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문안 및 인사/ 3~5디모데에 대한 감사 / 5~8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12바울의 간증과 사명/13~14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5~18 배도자와 헌신자들 |
제1장 :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Ⅰ . 서 론
A . 본 서신의 기록 연대와 장소
사도 바울은 두 차례에 거쳐 로마 감옥에 수감 되었습니다.
디모데전서의 기록은 A.D 61~63년경 첫 번째 투옥 되었다가 잠시 풀려난 후 기록 되었으며 , 두 디모데후서는 A.D 66년 재 투옥 당시 로마감옥에서 디모데 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정부 네로 황제 기독교 박해 말기인 A.D 67년 네로황제에 의해 순교를 당했습니다.
B . 본 서신의 특징
바울의 서신중에서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 또한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목회에 관한 기본적인 의무 등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와 디도서 사이에 상호 구별 되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첫째 디모데전서와 디도서가 대표적인 목회 서신이라고 본다면 본 서신은 개인적인 성격이 농후하게 풍기는 서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를 강해 할 때도 수신자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지만 수신자는 에베소에 담임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본 서신도 역시 마찬가지로 에베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로 권면과 격려와 믿음을 저버린 자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내용과 그리고 복음사역을 잘 수행 하다가 죽음을 앞에 둔 사도 바울 자신의 회고담이 기록되어 있는 이 책의 특징입니다. [1:13~14 , 1:15~18 , 4:6~8]
두 번째 디모데전서와 디도서 두 서신은 비교적 교리문제를 다루고 있는 반면 본 서신 디모데후서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1:8]라고 하는 고독한 복음 전파자로서의 삶에 대한 권면이 강하게 풍기는 것이 이 책의 두 번째 특징인 것입니다.
Ⅱ. 문안인사 1~2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 지어다>
A . 하나님 뜻으로 사도가 된 바울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서신의 발신자로서 자신을 소개 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도직에 대해 자기의 뜻이나 주위 사람들의 의해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란 원어로 [헬.ἀπστόλος아포스토로스]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자기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말은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 중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군을 세울 때 당신이 원하는 자들을 일군으로 부르시고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당신이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막3:13~14]을 보게 되면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B .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의 사도된 바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 의 사도 된 바울은>
여기서 <생명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에 의해 사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이 생명의 약속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바울을 사도로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C . 애정이 넘치는 호칭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본 서신에서 수신자를 언급할 때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는 말로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호칭은 우리에게 디모데를 향한 사도바울의 마음을 깊이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이란 호칭은 혈통적 관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관계를 부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일생동안 복음을 전하며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에게는 자기를 낳아준 육신적 부모가 있었습니다.
디모데의 신앙은 외조모나 어머니로부터 신앙의 영향력을 받고 자랐음을 본장의 5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행16:1]에서 저자 누가는 디모데를 사도바울의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앙적인 전문교육은 바울을 통해 이루어 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 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부를때 <사랑하는 아들>이란 호칭을 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관계가 더 값지고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12:50]에서<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관계는 혈통적 관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립됩니다.
이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D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 (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 지어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하나님 아버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사 내용은 신약성경 중 사도 바울의 서신중에 제일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서신들 중에 다른 서신에서 쓰지 아니하는 단어가 있는데 “긍휼”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본 서신에서 만 특별히 사용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긍휼>이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 사람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정을 베푸는 것을 긍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쓸 무렵 디모데는 병약한 가운데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를 위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깨 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본문에서 이 대목을 보면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보는 이의 느낌이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영적으로 따뜻한 아버지의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 기도할 때 대상의 형편을 알고 살핀 후 상황에 맞는 기도를 하해야 하는 것입니다.
Ⅲ. 디모데를 보기 원함 3-5절
A . 바울의 기도(3상)
<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살전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호흡이 끊어지면 살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사람의 호흡과 같아 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밤낮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간구>란 단어는 [헬.δέησις 데에시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간곡한 부탁”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은 밤낮 쉬지 않고 디모데를 위해 하나님 앞에 간곡하게 기도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종들도 기도해야 하고 성도들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우리에게 많은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막1:35]의 기록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눅6:12]에서도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라고 저자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B . 바울의 감사(3 ,5~6)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바울은 기도 중에 쉬지 않고 디모데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 참말로 사랑스런 아들 그 이상 이였음 읽는 이들로 느끼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 2:20-22]에서 디모데에 대해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뜻을 함께한 복음의 일군이며 ,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동역자로 더 없는 귀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설교 중에는 종종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하나님을 섬겨 왔다고 표현한 곳이 있습니다.
[행23:1]에서 [유대인의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란 내용으로 설교한 적이 있었고 그 후에 [행24:14-16]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설교한 내용인데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란 내용 중에도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양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내용에서는 디모데의 믿음의 성장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의 가문은 3대에 거쳐 하나님을 섬겨온 신앙의 가정 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거짓 없는 신앙의 영향 받아 거짓 없는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목회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디모데의 노고에 바울은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C . 바울이 디모데를 간절히 보고자 하는 두 가지 이유(4)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이 디모데를 간절히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보고자 하는 이유는 디모데의 눈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디모데는 마음이 여린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디모데의 눈물은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디모데는 눈물이 많은 사람 이였음이 분명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참된 눈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통회하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고 구원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의 인물됨을 보았을 때 이런 내용의 눈물이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디모데를 심히 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그의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보면 기쁠 것이 없고 오히려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지만, 보고 싶은 사람을 볼 때 그의 기쁨은 배가 될 것입니다.
이 기쁨은 마음의 만족에서 나오는 것이며 , 슬픔과 탄식은 마음의 불만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진실한 성도들에게 만족과 충만한 기쁨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Ⅳ . 디모데에게 주는 간절한 권면6~7
A . 은사를 회복하라(6)
<6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사도들의 안수 할 때는 특별한 은사가 동반한 것 같습니다.
사도들의 사역가운데 초자연적인 은사가 초대교회에는 임했음을 사도행전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행8:17]을 보게 되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에 내려가 사역 중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안수 한즉 사마리아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되겠습니다.
불일듯하다. 는 것은 성령 충만을 말하고 있는데 사명에 불타는 열정을 사라지지 않게 하라는 당부입니다.
B . 성령이 주시는 마음 (7)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에 해당하는 원어는 헬라어는 [πνευ̃μα δειλαίς 프뉴마 데이라이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 뜻은 “비급한 영”또는 “겁 많은 영” 이란 뜻입니다. 성도들은 “겁 많은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은 받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의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성령은 두렵게 하는 영이 아니라 담대케 하는 영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한 추진력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힘이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행8:12~13]의 내용을 보게 되면 빌립 집사가 복음을 전파하는 곳에는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롬1:16]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는 소심해서는 안 됩니다. 담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추진력 있게 사역을 감당할 때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은 신앙인으로 오직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시며 성도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요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또한 깨닫게 해 주십니다.
본 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라고 했습니까?
두 번째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마음>은 희생 적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사도 요한은 [요일4:10]에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를 위해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화목제무로 희생 시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예수 사랑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사랑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예수 사랑정신은 의를 위해 희생하는 정신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희생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자기의 만족을 다 채우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 희생적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진 자의 우월감을 채우려는 것이지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2:15]에서<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하였습니다. 이웃 사랑의 정신은 이웃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근신하는 마음>이란 “건전한 마음” 을 말합니다. “올바른 마음”을 건전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Ⅴ. 복음을 위한 당부 8
A . 복음을 부끄러워 말라(8)
<8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 편지를 쓸 당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혹시 목회를 하는 디모데에게 심적으로 위축 될 까봐 염려하여 자신이 옥에 갇힌 것에 위축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힌 것은 강도를 하거나 살인을 하여서가 아니라 타인의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16]에서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당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들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련을 당하는 것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 보람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Ⅵ . 소명의 목적의 기준 9
<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의 소명의 목적은 구원과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 만세전에 택하시고 예수 안에 부르신입니다. <구원>이란 단어는 여기서 일반적으로 만인을 구원하기 위한 예비 된 구원을 말하는 것이며 , 다음으로 <거룩한 부르심>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개인적으로 부르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엡1:4~5]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을 미리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거룩한 삶은 예수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죄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거룩하기 위한 부르심은 사람들의 의로운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Ⅶ . 복음의 역할 10
<10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본 절은 복음의 확증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나타났으며 ,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확증되었습니다.
본절에서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가리킵니다.
복음이란 뜻은 기쁜 소식이란 뜻인데 부활이야말로 인생에게 더 이상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를 믿는 이들로 영생을 얻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의 부활에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은 기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썩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이 보증의 확증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떤 환경에도 위축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다가 의로운 일에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사생활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자들로 나만이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Ⅷ . 아름다운 직분 11~12
[창3:6]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건설하신 애댄 동산에서 하와의 눈에 들온 선악과 보고 표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각적인 아름다움 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시각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청각정인 아름다움과 지각적인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고 육적인 귀로들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것은 깨달음으로 큰 소망과 기쁨이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보이는 것만 다가 아니라는 말씀드리고 자 하는 것입니다.
A . 아름다운 세 가지 직분(11)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여기서 세직분이 나오는 데 이 세 직분은 모두 복음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반포자”란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계가 있으며 , 사도란 직분은 주님과 관계가 있고 , 교사란 성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반포자란” [헬 , κήρυξ 케뤽스]란 단어로 “전도자”에게 적용되는 단어 입니다.
“사도”란 [헬 , ἀπό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알고 하는 단어로 “사자” ,“보내심을 받은자 “란 뜻으로 사도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교사”란 [헬 , διδάσκαλος 디다스칼로스]란 단어로 “스승”을 가리키는 단어로 목회자와 성도의 관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세 직분을 말하여 아름다운 직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름다운 소식인 복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B . 아름다운 것에 대한 확신 (12)
<12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 아름다운 복음을 위해 로마 옥중에 갇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 자기의 처지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고히 고난을 당해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의탁한 것>이란 [헬, παραθήκν μου 파라데켄 무]라고 하는 데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나의 맡긴 것”이란 뜻됩니다.
이것을 두 가지로 직역 할 수 있는데 “내가 주께 맡긴 것”이란 말과 “주께서 내게 맡긴 것” 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께 맡긴 것”이란 우리의 “생명과 구원”을 말하며 , “주께서 내게 맡긴 것” 이란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도들이 구원을 얻는 것과 복음전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재림하실 그때에 기필코 완성 될 것이라는 확실성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라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 시기 때문에 거짓약속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는 약속하신 것을 틀림없이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확실히 돌아보시는 분이시며 모든 인생이 믿을 만한 분이심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라고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주를 위한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 때문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신실하신 하나님 또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현재 우리가 복음을 위해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공정하게 갚아 주실 것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공의롭게 모든 일을 판단하시고 보응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현재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부당하게 받고 있는 고난을 부끄러워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 서신을 쓴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 전도자로 복음을 전하다가 무고하게 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도자가 아니었다면 이 고난을 감수 했겠습니까?
이악한 세대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고난의 길입니다.
사탄은 영혼 구원의 일을 가장 미워합니다. 악한 자들도 자신들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을 가장 꺼려하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복음이 세상에 있는 악을 정죄하기 때문에 마귀의 권세아래 있는 이악한 세상은 복음 전파를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 전도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게 받아 드려 합니다.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우리의 의탁한 것을 하나님이 그 날까지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생에 대한 보장입니다.
여기서 <그 날까지>란 시제를 쓰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혹은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Ⅸ. 아름다운 말을 지키라 13~14
A . 바른 말을 본받아 (13)
<13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여기서 <바른 말>이란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훈한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교회 안에는 거짓 교사들이 침투하여 영지주의 사상 ( 비 물질인 영은 선하고 순수하고 신비하고 물질인 육체는 악하고 타락한 것이라는 이원론적 사상을 말한다.)퍼뜨렸기 때문에 그들의 잘 못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고 사도 바울 자신이 디모데에게 가르쳐 준 대로 바른 신앙생활에 힘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키고>라고 하는 원어는[헬.ἔχε 에케]라고 하는 단어로 “가지고 있으라”, “붙들라” 라고 하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잊지 말라.” 뜻도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을 끝까지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사랑> 이 두 가지는 신앙의 요소 즉 근본을 말하는 것으로 [갈5:6]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에 사랑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우리 음식에 있어서 조미료와 같습니다.
모든 음식에는 조미료 즉 소금이 없으면 맛을 낼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랑으로 행하는 생활은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B. 부탁한 것을 지키라(14)
<14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여기서 <아름다운 것>이란 모든 사람이 듣고 믿을 때에 영생에 이르게 하는 복음 전파의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본 절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이 직무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 직무는 그 당시 디모데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지금의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부탁입니다.
여기서 <지키라.>라고 하는 그리스어는 [헬.φύλαξον 퓔락손]이라고 하는 단어로 “'간직하라. , 준행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란 이 내용을 직역하면 바른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함께 수행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안에 내주 하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엡1:13]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전12:13]에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롬8:9]에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속에서 거룩한 정신과 거룩한 마음으로 활동하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 복음전파에 동참하여 함께 활동하고 계십니다. 정경이 완성되기 까지 주후 100년까지는 사도들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복음의 확증을 위해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어 왔습니다. 이는 성령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들과 함께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동역하시며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보충해 주시고 담당하고 계십니다.[롬8:26]
Ⅹ. 아시아인의 배신15
A . 배신자의 대표적 인물(15)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아시아는 지금의 아시아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