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의 숲에서 무릉의 물길은 흐르고 - 삼척 두타산 청옥산 산행기
잠들고 싶은, 그러나 잠들 수 없는
훌쩍 이 도시를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열대야로 인해 잠들지 못할 때 피서를 떠나듯, 잠들지 않는 도시를 등지고 싶은 날들이 있다. 화려한 쇼윈도, 현란한 네온사인이 오감을 자극하고, 도시적․자본주의적 삶의 욕망이 내 안에서 꿈틀거릴 때 문득 이 세속도시를 벗어나고 싶어진다. 2013년 8월 12~13일 무릉계곡이 있는 삼척 두타산 청옥산으로 무박산행을 떠난다. 지리적으로 전주에서 가장 먼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이기에 멋지고 설렐 수밖에 없는 산행이다. 더욱이 밤 10시에 출발해서 동해 해맞이를 하고, 백두대간 두타산과 청옥산 구간을 산행한 후 무릉계곡으로 하산한다 하니 떠나기 전부터 가슴이 열린다. 세사에 시달리고, 번뇌가 많을수록 하늘이 그리운 법. 천지가 잠든 밤에 별빛을 우러르며 우주와 교감하고, 청정한 산과 물에 마음을 씻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정동진에서 해맞이를 하는 일정이 잡혀 있어 두타산 산행이 더 기다려졌다. 광화문을 기준점으로 하여 정동쪽에 있는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정동진(正東津)은 드라마 ‘모래시계’를 촬영한 이후 더욱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간이역인 정동진 역의 소나무는 ‘고현정 소나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해가 떠오른다는 전설의 바다인 부상(扶桑)이 된 후, 정동진 해맞이 관광상품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이곳도 개발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정동진, 정동진 역의 이미지는 오래 전 아름다운 시 한편을 접하면서 형성되었다.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 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줏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 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 박세현 ‘정동진 역’ (<현대문학> 1991. 1)
03:25 정동진 도착.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 온 버스는 정동진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정동진 역사에는 들르지 않고 밤바다로 나가기로 했다. 정동진 박물관 기차, 해시계 등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접힌 비치파라솔이 해안선을 향해 줄지어 서 있는 백사장을 가로질러 바다로 내려선다. 지친 해안선을 잠재우려는 듯, 뒤척이는 아이를 달래는 듯 파도는 잔잔하게 육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젊음, 열정, 낭만, 그리고 욕망이 넘실대는 여름바다, 기(氣)로 충만한 공간답지 않게 정동진의 밤바다는 고요하기만 했다. 박세현이 노래한 정동진 바다는 이(理)로 충만한 겨울바다지만, 허무와 적멸의 바다만 정동진다운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포구 쪽으로 옮겨본다. 해수욕장과 포구 사이에 다리가 있고 물길이 나 있다. 건너편으로는 식당이며 숙소가 즐비하다. 정동진의 명물로 등장한 썬크루즈 호텔이 눈에 들어온다. 더 이상 정동진은 세월에 풍화되어 가는 고즈넉한 포구가 아니었다. ‘억새꽃 같은 간이역’과 한적한 바닷가는 이미 상품화된 낯선 공간이 되어 있었다. 어느 시인이 ‘자본에 살어리랏다’고 노래한 것처럼, 이곳 또한 자본이 아름다운 자연을 독점하고 파괴하는 세속도시로 전락하고 있었다. 청산과 해원을 향해 그리움의 홀씨를 날리어 가며 고단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잠시 머물고 싶어하는 이곳마저 자본에 의해 훼손되어 간다고 생각하니 씁쓸해 발길을 되돌렸다.
타임뮤지엄, 시간을 철학하다
증기기관차 8량으로 만들어진 정동진 박물관 타임뮤지엄(Time Museum) 내부를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높이 7m 정동진 해시계 앞에서 잠시 시간에 대한 상념에 잠길 수 있어 상처받은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거대한 해시계를 받치고 있는 것은 3권의 책이다. 이들을 각각 TIME AND TIDE 時乎時乎不再來 司馬遷 팔천칠백육십시간후… 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TIME AND TIDE(시간과 조류)는 ‘세월’을 뜻한다. 밀물과 썰물이 밀려왔다 밀려가듯, 시간은 흐르면서(fluens) 영원히 머물러 있다(stanns). 스콜라철학자들은 영원의 시간에 주목했고, 석가 또한 제법무상(諸法無常)의 도를 가르쳤다. 시간의 변함 속에서 영원을 포착하라 말한 것이다. 북극성을 가리키고 있는 정동진의 해시계는 화살의 기울기를 통해 정동진의 위도를 카리키고 있다. 예로부터 영원성을 상징하는 북극성은 우리 삶의 방향성을 가리켰다. 망망대해 바다에서 북극성을 찾아 항해를 하듯, 우리 삶이 흔들릴 때마다 여여(如如)하게 존재하는 대상을 생각하게 된다. 노자는 이를 도(道)라 했고, 유가에선 성리(性理)라 했으며, 기독교에선 하나님의 뜻이라 말해 왔던 것이다. 時乎 時乎 不再來(시간이여 시간이여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이여!).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은 우리에게 한정된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라 말하고 있다. ‘팔천칠백육십시간후(365일 x 24시간)’ 나는 어떠한 모습일까? 얼굴의 주름만큼이나 지혜가 많아지고 깊어져 있을까?
인간은 시간을 인식하는 동물이다. 스피노자 등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와 같은 특징에 주목하고 있다. 동물은 시간의 무상성을 알지 못할 것이며, 세속적 시간과 성스러운 시간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과 같이 시간에 눈금을 새겨 이를 정량화하지도 않고, 시간의 중압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며, 시간을 초월하여 머무르는 ‘영원’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시간은 천공의 신(우라노스)과 대지의 신(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크로노스Chronos)이다. 아들이 자랄수록 아비는 늙는다. 아비는 아들을 미워하지만, 아들에게 물려 줄 지혜를 지닌 아버지는 영원하다. 깨달음을 얻기 전, 인간의 시간은 과거 - 현재 - 미래로 직선적으로 흐르지만,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그것은 회귀하며 영원으로 이어지리라. T. 아퀴나스는 시간에서 천지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세계의 창조가 행해졌다고 말한 바 있다. 과학이 전자에 무게를 두는 데 비해 종교는 후자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인류사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은 바로 시간을 인식하는 동물의 탄생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약 2000여년 전 인류사의 거대한 산맥에 노자와 공자, 석가, 예수가 출현해 큰 가르침을 세상에 펼쳤던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그것은 떠난 사람들이 받는 축복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원효처럼 떠나지 않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만, 원효 또한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지 않았던가? 그리고 일생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나고, 깨달음에서 떠나지 않으려 몸부림쳤던 것은 아닐까? 원효를 생각하며,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감모여재(感慕如在), 그리움이 해를 밀어올리고
북평 추암(湫岩) 해변에서 해돋이를 보기로 하고 길을 재촉한다. 포구 인근 주차장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바닷가를 향한다. 미명의 새벽이지만, 아침 바다는 벌써 뒤척이기 시작한다. 먼 바다에서부터 하늘이 불그레 밝아온다. 어둠을 사르고 우주가 깨어나는 시간에 하늘을 우러르며 정화수를 올렸던 우리네 할머니들과 어머니들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비단 우리 선인뿐만 아니라, 솔로몬 또한 새벽에 야훼 하나님과 대화를 했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시간은 그래서 성스럽다. 새벽은 인간이 하늘을 생각하며 초월자를 생각하고, 스스로를 정화하기에 좋은 시간, 성스러운 시간인 것이다.
촛대바위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동해를 향해 서 있다. 저마다 마음에 촛대바위를 세우고 간절한 소망의 불꽃을 사르고 있다. 관음보살이 연꽃같은 발꿈치로 파도를 잠재우고 있기 때문일까, 예수가 잠잠하라 꾸짖었기 때문일까, 아침바다는 순한 동물인양 빛을 맞이하려 엎드려 있다. 그 고요와 침묵을 깨듯 작은 배가 바다를 가르고 지나간다. 그 흔적, 상처도 이내 지워진다. 일출 예정시각이 가까워오자 모두들 마음조리기 시작한다. 이미 날은 밝았지만, 붉은 태양을 사모하는 마음은 강렬하다. 붉은 해가 머리를 내밀다가 수면 위로 솟아오르더니 바다를 가로질러 촛대바위까지 찬란한 붉은 비단길을 낸다. 잔물결이 일렁이는 수면 위로 햇살이 번득인다. 슬픔과 한이 모두 녹아들고 기쁨과 희망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 실크로드 사막을 가로질러온 낙타의 울음소리가 추암 바다에 녹아드는 듯하다.
감모여재,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소망이 깊을수록 해는 아름답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움으로 해는 솟아오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통의 바다 위에서 우리는 얼마나 하늘을 연모했던가. 내가 품고 있었으면서도 보지 못했던 하늘이여, 태양이여. 心卽佛, 人卽佛, 人乃天. 마음이 부처요, 사람이 부처이며, 사람이 곧 하늘이다. 내 마음에 태양이 솟아오르듯,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 내 마음에 하늘이 있으면 내 마음이 천국이요 내 가정이 하늘나라이며, 이 땅이 낙원이 된다. 길은 밖으로 나 있으면서, 마음 안에 있는 법. 마음 밖의 길과 마음속의 길은 둘이되 하나다.
능파대(凌波臺)를 곁에 두고, 다시 발길을 돌린다. 고려시대(1361년)에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沈東老-임금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쪽으로 낙향한 노인)가 지은 정자라 전해지는 해암정(海巖亭)에 아침 햇살이 비친다. 연붉은 배롱나무꽃, 맥문동 연보라 꽃대가 햇살을 받아 곱게 빛난다. 동해를 바라보며 바다를 정원으로 삼은 이곳의 풍광에 반해, 송시열은 ‘草合雲深逕轉斜(풀잎은 구름과 어우러지고 좁은 길은 휘돌아 굽이져 있구나)’이란 글을 남겼다 한다. 서인,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尤巖 宋時烈 1607~1689)이 예송논쟁에서 패한 후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귀양 가던 중 지은 것을 감안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원문 전체를 알 수 없어 유보하기로 한다.
숲이 물을 품고, 물이 숲을 키우네
06:00 촛대바위에서 일출을 감상하고 산행을 시작하기 위해 ‘댓재’로 향한다. 백두대간을 오르는 고개답게 구절양장 산길이 계속 이어진다. 댓재는 한자어로는 죽현(竹峴) 또는 죽치령(竹峙嶺)이라 불렸는데, 산죽이 많은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실제로 댓재에서 두타산에 이르는 등산로에는 키가 작으면서 청청한 산죽들이 도처에 있었다.
07:00 연칠성령과 건의령을 이어주는 댓재에서 몸을 풀고, 기념촬영을 한 후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등산이 시작되는 곳에 두타산산신각이 있다. 자연히 마음을 여미게 된다. 댓재는 해발 810지만, 댓재에서 두타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6.6km나 되어 만만치 않다. 다행히 동해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솔바람에 더위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산행지도에는 댓재에서 1228봉까지 1시간 30분, 1228봉부터 두타산(1352.7m)까지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솔바람을 타고 선두그룹은 댓재-두타산 구간을 2시간에 주파했다. 두타산에서 청옥산까지도 산행지도에는 두타산-박달령 1시간, 박달령-청옥산 1시간으로 총 2시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잡고 있으나 우리는 10:30분에 도착했으니, 1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선두그룹은 무릉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 같고, 나는 관음암을 들른 후 삼화사, 금란정, 무릉반석을 둘러볼 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까닭에 속도를 내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번 산행도 댓재에서 두타산(1352.7m)을 올랐다가 박달령으로 내려 선 후 다시 청옥산(1403.7m)으로 올라서고, 연칠성령을 거쳐 무릉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라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댓재에서 연칠성령까지 백두대간 주능선을 밟는다는 뿌듯함, 두타산 정상에서 바라본 백두대간의 연봉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무릉계곡의 펑퍼짐한 너럭바위며 폭포와 계류, 두타산의 조선소나무숲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피로감을 덜 수 있었다.
꽃,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청옥산을 지나, 연칠성령 - 칠성폭포 - 사원터를 거쳐 문간재에 이르렀다. 갈미봉 - 고적대(1353.9m) - 망군대(1247m) - 청옥산(1403m) - 두타산(1352.7m)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능선의 골들이 모이는 중심이 신선봉이요 문간재이며, 그 물줄기들이 무릉계곡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하늘문에 오르면 용추폭포, 쌍폭, 박달폭포가 있는 주변 산과 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문간재에서 다시 하늘문을 오르기로 했다. 나를 포함해서 세 사람이 하늘문 입구에 다다랐지만, 두 분은 이미 지친 탓인지 하늘문에 오르지 않겠다고 한다. 나 혼자서라도 하늘문을 오르기로 했다. 1km 거리에 있는 관음암에 들렀다가 삼화사(三和寺)로 내려오고 싶었지만, 이미 산행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하늘문에 올라 신선봉 주변의 비경을 보고 내려오기로 했다. 하늘문 입구에 배낭을 두고 가파른 철계단을 오른다.
입구에서 보면 바위덩어리 몇 개, 가파른 철계단만 보이기 때문에 아래서 보면 매력을 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늘문은 두타청옥산의 속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서 놓쳐서는 안 될 곳이라고 나는 믿었기에 고단함을 무릅쓰고 오르기로 한 것이다.
오르는 산은 오르지 않는 산보다 높다 했던가. 신선봉 주변 골짜기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철계단을 한참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인적이 없는 가파른 계단을 홀로 오르는 기분이 묘했지만, 구도행이 그러한 것처럼 고통의 크기와 기쁨이 비례한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늘에 다가갈수록 청옥산은 그 아름다움을 열어 보여주고 있었다. 하늘문에서 비록 두타산과 청옥산의 전모를 볼 수는 없었지만, 진면목의 일부는 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춘수 시인이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라고 노래한 것처럼, 우리는 대상의 본질을 영원히 포착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과 꽃, 진리의 중심에 다가서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한다. 산이 그러한 것처럼, 진리는 은폐성을 속성으로 하기 때문에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한다. 하늘문에 올라 계단을 잊었다. 강을 건넌 후 뗏목을 버리고, 지붕에 올라 사다리를 잊어버리듯 신선봉 주변의 풍광에 취해 아래 세상을 잊었다. 잠시 아름다운 대우주와 소우주인 내가 하나되어 소요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우주 자체가 화엄의 현신이요, 하느님이었다. 긴 산행의 피로를 잊고 번뇌마저 떨칠 수 있었다.
하늘문에서 두타산과 청옥산의 명칭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본디 ‘두타’는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이르는 불교용어로서, 산스크리트어 dhuta를 음역하여 두타(頭陀)라 한 데서 연유한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탐욕과 집착을 떨쳐야 하는데,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12두타행이 있다. 승려들이 인가와 떨어진 조용한 숲 속에 머물고, 걸식을 하며, 일일일식을 하고, 소식하며, 누더기 옷을 입고, 단정하게 앉고 누워 잠자지 않는 것(장좌불와) 등이 두타행의 구체적 모습이다. 석가의 10대 제자 중에는 가섭존자가 두타행의 1인자였다. 장좌불와를 했던 성철스님, 1일 1식을 하며 살았던 다석 유영모선생, 다석의 제자 김흥호 목사(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등도 두타행을 실천하며 부처처럼 예수처럼 살다 간 분들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은 둘이되 하나다. 이 둘을 합하여 두타산이라 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청옥산은 이 산에 푸른 옥이 많은 데서 연유했다고 하나, 나는 두타행을 통해 맑아진 마음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불경 아미타경에 나오는 7보(七寶) 중 하나가 청옥인 것과 연관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옥처럼 맑고 푸른 사람이 두타행을 하고, 두타행을 하면 마음이 청옥이 되니 두타와 청옥을 어찌 구별하겠는가?
무릉계곡, 유불선이 하나되어
삼화사에 잠시 들러, 산행 중 다친 회원을 위해 마음을 모으기로 했다. 태조 왕건이 삼한 3국의 화합을 기원한 데서 유래했다는 삼화사(三和寺). 장맛비에 법당 아래가 무너졌는지, 적광전(寂光殿) 아래 축대를 새로 쌓는 불사가 한창이다. 본래 대적광전에는 진리의 부처 비로자나불을 모시는데, 비로전을 따로 두고 철불, 석가모니불을 모신 듯하다. 시무인(아무 염려 하지 말라)과 여원인(네 소원을 들어 주리라)을 하고 있다.
적광전 오른쪽에 약사여래입상이 있다. 아픈 중생을 치료해 주는 부처로서 왼손에 약구슬을 들고 있다.
극락전(極樂殿) 뒷길을 올라 비로전(毘盧殿)에서 청옥산 풍광을 잠시 바라본다.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께 예를 올리고, 3층석탑을 지나 사천왕문을 벗어난다. 사천왕들이 탱화로 되어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반야교를 지나 일주문을 벗어나니 금란정이 나타난다. 성속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속계인듯 무릉반석 계류에서 물놀이가 한창이다. 금란지교(金蘭之交-아름다운 우정)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이는 정자, 단원 김홍도의 금강사군첩에 실린 무릉계(武陵溪)에 등장하는 소나무를 잠시 바라본다.
무릉반석 암각서를 보기 위해 무릉계곡으로 내려선다. 이곳저곳에 돗자리를 깔고 있는데, 다행히 조선시대 4대 명필 중 한 분인 양사언이 초서로 쓴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글씨는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고 피서객들이 비워두고 있다. 물이 이곳으로 흐르지 않고, 그늘이 없기 때문이지만 다행스러웠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 이란 유명한 시조를 남긴 양사언이 삼척 부사로 있을 때 이곳을 방문하여 소금강인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이러한 글씨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는 비록 유학자였지만, 이 글에는 유불선이 융합되어 있는 선인들의 사고가 잘 나타나 있다. 송(宋)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유래한 ‘武陵仙源(무릉선원)’은 이곳이 도가에서 꿈꾸는 신선세계, 이상향임을 뜻하며, ‘中臺泉石(중대천석)’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物我一體)를 꿈꾸는 유가적 사고, 중용의 삶을 추구하는 유교와 불교, 인간에게 내재된 불성의 맑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頭陀洞天(두타동천)’은 청정한 이곳에서 탐진치(貪瞋痴 -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떨치고 맑은 마음으로 불국정토를 만들만 한 공간이라는 불교적 의미를 균형감각 있게 담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달마가 동쪽으로 가듯, 우리는 백두대간 너머 서쪽으로 가야 한다. 비록 저녁에도 잠들지 않는, 욕망이 이글거리는 예토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다시 부대끼고 사랑하며, 하늘을 꿈꾸어야 한다. 이상의 소설 ‘날개’의 주인공이 경성의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서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소리쳤듯이, 세속도시에서 날개짓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두타동천의 숲과 물을 기억하며, 청옥 같은 마음을 잃지 않길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