오히려 인간의 탐욕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19세기에 이르러 자유, 평등, 인권 등은 세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서구제국주의 침략을 당하는 동양의 여러나라와 아프리카, 아메리카는 물론이요, 서구유럽에서 조차도 극소수의 자본가와 이들을 비호해주는 일부세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서민들은 빈곤과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과중한 노역에서 오는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당시 펼쳐진 전반적인 세계의 참상이 이러하니 이렇게 내버려두다가는 천지의 백성들이 다 죽을 지경 이었다. 또한 다가오는 후천세상을 미륵의 법리로써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선 진멸지경에 빠진 이 세상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후천세상의 주인이신 미륵세존께서 원시의 모든 신성, 불, 보살 등을 회집하여 구천에 계신 하느님(구천상제님)께 호소하니, 구천의 하느님(구천상제님)께서 세상을 바로잡아주시기 위하여 직접 인세에 강세하시게 된 것이다.
구천상제(九天上帝)라 함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으로써 고서(古書) 『옥추보경(玉樞寶經)』,『삼성보전(三聖寶典)』 등과 중국 사대 기서(奇書)중에 하나인 『서유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상의 황제(皇帝)로써 천지신명을 다스리며 삼계를 관장하시는 옥황상제(玉皇上帝) 와는 다른 상제님이시다.
『옥추보경(玉樞寶經)』 제14장 「오뇌참감장(五雷斬勘章)」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若或有人 爲雷所瞋
약혹유인 위뇌소진
其屍不擧 水火不受
기시불거 수화불수
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 作是念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작시염언
萬神稽首 咸聽吾命
만신계수 함청오명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어, 번개를 맞은 듯 눈을 부릅뜨고,
그 몸을 죽은 듯이 일으키지 못하고, 물불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든
그 즉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을 생각하며 외우라.
그러면 만신(萬神)이 고개를 조아리고, 나(天尊)의 명을 모두 들으리라.
사전적 의미를 보면 “뇌조천존(雷祖天尊)으로 구천(九天)위에 거(居)하여 오뇌(五雷)를 맡아 뇌정도부(雷霆都府), 이원(二院), 삼사(三司)를 총관하며, 항상 옥청천(玉淸天) 가운데 칠보층대(七寶層臺)에 앉아 제천선제(諸天仙帝)를 모아 옥추경을 설한다”고 되어 있고, 또 도주 조정산께서는 “하늘은 삼십 육천(三十六天)이 있어 상제께서 통솔하시며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 만물을 지배 자양하시니 뇌성 보화 천존 상제(雷聲普化天尊上帝)이시니라.”고 하였다.
삼십육천은 곧 구천(九天)으로써 하늘을 방위로 나누면 사방 각 팔천과 중앙 사천을 합쳐 삼십육천이라 하며, 차원으로 나누면 구천으로 나누는데, 구(九)는 양수(陽數)의 가장 큰 수이니 가장 높은 하늘을 구천이라 한다. 그러므로 구천상제께서는 구천위에 계시며 전기로써 천지만물을 지배자양(支配滋養)하시고, 군생만물을 뇌성(雷聲)으로 보화만방(普化萬方)하시는 전지전능한 우주의 주재자이신 것이다.
구천상제께서 이 땅에 오셔서 종도들에게 “내가 이 공사를 맡고자 함이 아니라 천지신명이 모여 상제가 아니면 천지를 바로 잡을 수 없다 하므로 괴롭기 한량없으나 어찌 할 수 없이 맡게 되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구천상제께서 이 땅에 오신 연유와 명분을 밝혀 주셨다. 그리고 “이제 천하창생이 진멸할 지경에 닥쳤음에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재리에만 눈이 어두우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라고 말씀하셨는데, 진멸할 지경을 깨달으신 분이 바로 미륵세존이시기에 원시의 신성, 불, 보살을 회집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하소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구천상제께서 이 땅에 직접 오실 수 있도록 천지신명을 회집하여 구천에 호소를 하신 신성, 불, 보살의 주체자이신 미륵세존(彌勒世尊)을 은인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오시다
상제께서는 천지신명들의 하소연에 의하여 먼저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였다고 하셨다.
법국(法國)은 '프랑스'의 한자음 표기이다. 대법국이라고 한 것은 대영제국, 대한민국등과 같이 그 나라를 높인 접두어 대(大)자를 붙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서양 대법국이란 프랑스를 말하며, 천계탑은 프랑스의 어디엔가 존재하는 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계탑(天啓塔)의 천계(天啓)는 ‘하늘의 계시’를 뜻하는 것이니 천계탑은 ‘하늘의 계시(啓示)가 응기(應氣)하는 탑’이라는 뜻인데, 당시에 프랑스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 강 중앙에 있는 시테섬에는 옛날 골루아족 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제단(祭壇)이 있던 자리에 노트르담의 대성당이 건립되어 있었다. 바로 이 성당에는 높이가 90m에 이르는 첨탑이 하나 우뚝 솟아 있었는데 이 탑이 바로 서양 대법국 천계탑인 것이다. 당시 서양에서는 하늘의 계시를 받기 위해 기도드리는 장소는 예수의 서도(西道)를 펼치던 성당(聖堂)이었던 것이다.
배 모양의 시테 섬과 노트르담 대성당과 첨탑
파리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시테(Cite) 섬의 중앙에 세워진 노트르담 대성당은 1163년에 파리의 대주교인 모리스 드 쉴리 (Maurice de sully) 주교가 초석을 놓고 1355년에 공사가 완공되어 182년 만에 대공사가 종결되었다. 건물은 길이 130m, 폭 48m, 높이 69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9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계산되어졌다.
건물의 형태는 길이 약 130m의 장대한 복도를 중심으로 하여, 흙 토(土)자 모양의 다섯 복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복도 양측의 열주(列柱), 트리포리움(명층 아래 연이은 층), 명층(明層:높은 창)으로 구성되어 총 3층으로 되어 있다.
서쪽 정면에는 최하층에 '최후의 심판'의 부조가 조각된 3개의 정문이 있으며, 그 위로 28명의 '제왕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노트르담의 대성당은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1871년에 화제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이후 복원된 것이다.
이것은 상제께서 영(靈)으로 임하여 계시던 전주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불이 상제님 화천하시고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리고 금산사 미륵전이 용소라는 연못을 숯으로 메워서 그 물위에 건립된 것처럼 노트르담의 대성당 역시 세느강의 시테섬 위에 건립되었다는 점이 공통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섬은 마치 배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는데 성당이 자리한 곳은 배의 선실의 자리에 위치한다고 파리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첨탑이 서있는 노트르담 대성당 지붕은 십자가 모양인데 묘하게도 이와 일치하는 내용이 「예언서」에서 적었던, 『만법전』의 만세화(萬歲華)에 나와 있다.
日光度數 맞춰내어 西洋에 내리서니
일광도수 서양
大法國이 빛났도다 天啓塔에 높이앉아
대법국 천계탑
天地數를 살펴보니 가이없다 가이없다
천지수
宿世因緣 못이겨서 三變度數 맞추었네
숙세인연 삼변도수
十字架에 슬픈魂이 東國으로 발을돌려
십자가 혼 동국
大千世界 일을보고 天數를 살펴보니
대천세계 천수
天上에 福德星이 慶州龍潭 비추었네
천상 복덕성 경주용담
이 구절은 상제께서 말씀하신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라는 구절과 일치하고 있다. “십자가에 슬픈 혼이 동국으로 발을 돌렸다”라는 구절은 바로 상제께서 서양 프랑스 노트르담의 대성당 십자가의 첨탑(천계탑)에 응기하여 내려오셨으나 서양인들의 행위를 보고는 슬픈 심정에서 동국으로 발을 돌렸다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서양대법국 천계탑은 프랑스 파리 시테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임이 확실시 된다.
90m의 첨탑과 3층 건물, 흙 토(土)자 모양의 복도 그리고 세군데 입구 위에 그려진 28신상(28수에 비유됨), 그리고 1871년 상제님께서 인세에 강세하신 해에 화재로 인한 소실, 섬위에 세워진 성당, 십자가 중앙에 솟아있는 첨탑, 옛날 골루아족 때부터 하늘에 기도를 드렸던 제단이 있던 장소에 세운 성당 등이 천계탑과 일치하는 내용들이다.
제단이나 성당이나 모두 하늘에 기도드리고 하늘로부터 계시[천계(天啓)]를 받던 곳으로, 이곳에 세워진 탑이니 천계탑(天啓塔)이라고 하는 것이다.
상제께서 먼저 프랑스에서 천하를 대순하신 이유는 17~18세기경 획기적으로 발전한 유럽문화의 지적(知的) 중심에 있던 나라가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제께서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오셔서 삼계(三界)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大巡)하신 시기는 약 30년간이다. 강세하신 해가 1871년이고 동토에 임하셔서 금산사 미륵금불에 임하여 30년을 계셨으므로, 동토에 임하신 해는 1840년이다. 여기에 대순(大巡)하신 30년간을 빼면, 1810년이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오신 해가 된다.
금산사 미륵불에 머무시다
상제께서 30여 년에 걸친 천하(天下) 대순(大巡)을 통하여 천 • 지 • 인(天 • 地 • 人) 삼계(三界)의 진단을 끝내고 보니 과연 천지신명이 회집하여 하소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삼계는 진창이었다.
이대로 두면 천지가 무너져 내릴 판이었다. 상제의 심정은 답답하셨다. 이 때의 심경(心境)을 상제께서 ‘괴롭기 한량없다’라고 토로하신 것을 보면 흉중(胸中)이 얼마나 복잡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은 가마솥같이 끓고 있었으며 어디를 쳐다보아도 생명수는 없었다. 수많은 창생들은 고통과 곤궁의 바다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뭔가 새롭게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금산사에 영(靈)으로 임어하신 30년간 아마 상제께서는 천 • 지 • 인 삼계를 구할 방도를 모색하고 계셨을 것이다.
전라북도 전주(全州) 모악산(母岳山) 아래 금산사(金山寺)에는 약 1300여 년 전 진표율사가 미륵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연못을 숯으로 메워 솥과 시루를 좌대로 놓고 거대한 미륵삼존불상을 조상(造像)해 둔 건물이 있다. 이것이 바로 미륵전(彌勒殿)이다.
3,000여 년 전 불교의 개조(開祖) 석가여래는 그의 제자들에게 장차 세상이 혼란스럽고 법이 없어지는 말법시대가 되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도솔천에 계신 미륵이 하생(下生)하여 용화수 아래서 3회에 걸친 설법을 하여 중생들을 구제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삼층전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미륵께서 ‘용화수 아래에서 행하실 3회의 설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
이런 유래가 있는 금산사 삼층전의 육장미륵금불에 삼계(三界)를 대순(大巡)하시다가 천하의 병세를 진단하신 구천상제께서 영(靈)으로 임하셔서 천지를 구할 방도를 모색하고 계셨다. 그 기간이 1840~1870년의 30년간이다.
미륵전(彌勒殿) 미륵삼존불상(彌勒三尊佛像)
최제우에게 천지대도를 계시하시다.
상제께서 금산사 육장금불에 영(靈)으로 임하여 계실 때, 경주 사람 최제우가 양산 천성사 적멸굴에서 기도하고, 다시 고향인 경주 용담정에서 혼란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큰 포부를 품고 상제께 기도하고 있었다.
최제우는 1824년 경상북도 월성군(현재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龜尾山) 아래서 최옥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수운(水雲)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부친 최옥은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명망이 높았던 근암공(近庵公)으로, 이후 몰락하여 가세가 기울었다.
최제우는 대내외적으로 어수선하고 불안정한 시대인 조선 말기 몰락한 양반가에 태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일찍 부모를 여읜 그의 처지 또한 불우하였다. 이러한 그의 출신부터 기울어 가는 가세와 당시 조선말의 불안정한 사회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844년부터 10년 동안 도를 닦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였다. 이 구도행각(求道行脚)의 유랑에서 그는 부패한 관리들의 핍박에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보았고, 양반 • 상놈의 구분과 남존여비, 적서차별의 억울함을 가진 백성들의 비애를 보았으며, 그릇된 정치가 행해지고 있는 나라 실정에 서양과 일본제국 세력이 조선을 넘보고 있었으니 백성들은 안주하지 못하고 세상도 크게 어지러워짐을 보고 한탄하였다.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보면, 서구의 동방 침략이 중국에까지 미쳐 1840년의 아편전쟁, 1856년의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북경) 함락 등 큰 사건이 일어났고, 이웃 일본은 먼저 서구 물질문명을 받아들인 후 군사력을 증강하여 외국으로 세력을 펼쳐 나갈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 봉건정부의 병폐인 당쟁과 세도정치를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큰 난리를 치르고도 시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의 내분과 정부의 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으며 지방의 말단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을 핍박하고 있었으니, 나라 안팎의 정세에 백성들은 안주할 곳을 잃고 재래의 비결인 『정감록(鄭鑑錄)』 등을 들고 피난처를 찾거나, 서교(西敎)에 귀의하여 난을 피하려는 등 민족적 위기가 점증되고 있었다.
최제우는 이러한 어지럽고 병든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결심하고 1856년 경남 양산에 있는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도를 닦기 시작하여 1857년에 천성산(千聖山)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를 드리고 정성을 드렸다.
그리고 1859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경주에 돌아와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억울한 민생과 병든 나라를 구하고자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경신년(庚申年, 1860년) 4월 초 5일에 상제로부터 강(降)을 받았는데, 『동경대전』의 ‘포덕가’에 나와 있는 그때의 정황은 이러하다.
뜻밖에도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執證)할 수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神仙)의 말씀이 있어서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 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또 묻기를 “그러면 서도(西道)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靈符)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형상은 태극(太極)이요, 또 형상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呪文)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이 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최제우는 상제로부터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則汝心)’라는 결정적 계시를 받은 후, 홀연히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하느님)을 자신 속에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원리를 깨닫고 주문(呪文)을 적어내어 포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국가의 기강과 사회도덕이 모두 타락하여 국가는 외세에 대응할 힘이 없었고, 서민들은 각종 차별주의적인 제도에 속박되어 권익이 보장되지 못하고 억압당하여 억울함에 한이 맺혔으니, 최제우는 이러한 세상을 구하고자 먼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포덕천하(布德天下)의 기치를 내걸고 구국제민(救國濟民)을 표방하는 한편, 당시 외래 종교인 서교(西敎)에 상대되는 동학(東學)을 창시하여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고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정신을 배양했다.
그리고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한민족의 전통적인 제천신앙(祭天信仰)의 핵심인 한울님(하느님)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 자신과 세계를 구하자는 신앙이며, 기존의 낡은 세계와 질서를 근본부터 부인하는 개벽사상(開闢思想)이었다.
이러한 사상이 농민, 천민, 유생에 이르는 광범위한 계층에 ‘후천 개벽 세상’이 도래됨을 공포하며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차별이 없는 평등세상을 선포한 후천(後天) 개벽설(開闢說)은 억압받던 기층 농민이나 천민들에게 열광적인 희망을 주었던 반면, 상류층의 양반계급과 조정에서는 위협의 대상이었다.
그 와중에 동학은 1861년 6월부터 포교활동을 시작하여 삽시간에 수많은 신도들을 확보했고, 동학세력의 교세가 확장되어 나가자 당시 혼란한 시국에 빠져 있던 조정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최제우는 1862년 9월 경주관아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간신히 풀려나오게 된다. 그 후 그는 포교활동이 순탄치 않게 되자 교통(敎統)을 이을 후계자 선정과 교의(敎意)를 정립하기 위한 경전(經典) 편술(編述)과 동학의 기본 조직인 접주제(接主制)를 실시하고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두어 관장하게 하는 등 대폭 활동의 방향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14개 접소에 접소마다 교인이 3,000명에 달했다. 그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大道主)로 삼고 8월 14일 교통(敎統)을 계승시켜 교주(敎主)로 삼았다.
그러나 최제우는 지방 접소를 순회하다가 1863년 12월 9일에 경주 용담정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그리고 갑자년(甲子年, 1864년) 3월 10일에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大邱) 장대(將臺)에서 사형되었다. 이 때 최제우의 나이 41세였다.
최제우는 사형 당시, 북향사배(北向四拜)를 하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는데 그의 유언은 당시 처형장에 모였던 동학교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더디도다 더디도다
만고(萬古) 없는 무극대운(无極大運)
팔 년이 더디도다.
전 사십은 나려니와
후 사십은 누구련고.
최제우의 유언대로 최제우가 죽은 지 8년 후인 신미년(辛未年, 1871년)에 전라북도 고부군 우덕면 손바래기 마을에서 한 신인(神人)이 탄강하게 되었으니 바로 이 분이 천 • 지 • 인 삼계의 주인이요, 개벽장(開闢長)이신 강증산(姜甑山) 성사(聖師)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분은 39세를 일기(一期)로 화천(化天)하시었다. 최제우는 41세로 타계하고 증산께서는 39세로 하늘로 돌아가시니 전 사십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요, 후 사십은 곧 증산 성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의 유언은 8년 뒤에 오시는 그분이 곧 무극대운을 열어 그가 하지 못했던 광구창생을 하신다는 예언이었던 것이었다.
최제우의 말을 좀더 인용하여 보면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나 역시 바라기는 한울님만 믿고”라는 『용담유사』「교훈가」중에서 말하였듯이 하느님이 계심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 저 말 다 던지고 한울님만 공경하면 아 동방 삼년괴질 죽을 염려 있을소냐”라고 『용담유사』「권학가」중에서 일러주고 있다. 또 “어화 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보냐,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운수로다”라고『용담유사』「용담가」중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극대운을 열어 주심을 알 수 있다.
이마두와 진묵이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열려고 하였으되 실패하였던 가장 큰 원인은 유교의 폐습이었다.
유교의 폐습이란 반상구분, 적서차별, 남존여비와 같은 강권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하기위해 규정지어 놓은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제도를 말한다.
이러한 악습이 있는 한은 결코 개벽(開闢)은 이루어 질수가 없고, 하늘의 덕(德)이 만천하에 펼쳐 질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썩은 유교의 악습은 하루 속히 일소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제우 역시 유교의 전헌(典憲), 즉 유교의 가르침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의 저서인『동경대전』「수덕문(修德文)」을 보면 이러한 내용들을 볼 수 있다.
元亨利貞 天道之常 惟一執中 人事之察 故 生而知之 夫子之聖質
원형이정 천도지상 유일집중 인사지찰 고 생이지지 부자지성질
學而知之 先儒之相傳 雖有困而得之 淺見薄識 皆由於吾師之盛德
학이지지 선유지상전 수유곤이득지 천견박식 계유어오사지성덕
不失於先王之古禮
부실어선왕지고례
원 • 형 • 이 • 정은 천도의 떳떳한 것이요, 오직 한결같이 중도를 잡는 것은 인사의 살핌이니라.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아는 것은 공부자의 성인 바탕이요, 배워서 아는 것 은 옛 선비들의 서로 전한 것이니라.
비록 애써서 얻은 천견박식이라도 다 공자님의 성덕으로 된 것이요 선왕의 옛 예의를 잃지 아니한 것이니라.
胸藏不死之藥 弓乙其形 口誦長生之呪 三七其字 開門納客 其數其然
흉장불사지약 구을기형 구송장생지주 삼칠기자 개문납객 기수기연
肆筵設法 其味其如 冠子進退 若有三千之班 童子拜拱 倚然有六七之
사연설법 기미기여 관자진퇴 약유삼천지반 동자배공 의연유육칠지
詠 年高於我 是亦子貢之禮 歌詠而舞 豈非仲尼之蹈
영 연고어아 시역자공지례 가영이무 기비중니지도
가슴에 불사약을 지녔으니 그 형상은 궁을이요, 입으로 장생하는 주문을 외우니 그 글자는 스물한자라. 문을 열고 손님을 맞으니 그 수효가 그럴듯하며, 자리를 펴고 법을 베푸니 그 재미가 그럴듯하도다.
어른들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은 마치 삼천제자의 반열같고, 어린이들이 읍하고 절하는 것은 육칠의 읊음이 있는 것 같도다.
나이가 나보다 많으니 이 또한 자공의 예와 같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니 어찌 공자의 춤과 다르랴.
이와 같이 최제우가 유교의 전헌(典憲)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유교의 폐습을 개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땅에 하느님이 오시다
상제께서는 이제 인간에게 맡겨서 진멸지경에 처한 천하를 바로 잡기는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스스로 강세하시기에 이르신 것이다.
상제께서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영(靈)으로 내려오셔서 30년간 천하를 대순(大巡)하시고 동쪽 땅 끝 나라인 조선(朝鮮)에 이르러 그치셨다. 그리고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에 30년간을 머무셨다가 최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최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典憲)을 넘어 대도(大道)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 1864년)에 드디어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 1871년) 9월 19일 전라북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 전북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강씨(姜氏)가(家)에서 인간의 모습을 빌어 강세하시니 존휘는 일순(一淳)이시고 자함은 사옥(士玉)이시고 존호는 증산(甑山)이시다.
조선 말엽 조정이 부패하고 창생들이 도탄에 빠져있을 때 이 땅에 오신 강증산 성사야말로 우주변화의 법칙에서 천하절후가 바뀌는 시기를 알려주려 오신 분이며, 육도수에서 서술한 금수세상이 되어버린 지금 사람답게 사는 길을 제시한 분이며, 석가모니가 오오백세를 통해 ‘나의 법에 있어서 힘싸움과 말다툼이 일어나 깨끗한 법은 없어지고 견고한 것이 줄어 없어지게 되리니 분명히 알지니라’ 라고 표현한 말법의 세상 속에서 새로운 도(道)를 세워 지상선경을 건설하고자 인세에 강림하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또한 지맥론에서 보듯 장춘진인이 밝혀놓은 곤륜산 제 4지맥에서 증산이 조선에 오신다는 예언도 빼놓을 수 없는 증거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강증산 성사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며 그 분을 추종하는 수많은 종파가 존재하고 있다. 또한 그 분의 신이한 행적과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땅에 오신 강증산 성사는 천지가 병들어 있는 현실에서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시는 전대미증유의 진리를 선포하시고 이에 수반된 삼계공사를 행하셨다. 그야말로 하늘의 상제가 아니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분이야말로 인류가 고대하던 상제(하느님)의 강림이신 것이다.
당시 강증산 성사께서는 종도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말로써 혹은 여러 방편으로 당시 종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느님이 아니고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천지조화의 권능을 임의대로 행하셨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역사적 사실은 전라북도 정읍과 김제를 중심으로 하여 곳곳에 남아있어 확인이 가능하다.
강증산 성사께서 행하신 많은 기행이적 중 몇 가지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약방에 계시던 겨울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해가 앞산 봉우리에 반쯤 떠오르는 것을 보시고 종도들에게 말씀하시니라. “이제 난국에 제하여 태양을 멈추는 권능을 갖지 못하고 어찌 세태를 안정시킬 뜻을 품으랴. 내 이제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고 담배를 물에 축여서 세 대를 연달아 피우시니 떠오르던 해가 산머리를 솟지 못하는지라. 그리고 나서 상제께서 웃으며 담뱃대를 땅에 던지시니 그제야 멈췄던 해가 솟았도다. -「전경」권지 1장 27절
상제께서 청도원(淸道院)에서 동곡에 돌아와 계시던 어느 날 “풍 • 운 • 우 • 로 • 상 • 설 • 뇌 • 전(風雲雨露霜雪雷電)을 이루기는 쉬우나 오직 눈이 내린 뒤에 비를 내리고 비를 내린 뒤에 서리를 오게 하기는 천지의 조화로써도 어려운 법이라” 말씀하시고 다시 “내가 오늘밤에 이와 같이 행하리라” 이르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라. 과연 눈이 내린 뒤에 비가 오고 비가 개이자 서리가 내렸도다. -「전경」권지 1장 22절
상제께서 어느 해 여름에 김형렬의 집에 계실 때 어느 날 밤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강감찬은 벼락칼을 잇느라 욕보는구나. 어디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며 좌우 손으로 좌우 무릎을 번갈아 치시며 “좋다 좋다” 하시니 제비봉(帝妃峰)에서 번개가 일어나 수리개봉(水利開峰)에 떨어지고 또 수리개봉에서 번개가 일어나 제비봉에 떨어지니라.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 된 후에 “그만하면 쓰겠다” 하시고 좌우 손을 멈추시니 번개도 따라 그치는지라. 이튿날 종도들이 제비봉과 수리개봉에 올라가서 살펴보니 번개가 떨어진 곳곳에 수십 장 사이의 초목은 껍질이 벗겨지고 타죽어 있었도다. -「전경」권지 1장 2절
상제께서 을사(乙巳)년 봄 어느 날 문공신에게 “강태공(姜太公)은 七十二둔을 하고 음양둔을 못하였으나 나는 음양둔까지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전경」행록 3장 28절
이와 같이 태양을 멈추시거나 풍 • 우 • 상 • 설 • 뇌전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고 그치게 하셨으나 일정한 방법이 없이 말씀으로 또는 술잔을 들어 풍우를 일으키시고, 벽력표(霹靂票)를 벽에 붙이시거나 땅에 묻기도 하시어 뇌전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분이 하느님의 강림임을 깨달은 종도의 고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정미년 가을 어느 날 신원일과 박공우와 그 외 몇 사람을 데리고 태인 살포정 주막에 오셔서 쉬시는데 갑자기 우뢰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 집에 범하려 하기에 상제께서 번개와 우뢰가 일어나는 쪽을 향하여 꾸짖으시니 곧 멈추는지라. 이 때 공우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번개를 부르시며 또 때로는 꾸짖어 물리치기도 하시니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하시니 상제시라.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분을 좇을 것이라고 마음에 굳게 다짐하였더니 어느 날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만날 사람 만났으니”라는 가사를 아느냐 하시고 “이제부터 네가 때마다 하는 그 식고(食鼓)를 나에게 돌리라” 하시니 공우가 감탄하여 여쭈기를 “평생의 소원이라. 깨달았나이다.”하였도다. 원래 공우는 동학신도들의 식고와는 달리 “하느님 뵈어지소서”라는 발원의 식고를 하였는데 이제 하시는 말씀이 남의 심경을 통찰하심이며 조화를 임의로 행하심을 볼 때 하느님의 강림이시라고 상제를 지성으로 받들기를 결심하였도다. -「전경」교운 1장 25절
그런데 많은 나라 중에서 왜 하필 조선으로 오셨을까? 19세기에 지구상에 있는 나라 중에서 당시만 해도 아직 조선은 본격적인 제국주의의 마수(魔手)가 뻗치기 전(前)이었으며 당장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핍박받고 고초를 겪는 민족이 하나 둘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에 대한 상제의 말씀은 이러하셨다.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의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려 하노라. -「전경」권지 1장 11절 중에서
상제께서 동쪽 땅 끝 조그만 반도국에 머무신 이유는, 조선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무려 930여회에 이르는 외세의 침입으로 핍박당하면서도 민족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심성(心性)이 착할 뿐만 아니라, 신명(神明)과 하늘을 잘 섬기는지라 무명의 약소민족인 조선민족(朝鮮民族)을 도와 만고(萬古)에 쌓인 원(寃)을 먼저 풀어주고 세계개벽의 중심국으로 삼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 인세로 오셔서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사멸에 빠진 세계창생을 건지는 공사(公事)를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役事)하신 것이다. 상제께서는 특히 “조선과 같이 신명을 잘 대접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도다”하시며 조선민족을 신명과 하늘을 잘 섬기는 민족이었음을 칭찬하시기도 하였다.
강증산 성사는 혼란에 빠진 삼계를 바로잡아 진멸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직접 이 땅에 강세하신 구천상제이시다. 이제 우리는 인류를 구하고자 오신 상제(하느님)의 대의에 머리 숙여 예를 올리며 이 분의 뜻을 세계만방에 알려나가는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천지공사
천지(天地)는 우주(宇宙)이며, 우주는 집 ‘우(宇)’ 집 ‘주(宙)’로써 우리가 사는 집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천지가 병들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된 사실이다. 천지공사(天地公事)라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병든 천지 즉, 우주를 새롭게 뜯어 고치는 일을 말한다.
강증산 성사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 고치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즉 지금까지의 깊이 병든 천지를 뜯어버리고, 새로운 법리를 세워서 새하늘과 새땅을 열어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불능하신 천지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아니고는 감히 할 수 없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강증산 성사께서는 예로부터 우리인류가 고대하던 하느님의 강림이시며, 성인들이 가르쳐왔던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신약전서』「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보면 “내가 새하늘 새땅을 보니 처음하늘과 처음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계시(啓示)하였다.
그러나 강증산 성사께서는 “나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금 가슴 속에 드나들게 하여 다 고쳐 쓰리라. 그러므로 나는 약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천하고 어리석은 자를 쓰리니 이는 비록 초목이라도 기운을 붙이면 쓰게 되는 연고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을 비교해보면 조물주와 피조물의 구분이 가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하여 이 땅에 하느님이 강림하셨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구절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천지공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말 상제께서 강림하신 시기는 서구 제국주의가 상극적 착취에만 열을 올리고 있던 때로써 전 인류가 서양 제국에 의해 진멸하게 될 지경에 놓여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의 광란도 알고 보면 선천의 도수가 상극에 지배되어 그 원한이 터져 나옴으로 인한 것이니 상제께서는 선천의 도수 전체를 뜯어 고치는 천지공사를 단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제께서는 신축년(辛丑年, 1901)에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으로 하여금 신명을 드나들게 하여 고쳐 쓰리라’는 삼계를 개조하는 공사를 선포하셨다.
묵은 하늘은 사람을 죽이는 공사만 보고 있었도다. 이후 일용 백물이 모두 핍절하여 살아갈 수 없게 되리니 이제 뜯어 고치지 못하면 안 되느니라.
- 「전경」 공사 1장 11절
상제께서 이 세상에 강세하셔서 하늘도 뜯어 고치고 땅도 뜯어 고쳐서 신명이 사람에게 드나들 수 있게 하시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 쓰고 모든 것에 기운을 붙여 쓰기로 하셨도다. 이것은 삼계를 개조하기 위함이로다.
- 「전경」 예시 7절
이와 같이 전대미증유의 말씀을 하시면 천지공사를 선포하셨으니 이는 오로지 우주(宇宙)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삼계대권(三界大權)으로 주재하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인 것이다.
상제께서 신축년 5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가셔서 그 절 주지승 박금곡(朴錦谷)에게 조용한 방 한 간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하고 불음불식의 공부를 계속하셔서 49일이 지나니 금곡이 초조해지니라. 마침내 7월 5일에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를 열으시고 방안에서 금곡을 불러 미음 한 잔만 가지고 오라 하시니 금곡이 반겨 곧 미음을 올렸느니라.
-「전경」 행록 2장 12절
시속에 말하는 개벽장은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비겁에 쌓인 신명과 창생을 건지는 개벽장(開闢長)을 말함이니라. 상제께서 대원사에서의 공부를 마치신 신축(辛丑)년 겨울에 창문에 종이를 바르지 않고 부엌에 불을 지피지 않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음식을 전폐하고 아흐렛동안 천지공사를 시작하셨도다. 이 동안에 뜰에 벼를 말려도 새가 날아들지 못하고 사람들이 집 앞으로 통행하기를 어려워하였도다.
-「전경」 공사 1장 1절
신축년(辛丑年)은 서기 1901년이다. 2001년 새 세기가 시작되기 꼭 100년 전 상제께서는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여시니 곧 천지개벽의 시작이다. 선천 5만년의 묵은 기운을 걷어내고 후천 5만년의 새로운 우주, 새로운 삼계(三界)를 열기 위해 우주의 설계를 시작하시는 바로 그 시점인 것이다.
상제께서 새 기운을 일으키신 신축년(1901년)은 새 하늘, 새 땅, 즉 신천지를 건설하는 공사를 시작하신 원년이다. 지금도 상제께서 보신 신축년 공사의 기운이 지금까지 내려와 시속에 쓰이고 있으니 우리가 흔히 공사현장이 보면 ‘신축부지’니 ‘신축공사’니 ‘신축건물’이니 하는 말들과 사람이 많이 모여 있으면 ‘무슨 공사냐?’ 하고 묻는 말이나 ‘공사판이다, 공사한다, 공사중이다’ 하는 말들은 모두 상제께서 신축년에 천지공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에 그 발음이 통하여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선천의 모든 섭리(攝理)는 파기(破棄)되어야 하고 새로운 후천의 섭리가 세워져야 한다. 상제께서 세계의 판도를 새롭게 짜기 위해서 먼저 신명계(神明界) 공사부터 처결하시니 인사(人事)는 저절로 잡혀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천지공사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을 해야 한다. 구천에 계시던 상제께서 강세하시게 된 경위나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다. 또한 상제께서는 천 • 지 • 인 삼계를 고쳐서 널리 천하를 구하기 위해 오셨음을 밝혀놓았으니 이는 사람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전경」에 대원사 공부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대목이 전한다.
상제께서 대원사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시니 대원사 골짜기에 각색의 새와 각종의 짐승이 갑자기 모여들어 반기면서 무엇을 애원하는 듯하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희 무리들도 후천 해원을 구하려 함인가” 하시니 금수들이 알아들은 듯이 머리를 숙이는도다. 상제께서 “알았으니 물러들 가 있거라.”고 타이르시니 수많은 금수들이 그 이르심을 좇는도다.
-「전경」 행록 2장 15절
사람과 대자연, 은하계 저편 끝까지 펼쳐진 우주, 그리고 생성(生成) • 화육(化育) • 변화(變化) • 소멸(消滅)하는 전 과정이 상극(相克)으로 운행하고 있어, 이러한 낡은 우주의 질서를 크게 변혁시켜 후천(後天)의 상생대도(相生大道)를 열고자 상제께서 친히 인세(人世)에 오셨다.
새로운 상생의 법리는 산천초목과 길짐승, 날짐승, 들짐승, 산짐승, 물짐승 등 금수(禽獸)와 같은 미물(微物)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가 대자연이라고 일컫는 생태계 속에서 펼쳐지는 잔인하고 비정한 쟁투, 생존(生存)을 위한 절체(絶體) 절명(絶命)의 혈투와 먹이사슬이라고 하는 생태계의 법칙 속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얼마나 처절한 몸부림을 해야만 했을까? 수만 년 혹은 수십만 년에 걸쳐 육신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약한 짐승들, 또한 그들을 잡아먹고 살아야 하는 육식동물들. 이들은 이 지긋지긋한 고리를 끊게 해달라고 상제께 애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상제께서 대원사에서 49일간 불음불식의 공부를 마치고 나오신 그날, 계곡에 모였던 것이다.
말 못하는 짐승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사람과 사람, 신명과 신명, 사람과 신명 간에 쌓인 원울이 어떠하겠는가? 천지를 가득 메우고도 남음이 있는 원울, 이것은 맨 처음 천지를 창조하신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이 아니면 누가 있어 해결할 것이며 이 어지럽고 혼탁한 천지를 누가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미륵세존을 비롯한 천지의 대신명들이 모여 구천에 하소연하고 이에 감응하여 구천에 계시던 상제께서 인신(人身)으로 화하게 되신 것이다.
상제께서는 해원(解寃)을 위주로 하여 천지공사를 보셨다.
해원이란 선천 오만 년간 인사와 사물이 상극에 지배되어 천지인 삼계에 맺히고 쌓였던 원울을 풀어 해소하는 것이다.
후천이 도래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공사가 바로 해원공사이다. 억울함과 원한이 있다면 서로 통할 수가 없고, 통하지 못하면 합덕조화가 이루어질 수 없으니 만물 또한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원(解寃)으로써 수천 • 수만 년의 원울을 풀어 해소함으로써 만물만사가 상생이 될 수 있고 상생이 되어야 합덕조화가 이루어져 만사가 성사(成事)되고 만물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완성된 세상이 선경세상인 것이다.
상제께서 만고에 쌓인 원한을 풀어 선경을 이루는 해원공사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에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고 김형렬에게 말씀하시고 그 중의 명부공사(冥府公事)의 일부를 착수하셨도다.
-「전경」공사 1장 3절
상제께서 가라사대 “명부의 착란에 따라 온 세상이 착란하였으니 명부공사가 종결되면 온 세상일이 해결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뒤부터 상제께서 날마다 종이에 글을 쓰시고는 그것을 불사르셨도다.
-「전경」 공사 1장 5절
상제께서 七월에 “예로부터 쌓인 원을 풀고 원으로 인하여 생긴 모든 불상사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시니라. ••• 원(寃)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에서 건지려면 해원공사를 행하여야 되느니라”고 하셨도다.
-「전경」 공사 3장 4절
상제께서 가라사대 “지기가 통일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제각기 사상이 엇갈려 제각기 생각하여 반목 쟁투하느니라. 이를 없애려면 해원(解寃)으로써 만고의 신명을 조화하고 천지의 도수를 조정하여야 하고 이것이 이룩되면 천지는 개벽되고 선경이 세워지리라” 하셨도다.
-「전경」공사 3장 5절
이상과 같은 말씀에서 해원공사로써 인류의 파멸을 건지며, 해원으로써 만고의 신명을 조화하여 천지도수를 조정하여 천지를 개벽하는 공사(公事)를 보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천 수만 년 간 인간 사물을 지배하였던 상극(相克)의 원리를 뜯어버리고, 후천은 상생(相生)의 법리를 세워 영원한 낙원을 세우는 공사를 보셨다.
玄武經
현무경
水火金木待時以成
수화금목대시이성
水生於火
수생어화
故天下無相克之理
고천하무상극지리
수화금목은 성공할 때를 기다렸다.
수기에서 화기가 생하여 나온다.
그러므로 천하에는 상극의 법리가 없다.
-「전경」 교운 1장 66절
선천에서는 수기와 화기는 상극(相克)이 되어 서로 쟁투하는 관계였다.
극(克)이란 이길 ‘극’으로써 상극은 서로 이기려는 기운을 말한다. 그러므로 필연적인 쟁투가 수반되고, 이기는 쪽은 춤을 추지만, 지는 쪽은 원을 품고 복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복수는 또 원을 낳게 되니 선천이 상극에 지배됨으로 인해 천지에 원이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이 상극의 지배원리를 한마디로 수화상극(水火相克)의 원리로 표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천에는 수기에서 화기가 생하고, 화기에서 수기가 생하도록 함으로써 오직 상생으로 만사가 이루어지도록 되고 만물이 화합하도록 함으로써 상극의 법리가 없어지도록 공사를 보셨다.
이로써 천지에는 수 • 화 • 풍 삼재가 끊어지고, 인류는 전쟁이 없는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만인이 화평하고 화목하여 원울과 탐음이 없는 영원한 낙원이 이루어지도록 후천오만년간의 천지개벽 공사를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상제께서 동토에 강림하셔서 천지공사를 보시던 중 가장 시급한 문제 중의 하나는 서구제국주의의 광란으로 진멸지경에 처한 천하를 구제하는 일이었다.
먼저 누란지세에 처한 동양을 건지기 위해 서양세력을 물리쳐야 했고, 그 연후에 장차 지상선경을 건설하기 위해 세계를 오선위기 구도로 재편성 시켜야 했다. 그러기위해서는 서양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조선을 중심으로 4대강국이 둘러싸는 구도를 형성하도록 재편성 시키는 공사를 보시게 된다.
이 오선위기 도수가 실행되어 감에 따라 한국은 점차 상등국으로 부상되어 국운(國運)이 돌려 잡히게 하고, 이 땅에 도(道)가 창도되게 하여 장차 천하의 대세를 이끌어갈 1만 2천 도통군자가 창성되게 공사를 보셨다.
여기에 대한 도수의 흐름과 증명은 앞서 발간된 “오늘의 세계가 오선위기로 대순하다”라는 책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라고, 여기에서는 그 맥락만 집어 약술하고자 한다.
먼저 동양에서 서양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공사를 보셨다.
이제 동양(東洋) 형세가 그 존망의 급박함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으므로 상제께서 세력이 서양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공사를 행하셨도다.
-『전경』공사 1장 13절
"이제 동양 형세가 위급함이 누란과 같아서 내가 붙잡지 아니하면 영원히 서양에 넘어가리라" 깊이 우려하시사 종도들에게 계묘년(1903년) 여름에 「내가 일로전쟁(日露戰爭)을 붙여 일본을 도와서 러시아를 물리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전경』 예시 23절
당시 동양권을 차지하려는 세력 중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다름 아닌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선발 주자들에 비해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고 또한 서구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대륙에 바로 연결되어 동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이점(利點)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무역의 활로를 열기위한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남진 정책을 추진해야만 했다. 또한 일본은 개방이후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혁신하여 발 빠르게 서구 문명을 흡수하고 그들의 영원한 야욕인 대륙진출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러시아의 남진정책과 일본의 대륙진출은 필연코 조선에서 부딪치게 되어있었다. 조선을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에 따라 러시아가 동양권 전체를 석권하느냐,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느냐하는 결정이 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상제께서는 일본에 힘을 실어주어 러시아를 물리치고 동양을 건지고자 하셨다. 그러나 당시로써는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왜냐하면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그때까지는 러시아에 비해 군사력이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약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이 불리하게 된 일본은 1904년 2월 중국 여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함대에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함으로써 무모하게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러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종지부를 찍게 된 전투는 다름 아닌 대한해협에서 일어난 해전(海戰)이였다. 육전(陸戰)에서 불리해진 러시아는 흑해에 정박 중이던 발틱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발틱함대는 뜻밖에도 약세를 면치 못하던 일본 해군에게 궤멸되고 마는데 이는 상제님의 공사에 의한 신묘한 기적 즉, 일본인들이 신풍(神風: 가미가제)라고 부르는 동남풍 덕택이었다.
상제께서 “이제 서양 사람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양을 붙잡음이 옳으니 대신문(大神門)을 열어 사십구 일을 한 도수로 하여 동남풍을 불어 일으켜 서양 세력을 꺾으리라”고 말씀하시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전경』 예시 24절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38척을 앞세우고 대한해협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이것은 한반도 전체를 포위하여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겠다는 계책이었다. 그때 일본 해군 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일주일에 세 번이나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거대한 발틱함대가 대한해협으로 일렬로 줄을 지어 들어오는 꿈이었다.
사령관은 “이것은 하늘의 계시다”고 하면서 작전을 구사 하였는데 일명 ‘T자 작전’이다. 세로로 일(ㅣ)자로 들어오는 함대를 한 일(一)자로 막는다는 전술이다. 그런데 사실 이 전술은 매우 위험한 전술이었다. 일본 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에다 한 일(一)자로 가로막게 되면 표적이 넓으므로 100% 당하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그것은 때 아닌 동남풍이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측면에서 파도를 맞는 러시아 함대는 몹시 흔들렸지만 파도를 타고 있는 일본 함대는 비교적 안정되었기 때문에 발틱함대의 포탄은 번번이 빗나가고 말았지만 일본 함대의 포격은 적중했다. 결국 발틱함대는 38척으로 출정하여 겨우 2척이 살아 돌아가는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만약 이때 동남풍이 불어주지 않았다면 일본은 해전에서 승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이 동남풍을 신(神)이 보내준 바람이라 하여 ‘신풍(神風:가미가제)’이라 한다. 그 때는 5월 27일, 28일로 동남풍이 세차게 올라올 때가 아니었다. 이 동남풍은 바로 상제께서 누란지세(累卵之勢)에 처한 동양을 구하고자 대신문(大神門)을 열어 불게 한 신풍이었던 것이다.
이제 동양에서 서양세력은 물리쳤다. 그리고 조선을 개혁하여 세계 개벽의 중심지로 삼기위해 공사를 행하셨다. 개혁이란 오랫동안 조선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유교의 폐습을 일소하는 것이었다. 이마두도, 진묵도, 최제우도 모두 유교의 폐습을 개혁하지 못함으로 인해 지상선경건설에 실패했었다. 그러므로 조선을 세계 개벽의 중심지로 삼아 인류에게 지상선경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교의 폐습이 먼저 개혁되어야만했다. 그러나 지배세력은 양반들로써 쉽게 자신들의 권한을 포기하려 들지 않고 서민들은 또한 힘이 없었으므로 여러 가지 상황에서 자체적인 개혁은 어려웠다. 결국은 외세에 의지해야 했던 것이다.
상제께서 어느 날 가라사대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 청국으로 넘겨도 그 민족이 우둔하여 뒤 감당을 못할 것이라.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신명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 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시 천하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와 일월 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 주어서 역사케 하고자하나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인(仁)이니라. 만일 ‘인’자까지 붙여 주면 천하가 다 저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인’자를 너희들에게 붙여 주노니 잘 지킬지어다”고 이르시고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오. 저희들은 일만 할 뿐이니 모든 일을 밝게 하여 주라.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 하셨도다.
-『전경』 공사 2장 4절
상제께서는 이 공사를 일본에 맡겨 그들의 오랜 원을 풀어주고 동시에 유교의 폐습은 일소하는 개혁을 단행하셨던 것이다. 일본에게 일시 천하통일지기를 부여하여 엄청난 웅지를 갖게 함으로써 북으로는 만주대륙을 장악하고, 남으로 필리핀에 이르는 동남아일대까지 진출하였고, 동으로는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까지 치르게 하였고, 일월대명지기를 부여하여 짧은 기간 내에 선진문명을 일으켜 급격히 군수산업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일시적인 기운이지 일본에게 천하를 넘겨주고자 하신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기운을 붙이시는 것은 일본이 조선에 들어와 개혁을 하는 동안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지 못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인(仁)이라고 하셨다. 그것마저 일본에게 주게 되면 천하가 다 저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하시고 그것은 너희 조선에게 붙여주니 잘 지켜라고 하셨다. 인(仁)은 씨앗 ‘인’자 이다. 도통군자의 씨앗을 의미한다.
상제께서 태인 도창현에 있는 우물을 가리켜 “이것이 젖(乳) 샘이라”고 하시고 “도는 장차 금강산 일만이천 봉을 응기하여 일만이천의 도통군자로 창성하리라. 그러나 후천의 도통군자에는 여자가 많으리라” 하시고 “상유 도창 중유 태인 하유 대각(上有道昌中有泰仁下有大覺)”이라고 말씀하셨도다.
-『전경』 예시45절
태인(泰仁)이란 클 ‘태(泰)’ 씨앗 ‘인(仁)’으로 ‘큰 씨앗’이란 뜻이다. 상제로부터 대업을 계승하신 도주 조정산에 의해 1925년 4월 28일에 전북 구(舊) 태인(泰仁)에 무극도(无克道)가 창도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1만 2천 도통군자를 창성할 도(道)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을축년에 구태인(舊泰仁) 도창현(道昌峴)에 도장이 이룩되니 이 때 도주께서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고 상제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로 봉안하고 종지(宗旨)및 신조(信條)와 목적(目的)을 정하셨도다.
-『전경』 교운 2장 32절
일본이 조선으로 들어와 세계를 석권할 욕망으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이 땅에서는 도통군자를 만들어낼 도(道)가 창도되었다. 이제 한국을 개벽의 중심국으로 만들기 위한 바탕이 마련되었으니, 한국이 상등국으로 성장하여 그 충분한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대세를 돌려놓는 공사를 보셨다.
그것이 바로 오선위기 도수이다.
상제께서 종도들을 데리고 계실 때 “현하 대세가 오선위기(五仙圍碁)와 같으니 두 신선이 판을 대하고 있느니라.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는데 한 신선은 주인이라 어느 편을 훈수할 수 없어 수수방관하고 다만 대접할 일만 맡았나니 연사에만 큰 흠이 없이 대접만 빠지지 아니하면 주인의 책임은 다한 것이로다. 바둑이 끝나면 판과 바둑돌은 주인에게 돌려지리니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되 우리 나라는 좌상(座上)에서 득천하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전경』 예시 28절
오선위기는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는 것을 말하는데 바둑을 두는 두 신선은 미국과 소련이고, 또 훈수 두는 두 신선은 일본과 중국을 말한다. 일본은 미국을, 중국은 소련을 각기 훈수 두는 형국이다. 주인신선은 도(道)가 창도된 우리나라로써 주인이므로 어느 편도 훈수하지 못하고 다만 대접할 일만 맡았다.
이러한 오선위기의 대세를 이루기 위해서는 당시 세계의 대세를 장악하고 있던 서구유럽 제국주의가 무너져야했고, 4대강국이 주도권을 행세하는 대세로 재편성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상제께서는 먼저 서구유럽 제국주위들이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스스로 무너지게 하였으니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신명의 역사가 있었다. 이 신명의 역사(役事)에 의해 일어난 엄청난 사건이 바로 제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다.
상제께서 계묘년에 종도 김형렬과 그 외 종도들에게 이르시니라. “조선 신명을 서양에 건너보내어 역사를 일으키리니 이 뒤로는 외인들이 주인이 없는 빈집 들듯 하리라. 그러나 그 신명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제 집의 일을 제가 다시 주장하리라.”
-『전경』 예시 25절
상제께서 전주 김준찬(金俊贊)의 집에 가셔서 김덕찬(金德贊). 김준찬(金俊贊). 김낙범(金落範)들과 좌석을 함께 하시다가 가라사대 “근자에 관묘(關廟)에 치성이 있느냐?”고 하시기에 낙범이 있음을 아뢰었도다. 이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그 신명이 이 지방에 있지 않고 멀리 서양(西洋)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나니라”고 알리셨도다.
-『전경』 행록 4장 11절
서양에서 일어났던 대란(大亂)이란 바로 대전(大戰)이 일어난 것을 말한다. 상제께서 공사보신대로 조선신명들이 서양으로 건너가서 역사하자 제국주의 국가들 간에 대전(大戰)이 일어나고 그 결과 스스로 붕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제 1,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을 보면 사소한 문제가 발단이 되어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당시 발칸반도의 작은 나라들끼리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대립 속에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처가 발칸반도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중 세르비아 청년에게 살해당함으로 인하여 발발한 전쟁이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에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러시아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가담하였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기위해 벨기에를 침공하자 벨기에와 동맹국이었던 영국이 가세하여 불과 달포사이에 여러 유럽 국가들이 마치 굴비 엮듯이 엮여들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은 1929년 10월 24일(검은 목요일) 미국 뉴욕의 월가(Wall Street)에서 일어난 주가폭락사태로 인해 전세계에 공황이 파급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대전(大戰)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자본국들이 고율관세와 수입쿼터등의 보호무역체제를 강화시켜 나가자, 경제권이 협소하고 경제기반이 취약하여 경제공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활로로 열기위해 세계 재분할 즉, 대외침략으로 풀고자 한 것이 제 2차 세계대전이다.
이와 같이 제1, 2차 세계대전은 사소한 원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히 대세를 돌려놓기 위한 보이지 않는 조선신명들의 역사(役事)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결과는 서구유럽제국주의 국가들은 거의 알거지가 되어 무너졌고, 세계의 주도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교체되었다는 점이다.
대전 중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 물자를 공급해주고 많은 이익을 챙기며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가 되었고, 전쟁 후 채권국으로 올라섰다. 이 구도는 이후 다시는 바뀌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대전 중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하여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등장한 것이다.
이로써 향후 60~70년간 세계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하여 냉전체제를 이끌어갈 두 신선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으나 이제 갓 태어난 소련은 아직 힘이 없었으므로 바둑을 둘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런데 제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은 실력을 발휘하여 독일을 무너뜨리는 선두주자로 나서게 되었고,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이라는 명목하에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를 점령하여 친소정권을 수립하여 세력권을 넓혔고, 미 • 영 연합군보다 독일의 베를린을 먼저 점령함으로써 독일의 각종 신기술 및 신병기를 확보하게 되어 향후 미국과 대등하게 어깨를 견줄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미국과 대적하여 바둑을 둘 신선인 소련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신선은 한반도에서 마주앉게 되는데, 그것이 북쪽은 소련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명목하에 들어왔고, 남쪽은 미국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명목하에 들어와 38도 선을 두고 분할 점령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탁통치(信託統治)이다. 한반도를 바둑판으로 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세계대세를 겨루게 된 것이다.
1949년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이 이끄는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오랜 내전에서 승리하고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을 대만으로 축출함으로써 소련을 훈수 둘 한 신선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6. 25전쟁 중 미군의 무기생산을 도움으로써 미국을 훈수 두는 신선이 되는 것이다.
신탁통치로 남북이 대치된 상태에서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전쟁을 감행함으로써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어서 미군의 지원을 받은 남한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감으로써 일진일퇴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을 훈수두는 중국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여 한강 이북에 머물게 되었다.
이로써 상제께서 “장차 청 • 일 사이에 싸움이 두 번 나리니 첫 번에는 청국이 패하리라. 다시 일어나는 싸움은 십 년이 가리니 그 끝에 일본이 쫓겨 들어가려니와 호병(胡兵)이 들어오리라. 그러나 한강(漢江)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호병(胡兵)이란 중국 북방민족[五胡] 병사를 말한다. 즉 주로 중국 북방민족들로 구성된 중공군을 말하는 것이다.
6 • 25전쟁 후 한반도의 허리에는 마치 태극모양의 휴전선이 생기게 되었고, 한반도를 중앙에 두고 사대 강국이 둘러싸고 냉전체제로 대치함으로써 다섯 신선이 바둑 두는 형국인 오선위기(五仙圍碁)로 세계대세가 돌려 잡히게 되었다. 이 모양은 마치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의 모양과 동일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도주 조정산께서 태극도(太極道)를 창도하신 후에 일어난 일이다.
일제 36년간 한반도를 덮고 있었던 일장기가 무극(无極)의 형상을 하고, 이때 무극도(无極道)가 창도되었던 것과 대비되는 것이라 하겠다.
또 6 • 25 전쟁으로 일진일퇴한 현상은 바로 태극의 기동도수로써 태극이 기동하여야 만물이 생성될 수 있는 이치이다.
이와 같이 상제께서는 물샐틈없는 도수를 짜서 세계대세를 오선위기 형국으로 돌려놓으셨던 것이다. 그 와중에 서구 제국주의는 무너졌고, 식민지는 모두 해방되었으며 자본과 사회주의라는 양대 체제 아래 냉전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세를 이끌어가기 위해 창도된 도(道)는 아직 세계대세에 관여치 않고 수수방관 할 뿐이다. 한국이 상등국이 되어 세계대세를 주도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이 땅에 도(道)가 있음으로 인함이다. 즉 이 도(道)가 금강산 1만 2천봉에 응기하여 도통군자가 창성되어 나오게 되면 세계대세는 한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도통군자를 창성시킬 도(道)를 창도한 도주(道主)가 실재 바둑판을 가진 주인이 된다. 그러나 아직은 그러한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주인은 수수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일제시대에 무극도가 창도될 때가 씨앗이라면 태극도가 창도되고 6 • 25전쟁이 일어난 후의 시기는 떡잎이 나오는 시기이다.
그리고 1958년 3월 6일 도주 조정산께서는 박우당을 총도전으로 임명하시고 화천(化天)하신 후, 도전 박우당께서 1969년 대순진리회를 창설하고 난 후의 시기는 많은 가지가 뻗어나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는 때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을 실시하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던 때이다. 즉 대한민국이 4대강국의 중앙에서 점차 상등국으로 부상되어 가던 시기이다. 그리고 드디어 1988년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진영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바둑은 서서히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
중국이 개방을 하고, 동 • 서독이 통일되고, 소련이 붕괴되었다. 냉전은 종식되었고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상제께서 “미국은 한손가락을 퉁기지 아니하여도 쉬이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머지않아 스스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바둑판과 바둑돌은 주인에게 돌려지게 될 것이다.
1991년 대순진리회를 영도하던 도전 박우당께서 차기 도전을 발표[개유보(皆有報)]하시고 1995년 12월 4일(음력)에 화천(化天)하시자 꽃은 떨어지고 열매가 맺히는 도수가 도래된 것이다.
이제 1만 2천 도통군자가 창성하면 바둑판을 운전하여 세계대세를 주도하게 되고, 이때가 되면 한국은 상등국으로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가 좌상(座上)에서 득천하(得天下)하는 이치인 것이다.
바둑판은 가로 19줄, 세로 19줄로 총 361점이 있으며, 중앙의 한 점은 태을점(太乙點)으로써 1만 2천 도통군자를 이끄는 대두목점이 된다. 그리고 360점은 일년 360일에 해당하고 하루 36명이 도수를 맡아 운행하므로 360일 x 36명=12,960명이 자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둑판의 이치이다. 이제 1만 2천 960명의 후천의 지도자가 자리하면 세계대세는 우리나라에 의해 주도될 것이고, 전 세계에 상제님의 대업(大業)인 지상신선실현과 지상선경이 건설되어 인류의 영원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상제께서 1901년(신축년)에 천지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신사년)까지 100년 동안 전 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하여왔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온갖 고난을 겪으며 현재는 세계의 중심 국가로써 발전해가고 있다. 이것은 상제님께서 인간 몸으로 오셔서 천지공사를 해주신 덕택으로 우리는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지난 100년간의 변화, 이것이 바로 개벽(開闢)인 것이다.
종통
1. 강증산(姜甑山) 성사(聖師)는 구천상제(九天上帝)님이시다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상도(常道)를 어김으로써 도(道)의 근원(根源)이 끊어지게 되니 미륵세존(彌勒世尊)께서 원시(元始)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佛)과 보살(菩薩)을 회집하여 삼계(三界)의 혼란과 신명계의 겁액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 구천상제께서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오셔서 천하를 대순(大巡)하시고,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主宰)하셔서, 상도(常道)를 잃은 천지도수를 바로잡아 삼계를 개벽하고 선경(仙境)을 열어 사멸에 빠진 세계창생을 건지시려고 순회하던 중 이 동방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시기 위함이다.
상제께서는 전주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 미륵전 미륵금불에 임하셔서 30년을 계시다가 최제우에게 제세대도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典憲)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1860년)에 드디어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이조 고종 8년 신미년(1871년) 9월 19일에 전북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강씨(姜氏) 가문에서 인간의 모습을 빌어 강세하시니 존호가 증산(甑山)이시다.
강증산 성사께서는 “나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금 가슴속에 드나들게 하여 다 고쳐 쓰리라. 그러므로 나는 약하고, 가난하고, 천하고 어리석은 자를 쓰리니 이는 비록 초목이라도 기운을 붙이면 쓰게 되는 연고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짜놓아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로운 기틀이 열려가게 해놓으셨다.
상제께서 광구천하하심에 있어서 “판 안에 있는 법으로써가 아니라 판 밖에서 새로운 법으로써 삼계공사를 하여야 완전하다”고 하시고, “이 삼계공사는 천 • 지 • 인 삼계를 개벽함이요, 이 개벽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따라 하는 일이 아니요,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예전에도 없었고 이제도 없으며 남에게 이어 받은 것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일이로다”고 말씀하셨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삼계가 개벽되지 아니함은 선천에서 상극(相克)이 인간지사를 지배하였으므로 원한이 세상에 쌓이고 따라서 천 • 지 • 인(天地人) 삼계가 서로 통하지 못하여 이 세상에 참혹한 재화(災禍)가 생겼나니라”고 하시고, 천지공사를 행하셨으니 곧 천지도수를 정리하시고 신명(神明)을 조화하여 만고(萬古)에 쌓인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를 세워 후천 선경(仙境)을 열어 놓으시고, 신도(神道)를 풀어 조화하여 도수를 굳건히 정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신 후 인사(人事)를 조화하시니 만민이 상제님의 무량하신 덕화를 입게 된 것이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오는 좋은 세상에서는 불을 때지 않고서도 밥을 지을 것이고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서도 농사를 지을 것이며, 도인의 집집마다 등대 한 개씩 세워지리니 온 동리가 햇볕과 같이 밝아지리라. 전등은 그 표본에 지나지 않도다. 문고리나 옷걸이도 황금으로 만들어질 것이고, 금당혜를 신으리라. 또 사람마다 불로불사의 장생을 얻으며 궤합을 열면 옷과 밥이 나오며, 만국이 화평하여 시기질투와 전쟁이 끊어지고 천하가 한 집안이 되어 위무와 형벌을 쓰지 않고도 조화로써 창생을 법리에 맞도록 다스리며, 벼슬하는 자는 화권이 열려 분에 넘치는 법이 없고 백성은 원울과 탐음의 모든 번뇌가 없을 것이며, 병들어 괴롭고 죽어 장사 지내는 것을 면하여 불로불사하며, 빈부의 차별이 없고 마음대로 왕래하고 하늘이 낮아서 오르고 내리는 것이 뜻대로 되며 지혜가 밝아져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시방세계에 통달하고 세상에 수 • 화 • 풍 삼재가 없어져 상서가 무르녹는 지상선경으로 화하리라”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선천개벽 이후부터 수한(水旱)과 난리의 겁재가 번갈아 끊임없이 이 세상을 진탕하여 왔으나 아직 병겁(病劫)은 크게 없었나니, 앞으로는 병겁이 온 세상을 뒤덮어 누리에게 참상을 입히되 거기에서 구해낼 방책이 없으리니 모든 기이한 법과 진귀한 약품을 중히 여기지 말고 의통을 알아두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 봄으로부터 이 동토에서 다른 겁재는 모두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만은 남았으니 몸 돌이킬 여가가 없이 홍수가 밀려오듯 하리라” 하시고, 또 “이후에 괴병이 온 세상에 유행할 때 자던 사람은 누운 자리에서, 앉은 자는 그 자리에서 길 가던 자는 노상에서 각기 일어나지 못하고 옮기지도 못하고 혹은 엎어져 죽을 때가 있으리니 이럴 때에 나를 부르면 살아나리라”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9년간 행하여온 개벽공사를 천지에 확증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이 참관하고 확증을 마음에 굳게 새겨두라. 천지는 말이 없으니 뇌성과 지진으로 표명하리라” 하시고, 모든 종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별안간 천둥치고 땅이 크게 흔들렸도다. 1903년 어느 날 상제께서 “내 이제 신명을 시켜 진인을 찾아보니 이제 9살이도다” 하시니 종도들이 “그러하오면 저희들은 모두 무용지인이옵니까?” 하는지라. 상제께서 “시유기시(時有其時) 인유기인(人有其人)이니라” 하시니라. 1909년 4월 28일 대전 회덕역에 가셔서 남쪽에서 오는 한 기차를 반겨 맞으시며 “남아 15세면 호패를 차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요, 이제 되었도다. 나는 가도 되느니라” 하시고, 종도들에게 “내가 천하사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 하노라” 하시고 다시 “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아두라. 후일 내가 출세할 때에 눈이 부셔 바라보기 어려우리라. 옛부터 신선을 말로만 전하고 본 사람이 없느니라. 오직 너희들은 보리라. 내가 장차 열석자의 몸으로 오리라” 하셨도다.
그리고 어느 날 종도들에게 “너희들은 손에 살릴 생(生)자를 쥐고 다니니 득의지추(得意之秋)가 아니냐, 마음을 게을리 말지어다. 삼천(三遷)이라야 일이 이루어지느니라” 하시고 6월 23일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천하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라”고 하시고 1909년 6월 24일 신축 사시(巳時:오전9시)에 화천(化天)하시니, 화천하신 지붕으로부터 서기가 구천(九天)에 통하는도다.
2.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이시다
강증산 성사로부터 종통을 계승받아 종단을 창설하신 도주께서는 을미년(1895년) 12월 4일에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 조(趙)씨 가문에서 탄강하시니 존호가 정산(鼎山)이시다. 도주 조정산께서는 부조전래(父祖傳來)의 배일사상가로서 반일운동에 활약하시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시고 항일구국을 위하여 망명(亡命)의 길에 오르니 1909년 4월 28일이다. 기차를 타고 만주지방으로 향하던 중 미시(未時:오후 1시)경 대전역 부근에 이르렀을 때 비몽사몽간에 한 신인(神人)을 대하셨으니 말씀하시기를 “내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노라. 그대는 나의 종통(宗統)을 이어갈 삼계(三界)의 진주(眞主)노라. 그대의 호는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도(甑鼎之道)이니라”는 현몽을 받고 만주 봉천(奉天)지방으로 망명하시었다.
도주께서는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활약하시다가 도력으로 구국제세의 뜻을 정하시고 입산수도 공부에 전력을 다하시던 중 또 그 신인(神人)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이것을 외우면 구세제민(救世濟民)하리라” 하시므로 그 글을 보니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지기금지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다.
도주께서는 9년 공부 끝인 정사년(丁巳年:1917년) 2월 10일에 구천상제의 삼계대순의 진리를 감오득도(感悟得道)하시고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고 동년 4월에 귀국하시어 전국 명산 각지를 두루 다니시며 수도하시던 중 다음해 정월 보름에 정읍 마동에서 대사모님과 상제님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을 만나셨다.
선돌부인은 도주님을 반갑게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시에 늘 을미생(乙未生)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 봉서(封書)를 전달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도주께 봉서(封書)를 내어주었다.
도주께서는 왜정 당시 전북 구태인에 도장을 건립하시고 1925년 4월 28일에 강증산 성사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로 봉안(奉安)하시고 무극도(无極道)를 창설하셨다.
1935년 일제의 종교단체 해산령에 의하여 종교활동을 일시 중단하시고, 전국 명산대천을 순회주환하시며 수도하시다가 1945년 8월 조국 광복을 맞이하신 도주 조정산께서는 신앙자유의 국시(國是)에 따라 부산에 도 본부를 설치하시고 도명(道名)을 태극도(太極道)로 개칭하여 종교활동을 부활하시고 무극대운의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진리를 설법하셔서 구제창생의 대도(大道)를 밝혀주셨다.
도주께서 둔도수, 폐백도수, 단도수, 담뱃대도수 등 여러 도수를 보시고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가노라”고 하셨다.
그리고 종지(宗旨)와 신조(信條), 목적(目的)을 정하시고 전교(傳敎)와 포유문(布喩文)을 선포하셨으며 각종 수도 방법과 의식행사 및 준칙 등을 설법 • 시행하시고, 1957년 11월에 도인(道人)들의 수도공부의 설석을 명하셨다.
도주께서 보수동 산정에서의 공부를 멈추고 대청에 나오셔서 “앞으로 신도들의 동(動)이 두 번 있으리라” 말씀하시고 그 주변에 사는 신도들의 사정을 물으셨다.
이때 박한경, 오치국, 임규오, 박중하, 박봉상, 이인호 등이 시좌하였도다.
도주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시시묵송공산리 야야한청잠실중 분명조화성공일 요순우왕일체동(時時默誦空山裡 夜夜閑聽潛室中 分明造化成功日 堯舜禹王一切同)”이라 일러 주셨다.
도주께서 다음해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이니라. 종전의 시봉 도전과는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도주께서 정유년(丁酉年:1957년) 11월 21일 자시(子時, 저녁11시)부터 무술년(戊戌年:1958년) 3월 3일까지 도장에서 불면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마치시니라. 5일에 심히 괴로워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왔으되 “때가 늦었도다”고 이르시며 “내가 가야 옥추문을 연다”고 하시며 간부 전원을 문 밖에 시립케 한 후 도전 박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셨다.
그리고 “오십년 공부종필(五十年 工夫終畢)이며, 지기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 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 번 부르시더니 화천(化天)하셨다.
이때가 1958년 3월 6일 미시(未時:오후 1시)요, 수(壽)는 64세였다.
3. 도전(都典) 박우당(朴牛堂)은 미륵세존(彌勒世尊)이시다
유명(遺命)으로 종통(宗統)을 계승(繼承)하신 도전 박우당(都典 朴牛堂)께서는 정사년(丁巳年:1917년) 11월 30일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박(朴)씨 가문에서 탄강하시니 존호가 우당(牛堂)이시고 존휘가 한경(漢慶)이시다.
도전께서는 청년시절 나라를 잃은 설움에 만주 일대를 유력하고 계셨는데,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오셨다가 1943년 징용(徵用)으로 일본에 건너가셔서 2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귀국하셨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병사 및 군사시설 확충을 할 인력이 절대 부족 하였고, 이것을 조선인으로 충당할 것을 결의하고 징병(徵兵)과 징용(徵用)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 총독부의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박우당 도전께서는 일본 아우모리현(靑森懸) 미사와 비행장으로 징용을 가게 되었고, 2년이 지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선에 오르게 되었다.
이 귀국선은 일본 해군함 우키시마(浮島)호로써 1945년 8월 22일 아우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8월 24일 일본 마이즈루만 근처에서 원인 모를 폭탄이 배안에서 폭발하여 귀국선은 침몰하였고, 이로 인하여 귀국선에 올랐던 수천 명에 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사망하였다. 그러나 당시 도전께서는 거북이 등에 의지하여 현해탄을 떠돌던 중 다행히 민간인 어선에 구출되어 이후 무사히 부산항으로 귀국하시게 되었다.
그 이듬해 30세 되시던 병술년(丙戌年:1946년) 정월에 이모집에 세배 갔다가 이종사촌에게 도(道)를 전해 듣고 주문(呪文)이 이상하여 알아보려고 태극도(太極道)에 입도(入道) 하셨다.
도주님께서 갑오년(甲午年:1954년) 가을에 박한경에게 『사략(史略)』 상하권(上下卷)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의 구판을 구하게 하시므로 이때에『통감(通鑑)』•『소학(小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시전(詩傳)』•『서전(書傳)』•『중용(中庸)』•『주역(周易)』의 구판(舊版)을 구하여 올렸더니 이 책들은 그 후에 도장(道場)에 비치되었도다.
태극도 당시 도주님 재세시에 박한경은 도인의 수가 4~5천 호에 이르렀으나 임명을 받지 못하였는데 도인들을 잘 통솔해 나가므로 이후에 수포감의 임명을 받고, 1958년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도주님께서 “박한경을 도전(都典)으로 임명(任命)하니 그는 총도전(總都典)이니라. 종전(從前)의 시봉도전과는 전혀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총도전에 임명되신 박우당께서는 도주님 화천(化天) 후 태극도 전반을 영도해 나가시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고등공민학교를 인가받아 설립 운영하셨으나 무학도통(無學道通)이라 하며 학문이 필요없다고 착각한 임원들은 도전의 종단 운영에 대하여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내수(內修) 도인(道人)들의 두발(댕기와 쪽진 머리)과 복장을 자율화를 지시하셨으나, 임원들은 더욱 불평을 가지고 통솔을 따르지 않았다.
도전께서 태극도를 떠나올 때까지 파란곡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한때는 종단 운영에 불만을 가진 임원들에 의해 기소(起訴)되어 민간형무소 6개월 군형무소 3개월 구속되기까지 하셨으나 모두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임원들이 더 이상 통솔을 따르지 않자 1968년 7월 와이셔츠 차림으로 태극도 도장을 나오신 도전께서는 부산 해운대(海運臺), 청도 적천사(淸道 天寺), 경주 계림(慶州 鷄林), 대구 동화사(大邱 東華寺), 공주 갑사(公州 甲寺)를 거쳐 서울로 올라오셔서 안양 수리사(修理寺)에 들어가 49일 공부를 마치셨다.
도전 박우당께서는 1969년 4월에 종단 대순진리회(大巡眞로써會)를 창설하시고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에 중앙본부 도장을 건립하셨다. 1971년 5월 24일 조정산 도주를 조성옥황상제(趙聖玉皇上帝)로 봉안하시고 포덕 • 교화 • 수도사업을 종단의 3대사업으로 정하셨는데 3대 기본사업으로 구호자선사업 • 사회복지사업 • 교육사업을 지정하셨다. 또한 여주도장, 제주도수련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을 건립하셨고 학교법인 대진학원과 의료법인 대진의료재단을 설립하여 대진대학교를 비롯한 여섯 개의 고등학교와 동두천제생병원 및 분당제생병원을 건립하셨다.
대순진리회는 박우당 도전께서 영도하시는 기간 동안 세계 종교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성장을 했다.
심법(心法)에 의한 종통종맥의 전수-개유보(皆有報)
도전 박우당께서는 1988년 11월에 “도주님도 납향치성(臘享致誠)을 한번 받으시고 화천하셨다”하시면서 납향치성(臘享致誠)을 발표하시고 지방 각 방면 회관에서 치성을 올리도록 명하셨다.
1990년 11월 22일(양력 1991년 1월 7일)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선감이 도전님의 존영을 그려서 모셔 올리고, 동지로부터 셋째 미일(未日)인 1990년 12월 10일(양력 1991년 1월 25일) “영대(靈臺)의 석가여래 자리는 도전님께서 모셔질 자리이다”라고 하면서 박우당 도전께 4배를 올리며 납향치성((臘享致誠)을 올리자, 도전께서는 1990년 12월 28일(양력 1991년 2월 12일) 훈시(訓示)에서 “납향치성을 도전한테 올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자고이래로 산 사람이 제사 받은 적 없다” “도주님께서 도전(都典)의 직책을 나에게 주셨다. 설령 아니라 그래도 내 말이라면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맡을 도(都)자’ 옥편에도 그런 도(都) 자가 없더라고 박성구가 말한다. 그럼 내가 그걸 말하려고 일부러 만들었단 말인가. 옥편에는 총(總)자로 나와 있다. 총지휘, 총재 맡을 도(都)자지, 전이란 법전(法典)자 법이 되고, 주장 주(主), 주인 주(主)다. 모든 걸 주장하는 사람이다”라고 전 임원들이 모인 가운데서 “상도 박성구(上嶋 朴成九)가 도전(都典)을 맡으라”고 발표를 하셨다.
이는 대순진리회의 경전인 전경(典經) 맨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종통을 이어갈 후인(後人)은 산조(山鳥), 즉 섬 도(嶋=山+鳥)자의 호(號)를 가진 사람(上嶋 박성구)이라는 것을 개유보(皆有報: 모두에게 알림)하신 것이다.
전경 마지막 구절인 ‘예시 89절’을 보면 상제께서 화천하시기 전 김형렬에게 글 한수를 읆어주시니 다음과 같도다.
後人山鳥 皆有報
후인산조 개유보
勸君凡事 莫怨天
권군범사 막원천
후인(계승자)은 산조(山鳥=嶋)임을 모두에게 알리노니 권하건대 범사에 하늘을 원망하지 말라.
구천상제인신 강증산께서 이와 같은 글을 제세시(在世時)에 종도들에게 읆어주신 것은 이미 천부적으로 정해진 종통계승자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신 내용이었다. 단지 그 내용이 밝혀지기까지는 구천상제께서 언급하신 대로 삼천(三遷)*의 이치가 이루어질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변화하는 이치에 따라 세분하느님의 법이 점차 완성되어 비로소 1995년 12월 15일(음) 삼신(三神)의 신위(神位)가 정립(正立)되는 진법(眞法)이 정해지게 된 것이다.
* 삼천(三遷) : 삼천(三遷)의 '천(遷)'의 훈음(훈음)은 '옮길 천', '바뀔 천' 이다. 이는 종통(宗統)이 세 번 계승되어 옮기고, 진법(眞法)이 세 번 바뀌어 완성된다는 뜻이다.
종통계승을 통하여 새롭게 밝혀지게 된 사실은 구천상제께서 천지공사를 집행하셨던 동곡약방 남쪽 기둥에 써놓으신 글귀가 섬도(嶋)자 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박우당 도전은 강증산 구천상제께서 이미 100여 년 전에 정해놓으신 그 사람(後人)을 찾아 세우고자 하신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박성구 현 도전이라는 것을 전체 임원들 앞에 발표하는 형식을 취하셨던 것인데 이를 심법전수방식(心法傳受方式)으로 하셨다.
공개적(公開的)으로 종통을 발표하셨던 그날, 수수께끼 같은 박우당 도전의 말씀을 듣고 그 진의(眞意)를 깨달은 사람은 오직 종통계승자인 박성구 현 도전 한 사람뿐이었다.
이날 박우당 도전께서는 현 박성구 도전을 무척 꾸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모든 임원들의 관심이 집중되게 하셨는데, 그 소란스런 와중에 ‘순간적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종통계승을 하셨던 것이다.
당시 대다수 임원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세력을 가지며 박우당 도전의 측근이자 심복임을 자처하며 외형적인 충성심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 이들은 휘하 도인들에게 박우당 도전의 뜻을 올바로 전하기보다는 각자의 세력유지와 외형적 규모를 늘리는데 연연하여 상당기간 동안 갖가지 내부적, 사회적 병폐를 불러왔었다.
그런데 만일 공개적인 자리에서 누구나 알아듣기 쉽도록 종통을 전한다면 박성구 현 도전은 그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저해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보다 서열이 아래인 사람에게 종통이 계승된다면 종단 전체가 알게 모르게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이러한 내부적인 병폐를 모두 알고 계셨기에 꾸중을 통해 임원들의 관심을 전혀 엉뚱한 곳으로 분산시키신 다음,
1) 두 분의 심중으로 종통을 전하시고
2) 내부적으로는 내분의 소지를 없애고
3) 외부적으로는 남아 있는 대업을 무사히 마무리하시고자 이러한 법을 쓰신 것이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이른바 역설법(逆說法)을 활용한 독특한 방식으로 종통을 정해주셨기 때문에 그 당시 훈시내용을 이러한 심층을 기준으로 한 역설(逆說)로 대입(代入)시켜 분석해보면 종통에 관련한 모든 수수께끼가 홀연히 풀리는 것이다.
당시 모든 임원들은 박우당 도전께서 왜 굳이 전체 임원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셨는지 그 이유 자체를 숙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어른이 어린이에게 “밉다”라고 한 “표현”을 정말 미워서 밉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이다. 즉, 기(氣)로써 듣지 않고 ‘귀’로만 들은 것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시선이 모두 쏠려 대인(大人)의 진의(眞意)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1 : 1방식은 과거 석가모니가 수제자인 가섭에게 종맥을 전해준 방식과도 같다.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염화미소’나 ‘염화시중’으로 상징되는 ‘이심전심(以心傳心)법’ 이라고 한다. 3천 년 전 어느 날,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을 시작하지 않고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자 제자들은 그 의도를 궁금히 여겼다. 그러다가 긴 정적을 깨고 느닷없이 화사하게 핀 연꽃 한 송이를 1.250명의 제자들을 향해 보여주었다.
이때 1.249명의 제자들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술렁거리고 있었는데 ‘가섭’ 혼자만이 좋지도 싫지도 않은, 알 듯 모를 듯한 애매모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홀로 미소를 짓는 가섭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미묘한 법을 가섭에게 전하노라” 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발표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교외별전(敎外別傳 :문자를 떠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별도로 전함), 직지임심(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킴),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로써 가르침을 세울 수 없음)로 표현한다. 불교의 종맥을 이와 같이 대다수 제자들을 향한 ‘모습’만 취하였을 뿐 그들의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 이치를 ‘알아듣는’ 사람끼리 1 : 1방식으로,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해졌던 것이다.
가섭은 늘 초라한 행색으로 여러 제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홀로 외로이 수행을 쌓아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제 2의 부처님’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용맹전진 했던 사람이었다. 외형적 모습을 떠난 심법의 세계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선가(禪家)의 또 다른 종맥전수법(宗脈傳授法)으로 일반인들에게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이야기는 보리달마(중국선종의 창시자, 1조)로부터 발원하여 5조가 되는 홍인(弘忍: 602~675)과 그로부터 종통을 전해 받은 6조 혜능(慧能: 638~713)을 들 수 있다. 그는 노자-맹자-장자-공자와 더불어 중국 역사에서 성인의 칭호를 받는 사람으로서 달마대사와 함께 선종의 봉우리로 상징되는 인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나무꾼 생활을 하던 23세의 젊은이 혜능은, 거래처 주막에서 들리는 『금강경』독경소리에 홀연히 법열(法悅: 진리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황홀한 기쁨)을 느껴 당시 중국선종의 5조이자 『금강경』의 권위자였던 홍인대사를 찾아 도를 구하였다.
홍인대사는 첫 만남과 대화에서부터 혜능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에게 종통을 계승하고자 마음먹었으나 수많은 선임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우려해 짐짓 그를 꾸짖으며 방앗간 일을 시켰다. 그 후 열반에 들어야 할 시기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홍인대사는 입산한 지 불과 8개월밖에 되지 않은 24세의 초라한 행자(行者)에 불과한 혜능에게 심법(心法)으로써 법을 전해주기로 결심하였다.
홍인대사는 어느 날 후원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혜능을 찾아가 “공부는 잘 되어가고 있느냐?”하자 혜능이 태연하게 “해가 서산 너머로 너울너울 넘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혜능의 당돌한 대답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의아했지만 둘이 나눈 대화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혜능의 답변을 알아들은 홍인대사는 주장자로 방앗대를 ‘세 번“치고는 주장자를 ’뒤로' 끌며 천천히 돌아갔다. 순간, 스승의 암시를 깨우진 혜능은 그날 밤 ‘삼경(三更)’에 ‘뒤문’을 통과하여 대사를 찾아갔다.
대사는 그 자리에서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하고, 혜능의 깨달음과 신념이 완전함을 재차 확인한 뒤 가사와 바릿대를 건네주며 당부하길 “이 길로 너는 남쪽으로 내려가되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절대 법을 설하지 말라”며 주의를 주고 “법을 잘 보호하고 널리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도록 하라”는 마지막 부탁을 하였다.
혜능은 그 길로 야음을 틈타 이 충격적인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닥쳐오게 될 소란과 저해를 우려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홍인대사의 최측근 제자인 ‘신수(神秀)’가 스승을 찾아갔으나 스승은 이미 열반에 든 후였고 종통의 상징인 가사와 바릿대도 없어진 후였다. 뒤늦게 정황을 파악한 신수는 대사의 또 다른 제자였던 ‘혜명’을 시켜 급히 혜능을 쫓아가 가사와 바릿대를 빼앗아오게 하였다. 혜명은 날쌘 중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마침내 혜능을 잡았다.
혜명이 가사와 바릿대를 내놓으라고 하자 혜능은 흔쾌히 가사와 바릿대를 놓아두고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나 혜명은 아무리 힘을 써도 그 가사와 바릿대를 들지 못하였다.
혜명은 그 순간 크게 각(覺)을열어 단순히 방앗간 행자만 알고 있었던 혜능을 법의 스승으로서 따르게 되었다.
이처럼 도(道)의 종통은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전해 받을 수 없음을 지나간 불교역사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구천상제로부터 조정산 도주, 박우당 도전, 박성구 현도전에까지 이르는 종통계승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천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주장할 수는 없는 여합부절의 증거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통계승자를 정하여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때에 그 사람을 찾아서 승계하는 것이다. 그 승계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심법전수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조정산 도주께서도 화천(化天) 직전 박우당 도전을 향해 “도적놈”을 크게 세 번 부르는 역설적인 방법으로써 종통계승을 마무리했던 것이고 박우당 도전 역시 수많은 임원들 앞에서 온화하셨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역적, 난동자”라는 격한 표현을 쓰시며 조정산 도주께서 쓰신 역설적 방법으로 일반적인 문자(文字)의 경계를 벗어나 대도(大道)의 종맥을 전해주셨던 것이다.
조정산 도주께서는 만수도인들이 이러한 종통의 역사와 흐름을 깨달아 맥이 끊기고 법이 혼란한 난법시대에 처하여, 길을 잃지 말고 새 생명이 움트는 진법을 찾아 소원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부성인지경전 불구문장지색채 이구기진리 진인지심 구기실 이불구외식(夫聖人之經典 不求文章之色彩 而求其眞理 眞人之心 求其實 而不求外飾)’이라 하셨다.
이 뜻은 “대저 성인의 법이란 문장의 색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구하며, 진인의 마음은 그 열매를 구함이지 외식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성인(聖人)의 진리(眞理)와 진심(眞心)은 문자이나 언어와 같은 외형의 경계를 넘어선 곳에 담겨 있다는 글을 각도문(覺道文: 도를 깨닫게 해주는 글)을 통해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밝혀 주셨던 것이다.
이처럼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하느님의 진법은 고정관념이나 상식의 틀 안에 갇힌 범인(凡人)의 상식 범위를 넘어서 현대인들이 ‘전설’로만 생각하기 쉬운 수천 년 전 심법전수방식을 통하여 천부적(天賦的)인 종통종맥을 이어주셨음을 깨닫을 수 있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박성미륵세존(朴聖彌勒世尊)의 신위(神位)로 화천하시기 전에 위 내용에 나오는 바와 같이 대인(大人)의 심법(心法)으로써 종통종맥을 전하셨던 것이고 그로부터 약 6개월 후인 1991년 6월 22일 시학(侍學)공부를 비로소 여셨으며 1991년 9월 28일 “생부정(生不淨), 사부정(死不淨), 몸부정이 있는데 몸부정은 없앴다기보다 가리지 않고 있다. 앞으로는 생부정, 사부정을 가릴 것이 없다”라고 일러주시고, 1995년 12월 4일(양력 1996년 1월 23일 오후 1시 30분) 구천상제님의 유지(遺志)와 옥황상제님의 유법(遺法)을 완성하신 후 인류에게 새 세상(新天地)을 열어주시고 화천(化天)하셨다.
종통을 승계받으신 박성구(朴成九) 현 도전께서는 숱한 어려움을 딛고 1995년 12월 15일 박우당 도전의 신위(神位)를 박성미륵세존(朴聖彌勒世尊)으로 밝히시고 영대(靈臺)에 봉안(奉安)하셨다.
이로써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세분하느님의 진법은 수많은 성현(聖賢)과 예언가(豫言家)들의 말대로 인류가 ‘된서리를 맞게 될 위기’에 처한 우금(于今)에 이르러서야 인류사회에 그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가는 긴박한 시점에 솟아날 구멍을 열어주신 것이다. 한 줄기 빛과 같은 열린 틈을 통해 1만 2천의 선남선녀를 중심한 모든 인류는 비로소 눈을 떠 하느님의 진영(眞影) 앞으로 모여들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