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용공으로 문제가 된 '조선인 반장'의 착복임금 자체는 당시로선 고액 / 5/17 (화) / 데일리 신조(デイリー新潮)
혁명을 목표로 하는 재일본조선인연맹과 일본공산당의 활동 거점 중 하나는 많은 조선인들이 일하는 탄광이었다. 그 일은 위험을 동반했기 때문에 임금은 높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전액 본인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여기에 징용공 문제의 원인이 있다.
민족 통일과 공산 혁명을 목표로 해, 일본 공산당 재건시의 모체가 되기도 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그 활동비는 철도와 물류 이권을 챙긴 동포 송환사업과 빼돌린 쌀의 매매 등에서 나왔지만 그 밖에도 중요한 자금줄이 있었다.
바로 탄광이다.
법무부 입국관리국에 따르면 종전 당시 우리나라(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조선인은 200만 명이 넘는다. 1938년 전시하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고 이듬해 국민징용령이 내려지자 한반도 등에서 63만5000여 명의 노무자가 도항해 왔다. 패전 후 GHQ로 출입국 관리가 이관됐을 때 사업 현장에 있던 조선인들은 32만2000여명에 달했다.
조선 노무 동원자가 다수 일했던 곳은 군수 산업, 토목 사업, 그리고 석탄 산업이었다.
1947년 발행된 석탄노동연감에 따르면 탄광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 수는 1945년 7월 말 현재 전체 석탄노동자 39만153명의 30%인 약 12만 명에 달했다. 그 체류지는 조선과 가까운 후쿠오카·야마구치·히로시마현 및 홋카이도의 산탄지였다.
재류 조선인들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전화를 피하기 위해 귀국을 시작했다. 특히 미군 공습의 표적이 된 군수공장 근로자들은 줄줄이 직장을 포기하고 공습이 없는 한반도로 배를 만들어 귀환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단숨에 대량의 조선인들이 송환 항구로 몰려들었다.
필요한 인물의 귀환 거부
GHQ(General Headquarters/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는 치안 유지를 위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계획 수송으로 송환시키려 했고, 이에 정부는 조선인 단체 흥생회, 그리고 조련의 협조를 부탁했다.
미쓰비시 등 대형 자본의 탄광에서는 독자적으로 배를 만들어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귀환시키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는 전후 부흥을 위해서는 에너지원인 석탄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전쟁터에서 귀환해 탄광에서 인력을 충원할 수 있을 때까지 조선인을 잔류시키려 했다.
1945년 9월 1일 각 지방장관에게 통지에는,
「석탄산 등에서의 숙련노무자로서 체류희망자는 체류를 허용할 것. 단, 사업주에게 강제로 권장하지 않을 것. 수송 순위는 대체로 토건 노무자를 먼저 하고 석탄산 노무자를 마지막으로 하며 지역적 순위에 대해서는 운수성에서 결정한 후 관계부현·통제회·동아교통공사에 연락한다.」('조선인 집단이입 노무자 등의 긴급조치 이관 건')
라고 있다.
또 조련도 조직의 소중한 구성원을 줄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인양특권 상실자 명단을 만드는 등 필요한 인물의 귀환을 거부하고 있다.
홋카이도의 조선민족통일동맹(조련의 한 조직) 창설 멤버로 공산당 핵심으로도 활약한 김흥곤은 GHQ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홋카이도에 17만 조선인
1945년 11월 1일과 2일 김은 삿포로에서 3천명 규모가 되는 통일동맹 결성대회를 개최하려 하고 있었다. 당초 GHQ는 협조적이어서 이들의 이동을 위해 여권을 주고 군 운전기사가 딸린 지프와 특별열차를 마련해 현지 홋카이도신문에 동포 공지를 해주는 편의도 꾀했다. 준비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재홋카이도 조선인노동자의 우선적 계획 수송이 나왔다.
「우리의 의도와는 반대로 점령군 당국은 당시 250만 명이나 되는 재일교포들을 본인들의 의지에 따라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점령지 일본의 치안상 편리했고, 게다가 홋카이도에는 석탄을 캐기 위해 17만 명의 조선인이 있었지만 점령 후에는 석탄 한 조각 캐기는커녕 싸움만 벌여 번거로웠기 때문에, 눈이 쌓이면 수송도 곤란하여 무료로 재홋카이도 조선인 노동자를 우선적으로 계획 수송하도록 일본 정부에 명령한 것이다. 금일까지 일한 임금은 깨끗이 지불하고 본인의 고향까지 무료로 우선 돌려보내 준다는 계획에 따라 강제로 끌려온 이후 밤이나 낮이나 한시도 잊지 못한 그리운 고향으로, 가장 용감하게 우리 조선민족통일동맹을 위해 함께 싸운 사람들도 우리에게 거절하지 않고 귀국해 버리는 것이었다」(김흥곤 「분노의 해협-어느 재일교포 전후사」 「계간인간잡지」 초풍관)
홋카이도에는 유바리(夕張), 비바이(美唄), 소라치(空知)의 탄광을 중심으로 14만 5천여 명, 치시마(千島)를 포함하면 17만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그 중 상당수는 조련(재일조선인동맹)의 구성원이었던 것이다.
노동조합, 조련, 공산당
산탄지는 전후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일본 공산당의 활동 거점이었다. 당시 탄광의 모습에 대해 일본 공산당 간부였던 데라오 고로(寺尾五郎)는 이렇게 회상했다.
「홋카이도의 탄광촌에 들어간 적이 있다. 깜짝 놀랐네, 역시. 300명의 거대 조직이 있어. 그게 다 조선인이고 조련 회원이고 게다가 어떻게든 노동조합지부이기도 해. 세 개의 다른 조직이 전부 똑같아. 그리고 제일 고참이 조합장이고, 제일 술이 센 것이 조련의 지부장이고, 제일 논리적인 것이 조직장이고(웃음), 무엇을 해도 300명이 하나가 되어 준다」(테라오 고로·降旗節雄対論 「혁명 운동사의 심층」타니자와 서방)
테라오는 말한다.
「어느 날 어떤 남자가 조합비 모으고, 어느 날 어떤 남자가 조련 회비 모으고, 어느 날 어떤 남자가 당비 모으고, 내는 분도 어디에 왜 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일에 사용하고 있으니까, 어디가 사용하든, 좋지 않은가』라고 하는 거야. 『이번에 도쿄에서 대회가 있다, 대표 두 명 나올 것이다』 『좋아 다녀와라』. 그게 전당대회든 조합대회든 요컨대 좋은 일을 하러 가는 거니까 조합비 모아서 조련에 가든 전당대회에 가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과 대중단체의 구별이라든지, 노동단체와 민족단체의 구별도 곧 다 같은 혁명이야기를 하고 천황제 타도 얘기를 하고 있어. 혁명적 앙양기란 그런 거니까 그거면 될 것 같고 멋질 것 같고 결국 난 세개 조직의 구별도 안 하고 정리도 안 하고 투쟁금만 받고 도쿄로 돌아오고, 특별히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어」(同前)
노동조합, 조련, 공산당이 혼연일체가 되면서 모아진 자금에도 구별이 없었던 것이다.
공산당에는 아낌없이 투쟁금을 내는 조선인
조선인은 탄광 노동자에 국한되지 않고 공산당 동지에게는 아낌없이 투쟁금을 낸 것 같다. 애초에 데라오는 후추(府中)교도소에 도쿠다 구이치(徳田球一) 등 공산당 간부들의 출옥을 맞으러 갔을 때에도 생면부지의 조선인에게 생활비를 후원받았다.
탄광에서는 조선인들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오야마 료죠(大山良造)의 「규슈지방조선인 강제연행 증언-2-죽음을 건 저항」('부락해방' 59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홋카이도에서는 김일성 장군 휘하의 조국광복회 공작원들이 각 탄광에 잠입, 해방 직후 곧바로 전도적 조직이 결성돼 귀국선 요구와 천황제 폐지 목표가 나와 있다.」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Summation No.1에도 홋카이도와 조반 등 일부 지역 탄광에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이 잦아 불온한 분위기에 휩싸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산탄지 조선인 노동자의 상당수는 차례로 귀국해 갔다. 1945년 8월말까지 10만 2천명, 9월말 6만 7천명, 10월말 3만 7천명, 11월말 1만 7천명, 12월말 773명으로 이 해에 22만 4천명 가까이가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석탄노동연감」).
탄광의 임금 체계
이 조선인 노동자들이 귀국할 때 「체불임금」이 있어 이를 보상하라는 것이 최근 한국이 주장하기 시작한 「징용공 문제」다. 이 체불임금은 어떻게 발생했고 어떻게 처리됐는가. 사실 여기에 조련이 크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파고들려면 우선 당시 탄광에서의 임금체계와 지급방법을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자 김두용은 『조선근대사회사화』(향토서방/郷土書房)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조반탄광(후쿠시마현, 이바라키현)에 대해,
「노동 현장은 매우 가혹했고 학대도 있었고 월급은 저금 형태로 억제돼 도망갈 수 없게 돼 있었다」
라고 쓰여져 있다.
다쓰다 코지(龍田光司)의 「조반(常磐) 탄전조선인 전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의 청취조사」(재일조선인사연구39호)에는 당시 임금에 대한 증언이 나온다.
「월급은 한 달마다 받고, 많이 받으려고 하든 조금 받으려고 하든 조금씩만 줬다. 남은 것은 저금하게 되었다. 30엔~500엔씩 집에 보낸 적이 있었다. 놀다가 다 써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광희의 증언)
「월급은 한 달에 40엔 정도 받았다. 송금은 한 번에 20엔을 보내기도 하고, 도망갈 때 사용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모아두기도 했다. (중략) 탄광을 나올 때 600엔을 받고 나왔는데 300엔을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300엔만 가져왔다」(이칠성(가명)의 증언)
「임금은 월 15엔 정도였다. 송금은 15엔 정도 사람에게 부탁해서 보냈다. 송금이 도착했는지 돌아와서 들었는데 받았다」(종갑규의 증언)
「임금은 받지 않았다. 아주 조금 받았다. 송금은 하지 않았다」(이흥순 증언)
「임금은 받지 않았다. 막걸리 한잔도 되지 못할 액수였다. 동원됐을 때 임금에 대해서는 설명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탄광에 간다는 말은 들었다.(중략) 집에 송금은 기숙사장이 보낸다고 했는데 귀국 후 가족들에게 물어보니 아무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전병룡 증언)
제각각의 이야기로 실태를 알기 어렵다.
500명 모집하는 곳에 10대 1의 응모
조반(常磐)탄광에서 채탄을 실시한 입산채탄주식회사의 임금에 대해 나가사와 시게르(長沢秀)는 이렇게 썼다.
「조선인 채탄부의 경우에는 하루 임금이 1엔 80전에서 1엔 60전이고, 한 달에 20일간 일하면 월급은 삼십육엔에서 삼십이엔은 되었다. 하지만 이 월급에서 식비, 소득세·후생연금 보험료·작업복값, 지하 버선값·잡비 등이 차감된 것이다. 게다가 이 잔금에서 탄광회사 내부의 양식(구매소)에서의 전표(통장)를 사용한 일상의 쇼핑비와 회사의 강제 사내저금이 차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가 조선의 고향으로 송금할 여유는 전혀 없었거나, 있어도 얼마 되지 않았다」(조반 탄전에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하여), 준대사학 제40호)
조선인 근로자에게 약간의 용돈 외에 현금을 주지 않은 것은 도피 방지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 그 임금은 「회사의 노무과의 기숙사 계원이나 기숙사주가 착복해, 빼돌렸다」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문제가 많았던 이 조반탄광에서도 당시 한반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것 같아 이와키(磐城)탄광주식회사가 경상남도 4개 군에서 모집을 했더니 500명 모집에 10대 1의 응모가 있었다(동)고 기록되어 있다.
높은 급료를 받은 탄광부
그렇다면 다른 탄광은 어땠을까.
한국영화 군함도에서 지옥섬으로 그려진 나가사키현의 하시마에 대해 조선인 갱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동료 중에는 일년에 천엔 정도의 저축을 하는 사람은 자라에 있습니다.(나가사키 닛폰 1941년 3월 1일)
후쿠오카현 가호군의 메이지광업주식회사의 조선인 모집요항에는 일당으로 4엔, 높은 사람은 7엔, 최저 3엔으로 되어 있다.
또 「연합회가맹탄광이입조선인갱부취업상황조」(1939년 11월 25일)에는 채탄부는 하루 평균 4.6엔, 기계부가 되면 평균이 일당 3.24엔으로 떨어지고 공사부가 되면 2.97엔으로 돼 있다.
당시 순경의 초봉은 45엔이었다. 또 회사 사무직은 75엔 정도다. 조반탄광을 별도로 하면, 탄광에서는 월수입 100엔 안팎이 되니까 당시로서는 높은 봉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탄광의 노동환경은 나빴다. 전시경제의 무리한 증산체제 속에서 가스폭발 낙반 등 사고가 잦아 채탄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또 일본 남성이 전쟁터로 향하는 가운데 조선인은 탄광의 귀중한 노동력이었다. 이 때문에 고액의 임금이 마련된 것이다.
징용공은 도박 좋아해.
참고로 탄광이 아닌 히로시마 도요공업에서 징용공으로 일한 정충해(鄭忠海)의 조선인 징용공 수기(가와이 출판)에는 월수입이 140엔으로 기재돼 있다. 이것도 상당한 고액이다.
탄광회사의 급여대장 등을 보면 임금은 직능급이 대부분이었고 조선인 징용공에게도 일본인 징용공에게도 평등하게 지급되고 있었다. 일당 지불인 곳도 있었지만, 대기업은 익월 지불이 주류였다.
그리고 강제예금 제도도 각지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도망 방지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모처럼 번 월급을 노름으로 날리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1938년 11월 26일 「나가사키 일일신문」에서는 나가사키현 하시마 탄광의 12명의 조선인 탄광부가 조선에서 유행하던 화투로 1승부에 10전의 도박을 벌여 200여 차례 승부를 벌이다 검거된 사실이 보도됐다.
미츠비시의 사도 가네야마에서, 조선인 노무자의 통역이었던 인물에 대한 청취에서는,
「당시 젊고 혈기 왕성한 반도 출신 징용공들은 노름을 좋아해 이긴 것은 좋지만 진 것은 가족에게 보낼 수도 없어 나중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종종 노름 사냥을 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임금 가지고 달아나기
지급방법은 미쓰비시 하시마 탄광이면 개별 노무자가 월급날에는 도장을 찍고 줄을 서서 월급을 받으러 갔는데 노무동원자의 경우 일단에 조선인 반장이 있어 반의 월급을 한꺼번에 받아 반장이 각자에게 배포하는 일이 많았다.
이 구조가 각지의 탄광, 금속광산에서 종종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 문화 자유 위원회 발행 「자유의 깃발아래」의 창간호(1952년 9월)에, 「현탄로위원장나가타장전(現炭労委員長田中章伝)」이라고 제목을 붙인 기사가 있다.
다나카 아키라 위원장은 전쟁 전의 이름을 다나카 나가토시(田中長求)라고 하며, 가바타 인조석유주식회사 내연광업소로 조선 대구지구에서 일하러 온 100명의 조선인 징용공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반 징용공 임금을 일괄 송금하는 책임자였으나 징용공 중 한 명이 낙반사고로 숨지고 그 형이 유골을 찾으러 오자 나가토시(長求)가 임금의 일부를 보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기숙사장이 따지자 다나카는 시원시원하게 자백하고 모두에게 따끔따끔하게 얻어맞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인물, 전후 근로봉사를 금전으로 배상하라고 회사에 압박해 조선민족 영웅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또 아키타 총련 지부장 이우봉은 「하나오카 광산의 추억」 속에서
「타치바나 기숙사장이 모두의 통장과 도장을 들고 잠적해 난리가 났다」(재일 1세가 말하는 일제 36년간 조선민족에게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재일 1세가 말하다 출판회)
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회사에서
「이미 기숙사장에게 돈을 줬으니 이중으로 줄 수는 없다. 지금 회사 쪽이든 경찰 쪽이든 범인을 수배해 찾고 있다. (중략) 조금 날짜를 달라」
라는 말을 들은 이씨 등은
「조선인은 해방된 셈이니 국제적 문제다」(同前)
하고 GHQ에 호소했다.
일본 정부의 방침은
그 결과 아키타현(秋田県) 지사에게 회사로부터 1인당 천엔, 의류 일식(담요, 속옷, 셔츠, 상하복, 신발, 점퍼)을 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러한 조선인 반장에 의한 착복이 상시화되었다면, 「체불 임금」의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첫머리에도 소개한 「조선인 집단이입 노무자 등 긴급조치에 관한 건」 에서 다음과 같은 방침을 통달했었다.
「二. 귀환할 때까지는 현재의 사업주로 하여금 계속 고용하도록 하고 급여는 대체로 종래대로 하여야 하는 것도 8월 15일 이후 차당 왼쪽과 같이 조치할 것.
(一) 종래대로 취업하는 자에 대해서는 사업주로 하여금
(1) 임금에 대해서는 임금규칙에 따라 종전대로 급여할 수 있도록 계산을 해 둘 것
(2) 임금의 지급에 대해서는 당좌의 용돈으로서 필요한 정도의 현금을 본인에게 전달하고 잔금은 각 인명의의 저금으로 하여 사업주가 보관해 둘 것
(3) 우(右)조치는 조선내와의 통신두절로 인한 부득이한 것으로 하고, 장래에 귀환시 저금은 반드시 본인에게 전달한다는 취지를 철저히 도모할 것
(二) 휴폐지공장·사업장 및 조업공장·사업장의 이입 조선인 노무자로 취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사업주는 차당 표준보수일액의 60% 이상의 휴업수당을 지급하고 숙소식량 등에 대해 종래와 같은 취급을 할 것.
(향후 상황에 따라 우(右)휴업수당 지급에 필요한 비용에 대해서는 국가보상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체불임금은 어디로?
용돈 정도의 현금을 본인에게 전달하고 나머지는 본인 명의의 저금을 사업주가 보관, 귀국 시 돈은 반드시 본인에게 전달한다.게다가 휴업 보상을 해주기도 하는 상당히 극진한 조치다.
그러나 전후 혼란기이다. 저축이 본인에게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고 서둘러 귀국한 사람에게는 통장이 전달되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계약 도중에 도망쳐 거처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공습으로 숨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체불 임금」은 분명히 있다.
그럼 그건 그냥 등한시 된 건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체불임금은 기업으로부터 공적기관 등에 공탁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공탁처의 명단이 있었던 것이다.
(경칭생략)
근현대사검증연구회 토고 카즈마(東郷一馬)
주간신조 2022년 4월 28일호 게재
신조사
https://news.yahoo.co.jp/articles/6c76ccd307574d28f0ed4188224f961bee35e563?page=1
徴用工で問題となった「朝鮮人班長」による着服 賃金自体は当時としては高額
5/17(火) 5:58配信
58
コメント58件
この記事についてツイート
この記事についてシェア
デイリー新潮
ソウル市の龍山駅前にある徴用工像
革命を目指す「在日本朝鮮人連盟」と「日本共産党」の活動拠点の一つは、多くの朝鮮人が働く「炭鉱」だった。その仕事は危険と隣り合わせだったから、賃金は高い。しかしさまざまな理由で全額が本人の手に渡っていなかった。ここに「徴用工問題」の淵源がある。
【写真18枚】大勢の人々が行きかう1958年の「軍艦島」
***
民族統一と共産革命を目指し、日本共産党再建時の母体にもなった在日本朝鮮人連盟(朝連)――。その活動費は、鉄道や物流の利権を得た同胞の送還事業や、闇米の売買などからもたらされたが、他にも重要な資金源があった。
それは「炭鉱」である。
法務省の入国管理局によると、終戦時にわが国に在留していた朝鮮人は、200万人を超える。1938年、戦時下の労働力不足を補うために国家総動員法が施行され、翌年、国民徴用令が出されると、朝鮮半島などから63万5千余人に上る労務者が渡航してきた。敗戦後にGHQに出入国管理が移管された時、事業現場にいた朝鮮人らは32万2千余人に上った。
朝鮮からの労務動員者が多数働いていたのは、軍需産業、土木事業、そして石炭産業だった。
1947年発行の「石炭労働年鑑」によると、炭鉱で働く朝鮮人労働者数は、1945年7月末時点で石炭労働者全39万153人の3割、約12万人に及んだ。その在留地は朝鮮に近い福岡・山口・広島県及び北海道の産炭地だった。
在留朝鮮人たちは、日本の敗色が濃くなると、戦禍を逃れるために帰国を始めた。特に米軍の空爆の標的となった軍需工場の労働者は、次々と職場を放棄し、空襲のない朝鮮半島へと船を仕立てて帰還していった。そして戦争が終わると、一気に大量の朝鮮人が引揚げ港に殺到した。
必要な人物の帰還を拒否
GHQは治安維持のため、できる限り早期に朝鮮人労働者を計画輸送で送還させようとし、それを受けて政府は朝鮮人団体の興生会、そして朝連の協力を仰いだ。
三菱など大手資本の炭鉱では、独自に船を仕立て、朝鮮人労働者をまとめて帰還させていた。もっとも日本政府は、戦後復興のためにはエネルギー源の石炭が不可欠だったことから、日本人が戦地から帰還し、炭鉱での人員の補充ができるまで朝鮮人を慰留しようとした。
1945年9月1日の各地方長官への通達には、
「石炭山等に於ける熟練労務者にして在留希望者は、在留を許容すること。但、事業主に於て強制的に勧奨せざること。輸送順位は概ね土建労務者を先にし、石炭山労務者を最後とし、地域的順位に付ては運輸省に於て決定の上、関係府県・統制会・東亜交通公社に連絡す」(「朝鮮人集団移入労務者等ノ緊急措置ニ関スル件」)
とある。
また朝連も、組織の大切な構成員を減らしたくはなかった。このため、引き揚げ特権喪失者リストを作るなどして、必要な人物の帰還を拒んでいる。
北海道の朝鮮民族統一同盟(朝連の一組織)の創設メンバーで、共産党の細胞としても活躍をした金興坤は、GHQへの不満を記している。
北海道に17万の朝鮮人
1945年の11月1日と2日、金は札幌で3千人規模になる統一同盟の結成大会を開催しようとしていた。当初、GHQは協力的で、金らの移動のためにパスポートを与え、軍の運転手付きジープや特別列車を用意し、地元の北海道新聞に同胞への告知を行う便宜も図った。準備は万事順調に運んでいたが、突然、在北海道朝鮮人労働者の優先的計画輸送が打ち出された。
「我われの意図とは反対に、占領軍当局は当時二五〇万名もいる在日朝鮮人を本人たちの意志にしたがって故郷へ帰すことが、占領地日本の治安上便利であったし、しかも北海道には石炭を掘るために十七万名もの朝鮮人がいたが、占領後は、石炭一かけら掘るどころか争いばかりおこして厄介であったことから、積雪となれば輸送も困難となるので、無料で在北海道朝鮮人労働者を優先的に計画輸送するように日本政府に命じたのであった。今日まで働いた賃金は奇麗に支払ったうえ本人の故郷まで無料で優先的に返すという計画に従って、強制的に引っ張られてきて以来、夜も昼も一分たりともわすれたことのない懐かしい故郷へと、もっとも勇敢にわが朝鮮民族統一同盟のために、共に闘った人々も我々に断りもなく帰国してしまうのであった」(金興坤「怒りの海峡―ある在日朝鮮人の戦後史」「季刊人間雑誌」草風館)
北海道には夕張、美唄、空知の炭鉱を中心に14万5千余人、千島を入れると17万人の朝鮮人がいた。その多くは朝連の構成員だったのである。
労働組合、朝連、共産党
産炭地は戦後の朝鮮人共産主義者と日本共産党の活動拠点だった。当時の炭鉱の様子について、日本共産党の幹部だった寺尾五郎は、こう回想している。
「北海道の炭鉱町に飛んだことがある。驚いたネ、さすがに。三百人からの巨大細胞があるんだ。それが全員朝鮮人で、『朝連』の会員で、そのうえ『なんとか労働組合支部』でもあるんだ。三つのちがった組織が全部おんなじ顔ぶれなんだ。そして一番の古参が組合長で、一番酒の強いのが朝連の支部長で、一番理屈っぽいのが細胞長で(笑)、何をやるのも三百人が一体になってやる」(寺尾五郎・降旗節雄対論『革命運動史の深層』谷沢書房)
寺尾は言う。
「ある日ある男が組合費集めて歩いて、ある日ある男が朝連の会費集めて、ある日ある男が党費集めて、出す方もどこへなんのために出しているのかわけがわからない。だけど、『良いことに使ってるんだから、どこが使おうと、いいじゃネーカ』ってなもんなんだ。『今度東京で大会がある、代表二人出そう』『ヨーシ行ってこい』。それが党の大会であろうと組合大会であろうと、要するに良いことをしに行くんだから、組合費集めて朝連に行こうと党大会に行こうと、誰も不思議に思わない。党と大衆団体の区別とか、労働団体と民族団体の区別もへちまもなく、みんな同じ革命の話をやり、天皇制打倒の話をしてるんだ。革命的昂揚期とはそんなもんなので、それでいいと思うし、すばらしいと思うし、結局私は、三つの組織の区別もつけず、整理もせず、カンパだけもらって東京へ帰ってきて、別に誰も怒りもしなかったよ」(同前)
労働組合、朝連、共産党が渾然一体となり、集められた資金にも区別はなかったのだ。
共産党には惜しげもなくカンパする朝鮮人
朝鮮人は炭鉱労働者に限らず、共産党の同志には惜しげもなくカンパをしたようだ。そもそも寺尾は、府中刑務所に徳田球一たち共産党幹部の出獄を迎えに行った時にも、見ず知らずの朝鮮人に生活費をカンパしてもらっている。
炭鉱では朝鮮人たちがさまざまな活動を繰り広げていた。大山良造の「九州地方朝鮮人強制連行の証言―2―死をかけた抵抗」(「部落解放」59号)にはこんなくだりがある。
「北海道では、金日成将軍指揮下の祖国光復会の工作員が、各炭鉱に潜入、解放直後直ちに全道的組織が結成され、帰国船の要求や天皇制廃止の目標が出されている」
連合軍総司令部(GHQ)のSummation No.1にも、北海道や常磐など一部地域の炭鉱で処遇改善を求めてストライキが多発し、不穏な空気に包まれたことが記録されている。
だが、産炭地の朝鮮人労働者の多くは次々と帰国していった。1945年8月末までに10万2千人、9月末に6万7千人、10月末に3万7千人、11月末に1万7千人、12月末には773人と、この年に22万4千人近くが帰国の途についたのである(「石炭労働年鑑」)。
炭鉱の賃金体系
この朝鮮人労働者たちが帰国する際、「未払い賃金」があり、それを補償しろというのが、近年、韓国が主張し始めた「徴用工問題」である。この未払い賃金はどのように発生し、どう処理されたのか。実はここに朝連が大きく関わっていたのである。この問題に踏み込むには、まず当時の炭鉱での賃金体系や支払い方法について知らねばならない。
共産主義者・金斗鎔は、『朝鮮近代社会史話』(郷土書房)の中で、自身が見聞した常磐炭鉱(福島県、茨城県)について、
「労働現場は大変過酷なものであり、虐待もあり、給料は貯金という形で抑えられ、逃亡できないようになっていた」
と、書いている。
龍田光司の「常磐炭田朝鮮人戦時動員被害者と遺族からの聞き取り調査」(「在日朝鮮人史研究」39号)には、当時の賃金についての証言が出てくる。
「月給は一ヶ月ごとに受け取り、多く受け取ろうと少し受け取ろうと、少しずつしか与えられなかった。残ったものは貯金させられた。三〇〇円~五〇〇円ずつ家に送ったことがあった。遊んで全部使ってしまう人もいた」(韓広煕の証言)
「月給は一月四〇円程度受け取った。送金は一回に二〇円送ることもあれば、逃亡する時に使うのに必要なので貯めて置くこともあった。(略)炭鉱を出るとき六〇〇円もらって出てきたのに三〇〇円を誰かに貸して三〇〇円だけ持って来た」(李七星=仮名=の証言)
「賃金は月一五円ぐらいだった。送金は一五円ぐらい人に頼んで送ってもらった。送金が着いたかどうか帰ってから聞いたが受け取っていた」(宗甲奎の証言)
「賃金はもらっていない。ほんの少し貰った。送金はしなかった」(李興淳の証言)
「賃金は貰わない。マッコリーいっぱいにもならない額だった。動員された時、賃金については説明されていたかどうかはわからない。炭鉱に行くと言うことは聞いていた。(略)家への送金は寮長が送ると言っていたが、帰国後家族に聞くと誰も受け取っていないと言っていた」(全炳龍の証言)
まちまちな話で、実態がわかりにくい。
500名募集のところに10倍の応募が
常磐炭鉱で採炭を行った入山採炭株式会社の賃金について、長沢秀はこう書いている。
「朝鮮人採炭夫の場合には一日の賃金が一円八十銭から一円六十銭になり、一か月に二十日間働けば月給は三十六円から三十二円にはなった。しかし、この月給から食費、所得税・厚生年金保険料・作業服代、地下足袋代・雑費などが差し引かれたのである。さらにこの残金から炭鉱会社内部の糧植(購買所)での伝票(通帳)を使っての日常の買物代や会社の強制社内貯金が差し引かれていたので、朝鮮人労働者が朝鮮の故郷に送金する余裕は全然なかったか、あってもわずかなものであった」(「常磐炭田における朝鮮人労働者について」「駿台史学」第40号)
朝鮮人労働者に、わずかな小遣い銭以外、現金を持たせなかったのは、逃亡防止のためだったという。また、その賃金は「会社の労務課の寮の係員や寮主がピンハネし、横流しした」(同)こともあったそうである。
問題が多かったこの常磐炭鉱でも、当時の朝鮮半島では大人気だったようで、磐城炭鉱株式会社が「慶尚南道の四つの郡で募集をしたところ、五百名募集のところに十倍の応募があった」(同)とも記されている。
高給取りだった炭鉱夫
それでは、ほかの炭鉱はどうだったか。
韓国映画「軍艦島」で「地獄島」として描かれた長崎県の端島について、朝鮮人坑夫は、こう語っている。
「私共の仲間のうちには一年に千円位の貯金をする者はザラにあります」(「長崎日日新聞」1941年3月1日)
福岡県嘉穂郡の明治鉱業株式会社の朝鮮人募集要項には、日割りで4円、高い人で7円、最低3円とある。
また「聯合会加盟炭鉱移入朝鮮人坑夫就業状況調」(1939年11月25日)には、採炭夫は1日平均4.6円で、機械夫になると平均が日当で3.24円に下がり、また工事夫になると2.97円とある。
当時の巡査の初任給は45円だった。また会社の事務職は75円程度だ。常磐炭鉱を別にすれば、炭鉱では月収100円前後になるから、当時としては高給だったといえよう。
ただし、炭鉱の労働環境は悪かった。戦時経済の無理な増産体制の中で、ガス爆発や落盤など事故が多発し、採炭は極めて危険な仕事だった。また日本人男性が戦地に赴く中、朝鮮人は炭鉱の貴重な労働力だった。このため高額の賃金が用意されたのである。
「徴用工はばくち好き」
ちなみに炭鉱でなく、広島の東洋工業で徴用工として働いた鄭忠海の『朝鮮人徴用工の手記』(河合出版)では、月収が140円と記載されている。これもかなりの高額である。
炭鉱会社の給与台帳などを見ると、賃金は職能給がほとんどで、朝鮮人徴用工にも日本人徴用工にも、平等に支払われていた。日払いのところもあったが、大手は翌月払いが主流だった。
そして強制預金の制度も各地に見られた。それは「逃亡防止」のためでもあったが、せっかく稼いだ給料をばくちでスッてしまう者も多かったからではないか。
1938年11月26日の「長崎日日新聞」では、長崎県の端島炭鉱の12名の朝鮮人炭鉱夫が、朝鮮で流行していた花札で1勝負につき10銭の賭博を開帳し、二百数十回にわたり勝負をして、検挙されたことが報じられている。
三菱の佐渡金山で、朝鮮人労務者の通訳だった人物への聞き取りでは、
「当時、若くて血気盛んな半島出身の徴用工たちは、ばくちが好きで、勝ったものはよいが、負けたものは家族への仕送りもできなくなり、あとで問題となるので、度々、ばくち狩りをやっていた」
と語っていた。
賃金持ち逃げ
支払い方法は、三菱端島炭鉱なら個々の労務者が、給料日には判を持ち、列に並んで給料を受け取りに行ったが、労務動員者の場合、一団に朝鮮人の班長がいて、班の給料をまとめて受け取り、班長が各人に配布することが多かった。
この仕組みが、各地の炭鉱、金属鉱山でしばしば問題を生じさせている。
例えば、日本文化自由委員会発行「自由の旗のもとに」の創刊号(1952年9月)に、「現炭労委員長田中章伝」と題する記事がある。
田中章委員長は、戦前の名前を田中長求と言い、樺太人造石油株式会社内淵鉱業所へ朝鮮の大邱地区から働きに来た100名の朝鮮人徴用工の一人だった。彼は自分の班の徴用工の賃金を一括送金する責任者だったが、徴用工の一人が落盤事故で亡くなり、その兄が遺骨の受け取りにやってくると、長求が賃金の一部を送っていないことが露見した。寮長が問い詰めると田中はあっさり白状して、みなにボコボコに殴られたという。ちなみにこの人物、戦後に勤労奉仕を金銭で賠償しろと会社に迫り、朝鮮民族の英雄として再評価されている。
また、秋田朝鮮総連支部長の李又鳳は「花岡鉱山の思い出」の中で、
「橘寮の寮長が皆の通帳と印鑑をもって姿をくらまし大騒ぎになった」(『在日一世が語る 日帝36年間 朝鮮民族に涙の乾く日はなかった』「在日一世が語る」出版会)
と書いている。そして会社から、
「すでに寮長に金を払ってあるから、二重に払うことはできない。今会社の方でも警察の方でも犯人を手配して捜している。(略)少し日にちをくれ」
と、言われた李たちは、
「朝鮮人は解放されたわけだから、国際的問題である」(同前)
と、GHQに訴えた。
日本政府の方針は
その結果、秋田県知事に、会社から1人当たり千円、衣類一式(毛布、下着、シャツ、上下の服、靴、オーバー)を出すよう命令が下ったのだ。
こうした朝鮮人班長による着服が常態化していれば、「未払い賃金」の一因にはなったであろう。
日本政府は、冒頭にも紹介した「朝鮮人集団移入労務者等ノ緊急措置ニ関スル件」で次のような方針を通達していた。
「二.帰鮮せしむる迄は、現在の事業主をして引続き雇傭せしめ置き、給与は概ね従来通りと為すべきも、八月十五日以降差当り左の如く措置すること。
(一)従来通り就業する者に付ては事業主をして
(1)賃金に付ては、賃金規則により従前通り給与し得る如く計算を行はしめ置くこと
(2)賃金の支給に付ては、当座の小遣として必要なる程度の現金を本人に手渡し、残金は各人名儀の貯金となし、事業主に於て保管し置くこと
(3)右措置は、鮮内との通信杜絶に依る已むを得ざるものにして、将来帰鮮の際、貯金は必ず本人に渡す旨の周知徹底を図ること
(二) 休廃止工場・事業場及操業工場・事業場の移入朝鮮人労務者にして、就業せざるに至りたるものに対しては、事業主は差当り標準報酬日額の六割以上の休業手当を支給し、宿舎食糧等に付、従来通りの取扱をなすこと。
(今後の状勢に依り、右休業手当の支給に要する費用に就ては、国家補償の途を講ずることあるべきこと)」
未払い賃金はどこへ?
小遣い程度の現金を本人に手渡し、残りは本人名義の貯金を事業主が保管、帰国の際に金は必ず本人に渡す。しかも休業補償をするともある、かなり手厚い措置である。
しかしながら、戦後の混乱期である。貯金が本人に手渡されたのかどうかはわからないし、急いで帰国した者には通帳が渡らなかったケースもあるだろう。また契約途中で逃亡し、居所のわからない者もいただろうし、空襲で亡くなった人もいるだろう。そうした「未払い賃金」は確かにある。
ではそれはそのままなおざりにされたのか。否、そうではなかった。未払い賃金は企業から公的機関などに供託されたのである。そして、その供託先のリストがあったのだ。
(敬称略)
近現代史検証研究会 東郷一馬
「週刊新潮」2022年4月28日号 掲載
新潮社
|