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나물 / 이화은
시집 온 새색시 산나물 이름 서른 가지 모르면 그 집 식구를 굶어 죽는다는데
- 가죽나무 엄나무 두릅나무 오가피 참나물 참취 곰취 미역취 개미취 머위 고사리 고비 돌나물 우산나물 쇠뜨기 쇠무릎 원추리 방아풀 메꽃 모싯대 비비추 얼레지 홀아비꽃대 노루오줌 환삼덩굴 마타리 상사화 꿩의 다리 윤판나물 자리공
촌수 먼 친척 같기도 하고 한 동네 동무 같기도 한 귀에 익은 듯 낯선 이름들
가난한 가장의 착한 반려자처럼 덩그러니 밥 한 그릇
고기반찬 없는 적막한 밥상을 사철 지켜주던,
생으로 쌈 싸먹고 무쳐 먹고 국 끓여 먹고
말렸다가 나물 귀한 겨울철 묵나물로 먹기도 하지만
그 성질 마냥 착하고 순하기만 한 것이 아니어서
홀로 견뎌낸 세월 소태 같은 세월
어르고 달래서 그 외로움의 어혈을 풀어 주어야 한다
독을 다스려 약으로 만드는 법을 이 땅의 아낙들은 모두 알고 있으니
간나물 한 접시보다 산나물 한 젓가락이 보약이다
조선간장 파 마늘 다져놓고 들기름 몇 방울 치면 그만이다
먹고 사는 모든 일에 음향이 있듯
음지에서 자란 나물과 양지 나물을 함께 섞어 먹는 일
남과 여가 한 이불 덮고 자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이 모든 이치가 또한 손맛에 있다
손맛이다
여자의 맛이며 아내의 맛이며 어머니의 맛이다
삼라만상 쌉싸름 깊은 맛이 모두 여기에 있다
순두부찌개 / 공광규
순두부는 부드럽고 연하고 순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지고 뭉개지기 쉬운 뇌 같은 것
마음 같은 것
연인의 입술이나 덜 익은 사랑 같은 것
그래서 처음에는 약한 불로 요리를 시작해야 하지
사랑의 처음처럼 약한 불에 참기름과 고추를 볶아 고추기름을 만들고
다음엔 좀 진전된 사랑처럼 센 불에 돼지고기를
돼지고기가 없으면 쇠고기를 볶아 입맛을 두텁게 하지
거기에 물을 붓고 마음을 잘 끓이면
양념으로 파와 바지락을 넣고 순두부를 넣으면 되지
계란은 넣어도 되고 안 넣어도 되고 요리가 맘대로
소시지를 넣으면 부대순두부찌개
김치를 넣으면 김치순두부찌개
만두를 넣으면 만두 순두부찌개
버섯을 넣으면 버섯 순두부찌개
들깨를 넣어면 들깨 순두부찌개
굴이나 새우나 주꾸미를 넣으면 해물순두부찌개
사랑에 무르익은 애인처럼 부드럽고 연하고 순해서
다른 것과도 잘 어울리는 순두부는 입술의 맛
그러나 급하게 먹으면 입에 화상을 입을 수 있지
급한 사랑처럼
그래서 후후 불면서 먹어야 해
살갗에 불어오는 봄바람 흉내를 내며
떡국/ 이근배
까치설달이면 우리 동네 삼꽃마을
김 구장댁 발동기가
숨가쁘게 통통거였다
집집마다 시루에서 쪄낸 쌀밥을 이고 지고 와서
발동기에 떡가래를 뽑아 가느라 붐볐다
우리 집 박 서방이 한 짐 날라 온
떡가래를 협도로 써는 일은 내 몫이었다
종갓집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밤늦도록
오대(五代)봉사 차례상에 올리는
제수 준비를 해놓고는
외동아들 설빔으로 솜바지저고리 조끼까지
손바느질 끝내느라 꼬박 밤을 밝히셨다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게 세배를 드리고
온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한 그릇 떡국은
우리네 가장 큰 명절인 설날 아침에만 맛볼 수 있는
축제의식이 아주 맛있는 별미였다
“떡국을 많이 먹으면 죽는단다”
할머니의 우스개 말씀처럼 떡국 한 그릇은 나이 한 살
떡국 먹고 나이 먹고 떡국 먹고 키가 크고
잠자리에 들면서 손꼽아 기다리던
설날은 떡국 먹는 날
먹은 나이 다 내려놓고 돌아갔으면
어머니가 지어주신 새 한복 입고
조상님께 절하던 그 아침으로
시래기/ 도종환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들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사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미역국/ 이규리
엄마의 맛
엄마가 나를 낳고 미역국을 먹을 때
더운 국물 먹고 눈물 같은 땀을 쏟아낼 때
길고 어두운 산고가 비로소 씻겨나갔다고
열 달을 품었던 생명 쏟아내고
이 땅, 엄마의 엄마 할머니의 할머니가 먹었던 미역국
텅 빈 자궁을 채우고 생살을 아물게 하는
미역국에서 엄마가 나왔다
외로운 산모들을 치유한 눈물 같은 국이었으니
이상도 하지
미역국 먹으면 분노도 고통도 사라지고
순한 고요가 몸 가득 출렁이지
몸이 곧 마음인 걸 믿게 하는 국이지
마음이 허한 날은 미역국을 끓인다
입 안에 부드럽게 감기는 푸른 바다
미역국을 먹고 엄마가 되었다
엄마를 알았다
고추장/ 오정국
세상살이 떫고 쓴맛을 단번에 돌려 세운다
눈물이 핑 돌만큼 얼얼한 혓바닥이다
이토록 진땀나는
땡볕처럼 타오르는
붉은 맛이 또 어디 있으랴
잡티 한 점 섞이지 않은
태양빛 알갱이들, 저의 빛깔대로
우리네 혈관을 틔여서
한국인의 매운맛을 단단히 보여준다
탐스러운 빛깔들이
가를 볕 고랑을 수놓아도
아서라, 고추밭에서 함부로 손 내밀지 말아라
빻아지고 버무려지고 비벼지더니
온 식탁의 입맛을 후끈하게 달구는
찰고추장, 이보다
깊고 맵고 진득한 입맛이 또 어디 있으랴
과메기/ 문인수
겨울 한철 반쯤 말린 꽁치를 아시는지
덕장 해풍 아래, 그 등 푸른 파도 소리 위에
밤/ 낮 없이 빽빽하게 널어놓고
얼렸다 풀렸다 얼렸다 풀렸다 한 것이니 그래,
익힌 것도 날 것도 아니지, 다만
고단백의 참 찰진 맛에
아무래도 먼 봄 비린내가 살짝 비치나니
저 해와 달의 요리, 이것이 과메기다. 친구여,
또 한 잔!
이 우정 또한 천혜의 사철 술안주라지
꼬막조개/ 김용택
동네 사람들은
재첩을 꼬막조개라고 물렀다.
커다란 바위 뒤 물속
잔 자갈들 속에서 살았다.
아이들 엄지손톱만 한 것부터
아버지 엄지손톱만 한 것까지 있었다.
어쩌다가 다슬기 속에서 꼬막조개가 있으면
건져 마당에다 던져 버렸다.
꼬막조개가 있으면 다슬기 국물이 파랗지 않고
뽀얀했다.
강에 큰 물이 불면
꼬막 조개껍질이
둥둥 떠내려갔다.
어느 때부턴가
꼬막조개가 앞강에서 사라졌다.
어른이 되어 하동에 갔더니
온통 재첩국집이었다.
나는 재첩이 무엇인지 그때 알았다.
우리 동네에서 사라진
꼬막조개가 하동에서
재첩이 되었다.
시원하고 맛있었다.
장조림/ 나태주
언감생신 어린 시절엔
가까이할 수 없었다
아예 그런 음식이
있는 줄조차 알지 못했다
나이 들어 조금씩 가까워졌다
어쩌면 남의 집 밥상이나
한정식 식단머리에서
처음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
도시락 반찬으로 제격이었다
밥맛이 없을 때
두어 덩이만 가져도
밥사발 한 그릇이 뚝딱 가벼웠다
입안에 넣고 씹으면
남의 살이지만 오돌오돌 고소한 맛
돼지에게 소에게 미안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