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의 시대를 읽고: 이 시대의 고구마줄기들을 기리며>
박소희
대학시절 [재앙의 세대]라는 별칭을 나와 친구들에게 붙여준 적이 있다. 우리 20대는 벌써부터 지구를 등에 지고 사는 것 같아서. 이대로 죽을 때까지 벌을 받을 것 같았다. 요즘 20대는 갓 태어난 신생아들 위해야 하며 잡초의 생명력을 투쟁하듯 옹호해야 하며 자본의 활개를 용납해야 하며, 등등 양해해야할 사회적 짐이 무수하다. 그래서 '이런 우리에게 스스로를 돌볼 여력이 앞으로 과연 있을까', 에 대한 담화를 당시 자주 했던 것 같다. 즐거워야할 담소를 훼방 놓는 문제의식은 매번 SNS에서 비롯했고...
그렇다는데 메타버스란 게 생겨났단다. SNS가 은하였다면 메타버스는 말 그대로 우주다. 이젠 여기서도 거기서도 학사 필독 의제들이 봇물 터지듯 생성되고 있어 우리 학생 무리는 예전에 우려한 대로 무한의 책임을 져 나가게 생겼다. 나는 세상에 나도 모르는 새 진 빚이 이렇게나 많은 줄 몰랐다. 세상이 그러는데 모든 죽음이 우리 탓이란다. 풀이 죽으면 소처럼 반추해본 내 탓이고 야생지대 줄면 내 탓이고 그게 늘어도 내 탓이며 냅다 도망을 가면 그때는 대역죄인으로 기록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속 고구마 줄기 같다. 그렇게나 왕성한데 자리만 축낸다고 목과 팔이 단두됐다. 살아있는 백수는 세상의 공간만 축내는 빈털터리 이므로 죽거나 벌을 받아야 한다는 자책을 한 적이 있다.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리라- 백수였을 때 나는 미조처럼 엄마를 주시했다. 그렇다한들 당신의 속내가 어떤지는 절대 모른다. 다만 보이기로서니 무기력하고 착잡했다. 마음이 아팠다. 다음은 작가가 글을 쓸 적 나와 같은 심리 상태에 있었을 걸로 보이는 대목이다.
[(중략)자르라고? 엄마는 뜻밖이라는 듯,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나를 길게 쳐다보다가 다시 모니터를 보더니, 갑자기 타자를 빠르게 치기 시작했다. 내 욕을 쓰는 건가?]
생활력이 없는 자식일수록 제 어미의 일거수일투족을 의무처럼 살피며 의미부여를 하고 슬퍼하는 법일까? 저 눈에 여태 비치는 내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무쓸모한 자식으로서의 분함이 엿보이는 문장 같다. 오은영 박사가 한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녀관계는 서로가 한 몸처럼 느껴지는 상태가 가장 바람직하다.’ 딸이 우울하자 엄마도 덩달아 우울해진 듯 감상적인 시를 자꾸 읊조리는 소설 속 장면들은 미조의 과거의 반복같이 느껴진다. 엄마가 미조를 흉내 내는 것인지 미조가 엄마를 자기처럼 묘사하는 것인지 거울처럼 분간이 안 간다. 일기를 물려줬다는 내용이 괜히 삽입된 것은 아닐 것이다. 딸이 엄마에게 말이다. 따라서 모녀관계는 가정 내 암울함과 무관했으리라 보인다. 내가 보기에 둘은 한 몸 같았으므로. 그리고 나는 이 두 인물이 자신들의 청승에 대해서 마음껏 시대 탓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이트족이라는 일본 니트문화가 있다. 일단 니트는 청년무직자를 뜻하는 신조어다. 바이트족도 같은 맥락에서 생긴 말인데, 알바로만 생계를 이어나가는 작중 인물인 충조같은 청년을 일컫는다. 충조는 정상이 아니라고 묘사됐다. 그는 동생 미조와 엄마가 거리낌 없이 탐탁찮아 할 수 있는 대상이다. 누릴 거 다 누리는데 무직이기 때문이다. 내 눈에 충조는 원하는 바가 뚜렷한 인물 같았다. 욕망은 분명히 있으나 본격적인 실천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여건이 안 되는, 그러나 ‘팔팔한’ 사내다.
이쯤 되면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여러분도 눈치 채셨을 것 같다. 웹툰작가인 수영언니는 언급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교수님은 그녀를 요주의 인물로 상정하는 듯 보였는데 언급하지 못하는 건 내 분석이 뻔해질 것 같아서 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억나는 대로 인물들을 분석하니 모두 상징하는 바가 비슷해 보인다. 내게 그들은 모두 고구마 줄기들이다. 젊어서 혈기왕성하고 될성불렀는데 애물단지 신세다. 그들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재앙의 좋은 변명거리들이다. 그들은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그들은 여성을 착취했다. 그들은 서로를 깔봤다. 그들은 서로를 죽였다. 사회적으로. 그런데 그들은 경제활동도 안한다. 그들은 쓰레기다. 그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토르소로 만들어 태우는 수밖에 없다. 잘린 고구마 줄기처럼. 싱싱했던 고구마 줄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